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88화 (188/226)

<-- 8. 채식 -->

***

체리 먹고 싶어…….

그치만 체리가 열리는 계절이 아니지. 이럴 때는 정말 아쉽다. 웬만해서는 여기는 제철 과일밖에 먹을 수 없다. 다른 계절에 먹고 싶으면 비싸게 수입해 오는 법이 있지만, 그마저도 수요가 공급에 비해 너무 많아 없어 못 살 때가 많다. 제철 과일이야 맛은 있지만 다른 과일이 먹고 싶으면 어쩌란 말인가.

이건 전생이 좋았는데……. 하우스 과일이라도 괜찮았는데.

나는 중얼거리면서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은 후, 깜박이며 눈을 도로 떴다.

나는 눈을 비비며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스튜 냄비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뭐지……. 요정이 해 두고 갔나?

아니지, 따지면 내가 요정인 거나 다름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요정은 요리를 못 한다. 인스턴트라면 모를까 말야.

내 뇌와 시신경이 허락하지 않은 존재라 잘은 몰랐지만 지금 보니 엘릭이 바로 그 스튜를 젓고 있었다. 그는 내가 일어난 것을 보고 고갯짓을 했다. 앞에 와서 앉으라는 의미인 것 같다.

“저기……, 이거 인스턴트?”

불이야 요새는 불을 붙일 수 있는 마법 도구가 싼 값에 널렸으니 그렇다치고, 나무나 장작이야 숲인 만큼 주변에 죽은 나뭇가지들이 널려 있으니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야외용 냄비는 애초에 챙겨왔고. 엘릭은 무슨 헛소리냐는 듯 냉랭하게 나를 쳐다보면서도 그릇에 스튜를 반 덜어주었다.

“인스턴트가 뭔데?”

“아, 아냐. 아무것도……. 엘릭이 했어?”

당연히 그가 안 했으면 누가 했게? 내가? 내가 생각해도 바보같은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배고프다고 말했잖아. 어제.”

“어제……?”

그건 내가 배가 고파서 그런거라기 보다는 엘릭이 혹시 배가 고프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뭐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니깐. 나는 스푼으로 잘 익어 푹 퍼진 스튜를 떠서 입에 넣었다. 따끈따끈하고 엄청 맛있었다. 그는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으응! 마시쪙!!”

딸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인간의 요리를 먹어 본다. 과일의 상큼한 맛과는 다른 의미로 행복했다. 그는 훗, 하고 웃는 것 같았다. 나는 스튜 스푼을 놓고 잠시 눈을 비볐다. ……착각인가?

물의 정령인 운디네를 불러 대충 그릇을 설거지했다. 굳이 손을 움직이지 않아도 저절로 씻겨내려가는 그릇을 바라보던 나는 엘릭이 운디네를 붙잡고 흰색 가루를 뿌려 그릇을 문지르자 깜짝 놀랐다. 거품이 나며 그릇이 정말로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으앗! 악! 아아!!”

“물만으로는 깨끗이 안 씻겨.”

“그, 그렇다고, 아악!”

정령이라 아프지는 않겠지만 나는 운디네의 표정을 보고 그대로 입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으으, 마족은 너무 잔인해……. 원래라면 타인이 정령을 잡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마나로 소환한 정령이라 그런지 물질성을 가지고 있어 타인의 손에도 내 운디네가 잡혔다. 바람의 정령은 아무래도 물질이 있어도 잡기 힘들겠지만 물이라 그런지 밀도가 높아 손에 쥐여지는 것 같다. 그치만 스튜는 엄청 맛있었다. 나는 다음 번에는 내가 요리를 하겠다고 했다. 엘릭은 딱 잘라 거절했다. 보나마나 과일이랑 풀 몇 개 넣어서 그릇에 담겠지, 하고 말이다. ……어떻게 알았지?

한동안은 그런 일정이 계속되었다. 나는 드디어 리스피아가 말한 ‘소리나는 꽃’을 찾아 기쁨에 소리질렀다.

“이제 벌써 반이나 왔어!”

“…….”

엘릭은 뒤에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흔히 있는 일이라 신경쓰지 않고 소리나는 꽃에서 다음 목적지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슬슬 강이 있다고 한다. 깊은 숲 속이고 마나도 남아돌아서 물이라면 작은 냇물을 만들 정도도 불러낼 수 있다. 그래서 강이라고 해도 별로 물을 실컷 마신다거나 씻는다거나 할 생각은 없다.

나는 점점 더 평소에 본 적이 없는 식물과 생물들로 숲이 가득차는 것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충식물……, 아니, 거의 사람보다 큰 몬스터도 잡아먹을 수 있을 식인식물도 많았고 가시 투성이의 꽃도 있었다. 나는 같은 식물이라 동물에 피해를 입히는 것이 목적인 식물들에게 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정말 위험하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열심히 보고 가서 유렌에게도 말해줘야겠다.

“꺅!”

주변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엘릭과 나란히 서서 강을 찾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데, 갑자기 눈 앞으로 황금빛의 밧줄이 떨어져내려서 나는 깜짝 놀라 무의식중에 옆의 엘릭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엘릭은 당황해서 몇 초간 허둥거리더니 검을 꺼내 횡으로 휘둘렀다. 그의 귀 끝이 살짝 빨개진 것이 보였다. 놀란 건가? 나는 엘릭의 허리를 곧장 놓고 사과했다. 하지만 엘릭은 그 사과를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높게 하늘로 쭉 뻗은 큰 나무 위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나는 긴장하고 있다가 익숙한 냄새에 놀라 엘릭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엘릭!”

어느새부턴가 레이몬드 자작님이 아니라 또다시 엘릭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름이 문제가 아니였나보다. 아니,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사락, 하며 엘릭이 휘두르는 검에 밧줄의 끝 부분이 살짝 베일 뻔 했다. 위에서 어디서 들어본 듯한, 하지만 아직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앗, 깜짝이야, 머리카락 베일 뻔 했잖아요! 50년이나 열심히 길러왔는데…….”

내가 밧줄이라고 착각한 것은 길게 땋은 황금빛의 머리카락이었던 것이다. 나는 입술을 헤 벌렸다.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엘릭, 엘프야.”

대화해 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엘프 마을까지 직접 갈 수고를 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곧이어 빼꼼 나뭇잎 사이에서 얼굴을 내민 것은 앳되지만 부드럽고 상냥해 보이는 인상의 긴 머리 남자 엘프였다. 처음 본 순간 리스피아와는 달리 ‘예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스피아가 성숙하고 고고한 아름다움이라면 이 쪽은 순결한 모란꽃 같은 모습이다. 엘프답게 고아하지만 어떻게 보면 아직 어려서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나는 엘프의 나이를 추정하는 방법을 알 것 같았다. 둘 다 젊은 외모였지만 이 엘프는 리스피아보다 한참 어린 듯 했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뺨을 바알갛게 붉혔다. 이상하게도 리스피아와 똑같은 반응이라 후후 웃음이 나왔다.

“놀랐어요?! 죄송해요. 제가 있는 줄 알고 계셨다고 생각했어요.”

엘프는 나무를 타고 나무와 같은 눈높이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보통인가 보다. 나무 위에서 박쥐처럼 고개를 거꾸로 내밀어 눈을 마주친 것이 이번이 두 번째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는 나와 눈을 마주치길 원했는지 나무에서 거꾸로 떨어져 지면에 착지했다. 엘프가 키가 크다는 것이 사실인지, 굽 없이 얇은 신을 신었을 뿐인 그의 키는 세르보다도 더 큰 것 같았다.

크고 동그란 신비로운 빛의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녹색도, 푸른 색도 아닌 비취빛에 가까운 눈이었는데 빛의 양과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해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나뭇잎에 몸을 가리지 않고 내 앞에 선 그 엘프는 회색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아까와 달리 내 앞에서 수줍어하며 다시 나무 뒤로 가 반쯤 숨어버렸다. 덩치와 달리 반응이 꽤 귀엽다.

“저는 슈라고 해요. 본명은 슐츠라윈 카르테인. 장미 정령님은요?”

“난 플로라. 지금은 세이시아 시렌느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시아라고 불러도 되고 플로라라고 불러도 돼.”

“플로라? 그럼…….”

슈라는 그 엘프는 나무 뒤에서 귀를 쫑긋하고는 나무에서 빙 돌아나왔다. 가까이서 보니 덩치가 정말로 크다. 리스피아는 키는 컸지만 엘프 중에서도 마른 편이었다면 그는 리스피아보다 몇 센티 정도 작은 듯 했지만 손목이 더 탄탄하고 굵직해 보였다.

“새로운 여왕님이세요?”

엘릭이 경계하며 다시 집어넣었던 검을 빼기 위해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응. 슈는 엘프 마을에 살아? 우리를 그 쪽으로 안내해 주면 안 돼?”

“아앗, 저희 마을에 오시는 거에요? 물론 되지요. 언제든 환영이에요! ……그치만 저쪽 분은.”

슈는 나에게야 호감을 보였지만 옆의 엘릭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당연할지도 모른다. 엘릭은 마기로 숨기지 않고 몸을 감싸고 있었으니까. 이런 식물 외에는 위험한 숲에서 최대한의 신체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는 리스피아가 준 엘프어 편지를 그에게 건넸다. 원래는 엘프 마을의 수장이나 그에 준하는 대표자에게 주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지금 슈의 도움을 받으면 더 빨리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편지에는 나에 대한 것도 약간은 적혀 있었는지 슈는 금세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희라……, 그 드래곤 분들이 하는 거 말이죠? 하르아이나 제국이라면 우리와 협약을 맺은 흑룡의 수호제국일 테고. 그치만 그것과는 관련 없이 저희 엘프들은 여왕님이 바라시는 거라면 뭐든지 도와 드릴 거에요! 제가 안내할게요.”

엘릭은 탐탁치 못한 표정이었지만 엘프가 앞장서서 안내하는 길로 따라왔다. 슈가 나무를 타며 가장 앞장서고 그 다음 숲에 가려져 제대로 눈으로 보이지 않는 슈의 기척을 쫓았다. 마지막으로 엘릭이 주변을 살피며 내 뒤를 따라왔다.

“제국에 심부름 가신 리스피아 님에게 받았다는 지도가 이거에요? 그치만 리스피아 님은 워낙 마을에 머물지 않고 돌아다녀서 최근에 강에 돌다리가 생긴 건 몰랐나 봐요. 제가 다리 쪽으로 안내할게요!”

나는 슈의 길다란 황금빛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를 따라갔다. 아까 50년이나 길렀다고 했었나. 지금은 땋고 있어서 조금 짧아 보였지만 땋은 것을 풀면 발목까지 올지도 몰랐다.

어리고 파릇한 새 풀잎처럼 보였지만……. 50년이라. 그렇게 여리지는 않아 보인다. 일단 헐렁한 망토 아래로 보이는 손과 발이 꽤 큰 것만 봐도 그렇고.

게다가 리스피아와는 달리 섬세한 그 외모가 정말로 예뻤다. 유렌의 콧볼이나 뽀얀 턱선, 리스피아의 남자다우면서도 주름 하나 없는 목줄기, 반듯한 이마. 전부 엘프 특유의 섬세함의 흔적이었다. 슈는 마치 그 엘프의 특징을 전부 한 곳에 모아놓은 듯한 예쁘장하면서도 우아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내가 멍하니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고 있자 슈는 내 시선을 느끼면서 부끄러운 듯 다시 풀숲으로 숨었다. 그리고 곧 다시 내려와서 잘 익은 연두색의 과일송이 몇 개를 내게 건네주었다. 연한 가지에 주렁주렁 붙은 아주 작은 라임레몬 같은 과일은 내가 처음 보는 과실이었다. 숲의 깊숙한 곳으로 어느 정도 들어오고 나서는 오히려 밖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과일이나 풀들을 보는 것이 더 드물 정도로 신비한 식물들이 많이 보였다. 이 과일도 그 중 하나인 것 같다.

나는 엘릭에게도 몇 개를 건넸지만 그는 됐다고 거절했기에 혼자서 열매의 끝부분을 깨물어 보았다. 새콤달콤한 액과 단 냄새가 확 퍼졌다. 시트러스와 열대 과일향을 섞은 듯한 냄새였는데 향이 무척이나 진했다. 파인애플의 두세 배는 되는 진한 과일 냄새가 났다.

슈는 볼을 빨갛게 붉히며 내게 말했다.

“어때요? 달콤하고 향도 좋지요? 플로라 님한테선 그것보다도 좋은 향이 나요…….”

그리고 다시 나뭇잎 사이로 들어갔다. 슈 나름대로의 호감 표시법인가. 나는 괜히 그에게까지 들리도록 즐거운 소리로 웃었다. 그 외에도 슈는 이동하면서 내게 가끔 가까이 붙어서는 이것저것 자잘한 식물의 이름이나 맛을 소개해 주거나 간단한 얘기를 나누거나 했다.

그의 말투는 무척이나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상냥하기 그지없어서 나는 꼭 살랑살랑하는 따스한 봄바람을 느끼는 것처럼 기분이 편안했다. 원래 엘프는 다들 이렇게 말솜씨가 좋은 걸까? 그치만 리스피아의 행동이나 어조는 무언가 종종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하학적이라 의아하게 느낀 적도 많았다.

“리스피아에 대해서는 알아? 마을에 거의 머물지 않는다고 하던데…….”

슈는 은방울 소리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깨끗한, 하지만 새 소리보다 굵직한 울림의 목소리로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알고 있죠! 저희 아버지의 친척인걸요. 조금 특이하신 분이라 성년식을 치룬 직후에 마을을 나가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해요. 그치만 지금은 리스피아 님하고가 아니고 저랑 플로라 님의 대화잖아요? 마을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우리, 단 둘인데…….”

그는 심호흡을 하고 나랑 눈을 마주쳤다. 다정하게 눈웃음을 짓는 모습이 생각보다 남자다워서 발끝이 녹아버리는 줄 알았다.

“저에 대한 얘기는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러고는 또다시 수줍은지 뾰족하고 긴 귀의 끝을 발갛게 물들였다. 얼굴 표정으로는 그다지 감정이 드러나지 않지만 귀로는 그가 느끼는 모든 것이 가감 없이 순수하게 드러나는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구구구구구구구구

마이쪙! 이히히힣

여러분, 엘릭 프로필 확인하셨어요?? 왜 안 확인이요?

프로필 한참 옛날에 올려놨는데 아무도 눈치를 못 채셨네. 그냥 덧글만 안 다신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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