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86화 (186/226)

<-- 8. 채식 -->

‘마차로 갈 수 없는 곳’까지는 정말 금방이었다. 마부와 말을 교체해 가며 밤낮으로 달린 결과 내가 어설프게 말을 타고 가는 것보다 훨씬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루페닌 왕국 수도에서 어둠의 숲까지는 멀지 않다. 고작해야 1주일정도 되려나. 하지만 우리는 추적당하지 않도록 이리저리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열흘 만에 숲 근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가 가려는 루페닌 숲, 즉 어둠의 숲은 대륙의 서쪽 끝에 있다. 바다와 옆구리를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육로로 바로 가는 법도 있지만, 지금 육로 쪽은 전부 벌레에게 점령당해 있다.

방향을 틀어서 바다를 통해 숲의 한가운데로 가는 법밖에 없다.

그렇지만 해로 역시 안전한 것은 아니다. 육로와 반대로 해로는 숲까지 접근하기가 쉽지만, 숲에 들어간 순간 인간의 발이 거의 닿지 않은 암흑의 숲 속으로 현관도 없이 입장하는 셈이다. 어둠의 숲은 깊은 곳의 절반 이상이 인간의 발자국이 닿지 않았다. 그만큼 위험한 곳이 많은 미지의 숲이었다. 인간이 허용된 곳 이상 들어가면 시체도 발견되지 못한다.

어차피 내게는 좋은 놀이터지만 말야……. 노는 것보다 엘프를 데려오는 게 더 중요한 목적이니까.

무성한 숲 속에서 말을 달릴 수는 없었다. 엘릭이 말을 처분하고, 혹시나 필요할지 모를 물건들을 사러 간 동안 나는 내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마스크와 후드 달린 망토를 뒤집어쓰고 배를 구해 보았다. 붉은 눈이나 보기 드문 색의 머리카락만 해도 눈에 띄기 쉬운 외모라 혹시 제국의 귀족에 대해 아는 사람이 조사하러 나온다면 몇 가지 설명만으로 금세 나라는 사실을 들킬 것이다. 사실대로 숲에 들어간다고 하면 요즘같이 숲에 마물이 출몰해 위험한 시기에 우리가 엄청 수상해 보일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어떤 귀족의 심부름으로 누군가의 사유지일지 모르는 근처의 작은 섬에 간다는 핑계를 댔다.

“아니, 거긴 대체 왜 가려는 건가?”

“윗사람의 심부름에 제 이유가 필요한가요?”

“하긴 귀족나리가 시키는 일이라면 우리 같은 평민들은 그냥 찍 소리 못하고 떠받들어야지……. 그런데 목소리를 들어 보니 여자 아닌가?”

“이 나이를 먹고도 여자라고 할 수 있다면 말요.”

“목소리는 젊어 보이는데, 꽤 먹을 만큼 먹었나 보오? 하지만 혼자서 노를 젓기는 힘들 거요. 웬만한 나이대의 건장한 청년이 아니고서야…….”

“젊은 일행 둘이 지금 음식을 사러 갔어요. 그 때까지 배를 구해 놔야 해요.”

“그렇다고 말해도 말이지……. 개인적인 일이니 노 젓는 선원도 필요 없다, 배를 빌리는 것이 아니라 구매하고 싶다, 위험 따위는 상관 없다니, 아무리 본인이 그렇게 말해도 인명은 중요한 것인데……. 게다가 지금 마을에 큰 배는 하나도 없소. 가장 큰 어선 말고는.”

너절한 항구 도시에서 아무리 열심히 배를 구하려 해 봐도 큰 배는 역시 무리였다. 마을의 생사가 겨우 세 척 있는 큰 어선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나무 배라도 구해볼까 하는데, 어디로 갈 건지 묻던 어부들은 내가 바다 건너 섬에 볼일이 있어 간다고 하자 다들 나를 말렸다. 요새는 바다에도 위험한 마물이 나오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멀리 간다치면 커다란 어선 정도가 아니면 위험하다면서.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자네 혹시 배를 구하고 있는 건가? 어디 가려고?”

나는 골목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한 작업복 차림 중년 남자와 젊은 청년 둘을 보고 돌아섰다. 왜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 거지? 내가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이자 그 중년은 허허 웃으며 자신은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런 허접한 끄트머리 마을에 낯선 손님이 오는 게 드문 일이라 그래. 그나저나 이런 날씨에 마스크라…….”

“얼굴에 화상이 있으니까.”

볼일 없으면 꺼지라는 차가운 내 말에 그는 경계하지 말라는 듯 양 손을 들어보였다.

“함부로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 말아. 정말로 이런 어촌에 자네 같은 젊은 여자가 오는 것이 오랜만이라……. ……아까 봤거든. 마차를 처분하기 전에 자네 얼굴을.”

나는 그 남자의 눈동자에서 넘쳐흐르는 욕정을 쭉 읽고 있었기에 그가 무슨 목적으로 남자 둘을 데리고 골목까지 나를 따라온 건지 알고 있었다. 정말로 오랜만인걸……. 이런 일은.

이 곳에 와서는 완벽히 유혹을 조절할 줄 알게 된 데다가 늘 유리장 속에서 보호받으며 지내왔기에 이런 일을 겪을 기회가 없었던 것 뿐이었다. 그는 내 향기보다는 얼굴만 보고 나를 따라온 것이다. 나는 불쾌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깨닫고 마스크를 벗었다.

곧 드러난 내 얼굴에 중년 남자 말만 믿고 따라왔던 젊은 청년 둘이 헤벌레하며 좋다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후드를 벗어내리고 거만하게 말했다. 답지 않은 늙은이 흉내를 내느라 낮춘 목소리도 다시 높였다.

“미천한 것들. 지금이라도 내 발자국을 핥으며 잘못했다고 빌면 내 구두로 한 번 걷어차 주는 걸로 용서해 주지.”

한순간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 멍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셋은 나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내 눈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얼굴이 붉게 물들고 육체는 점차 흥분상태가 되어 갔지만 내 향에 완전히 취해 나를 거역하는 짓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몇 초간 그렇게 취한 듯 있었을까. 나는 그들에게 다시 명령했다.

“너희들이 감히 나에게 저지르려고 했던 걸 네녀석들의 육체가 허락할 때까지 사죄해 봐.”

“예!”

“무슨 짓이든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

탐욕스럽게 내 대답을 덥석 받아먹고는 천사의 목소리라도 들은 듯 그들은 황홀해했다.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대려는 순간 파삭, 하고 풍선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

바닥에 핏자국이 번졌다. 그러나 그 핏자국은 금세 남자의 뒤통수를 덮친 시꺼먼 어둠에 빨아들여지듯 사라졌다. 튀어오르기도 전에 붉은 액체들은 불타버리듯 소멸했다. 나는 멍하니 방금 내가 화향의 노예로 만든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엘릭이 골목 근처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배는 안 구하고 이런 어두컴컴한 골목길 같은 데나 돌아다니니까 이런 녀석들한테 협박당하는 거야!!”

엘릭은 무척이나 분노한 듯 했지만, 그 분노를 나에게 풀지 않고 자신이 방금 죽인, 아니, 사냥한 남자 셋에게 마음껏 퍼부었다. 아니……, 방금 협박은 내가 하고 있었는데.

퍼석, 파삭, 하며 남자 셋의 시체는 머리부터 어둠에 뜯어먹혔다. 그 밤의 근원, 세상의 어떤 검은 빛 보석보다도 새까매 보이는 블랙 홀 같은 물질은 엘릭의 손에서 나왔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죽지 않은 인간을 조금씩 조금씩 뜯어먹고 있었다.

엘릭이 말했던 ‘사냥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였던 걸까. 그렇다고 해서 죽일 것까진…….

이질적인 어둠은 인간의 피를 남김없이 흡수한 후 사라졌다. 재가 된 옷가지 이외에 남은 흔적은 없었다. 나는 멍하니 엘릭에게 물었다.

“맛있었어?”

내가 먹는 거랑 비슷한 느낌인데. 그는 육체마저 뿌리째 흡수하고, 나는 기운을 조금씩 빼앗는다는 차이 정도만 있을 뿐.

내 말에 엘릭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더럽게 맛없어.”

하긴, 나도 별로 식욕이 일지 않는 모습이었어……. 이런 게 마족의 '사냥' 법일까? 멍하니 마치 불에 타버린 것 같은 작은 잿더미를 바라보고 있는 내게 엘릭이 물었다.

“배는?”

“으, 응! 잠시만!”

여기서는 아무래도 구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나는 미르의 주머니를 뒤졌다. 정말로 뭐든지 있다고 했겠다? 그렇다고 설마 배까지 있겠어? 하며 무심코 휘젓던 내 손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나는 설마설마하며 주머니를 낑낑대며 옆으로 뒤집었다. 꺼내기 쉽지 않아 실프의 도움을 받았다. 마침내 붉은 색으로 칠해진 작고 낡은 나무배가 쿵, 하고 떨어졌다. 주머니에서 나오자마자 중력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사람 넷은 충분히 탈 수 있는 크기다. 노 두 개가 배 안에 붙어 있었다.

“…….”

우와, 진짜로 있네!! 미르의 창고에는 대체 없는 게 뭐야? 전에는 사탕을 생각했더니 사탕 수십 봉지가 나왔었고……. 상해서 못 먹지 않는 거라면 다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엘릭은 왜 주머니에 그걸 넣어놓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 주머니…….”

“마법 주머니……, 인데.”

“아무래도 상관없지. 오래 머물지 말고 지금 당장 출발하자.”

나는 실프를 시켜 배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그와 함께 눈에 띄지 않는 얕은 바닷가를 찾아갔다. 굵은 자갈 덕분에 걷는 게 힘겨웠다. 마침내 물가에 도착해서 나는 다시 실프의 도움으로 배를 꺼냈다. 배 중에서는 작은 나무배라지만 너무 크고 무거워서 혼자 힘으로 꺼내고 넣을 수 없었다. 엘릭은 가볍게 배를 건네받고는 말했다.

"너무 가벼운데……. 이거 믿을 만 한 거겠지?"

"아, 아마도?"

"……이거 어디서 났어."

불안한 내 대답에 엘릭은 추궁조로 말했다. 나는 드래곤 미르의 주머니에서 나온 배라고 사실대로 실토했다. 엘릭은 배를 다시 두드려 보더니 추측했다.

"마법이 걸린 배 같군. 물에 뜨기만 하면 괜찮을 거야. 타."

나, 나보고 먼저 가라앉는지 아닌지 시험해 보겠단 건가? 내가 가져온 배니 어쩔 수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라니까."

"지금?"

적어도 물에 띄우고 타야 하지 않나? 나는 엘릭이 시키니 일단 부들부들 떨며 배 위에 올라탔다. 엘릭은 배 위에 나를 태운 채 나뭇배를 두 팔로 번쩍 안고서 물 안으로 깊이 들어가 배를 띄웠다.

우와앗, 엘릭 엄청 힘 세다! 나는 두 손으로도 제대로 지탱하지 못했던 배인데.

어느정도 깊이 들어와서 노를 저을 수 있을 정도의 깊이가 되자 그는 배의 끝부분을 잡고 올라탔다. 주르륵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크기가 작은 배인데 균형이 잡혀 있어 안정적이었다. 설마 나를 젖지 않게 하려고……?

가슴께 아래로는 다 젖은 그는 배에 올라타서 부츠를 벗고 안에 든 물을 배 주변의 출렁이는 파도 사이로 쏟았다. 나는 다급히 가방에서 큰 타월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춥지 않아?"

"……별로."

"나한테 시켜도 될 텐데."

"소금물에 절인 풀조각한테 시키는 것보다는 내가 하는 게 나아."

한여름이지만 이런 저녁 시간에 바닷물에 옷이 흠뻑 젖으면 결코 시원하지만은 않을 텐데. 그치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타월을 받아들어 대충 물기를 닦았다. 그의 어조가 조금은 다정해진 것 같아 다행이다.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은 걸까?

노를 저을 필요 없이 나는 실프 둘을 시켜 배를 밀도록 했다. 웬만큼 노를 젓는 것보다 더 빨리 배가 앞으로 나아갔다. 엘릭은 무기를 재차 점검했다. 검 세 자루와 단검 몇 자루다. 숲에 들어가면 곧장 무기를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나는 리스피아의 편지에 들어있던 루페닌 숲 지도를 눈으로 대충 훑어보았다. 거대한 미역 군집체 근처. 메꽃이 가장 많은 바위틈에 배에서 내려서 눈에 보이는 푸른 꼭지를 가진 큰 참나무로. 그 참나무 여덟 개 분량의 길을 지나 해가 지는 쪽으로 쭉 걸어간 후 하얀 버섯꽃에서 멈춘다. 버섯꽃에게 물어보면 다섯 소나무 무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 것이다. 소나무 무리가 있는 곳에서 가운데 소나무가 향한 곳으로…….

역시 엘프라 그런지 무척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몇 번쯤 읽고 되도록이면 어두운 밤에도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달달 외웠다. 배를 탔던 시간이 이미 저녁쯤이었으니 해가 금방 저물었다. 나는 전에 잔뜩 사서 미르의 주머니에 넣어 둔 아삭아삭한 배를 깨물었다. 그리고 엘릭에게도 하나 건넸다. 엘릭은 새콤한 맛이 나는 파란 배를 건네받은 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거절치 않고 먹었다.

어느 정도 깊은 바다까지 온 것 같다. 멀찍이 실같이 작은 대륙이 보였다. 벌레형 마물은 날개가 있으므로 마물조차 접근하지 못하는 깊은 숲의 안쪽까지 들어오기 전에는 대륙에서 이만큼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더라. 작은 배로 여기까지 오는 것은 위험하지만 엘릭이 마법 배라고 판단한 게 사실인지 배는 의외로 안정적으로 뒤집히지 않고 파도를 타 주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 배는 실제로 미르가 강이나 바다 한가운데서 가끔 타는 휴식용 보트라고 했다. 뒤집히지 않는 균형 마법과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는데다가 특정 마법을 가동하면 모터 보트처럼 빨라지는. 하지만 나나 엘릭이나 정령술과 마기는 다룰 줄 알지만 마법은 전혀 못 썼기 때문에 보트가 마법에 걸려 있다는 것은 짐작 가능할지 몰라도 보트의 가속 기능은 이용할 수 없었다.

“벌써 밤이네…….”

새까만 물을 담아놓은 듯 잔잔한 바다가 찰랑찰랑거리며 해수면으로 달빛 금박을 반사시켰다. 고요한 밤 바다. 넓은 하늘과 별, 수평선과 하늘의 분간이 어려울 정도다. 이런 풍경도 꽤 좋은데……. 주변이 다 내 천적인 소금물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물론 미역은 소금물 속에서도 잘 살지만 장미는 해조류가 아니기 때문에, 물 속에서 잠시 광합성이야 할 수 있지만 소금물에서 오래 살 수는 없었다. 이 때는 잠자고 있는 편이 낫겠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 멋대로 잘 수는 없다. 나는 가만히 옆을 보고 있는 엘릭에게 말했다.

“깊은 바다에는 몬스터도 나온대. 검을 쓰기는 어려울 테니까 내가 전부 처리할게. 엘릭은 자 두는 게 어때?”

“됐어.”

“그치만…….”

“네가 안 자고 버틸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오랫동안 안 자고도 살 수 있어. 너는 숲에서 길을 찾아야 하니 지금은 네가 자.”

엘릭은 정말로 그런 것처럼 말했기 때문에 나는 모포를 꺼내 덮고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협력하는 입장에서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않겠지. 나는 실프에게 계속 이 거리로 움직이라고 말해둔 후 배 위에서 잠들었다.

========== 작품 후기 ==========

3황자 기억 못하실줄 당연히 알고 있었어요ㅋㅋ

앞에 보시면 이루가 가끔 자기 동생에 대해 짧게 몇마디 했는데, 그게 답니다.

딴거 없어요. 그게 전부에요. 어차피 내용상 중요한 부분도 아니니 신경쓸 필요도 없습니다.

나중에도 그냥 몇 번 언급되고 끝날 엑스트라입니다;; 굳이 앞 내용을 다시 안 읽어도 적당히 알아듣게 적어놓을게요 흐규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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