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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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와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가 들린다. 부드럽게 늘어진 내 몸 위로 묵직한 무언가가 덮어누르고 있다. 적당한 무게감과 따스한 열기, 그리고 전해져오는 심장박동소리는 그 누군가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아니, 사람은 아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엘프, 그것도 남자 엘프였다.
나는 그 엘프의 팔에 안긴 채 침대 위에 엎드려 깔려있었다. 팔을 움찔거려 보았지만 천근만근이다. 눈가가 조금 따끔거렸다. 온 몸에 풀이 덕지덕지 붙은 것처럼 끈끈했다. 얼마나 핥은 거야…….
내가 눈을 뜨자 그 역시 같이 잠이 깬 듯 고개를 들었다. 물기 젖은 유렌의 눈과 같은 녹감람석빛 눈동자와 다시 마주쳤다. 순간 유렌이라고 착각한 나는 흠칫 놀랐다.
사락거리며 실크같은 녹색 블론드가 그의 머리에서 흘러내렸다.
“…….”
“정말로 죄송합니다.”
나는 실크로 몸을 감싼 채 어젯밤의 일을 사과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제 간만에 술을 마시고 취한 상황에서 요정의 달빛 아래에 너무나 아름다운 나체가 비춰져 있는 걸 보고 그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엘프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는 세이지라는 이름의 남자 엘프로서, 엘프 중에서도 무척이나 드문, 이혼남이라고 한다. 한 엘프 여자와 사랑으로 착각한 감정에 빠져 결혼해 아이까지 가졌지만 결국 그것은 친구로서의 호감일 뿐이었고, 상대 여자 엘프가 정말로 사랑하는 다른 남자 엘프를 만났기 때문에 아이가 3살 때 그녀와 합의 후 이혼했다. 그런 상황이었다.
자신의 느낌에 무척 솔직한 엘프들로선 웬만해서는 감정을 착각하는 일이 없지만 결혼까지 할 정도라면 정말 친한 친구였나 보다.
"하고 싶으신 대로 때려도, 화내고 욕해도 좋아요. 잘못했다는 건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그치만, 정말 그런 생각은 아니었어요."
내 진한 화향, 그리고 경험이 있는, 절정의 맛을 알고 있는 육체였기에 그런 상황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그 때 내 진한 장미향을 맡지 못하고 나를 혼혈 엘프로 착각했었다. 취해서 후각에 혼동이 생긴 상태에 내 향의 자극을 받으면 뭐, 안 되는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중간부터는 거의 내가 자극해서 흘러간 거나 다름없으니…….
나는 그를 때리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 때도 놀라긴 했지만 아프진 않았고.
나는 그가 따로 받아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 엘프의 집에도 따로 욕실은 있었고, 수도기관은 없지만 정령을 쓸 줄 아는 엘프라면 온수건 냉수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테지.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작은 집에는 욕조가 없다고 했다. 이 집은 원래 그의 전 부인과 친아들과 살던 집이기에 웬만한 것이라면 다 있지만, 절반 정도는 욕조 없이 그냥 샤워만 하거나 강에서 목욕을 한다고.
욕실은 좁으니 그는 나무 욕조를 거실까지 끌고 나와 내 목욕시중을 들어주었다. 어제 꽤 놀랐으니 이 정도는 봉사받아도 되겠지?
여제에게 임무를 받은 이래로는 거의 포기했던 따뜻한 물로 머리 감기, 그것도 엘프 남자의 손으로 받고 있으니 정말 행복했다. 욕조에는 비누 대신으로 쓴다는 향이 좋은 풀잎이 가득했다. 세이지는 빗으로 내 머리를 사각사각 빗어주었다. 가지런히 감겨진 머리를 정리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후 말려 주었다.
“내 옷…….”
어제 목욕한 자리에 그대로 놔두고 왔었지. 그는 일단 세탁해 두겠다며 내 옷 대신에 부드러운 가죽으로 된 슈즈와 실크 원피스를 주었다. 원피스는 몸에 딱 맞았다.
“전 부인의 옷?”
“후후, 그럴 리가요. 제 아들이 어릴 때 입었던 상의랍니다. 미셀과는 관계를 정리할 때 짐도 전부 나눴어요.”
아들은 20년 전에 성년식을 치르고 지금은 다른 집에서 살고 있다더라. 아들도 독립해서 없고, 부인과도 깔끔히 정리. 이 정도의 큰 집에 사는 걸 보면 재력도 꽤 있어 보이는데 왜 아직 재혼하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인간과 달리 엘프는……, 진짜 사랑하는 상대가 없으면 결혼은 생각도 하지 않아요. 저는 미숙했기에 한 번의 실수를 했지만 다음 결혼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지요.”
흐응……. 그런 건가. 세이지는 다 마른 내 머리를 빗으로 빗어 가지런히 정리해 꽃비녀를 꽂아 올려주었다. 꽃비녀는 의외로 그의 것이라고 한다. 하긴 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라면 당연히 어울리겠지. 슈 역시 발목까지 오는 긴 머리였고 그는 그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왜 다들 이렇게 머리를 기르는 걸까?
“엘프들 사이에서 긴 머리는 성적인 매력 중 하나랍니다. 특히나 제 아들녀석은 언제든 좋아하는 상대가 나타나면 무조건 머리카락의 매력으로 휘감아 잡겠다고 무척이나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죠. 저는 이혼한 이래로 별로 길게 기르고 있지 않지만, 이제부터라도 길게 길러볼까 해요.”
그가 침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며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주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으응, 편하다……. 하룻밤으로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다면 오늘도 함께 자줄 수 있는데. 엘프란 향긋하고, 따끈하고, 기분좋고…….
이제부터 머리를 기른다는 건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다는 뜻일까? 분명 세이지는 머리를 기르면 인기가 많을 거야.
“후후후, 그래서는 안 되죠. 말했잖아요. 진짜 사랑에 빠진 분과 결혼하겠다고.”
“……응?”
“엘프는 진짜 좋아한다고 생각한 상대가 아니면 대쉬하지 않아요.”
세이지는 부드럽고 굵은 손마디를 가진 큰 손으로 나를 살며시 뒤에서 끌어안았다. 등에서 따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심장박동 소리도 함께. 그렇게 붙잡으면 내가 녹아버린다……. 내가 살짝 그의 팔 위에 손을 얹자, 그는 조금 더 다정하게 나를 껴안았다.
“어젯 밤 진짜 사랑에 빠진다는 감각을 드디어 깨달았어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너무 흥분했기에 당신을 억지로 끌고 와 버렸어요.”
어제와는 다른 갭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다정한 성격의 엘프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조금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제 감정을 말해도 화내지 않으실 거죠? 플로라.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나는 세이지의 그 고백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부서져라 문을 쾅 여는 소리에 놀란 것인지 순간 헷갈렸다. 노크 같은 것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인 양 문을 열고 거의 쳐들어오다시피 한 남자 엘프는, 금발의 긴 땋은 머리를 휘날리는 슈였다. 그는 무언가에 약간 화가 난 듯 그 큰 구슬같은 비취색 눈동자를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었다.
어젯밤에 꼭 자기 집에서 자자고 했는데 내가 돌아오지 않으니 찾아나선 모양이다. 아마 냄새로 단번에 내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었겠지. 그런데…….
“슈?”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슈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아니라 내 뒤의 세이지를 쳐다보는 듯 했다. 나는 불안감에 내 뒤의 세이지를 바라보았지만, 세이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나는 그가 무엇에 화를 내는지 잘 알지 못했다. 내 뒤의 세이지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하지만 슈의 다음 말에 나는 흠칫하며 경직해버렸다.
“아버지 너무해요! 플로라 님은 제가 먼저 찜해놨었는데!!!”
========== 작품 후기 ==========
엘프 부자덮밥 외치시던 분들 다들 어디 가셨나?
내일부터 개인지 예약 시작 예정입니다. 일주일정도 진행후 마감합니다. 이번 기회 끝나면 적어도 1년 이상은 개인지를 낼 예정 없습니다(차기작 연재는 계속합니다만..)
아직 엘프 내용이지만, 갖고있는 비축분은 마무리 좀 하구 외전만 끝내면 완성이에요 ㅠㅠ
p.s. 개인지 예약문서 내일 중으로 올라옵니다. 내일 다음회 올리면서 밑에 같이 안내 적을게여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