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전쟁 -->
개전을 알리는 화살이 날아올랐다.
영원한 숙적이라 알려진 젤타 왕국과 하르아이나 제국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접전을 벌였다. 지원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고, 개미새끼 하나 들어올 수 없게 경비를 강화하되 적국의 정보를 최대한 많이 얻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평화로운 시기 그대로의 상태에서 귀족들의 사병 위주로 적군을 막아내는 제국 쪽이 처음엔 밀리는 듯 보였다.
이미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해 온 젤타 왕국이었다. 수십 년 전 제국에게 절반이나 되는 땅을 빼앗긴 후 첫 번째 회심의 반격. 전선은 쉴새 없이 바빴다. 케르타에서 철을 수입해온 이래로 전쟁 물자 보급은 원활해졌지만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 시점에서 소드 마스터로서 유렌 위스피닌 백작이 기대를 한껏 받으며 출정했다. 최대한 많은 적을 베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상대의 숫자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소드마스터에 가장 근접한 실력자라고 해도 신인인데다가 혼자였다. 또 다른 강자인 엘릭 레이몬드 자작은 지금 다른 임무로 타지에 나가 있었고, 제국의 유일한 희망일 흑의 대공 레이니안 이트리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유렌 위스피닌, 달랑 혼자서 제국을 지킨다는 부담을 떠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일체의 흔들림이 없다. 죽음의 두려움도 그의 눈동자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기사도 아닌 유렌을 리더로 둔 황실 기사단 일원들은 처음에는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혼자서 수십의 적을 단숨에 벤 그와 그의 푸르스름한 미스릴 애검을 어느샌가 숭배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진짜 소드 마스터라는 소문을 정말로 믿게 되었다.
소문이 실제가 되는 날이 머지 않았다. 유렌은 가만히 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소드 마스터가 된지는 한참이 지났다.
"그보다 시아가 돌아올 저택은 무사해야 할 텐데……."
시아는 정령이니 검 따위에 죽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도망치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기 때문에, 그는 시아보다 시아가 돌아올 장소에 대한 염려가 더 컸다.
***
유렌이 걱정한 대로, 저택 역시 전중의 긴장감이 싸하게 감돌고 있었다. 제인은 내 딸 무사하냐는 전 시렌느 공작의 시도 때도 없는 연락에 일일이 답서를 써 주고 있었다. 루페닌 왕국에 감시 임무 겸 사신으로 갔다는 사실 외에 시아의 비밀 임무를 아는 사람은 오직 여제밖에 없었다. 제인은 그의 여주인이 걱정 없이 루페닌 왕국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잘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순간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깜짝 놀라 창 밖을 내다보니 어두운 밤, 정원 밖에 횃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수도에 한창 극성이라는 도적단이다. 귀족의 사병이 죄다 전쟁에 동원된 틈을 타 귀족 집 털어서 한 탕 해치워 버리자는 불순한 일당들이었다. 대체로 빈곤층이 전쟁 때문에 오른 물가, 불안한 정세 때문에 구하기 힘들어진 일자리 탓에 죽지 않기 위해 결성한 생계형 단체도 있었지만 그 틈을 타 용병이나 다른 사람들을 꼬드겨 모아서는 만만한 저택을 털기 위해 돌아다니는 악질 범죄단들이 더 많았다.
대체로 그런 단체들의 목적은 시골집보다는 건질 것이 많은 귀족의 저택이나 별장이었다. 수도 역시 좋은 먹잇감이다. 하물며 수도에서 약간 떨어진 시렌느 저택이라면 더더욱.
원래 시렌느 저택은 누군가가 쭉 여기서 살기 위해 만들었다기보다는 황실의 부름이 있을 때나 찾아가서 잠시 머무는 초대 시렌느 공작의 별장이나 다름없었다. 초반의 시렌느 가문은 시골 영지의 귀족이라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저택의 위치는 도심에서 벗어난 곳이었고, 저택의 규모 역시 귀족이 쭉 머무르기에는 살짝 좁고 허접한 감이 있었다. 요즘 뜨는 중인 대 귀족 세이시아 시렌느 여공작이 살고 있는 집이라기에는 여러 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기에 제인은 집을 증축하는 게 어떨까 하고 제안한 바가 있다.
세리안도 유렌도 지금은 전장에 나가고 없다. 주인이 부재중인 저택은 경비조차 소홀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대 귀족의 이름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아마 그들은 이 허접하면서도 돈은 많을 것 같아 보이는 이 작은 저택이 시렌느 공작가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것이다. 알았더라면 침입이나 도둑질은 상상도 하지 않았겠지. 고작 시아가 머무른지 몇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집이라 주변에서도 이 곳에 공작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주인이 돌아오면 대문을 증축하고 문패를 크게 달아놓으라고 시아를 달달 볶고 말겠다고, 그는 말라비틀어진 무지개 장미와 녹슨 문패에 대고 결심했다.
무기를 든 도적이라고 해야 어차피 오합지졸들이다. 마법 경비 시스템이 작동하면 몇 정도는 눈치채고 도망가거나 경비 시스템에게 당해버릴 것이다. 그러면 저택을 지키고 있던 최소한의 사병들만으로도 제압 가능하다.
전쟁 중에는 치안이 나빠져서 골치란 말이지. 수도 근처인데도 이런 걸 보면……. 제인은 두 번 다시 전쟁의 전 자도 입에 올리고 싶어지지 않아졌다.
쾅, 쾅 하는 소리가 두 번 들렸다. 문을 때려 부수는 소리 같았다. 그래, 부숴라 부숴. 어차피 사람을 불러서 문짝을 떼낼 생각이었어. 돈 아끼고 좋지 뭐. 그가 믿는 것은 문이 아니라 문 양쪽의 마법 경비 시스템이었다. 저건 쉽게 부술 수도 없을 뿐더러 손도 닿기 힘들 것이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제인 이외에도 다른 저택의 사용인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와 보았다. 저택의 하녀와 하인은 수가 많지 않았다. 어차피 주인도 없으니 세리안이 떠나기 전에 최소한의 저택 유지가 가능한 숫자만 남기고 다들 휴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집사가 제인에게 달려와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요즘 유행하는 도적단입니다. 아마 우리 저택을 털고 싶은가 봅니다. 오합지졸이지만 무기는 진짜에요. 위험하니 다들 조심하세요! 일단 저택을 지키는 기사들을 불러오세요."
제인의 침착한 지시에 따라 저택을 지키기 위해 남은 최소한의 기사 다섯 명이 불려왔다. 제인은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지만, 능력과 두뇌가 무척이나 뛰어나서 전 공작 시절부터 바로 곁에서 그를 보좌해 온 실력자였다. 지금 세리안이 나머지 권리를 다 그에게 맡기고 나간 이상은 기사들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전투 경험이 있는 기사가 둘이고 나머지는 신입……. 곤란하군요. 지원 요청이라도."
하필 이런 애들만 남았냐, 제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수도에 지원요청을 하려고 통신룸으로 가려고 했다. 그 때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반듯한 셔츠와 깔끔한 검정 색 베스트는 저택의 하인들이 입는 유니폼이었다. 제인은 무슨 일이냐는 듯 비장하게 걸어나오는 라르슈를 쳐다보았다. 라르슈는 천천히 부서져가는 대문을 바라보았다.
"지원 요청은 늦습니다. 저 녀석들, 중간에 용병 마법사라도 초빙해 온 모양이네요."
제인은 당황했다. 라르슈는 그의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앞으로 나섰다.
"돈은 꽤 들었겠지만 우리 저택을 털면 수백 배는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아마 곧 허접한 경비 시스템 정도는 뚫을 수 있을 겁니다. 어젯밤부터 준비해온 모양이거든요."
그 때 마법사를 붙잡는 것보다 때를 기다려 죄다 소탕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라르슈는 생각했다. 마법사야 잡아 봤자 새로 고용하면 끝이니. 대신, 만만치 않은 저택이라는 걸 알려주도록 하지. 오랜만이라 자신은 없지만 한 번 해볼만 하다.
마법사가 있는 줄 어떻게 알았냐는 제인과 저택 집사의 물음에 라르슈는 미르가 진작에 빼주고 간 봉인의 자수정 목걸이를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평소대로의 약간 거만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마법사니까요. 물러서는 게 좋을 겁니다. 냄비라도 들고 저 놈들을 때려눕힐 셈이 아니라면."
그는 일 잘하고 성격 싹싹한 카딘과 달리 약간 다른 의미에서 저택에서 꽤 유명했다. 하인들은 동급이면서 말투며 태도며 마치 귀족 아들내미처럼 은근히 재수없는 라르슈의 모습에 불만이었지만 공작님이 직접 데려온 녀석이라 차마 말로 불평불만을 꺼내진 못했고, 하녀들은 평소 라르슈의 달콤해 보이는 외모에 눈독들이고 있었지만 공작님 거라는 꼬리표에다가 너무나 냉랭한 태도에 접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여러가지로 뭔가 겉도는 녀석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설마 공작님이 데려온 저 녀석이 마법사였을 줄이야.
"그 때 도적새끼들한테 습격당해서 마력 봉인당하고 팔려가지만 않았어도 지금쯤은 5클래스를 찍었을 텐데! 덕분에 답지않은 칼질로 노선 변경하느라 팔에 근육이 붙어서 몸 튼튼해진 건 참 고맙네. 그러니 네놈들한테라도 대신 감사해 주지."
라르슈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중얼거렸다.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라르슈는 성격이 참 나쁜 것만 빼면 좋은 녀석인데, 하며 카딘은 그 모습을 바라보곤 중얼거렸다.
라르슈는 원래가 전투 마법사였다. 스승이 세간에서도 꽤 드문 배틀 위저드였으니 그 영향이 컸다. 고아였던 그의 마법 재능을 높이 사 거두어 준 그의 스승은 각 나라를 돌아다니며 일을 의뢰받아 하는 용병이었다. 전투마법사라는 것은 특정 분야에서 꽤 유용했기 때문에 스승은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이곳저곳으로 불려가 일을 했다. 라르슈 역시 스승에게 기본적인 마법을 배우면서도 주변 용병들을 따라 간단한 검술이나 체술을 익히게 되었다.
스승에게서 배운 마법은 학구적인 것보다는 실전에 도움이 되는, 빨리 영창해서 빨리 구현하며 마력량에 비해 유용하고 큰 집중이 필요없는 간단한 공격마법류였다. 용병계에서는 그래도 중급 수준까지 갔던 스승 밑에서 배워왔다. 재능도 있다고 자부한다. 저런 거렁뱅이들한테나 고용되는 최하급 용병 마법사와는 격이 다르다. 다만 문제는 공백기간인데…….
"어이! 검 좀 줘봐."
라르슈는 멍청히 서 있는 풀색 머리의 기사에게 소리쳤다. 신입 기사 중 하나랬던가. 그는 당황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여분의 검 하나를 그에게 던져주었다. 라르슈는 검을 하인복 위에 바로 차고 스르륵 장검을 뽑았다. 묵직했다. 적당한 무게감에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바스타드 소드는 익숙치 않은데. 개인적으로 미르의 아래에서 일할 때는 더 가느다랗고 무게 중심이 끝에 쏠려 있어 잘 휘어지는 검을 애용했다. 하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문 앞에서 라르슈가 싸울 기세로 서 있자 저택에 침입하려는 도적들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라르슈는 들은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검을 뽑은 채 그대로 서서 기다렸다. 마침내 마법사가 방어 마법을 풀어냈다. 마법진까지 써 가면서도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건가? 라르슈는 속으로 비웃었고, 겉으로도 그다지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구식 방어장치였다. 사는 집이 아니고 별장일 뿐이었기에 집에 재산도 그다지 없었고 평소에 기사들이 늘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장치는 단지 저택에 들어오려는 장난꾸러기들을 막거나 침입자의 유무만 알려주는 역할밖에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푸는 데 저렇게 오래 걸리다니. 한심하군. 같은 마법사라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야.
라르슈는 그제서야 시끄러운 함성을 지르며 문을 본격적으로 부수는 도적들 앞에서 한방 크게 터뜨려 주었다. 열기를 이용한 폭발 마법이다. 덕분에 반쯤 너덜너덜하던 문은 산산조각났고, 파편이 이리저리 튀고, 아까부터 혹시나 저택의 대문과 그 옆의 값비싼 무지개장미에 흠집이라도 날까 전전긍긍하던 저택의 집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를 질렀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문 앞에서 문을 밀던 도적 몇몇이 없어진 문 때문에 앞쪽으로 우르르 쓰러졌다. 그는 정문 앞에서 거만하게 선 채 턱짓을 했다.
"빨리 안 들어오고 뭐 해?"
너무 강한 마법에 주춤한 도적들은 잠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머릿수를 믿고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이나 귀족이 부재중인 저택을 털었다. 정식 훈련을 받은 기사도 일대 일이 아니라 일대 다수가 되면 별로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제국은 마법사가 유난히 부족한 곳이다. 환경이 다른 따뜻한 나라들보다 험하기 때문에 성격이 유약한 마법사들은 마탑 근처 아크샤 왕국과 젤타 왕국 놔두고 굳이 제국까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 두 왕국도 마법사에 대한 대우가 충분히 괜찮은 편이고. 오히려 제국보다 좋을지도 몰랐다. 평민의 입장이 낮은 만큼 마법사의 권력은 높으니까.
"우와, 머릿수만 쓸데없이 많이 채워왔군. 하긴 네놈들이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더 있겠어?"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라르슈는 연속해서 뜨겁게 타오르는 불의 공을 별다른 주문도 없이 날렸다. 상대쪽 마법사는 움찔해서는 하나 정도 급히 막았지만 나머지 둘은 막아내지 못했다.
그 역시 돈 받고 의뢰를 수행하는 만큼 어느 정도의 스피드는 자신 있을 것이다. 실전 마법은 주문의 난이도나 공격력과는 무관하다. 오직 시전하는 속도다. 마법 자체가 인간이 다루기 힘든 자연의 능력을 빌리는 것. 허접한 마법이든 강한 마법이든 시전했을 때 죽는 사람 수만 달라질 뿐 죽는 것은 죽는 것이다. 크게 한 판 쓸 수 있는 높은 클래스 마법사라도 주문 외우는 중에 공격받아버리면 소용없다.
몸빵이 시간을 벌어주는 파티 플레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이 쪽이나 저 쪽이나 콩가루 파티나 다름없으니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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