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96화 (196/226)

<-- 9. 전쟁 -->

***

"미르헬이라고 했던가요? 놀랐습니다. 설마 당신이 대놓고 저를 돕겠다고 나설 줄이야."

흑의 대공, 레이니안 이트리샤는 시아의 연인인 미르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또한 다른 드래곤을 알고 있기도 하다. 제국을 세운 흑룡 하르아이나. 하지만 하르아이나와는 무관하게 그는 레드 드래곤인 미르헬이 스스로 나서서 그를 돕겠다고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미르는 레이니안과 함께 젤타 왕국의 수도까지 와 있었다. 그 둘은, 여제의 명으로 젤타 왕국에서 마족 소환의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적국에 잠입한 스파이였다.

"됐네요, 뭐. 나도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어."

미르는 칫, 하고 자신이 레이니안을 협박하던 순간을 생각했다. 시아를 위해서 무조건 제국이 이겨야 하니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라고 흑의 대공을 찾아가서 졸랐지. 그가 의외로 이렇게 간단히 오케이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원래 드래곤은 유희 도중에 정체를 밝히거나 인간을 대량으로 학살하거나 드래곤으로서의 권력을 이용하거나……, 하여든 기타 등등 해당 사회를 혼란시키는 모든 짓이 짜증날 정도로 많이 금지되어 있었다. 법적으로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강대한 힘을 가진 드래곤들이 그들 스스로 일정한 선을 지키지 못하면 세계의 축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 규칙은 누가 뭐래도 어겨서는 안 된다. 미르가 스스로의 정체를 대놓고 밝힌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보통 유희의 규칙을 어겨 그로 인한 피해가 생기게 되면 드래곤들의 수장에게 일차적으로 충고를 받고, 그래도 해당 드래곤이 반성하지 않은 채 혼돈을 일으킬 수 있는 행위를 계속한다면 인간들의 질서 파괴를 우려, 드래곤들 측에서 강제 재제가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도 미르는 규칙을 어기고 인간의 흐름에 개입했다. 시아를 위해서는 아니다. 시아를 위한 일이라고 한다면 미르는 인간들을 끌어모아 아예 시아를 여왕으로 모시는 거대한 왕국을 세우는 병신짓도 맨정신으로 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은 순전히 그 자신의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일 뿐이다.

사실 자잘한 규칙 위반 정도는 드래곤들 사이에서 어쩌다 한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넘어가기도 하지만 이번 일은 국가의 전쟁 승패가 결정된 일이기도 했다. 인간들의 전쟁은 인간이 이기면 인간이 지고, 인간이 지면 인간이 이긴다. 어느 쪽이 이겨도 별 차이 없다. 그렇기에 드래곤이 중간에서 원하는 국가가 이기도록 하기 위해서 약간 손을 쓰는 것 정도야 관계없지만 이렇게 직접 인간의 지도자급 권력가와 접촉해서 노골적으로 승패에 관여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금지되어 있다. 들킨다면 큰 제재까지는 받지 않겠지만 잔소리 정도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미르는 처음부터 꽤 큰 각오를 지고 이번 일에 뛰어들었다.

레이니안은 자조가 섞인 미르의 말에 얼핏 냉랭해 보이는 무표정으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내용은 헛소리나 다름없는 얘기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기사란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무엇이든지 해도 되는 존재니까요."

그럴 리가 있냐. 미르는 작게 대꾸했다.

"난 기사는 아니지만."

"아니, 그대는 이미 훌륭한 기사입니다. 미르헬."

칭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레이니안의 말에 미르는 곰곰히 생각했다. 내가 기사라고? 시아를 지키는? 그거 땡기는데? 좋아, 그럼 나도 기사다!

미르는 스스로 자신이 기사라고 되뇌며 만족감에 젖었다. 레이니안은 주의력 산만한 그를 불러세워 다시 젤타 왕국의 수도, 그 드높은 성벽을 바라보았다.

"전쟁 중이라 밤도 낮도 경계가 만만치 않군요. 어떻게든 잠입해서 왕궁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워프하면 되잖아? 아니면 눈속임 환상 마법으로."

"저는 광범위 이동마법에 약합니다."

즉 못한다는 말이었다. 8클래스씩이나 된 주제에↗.

레이니안은 미르 쪽을 쳐다보지 않고 언제나처럼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순히 검을 보조하기 위해서 재능도 없는데 억지로 배운 마법일 뿐이고 제 본직은 기사입니다. 검으로 성벽을 베라면 할 수 있으나, 우리가 할 일은 잠입 수사입니다. 우리가 제국민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꾸준히 내부인과 접촉할 수 있는 철저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그럼 철저하게 변장하자.”

“좋습니다.”

미르는 쓸데없이 변장이라고 하니 재미가 들려서 마법으로 커다란 거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머리색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그에게 물었다. 나 미르같아? 이러면 미르 안 같은가?

단순하기 그지없는 미르의 변장을 무심하게 쳐다보단 레이니안은 그에게 보란 듯이 신체 변형 마법으로 본격적으로 키를 줄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덩치가 약간 가느다란 청년의 것처럼 변화했다. 거울을 보고 능숙하게 자세를 바꿔 가며 어깨를 약간 좁게 보정한 후, 헐렁해진 기사 제복 대신 어색함을 감춰야 하는 가슴과 허리에 프릴 장식이 들어간 짙은 갈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눈동자의 색도 훨씬 옅게 바꾸었다. 새까맣던 머리색은 아예 눈 색과 비슷하게 하늘색으로 물들인 후 얼굴 선을 감추기 위해 곱슬거리는 웨이브를 주고 포니테일로 묶었다.

신체 변형 마법은 비교적 낮은 클래스의 간단한 마법인데 비해 특별히 디스펠 마법으로 스캔하지 않는 이상 들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변화시킬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어서 변장을 하더라도 쉽게 들키게 된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미르는 어느새 190cm가 넘는 건장한 체격과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 대신에 키는 약간 큰 편이지만 늘씬한 몸매에 귀여운 커다란 눈동자를 가진 하늘색 머리 미소녀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입을 헤 벌렸다. 그 미소녀는 여전히 굵직하고 낮은 남성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변장이라면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는 정말 질색이었지만 막상 배워 놓고 보니 쓸 데가 있군요.”

“너……, 목소리…….”

“남자 목소리라 어색할 수밖에 없죠. 소리 변환 마법 정도는 쓸 줄 알지만 마법사가 주변에 있으면 들킬 수 있으니까 가능한한 남들 앞에서 말하는 걸 자제할 수밖에는.”

레이니안은 그렇게 말하고 목에 부드러운 실크 숄을 둘렀다. 정말로 약간 거친 듯한 어깨선이 확실히 가려졌다. 미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믿을 수 없는 현장에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왜 저렇게 여장을 잘 해? 약간 무례할 수도 있는 미르의 질문에 그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생각해낸 듯 미간을 굳혔다.

“예전에……, 여자로 변장해야만 하는 임무가 조금 있었습니다. 변장 효과는 확실하더군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조금 이상한 짓을 해도 수상한 사람 취급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빨리 말을 돌렸다.

“드래곤은 고위 마법인 폴리모프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목소리는 문제 없을 테니 남들 앞에서의 대화는 그대에게 맡기겠습니다. 어서 변장해 주십시오. 불쌍해 보이거나 예쁜 모습의 상대를 앞에 둔 사람은 자연히 어느 정도는 방심하게 되니 그것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노인이나 어린아이 같은 허약한 모습으로 부탁합니다.”

“그럼 나, 나도 여자로 해 볼래!”

마침 주위를 둘러보던 미르는 주변에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서 위로 힘껏 쳐든 채 자신있게 외쳤다.

“매지컬 러블리 플레임 러스트 미르미르 미르링 변★신!!!”

그는 침착하게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구현해나갔다. 붉은 드래곤 본연의 기운과 하얀 빛이 섞여들어 밝은 핑크빛의 광선이 미르의 육체를 휘어감쌌다. 여자로 변신하는 건 딱 한 번 해본 것 이외에는 지금이 처음인 만큼 익숙하지 않아서 느리게 폴리모프를 진행하는 탓에 과정이 전부 보이게 되었다.

레이니안은 어린아이 모습이 좋다고 말했지만 그는 너무 작은 키는 불편했다. 드래곤일 때의 영향 탓일까, 미르는 팔다리가 길고 큰 키를 선호했다. 여자로 변신한 키는 180cm가 조금 안 되는 정도로 설정했다. 여자 키 치고는 컸지만 지금처럼 가녀린 팔다리로 커버하면 된다. 그리고 시아의 말캉말캉하고 큰 가슴을 떠올렸다. 가슴 역시 글래머한 편이 좋겠지.

밖에서 레이니안이 이건 또 뭐 하는 놈이냐는 듯 어이없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미르는 여체 구현화에 열중했다. 긴 가죽 부츠에 망토, 가슴 윗부분이 살짝 드러나는 코르셋, 그리고 딱 달라붙는 미니스커트. 어릴 때 몇 번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어 본 소설이 영향을 크게 미쳤다. 실제로 성년 드래곤이 된 후 나와서 살아보니 현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조금 찢어진 듯한 가는 눈에 턱은 뾰족한 미인형으로. 이미 작은 얼굴이었지만 더 얼굴이 작아보이도록 양 귀에는 큼직한 귀걸이도 달았다. 머리카락은 그대로 하되 포니테일로 높게 묶어올렸다.

마침내 폴리모프를 끝낸 미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지면에 내려섰다. 10cm는 되어 보이는 핀힐의 굽이 약간 불편했는지 몇 번 걷다가 굽 높이를 반 정도로 줄였다.

“……뭐, 뭐야, 왜 그렇게 봐?”

빤히 그를 바라보는 레이니안을 눈치챈 미르가 당황해서 물었다. 뭔가 이상한가? 완벽한 여잔데. 목소리조차 진짜 여자처럼 가늘고 섹시해졌다.

레이니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 친구가 당신같은 족속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뭐야, 그거의 의미?”

미르는 허리에 양손을 얹고 렌을 내려다보았다. 옆에서 보면 키 크고 글래머러스한 붉은 머리의 섹시 미녀가 하늘색 곱슬머리를 한 귀여운 미소녀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쿨한 분위기의 미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관심 없다는 표정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들어가 보죠.”

원래의 모습은 키가 크고 근육질의 건장한 청년이었기에 그 미소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남자보다도 더 낮고 굵직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입을 열지 않을 테니 상관없었다. 수도의 입구는 전쟁 중이라 그런지 검문하는 줄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둘은 줄을 서기 전에 각자 변장 중인 여자의 설정에 대해 의논하고 말을 맞췄다.

“짧은 이름이 외우기 편하겠죠. 제 이름은 레이니안이 아니라 렌. 나이는 61살이 아니고 16살. 태어날 때부터 귀가 들리지 않고 벙어리.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수화나 독순술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아야겠지만, 문맹인 편이 상대의 방심을 이끌어내기 쉬우니 글자는 읽고 쓰지 못하는 걸로 합시다. 개인적으로 수화는 능숙하지는 못해도 배운 적 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흉내를 내는 데는 충분할 겁니다.”

미르는 레이니안의 말에 이어 재미난 설정을 더 덧붙였다.

“어릴 때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은 후 뒷골목에서 구걸을 하며 버려진 빵과 음식 찌꺼기를 주워먹고 처절하게 생존해 온 렌(16세, 여자). 매일 장애인이라고 괴롭힘을 당하던 그녀는 어느 날 마을 뒷산에 풀뿌리를 캐러 갔다가 늑대인간에게 팔을 물리게 되는데…….”

“우리는 지금 놀러 온 게 아닙니다, 미르헬.”

나도 알아. 장난 좀 쳐 봤어. 그나저나 너도 재미있다는 표정이잖아. 미르는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딱 생각난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헬라. 나이는 스물. 스리 사이즈는 40-26-38. 너랑은 친척 사이인걸로 하자. 아래쪽 도시에서 가족끼리 옷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터져서 이쪽으로 친척 아저씨를 찾아 피난 온 거야. 이러면 됐지?”

레이니안, 이제는 렌이 된 그는 미르의 설정을 입속으로 되뇌더니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요구했다.

“좀 더 심금을 울리는 스토리는 없습니까?”

“……역시 너도 즐기고 있었잖아!”

친척이라면 몇 촌 정도인지, 부친과 모친의 이름은 뭔지, 마치 둘은 진짜 렌과 헬라가 된 것처럼 사소한 것까지 의견을 나눴다. 미리 말을 맞춰 놓지 않으면 검문시에 실수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기다렸을까. 헬라와 렌의 차례가 왔다. 경비원은 검문 도중에 웬 미소녀가 글래머 미녀와 함께 들어오자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리고 헤죽거리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대놓고 찝적거렸다.

“이름은? 출신 마을과 나이는? 동행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지?”

헬라는 최대한 여자같은 말투로 튕기듯 말했다.

“헬라. 나이는 스무 살이고 요 아래의 지트 마을에서 사촌동생인 렌과 같이 작은 옷가게를 하고 있었어요. 그보다 만지지 좀 말죠?”

“저 쪽이 사촌동생인 렌? 왜 말을 안 하지?”

“렌은 태어날 때부터 말을 못 해요. 듣지도 못하고. 그치만 입술 모양으로 뭐라고 말하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으니 렌 앞에서 막말할 생각은 마요. 이것 좀 치우라고!!”

날카로운 헬라의 외침에 다른 경비병들도 이쪽을 바라보았으나 성희롱이 대놓고 벌어지는데 돕기는 커녕 오히려 헬라 같은 미녀를 마음대로 만지는 해당 경비병을 눈으로 부러워할 뿐이었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젤타 왕국의 공공기관과 아직 새것같은 제국의 공공기관의 도덕성이 이렇게나 다르구나. 헬라는 무척이나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으나 렌은 익숙한 듯한 표정이었다. 렌, 그러니까 레이니안 이트리샤 대공은 지금이야 제국 국민이지만 원래는 젤타 왕국 출신이었다고 했었다. 이미 미성년자 때 국적을 버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젤타 왕국 출신 따위가 아닌걸! 헬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것저것 질문을 하다가 꼬투리 하나 잡아 물고 늘어지며, 명분을 만들어 몸 수색을 해 보려는 경비병의 다리 사이를 휙 걷어찼다. 남자였을 때는 꿈도 못 꾸던 짓을 여자가 되니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무슨 짓이냐는 듯 렌은 당황한 표정으로 헬라를 바라보았다. 사내새끼가 되어서 같은 남자가 만지는 것도 못 참냐는 눈빛을 받은 헬라는 당당히 선언했다.

“나는 시아 꺼니까!”

얼굴은 예쁜데 성격이 난폭하고 억세다며 그 경비병은 중얼거렸다. 대낮이다 보니 뭔가 더 하고는 싶은데 도전하지는 못하겠는지 경비병은 결국 둘을 통과시켰다.

“……무사히 통과는 했으니 다행인데, 다음부터는 조금 더 참아 보십시오.”

렌이 작게 속삭였다. 헬라는 못 들은 척 멀리 석양을 바라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미르르르링!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