<-- 9.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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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왔다. 라르슈는 밧줄로 단단히 결박한 도적단 일당을 보람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도적들은 어제의 자신만만한 모습들은 어디로 가고 다들 거의 만신창이였다. 저택을 지키라는 의미에서 미르가 그의 자수정 귀걸이 봉인을 풀어놓고 갔지만 그간 마법을 쓸 일이 없어 꽤 답답했는데 드디어 풀어서 개운한 표정이다.
“마법사 녀석은 아예 봉인을 해 놨고, 이 녀석들을 엮어 놓은 밧줄은 마법이 아니면 못 풀게 해 놨으니 이대로 관공서에 끌고 가서 현상금이나 받아오세요. 오랜만에 마법을 썼더니 피곤하네요.”
“안 그래도 전쟁 때문에 신경쓸 게 한두가지가 아닐 텐데 관공서라고 제대로 처리를 해 줄까?”
카딘이 문득 끼어들었다. 라르슈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그러면 내가 이 녀석들을 잡았다는 걸 공작님에게 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라르슈는 자신이 잡은 도적들을 관공서에 넘겨 흔적을 말소시키는 것과 도적을 그가 털어서 흔적을 남기는 것, 어느 쪽이 좋은지 생각해 보았다. 실리적으로 후자가 우위였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려 묶어 놓은 귀족들을 보고 악당처럼 비웃음을 띄웠다.
“누가 이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지?”
도적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기절해 있는 한 덩치 큰 녀석을 다 함께 쳐다보았다. 역시 저 녀석이 대장인가. 의리도 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별다른 큰 의의도 없이 한탕 챙기기 위해 털자는 목적만으로 모은 인원들이니 어쩔 수 없나. 그는 다음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럼 두 번째는?”
두 번째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순위가 가려졌다. 이번 녀석은 조금 비쩍 마르고 아부 잘 할 것처럼 생긴 놈이었다. 카딘은 보스는 그렇다쳐도 왜 2인자까지 찾냐며 물었다. 라르슈는 히쭉 웃었다.
“이 놈들이 부숴버린 문값도 받아낼 겸 지금부터 이 녀석들의 본거지를 알아내러 갈 건데, 첫 번째 녀석이 고문당하다가 죽어버리면 대신 불어줄 두 번째 녀석이 필요하잖아? 그리고 거기, 얼음물 좀 가지고 와 줄래요?”
아니, 문 부순 건 너잖아……. 집사님 표정 좀 봐. 카딘은 집사와 함께 더러운 눈매로 라르슈를 쳐다보았다. 마법 봉인이 풀리더니 이전보다 더 성격이 괴팍해진 것 같다. 역시 마법사들이란.
라르슈는 남들이 뭐라 생각하건 아랑곳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잔혹하게 도적단 보스에게 얼음물을 끼얹었다. 그것도 두 번에 나눠서! 도적단 보스가 눈을 뜨자 라르슈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어라? 벌써 일어났네. 그래도 안 일어나면 수염에 불을 붙여볼까 했는데……. 아까워라.”
우왘, 허세 쩔어. 카딘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그런 주제에 라르슈의 반응을 흥미진진하게 쳐다보았다.
“너 집에 모아둔 거 꽤 되지? 우리가 말야, 습격당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약간의 합의금과 너네가 부순 유서 깊은 저택의 문짝 값을 조금 받고 싶은데…….”
글쎄 문짝 부순 건 너잖아. 그런 도적단 보스의 눈빛을 받은 라르슈는 기분이 언짢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리고 문짝 위의 마법 경비 시스템도 부쉈더라? 제국에서 ‘마’ 뭐 들어가는 물건 있으면 가격 엄청 올라가는 거 알지? 그래서 말인데, 너희들의 재산을 조금 압수해야 할 것 같단 말이지. 불만 있어? 있으면 손 3개랑 발 5개만 살짝 들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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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인 남쪽의 영지 뮴뮴에서 세리안은 창 밖을 빤히 내다보았다. 이곳은 최전선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국경이 뮴뮴 성의 가장 위층에 있는 세리안의 눈에도 보였다. 아마 그 쪽에 유렌도 있겠지.
생각보다 유렌이 잘 버텨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혼자였다. 상대 측에서는 유렌이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을 아직 모른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유렌 역시 지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버리는 인원을 반복해서 보내고 있었다. 유렌이 지친 척 해서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곧 그들은 진짜 소드 마스터인 유렌을 상대하기보다는 직접 덤비지 않고 유렌의 눈을 피해 군사를 우리 나라 안쪽으로 넘겨보내는 방식을 이용할 것이다.
전선에 많은 병사들이 몰려 있기는 하지만 안쪽은 위험하다. 긴 역사를 가진 젤타와 달리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하르아이나는 당장 싸울 수 있는 군사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도도 그만큼 뿌리깊지 않았기 때문에 이대로 전쟁이 길어지고 치안이 더 나빠지면 국민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라의 개념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 유일한 소드 마스터인 유렌의 몸이 하나라는 것이 문제지. 하다못해 엘릭 레이몬드라도 어서 돌아와 줬으면. 평소에는 싫은 놈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급한 상황이 되니 오히려 그 건방진 얼굴이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우리와 오랜 친분을 쌓아 왔던 라콘 왕국과 얼마 전 평화협정을 맺은 케르타 왕국에서는 지원병을 우리 측에 보내준다고 답변했으나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아직 몇 개월은 이대로 더 버텨줘야만 한다. 마법 강대국인 아크샤 왕국은 이미 젤타 쪽에 손을 들어주었다. 무역국이되 노예 거래의 요충지이기도 한 아크샤 왕국은 혼자만 고고한 듯이 만인은 평등하다느니 노예 거래 금지라느니 하는 제국의 행태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 직접 관련이 없으니 자기네들은 그냥 상황을 지켜보고 판단하겠다며 공언해왔지만 아마 뒤로는 젤타 왕국 쪽에 적극적으로 물자를 보급해주고 있을 것이다. 남은 건 루페닌 왕국 정도일까. 비록 루페닌 왕국의 전체적인 국력은 약하다고 해도 뒤에서 약간의 병사들로 보급로를 끊어주면 큰 도움이 될 텐데. 그러나 루페닌 왕국과는 친분이 아닌 또다른 조약으로 맺어져 있다. 루페닌 왕국이 비록 목재의 큰 수입국인 제국측에 거의 경제적으로 속국이나 다름없을 만치 굽신굽신한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중립에 가까운 정치색을 띠고 있기에 제국의 패배 또한 고려해서 확실한 명분 없이는 우리 쪽에 대놓고 도움을 주려 들지 않을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자기 나라 건사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더 낫지도 더 나쁘지도 않게, 그것이 루페닌 왕국 국왕의 모토였다. 젤타 왕국이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확실한 증거 없이는 루페닌 왕국 측에서 함부로 병사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여제는 엘프들에게 따로 전령을 보내놨다고는 했지만 그 느릿느릿한 엘프들이 대체 언제 도우러 와 줄지……. 세리안은 이미 은퇴한지 오래 되었지만 그가 검이라도 들고 나서야 하나 진지하게 생각했다.
미르헬을 조금 더 재촉하는 편이 좋으려나…….
그 순간 미르, 아니 이제는 헬라라는 이름의 여자겠지. 헬라는 쭉쭉빵빵한 몸매를 뽐내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젤타 왕국은 처음이었기에 제국보다 훨씬 싼 물가에 감탄하며 보석부터 쇼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싼 물건은 가격이 비슷했지만 보석이나 서민들의 식료품은 제국보다 더 가격이 낮았다. 문제는 서민 소득도 제국의 절반 수준이라는 거지만.
“어머, 이 목걸이 예쁘다! 반지도 훨씬 싸네~. 시아한테 주면 좋아하겠어.”
사람들 앞에서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렌은 보석을 보고 제정신이 아닌 헬라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지만 헬라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참다 못한 렌이 헬라에게 메시지 마법을 사용했다. 상대의 머릿속에 그대로 전음을 보내는 간단한 마법이었다.
〈뭐 하는 겁니까. 어서 왕궁으로 침입할 적당한 장소를 조사해야지요.〉
“그런 건 밤에 하자구. 밤에. 그보다 이것 좀 봐. 시아한테는 핑크색과 빨간색 중 어느 쪽이 더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역시 핑크?”
〈…….〉
렌은 헬라의 양손에 들린 각각의 레이스 잠옷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하얀색 레이스 잠옷을 바라보았다.
“흰색? 시아에게는 흰색보다는 유색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아, 혹시 너 따로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거야?”
〈……받아 줄지는 모르겠네요. 잠옷을 안 입는 분이라서.〉
“선물해봐, 해봐. 잠옷이 얼마나 섹시한데! 속옷 다음으로 밤의 여자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아이템이라구! 아저씨, 이거 세 개 다 주세요!!”
헬라는 예고 없이 잠옷 세 벌을 주문해버렸다. 렌은 흰색 잠옷을 얼결에 받아들었다. 아니 그보다 왕궁은 언제 조사할 거야!? 도우러 따라온 거 아냐?
렌이 남들 앞에선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해서 헬라는 해가 질 때까지 젤타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한참 후 저녁때서야 허름한 여관으로 돌아온 헬라는 검은 색 옷으로 갈아입으며 말했다.
“젤타 왕국은 처음인데 의외로 재밌는 것들 많이 파는구나. 맛난 것도 많고 전통음식도 길거리에서 싸주고♬”
“제국과 달리 역사가 꽤 되는 나라니까요. 뭐 하러 여기 왔는지 잊지는 않았습니까?”
“알아, 알아. 이제부터 가려고 준비하고 있잖아. 너도 검정색 옷 갈아입어. 스파이 놀이다!”
“…….”
렌은 표정이 얼굴에 거의 드러나지 않아 언제나 냉랭해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런 얼굴로 시선을 일체 돌리지 않은 채 빤히 바라보면 잘못이 없는 사람도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나 되돌아보게 되는데, 헬라는 렌의 무표정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까만 색의 달라붙는 가죽 조끼를 입고 머리를 말아서 틀어올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렌은 헬라의 행동에 동조해 주었다. 아니, 의외로 렌은 헬라보다도 더 이런 짓을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기사라는 직업이 평소에 워낙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하고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 많으니까 쌓인 것도 많았겠지. 자유분방한 헬라의 방식에 휘둘리면서도, 정작 렌은 속으로는 꽤 재미있어하고 있다. 새까만 옷으로 갈아입고 검은 두건까지 두른 렌은 이불을 길게 묶어서 여관의 창문으로 나가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그냥 3층에서 뛰어내려버린 헬라의 뒤를 따랐다.
“자, 그럼 갑시다.”
“오케이! 구호는 뭘로 할까?”
“구호가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물론!!”
“알아서 정하십시오. 저는 먼저 가볼 테니까.”
“앗, 잠깐, 야!”
헬라는 다급히 렌의 뒤를 쫓아갔다.
========== 작품 후기 ==========
뮴뮴이 쿵쿵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