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채식 -->
내가 한 눈을 파느라 돌을 잘못 밟아 풀밭 위로 털썩 넘어지려고 하자 엘릭보다도 먼저 그가 잽싸게 내 뒤에서 나의 허리를 꼬옥 안았다. 생각보다 그의 뼈대가 굵고 단단해서 나는 내색은 않았지만 내심 놀랐다. 체온 역시 예상대로 리스피아나 유렌만큼 따뜻해서, 그 한 번의 포옹으로 넘어가버릴 뻔 했다.
이 녀석……. 단지 어린 것 뿐인가, 아니면 의도하고 하는 걸까? 그치만 순수한 비취빛의 크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면 일부러 성욕을 목적으로 두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와아, 플로라 님. 허리가 굉장히 가늘어서 장미 꽃받침의 아랫부분 같아요. 이런 허리라면 굉장히 연약할 거에요. 숲의 바닥은 식물만 있는 게 아니니까 조심해요.”
나는 나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꼈다. 장미 꽃받침의 아랫부분이라니……. 그런 곳까지 신경써주는 남자는 드문데. 이 슈라는 엘프, 대체 얼마나 선수인 거야? 이렇게 어려 보이는데? 게다가 동정인데 이 정도로 식물의 육체에 대해 잘 알 수가 있는 건가?
나는 두근두근하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뒤에서 엘릭이 보기 싫은지 가만히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조차 슈의 뜨거운 가슴에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엘프는 보는 것만으로도 맛이 좋은데, 저절로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슈는 걱정스럽게 나를 무사히 세워 주었다.
“역시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봐요. 처음부터 플로라 님을 걷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아직 미숙한 저 같은 거라 죄송하지만 제가 플로라 님을 모셔도 될까요?”
내가 올려다보면 목이 아플 만큼 키가 그렇게 큰 주제에 허리를 숙이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슈의 부탁을 어떻게 하면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나한테 나쁜 점이라고야 없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슈는 금방이라도 소리지를 만큼 즐거운 듯 감정의 기복이 느껴졌지만 표정은 조용하고 얌전하게 내 허벅지 아래를 받쳤다. 마른 듯한 허리와 달리 어깨가 넓어서 그런지 몰라도 자세가 엄청 편했다. 슈는 내 뒤를 따라오던 엘릭에게도 공손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굽히지 않고 말했다.
“더 빨리 갈 건데 따라올 수 있죠?”
“…….”
대답하는 엘릭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 그가 긍정의 뜻을 보인 건지 슈는 나를 안고 단숨에 나뭇잎 사이로 뛰어올랐다. 아래와 달리 위는 시야도 넓고 풍경도 좋았다. 공기도 훨씬 괜찮고 햇볕도 강해서 오랜만에 제대로 광합성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리스피아가 나무 위를 좋아하길래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는데, 이런 느낌이구나. 나뭇가지가 마치 저절로 피해 가듯이 슈는 빠르면서도 가장 발을 딛기 편하고 장애물이 없는 가지 위로 달리고 있었다. 아까보다 속도가 높아서 그런지 두근두근하며 약간은 불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자세 역시 안정적이었다. 이런 거 중독될지도 몰라. 나중에 돌아가면 리스피아한테 나무 위 산책을 시켜달라고 부탁해 봐야겠다. 환상적인 기분이다.
***
엘릭과는 말 없는 밤과 낮이 두 번 바뀌고, 마침내 어느 정도 손질이 되어 있는 공간으로 들어선 것 같았다. 엘프 냄새가 멀리서부터 났다. 바스락거리며 수풀을 헤치고 공터로 들어섰다. 나는 슈에게 안긴 채 그 풍경을 관찰했다. 한 템포쯤 늦게 엘릭이 따라왔다. 제대로 도착한 것 같았다……. 여기가 엘프의 왕국인가.
주변은 엘프, 엘프, 정말로 온통 엘프 뿐이었다. 온통……, 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엘프의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아직 낮이니 집 안에 있거나 밖으로 돌아다니겠지, 아마?
“기껏해야 인간의 작은 마을 정도 크기지만요. 이런 작은 마을이 걸어서 반나절 정도 거리를 두고 여러 개 이어져 있어요. 여기도 역시 엘프 마을이긴 하지만 우리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라 하이엘프의 수장이 있는 마을, 맞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걸어서 반나절이라면 이 정도 속도라면 오늘 내로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거기는 잘 알아요. 제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한 걸요.”
그러고 보니 궁금했었는데 아무리 빠르게 가도 마을에서 3일이나 걸리는 그 냇물에 왜 슈가 있었을까? 우연히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슈가 어째서 그런 곳에 그 때 있었던 건지는 알고 싶었다.
“아아, 어떤 엘프를 좀 찾으려고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나갈 생각이었거든요. 요즘 하도 벌레들이 많아서 다른 길로 가 볼 생각이었어요. 플로라 님을 만나서 돌아왔지만.”
“그럼 괜히 도움을 청해서 방해한 건…….”
“앗, 절대 아니에요! 저는 아무나 도움을 청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꼭 해야 할 일을 미루지는 않아요. 플로라님이니까 모든 것에 우선이 된 거에요. 게다가 어차피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닌걸요. 마을의 다른 엘프들도 포기한 것이기도 하고…….”
“누구를 찾는데?”
“몇 달 전에도 인간들의 중심지라는 마케까지 가서 인간의 마법 길드에 의뢰해 봤지만 허사였어요. 제가 찾는 건 에라렌 카르테인이라는 여자 엘프에요. 제 아버지의 여동생인데 오래 전에 인간 세계로 나갔다가 실종되었거든요. 마을의 어른들 모두 포기했지만, 그래도 저는 그 분의 흔적이라도 찾아보고 싶어요……. 무척이나 다정한 분이셨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는 추억 안에 깊이 잠긴 것 같기도 하고, 비취 빛의 수면 위로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를 위해 위로의 말을 하는 대신에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함께 마케로 가 보지 않을래? 마탑 대신에 검은 달 길드에 의뢰하면 어쩌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정말요?!”
“내가 도와줄게.”
슈는 무척이나 기뻐하다가 이 기회를 타서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헤실 웃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슈는 먼저 뺨에 키스해놓고는 다시 귀를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귀여운데…….
“그렇게까지 도와주신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저도 뭔가 보답을 하고 싶어요.”
아니, 그건 길 안내를 해 준 내 보답이라고……. 하지만 슈는 정말로 하고 싶어서 못 참겠다는 듯 내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저희 마을에서 머무는 동안 제 집에서 플로라 님을 대접할게요!”
“집이 따로 있어?”
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없을 리가 있나요. 엘프 마을은 처음이죠? 우리는 성년이 되기 전까지 생활에 당연히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워요. 성년이 되면 보통 바로 독립할 수 있게 된다구요. 인간과는 다르죠?”
“그럼 슈는 성년 엘프?”
그는 애교스럽게 웃으며 내 눈을 그 예쁜 눈동자로 빤히 바라보았다.
“우응, 저 그렇게 어려 보이나요? 벌써 20년도 더 전에 성년식을 치뤘어요. 하이엘프의 나이로 치면 아직 한참 어리지만, 그래도 성인 몫 정도는 하고도 남아요.”
화기애애한 나와 슈의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는지 엘릭은 작게 칫, 하고 고개를 돌렸다. 슈가 종종 엘릭도 이야기에 끼워 주려고 말을 걸었지만 그는 아예 대답하지 않거나 짧게 대꾸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샌가 슈의 편안한 팔 안에 안겨 잠들었나 보다. 나무 위를 오가며 움직이는 중이었지만 그가 나를 안는 행동이 능숙했고, 나무 타는 솜씨가 좋아 심하게 흔들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깜깜한 엘프의 마을 앞이었다. 아직 하늘 끝이 붉은 걸로 보아 초저녁이었다. 엘프의 마을은 지금까지 보아 온 숲처럼 나무들이 촘촘하지만은 않은 공터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마을은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슈가 웃으며 말했다.
“요정의 달이 뜨는 날이네요. ……이런 날은 가끔 마을에서 과일주를 마시며 축제를 하기도 해요. 매번 달이 뜰 때마다 하는 건 아니지만요. 오늘이라면 로드 역시 축제를 즐기고 있을 테니 일 얘기를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밤이에요. 제 집에 먼저 안내를 해 줄 테니, 짐을 풀고 플로라 님도 가볍게 마시는 게 어때요? 안내해 드릴게요.”
요정의 달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달이 두 개 뜨는 날이라면 알고 있다. 카덴에는 종종 두 개의 달이 뜬다. 마력이 훨씬 강해지는 밤이기 때문에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바로 그 날이었고. 아마 그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엘프들이 모여 있는 공터의 위로 붉은 달 두 개가 빛났다.
희미한 등불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등의 기둥은 나무였고, 거미줄 같은 망사 사이로 빛을 내는 기생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한 곳에 엘프가 이렇게 많다니, 천국이다. 나는 다른 의미로 흥분해서 슈가 가르쳐 주는 집의 위치를 건성으로 외웠다. 엘릭에게도 제안했지만, 원래가 그는 이방인인데다가 엘릭은 술 따위는 정말 질색이라며 짐을 가져다 놓고 쉬겠다고 말했다. 내가 엘프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걸 보고 빈정상한 건지도 모른다.
“하얀 프리지어가 있는 집이 제 집이에요. 제가 아는 엘프 몇 명이라면 소개해 줄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슈는 출입문 옆에 프리지어가 심긴 곳의 나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면서 설명으로도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무척 자연적인 집이다. 엘프의 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이미 죽은 단단한 나뭇가지를 모아 다듬은 후 튼튼하게 사각형으로 인간처럼 나무집을 짓거나, 오래 살아 속이 비었거나 속이 썩은 거목의 안을 파내고 살거나. 둘 다 숲을 해하지 않는 방향이기 때문에 진정 엘프를 자연의 아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모양새는 이래도 무척 튼튼한 집이란다. 크게는 8층까지 위로 올릴 수 있으니 튼튼하다는 말은 허언이 아닌 것 같다. 슈의 집은 사각형의 나무집이었다. 좁지만 2층까지 있다. 1층은 고작해야 내 저택의 방 하나 크기고 2층도 마찬가지다. 아마 1층은 주방 겸 거실, 2층은 침실 정도의 용도겠지.
"2층에는 방이 둘 있어요. 계단을 올라가서 오른쪽은 침대가 있는 방이고 왼쪽은 없는 방……."
"난 왼쪽 방에서."
엘릭은 짧게 말하고 침대가 없는 방으로 들어갔다. 슈는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수줍음이 꽤 많은 분이시군요. 그냥 좋아하는 분을 바닥에서 재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호감을 어필하기에 더 나을 텐데요."
아니, 수줍음이 많다기 보다는……. 랄까 그건 무슨 소리야?! 나는 넋놓고 되물었지만 슈는 재빨리 화제를 바꾼 뒤였기에 나도 금세 그 화술에 말려들어갔다.
"플로라 님은 제 침대를 쓰세요. 아, 주무시기 전에 조금 더 폭신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시트는 이 정도면 되려나. 원래는 옷을 만들려고 구해 둔 천이긴 한데, 이걸 깔아 드릴게요. 엘프 실크에요."
엘프 실크라면 하이엘프가 식물에서 뽑아낸 가늘고 부드러운 실로 짠 실크 말하는 거지? 재료를 따지자면 실크는 아니지만 실크보다도 더 부드럽고 가볍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붙여지고 있다. 엘프 실크는 짜는 것도 오래 걸리고 고급품은 구하기가 힘들어서 나는 본 적도 없었다. 실제로 본 엘프 실크는 정말 촘촘하고 윤기가 흐르는 표면의 얇은 천이었다. 색은 약간 옥색이 도는 베이지색. 리스피아의 겉옷 아래 얇은 속옷이 이런 감촉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색은 하얀 색이었지만.
원래 침대에는 통풍이 잘 되라는 의미에선지 성긴 면 시트가 깔려 있었다. 그는 그 위에 1층에서 가져온 실크를 깔았다.
"이불은……."
"이불? 덮는 것 말이에요? 인간의 여관에는 있더라구요. 저는 안 덮기 때문에 저희 집에는 없어요. 그치만 곧 구해 올게요. 이불을 덮고 자는 엘프도 있긴 해요. 보통 여자 엘프지만."
하긴 이렇게 따뜻한 날씨에 밤에도 낮과 비슷한 기온이라면 이불을 덮는 편이 이상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불이라면 미르의 가방에 들어 있으니까 굳이 구해 올 필요는 없는데…….
슈를 말리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아까 본 마을과 달리 여기저기에 엘프들이 보였다. 리스피아는 백발, 슈는 금발. 엘프는 밝은 머리색이 거의 압도적이었다. 밤이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엘프 중에서 어두운 머리색이라 해야 부드러운 커피 색 정도일까. 농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백금발이 가장 흔했고 은발, 연한 금발, 연두색과 푸르스름한 하늘 색 정도다. 눈 색도 머리색과 맞춰 연한 편이었고, 중요한 것은……. 다들 예뻤다.
정말이다. 나는 취하지도 않았는데도 모든 남녀가 보기 매우 드문 미남미녀들로 보였다. 향도 질식해 죽을 정도로 기분좋았다.
한 엘프가 슈랑 서 있는 내게 다가왔다. 슈에게 가벼운 인사를 한 후 붙임성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황홀함이 머물렀다. 손에 붉은 액체가 반쯤 찬 나무잔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술인 것 같았다. 베리류를 섞어 담근 진한 술 냄새가 났다. 그치만 인간의 술 냄새와 다르게 마치 달콤한 알코올 그 자체에 주스를 섞은 듯한, 잘 익은 과일 칵테일과 비슷한 향이었다.
"예쁜 장미꽃 정령님? 아아, 향기가 너무 좋아요. 혹시 이름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이런 아름다운 꽃을 슐츠는 대체 어디서 데려온 건가요?"
마을에 돌아다니던 아무 엘프나 찝적거리며 작업을 거는데, 조금도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하나하나가 전부 납치해서 애인 삼고 싶을 정도로 잘 생기고 꽃을 대하는 매너 역시 미리 교육이라도 받은 듯 뛰어났다.
"아……. 행복해♡"
그치만 엘프가 이렇게 질길 줄은 몰랐다. 나를 처음 보는 엘프마다 남녀를 불문하고 내 향에 취해서는 끝까지 따라오는데, 나는 어느새 슈가 데려온 아름다운 장미 정령이 되어선 이것저것 권하는 엘프들에게 과일과 술을 잔뜩 얻어먹었다. 축제 최고오오♡
아무리 눈짓을 해도 안 넘어오는 엘프는 아마 연인이나 부인이 있는 엘프같았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전부 내 거였다. 엘프는 다들 정중했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의외로 더 개방적이라, 이대로 가다간 난교라도 벌일 기세였다.
"이름 뭐에요? 나랑 잘래요? 응? 응?"
"좀더, 좀더 향기를 맡고 싶어요~!"
"아아, 예뻐라~."
아마 술에 취한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슈는 나를 보고는 즐길 만큼 즐기되 다른 데서 주무시지 말고 밤에는 꼭 돌아오라며 내게 일러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