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87화 (187/226)

<-- 8. 채식 -->

“히익!!”

나는 끈적함과 불쾌함 속에서 잠에서 깨어났다. 소, 소, 소금!!! ……인 게 당연하지! 지금은 바다 위니까!!!

나는 따가운 햇볕을 막고 있는 얇은 모포 밑에서 꼼지락거리며 일어났다. 내가 언제 모포를 여기까지 덮고 잤지? 덕분에 새벽 광합성을 못 했잖아. 그러다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며 내 앞의 엘릭을 바라보았다. 너무 오래 잤나 보다. 깨우지 그랬어…….

하지만 엘릭은 화내지 않고 빨리 준비하라는 듯 눈짓했다. 내가 육지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미역 군집체까지 배를 밀라고 했기 때문에 아직 육지에서는 꽤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멈춰 있는 것을 보니 마침내 내가 말한 곳까지 도착했나보다. 나는 모포를 가방에 쑤셔넣고 실프에게 바위 틈새까지 밀라고 지시했다.

“밤에 뭐 나왔어? 안 나왔어??”

엘릭은 별로 피곤하지도 않은 것 같고 언제나보다 평온한 표정인 걸 보니 나오지 않았나 보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셋 정도……. 약했어.”

“다행이네.”

엘릭은 바위틈 중 가장 낮은 곳으로 배를 대고 바위 위에 올라서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결에 그 손을 덥석 붙잡았다. 엘릭은 단숨에 나를 끌어올리고 무기를 마지막으로 재점검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발을 들인 적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배의 물기를 가볍게 말린 후 다시 주머니에 배를 집어넣고 숲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성해진 숲은 ‘어둠의 숲’ 그 자체였다. 너무 촘촘하고 높다란 나무들 때문에 숲길을 걸으면 마치 나뭇잎으로 녹색의 두꺼운 장막을 친 듯 어두컴컴해 보였다. 그치만 이런 천국도 없을 것이다. 사방에서 나무 냄새가 났다. 여기도 저기도 풀, 꽃, 나무, 줄기, 식물 투성이다.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나는 엘릭조차 쉽게 뒤쫓아올 수 없을 정도로 생기가 돌아 빠르게 숲을 헤쳐나갔다.

“맞게 가고 있는 거겠지?”

“난 식물의 정령왕이라구? 틀릴 리가 없잖아.”

크게 소리쳐주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눈으로야 처음 보는 식물들일 테지만 내게는 흔한 식물이건 희귀한 식물이건 다 같은 내 아이들이나 다름없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하고 푸른 기운이 몸을 통과해갔다. 무척이나 개운했다.

길도 없는 빽빽한 숲이라 엘릭은 이동 속도가 엄청나게 느려졌다. 당연할지도 몰랐다. 웬만큼 산에 숙련된 자들도 이 정도로 덩굴과 풀이 빽빽하다면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것이다. 엘릭은 그로 따지면 무척 빠른 편이다. 엘릭이 불편하게 느릿느릿 걷다 못해 화가 나서 꿈틀대는 마기의 칼날로 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하자 내가 아악! 하며 엄청 아픈 표정을 짓는 것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왠지 좀 미안한데.

내가 풀들에게 우리가 가는 길을 조금 비켜달라고 말하자 사람 하나는 충분히 쉽게 걸을 수 있을 정도의 길이 생겼다. 엘릭은 할 줄 알면 조금 빨리 하라는 듯 나를 쳐다보는 듯 했으나 나는 딴청을 피웠다.

“……얼마 안 온 것 같은데 벌써 밤이네…….”

하긴, 지도로 본 어둠의 숲은 웬만한 국가 하나 정도는 될 정도로 넓었다. 엘프식으로 쉽게 설명해 줬지만 하루종일 가도 리스피아가 말한 참나무까지는 반도 오지 못했다.

“그나저나 정말 마물이 없구나.”

맹수와 숲의 동물은 잔뜩 있어도 나무들이 도와주었기에 거의 마주칠 일은 없었다. 만약 내가 제국에서 받은 그 보고가 사실이라면 마물을 풀어 놓은 범인은 인간이다. 인간이 갈 수 있는 왕국이나 계곡, 숲에서 마계의 게이트를 열어 마물을 수십 마리 풀었을 것이다. 인간이 아예 갈 수 없는 어둠의 숲에는 마물 역시 접근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어둠의 숲이 괜히 카덴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 중 하나가 아니라구. 평지를 돌아다니는 오크나 트롤 역시 숲 깊숙이까지는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걸. 이 안에서 살 수 있는 생물은 엘프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후훗, 식물을 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나는 밤의 깜깜한 어둠의 숲을 둘러보았다. 낮에는 웬만한 숲보다 어둡다고 느꼈지만 막상 밤이 되고 달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지고 보니 생각만큼 어둠의 숲은 깜깜한 암흑으로만 가득 찬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낮의 햇볕을 받아 밤에 빛나는 일부 식물들 덕분이었다. 그러나 어두운 숲길을 안전하게 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식물을 읽을 수 있는 나야 어두우나 밝으나 상관 없이 다닐 수 있겠지만……. 빛의 정령을 부른다고 해도 넓은 장소가 아니라 이런 큰 나무 투성이의 빽빽하고 좁은 공간에서는 아무리 빛의 정령으로 주변을 밝혀도 밝아지기는커녕 장애물의 뒷부분을 더 어두워 보이게 할 뿐이다. 나는 엘릭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쉴까? 아니면 더 갈 수 있어? 역시 걷기에는 너무 어두운가?”

나는 어젯 밤에 푹 잤지만 엘릭은 아니었다. 게다가 비록 희미한 빛을 내는 식물이 곳곳에 있기는 해도 언제 이 식물의 빛이 사라질지 몰랐다. 지금만 이 식물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둠의 숲은 넓고, 부분적으로 살고 있는 식물의 종류도 다 다르니까. 그래서 그가 쉬자고 제안할 줄 알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안대를 풀어 손목에 빙빙 감았다.

“이제 분명히 보이는군.”

“더 갈 수 있어?”

“……네가 지쳤으면 쉬어도 되고.”

엘릭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나는 울컥 경쟁심이 솟아올랐다. 나, 나는 절대 안 지쳤거든? 오히려 힘이 펄펄 넘쳐서 남아 돌 정도야.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엘릭이 어디 하나 걸려서 다칠지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어두웠다. 게다가 이렇게 어두우면 식물 이외의 존재, 죽은 나무나 돌 같은 장애물에 대해서는 내가 미리 말해줄 수 없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쉬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쉰다고 말하면 엘릭도 쉴 수 있겠지? 아무래도 자존심 때문에 먼저 쉬겠다고 말 못하는 것 같으니까. ……그게 아닌가?

“내가 지킬 테니까……, 너는 걱정 말고 쉬어.”

내가 모포를 깔 곳을 알아보려고 주변을 빙빙 돌아보자 엘릭은 작게 속삭였다.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놀라서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엘릭을 재차 쳐다보았다. ……그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라니. 뭘 잘못 먹었나? 아니지, 숲에 들어온 이래로 뭘 먹은 적이 없구나.

나는 영양분이 풍부한 땅과 조금씩 비춰드는 따가운 햇볓, 그리고 미르의 주머니에 넣어 온 신선한 물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미처 생각지 못했다. 엘릭은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종종 물이나 과일을 권해도 고개를 저을 뿐이다. 분명 짐을 챙길 때 음식도 챙겨왔고, 배를 구하려고 갔던 항구 마을에서도 식량을 샀을 텐데? 걸으면서 먹을 수도 있는데 왜 안 먹는 거지. 식사 시간에 예의상 조금 든 것 말고는 거의 먹는 것을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고 그에게 물었다.

“엘릭, 배 안 고파?”

“배고픈 적 없어. ……열 살 때부터.”

열 살이라면 그 황금빛 눈이 처음으로 생긴……. 나는 고개를 젓고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엘릭에게는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추억일 것이다. 마족은 음식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나? 아니, 아니었던 것 같다. 음식 대신에…….

나는 항구 마을에서의 일을 생각했다. 옷은 전부 타서 재가 되어버렸지만 그 내용물은? 인간은?

“…….”

역시 생각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엘릭은 가만히 서서 나무에 기대, 모포를 덮고 세상 모르게 잠든 시아를 바라보았다. 새근새근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시아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래도 새하얀 피부가 밤의 어둠에 묻혀 창백하게까지 보였다.

그는 살짝 풀린 표정으로 다시 일어나, 들키지 않게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그녀의 바로 옆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방금까지 들킬까 말까 살그머니 움직이던 몸짓과 반대로, 과감하게 나무를 짚고 시아의 얼굴 바로 앞까지 머리를 들이댔다. 약간의 풀 냄새와 잘 익은 체리같은 과일 향이 조금 났다.

파아란 눈동자와 금박을 입힌 듯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가늘게 감겼다. 반쯤 뜬 눈으로 엘릭은 가만히 시아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평온하게 잠든 시아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듯 했다.

엘릭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녀의 꼭 감긴 눈꺼풀과 핑크빛 속눈썹을 응시하며 도톰하게 벌려진 시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갖다 댔다. 자연스럽지만 매우 느리게. 입술이 살며시 닿는 순간 그는 잠시 멈추었지만 언제 멈추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게 다시 조금 더 얼굴을 밀착시켰다.

아랫입술은 아랫입술, 윗입술은 윗입술에 그대로 맞춰 꾹 눌렀다.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그녀의 치아와 엘릭의 혀가 맞닿았다. 그런 건 어떻게 되어도 좋다. 그는 살짝, 느리지만 침착하게 한번 더 몰래 입맞춤을 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달빛이 비추어 들어왔다. 내려오고 있는 노란 달빛을 가리듯이 엘릭은 재차 입술을 맞댄다. 잠시뿐이지만, 그는 웃음지은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일부러 가볍게 연출했습니다.

뜻하는 대로 나오질 않네요 ㅠㅠ

개인지 수량조사 합니다. 곧이에요. 정말 곧이에요...

비축분 꽤 됩니다요 ㅠㅠㅠㅠ 비축분만 거의 300K입니다;;; 완결 보여요...

전에 1차 뽑아낼 때 1,2권 구매하셨던 분들 정도로 이번에도 수량 나올 것 같으니 대충 감은 잡힙니다만 수량조사를 해 봅니다.

전에는 책 안 사실 분까지 산다고 찍어서 수량이 엄청 이상하게 나왔기 때문에 안 사실 분 전용으로 찍는 곳을 마련했습니다. 이런 짓까지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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