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85화 (185/226)

<-- 7. 사신 파티 결성 -->

***

그 이래로 며칠째. 제국의 일은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얼마 전 제국에서 날아온 보고서를 읽고 고민에 빠졌다. 마물의 출몰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나는 우리가 루페닌 왕국으로 올 때 계곡에서 만난 마물들을 떠올렸다. 기사들 중에서 손꼽히는 실력이라던 엘릭과 열 명이 넘는 황실 기사들이 싸워서 겨우 마물 한 무리를 힘겹게 물리쳤다. 마물의 숫자가 이 이상이라면 정말 문제가 생기는 것 아냐? 게다가…….

나는 제국을 떠나기 전, 엘리아스 씨에게 들은 얘기가 지금 생각났다.

‘마족이 관여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날 거야.’

…….

아아! 정말 여기 위험해지는 거 아냐? 식물들은 인간들의 다툼에 큰 피해를 입지 않는다. 아예 입지 않는다고 하긴 뭣하지만 인간들이나 이종족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식물이 입는 해는 새발의 피 정도일 것이다. 특히 전쟁이 끝난 후는 땅의 양분이 너무나 풍부해서 식물의 전성기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반대로 인간 입장에서는 아비규환의 시기다. 지금 내 식물 아이들만 추스르고 빨리 정령계로 돌아가야 할까? 그치만 인간계에는 아젤님도 있고, 유렌도 있는걸. 드래곤인 세르와 미르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말야.

불안한 첫 번째 제국에서의 편지. 그에 비해 마치 피난이라도 온 것처럼 루페닌 왕국 쪽은 특별한 사건도 없이 고요하게, 이상할 정도로 수고로움 없이 모든 일이 무사히 진행되고 있었다.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건 그저 태풍의 눈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을까. 해외에 온 타국의 귀족은 사실상 할 일이 거의 없다. 특히 해외에 오는 것만으로도 ‘일’이 되는 귀족이라면 더더욱. 나는 한가함에 하루하루를 루시나만 물고 빨며 여유롭게 지내고 있었다. ‘그 지령’이 내게 전달되기 전까지는.

텔레포트 스크롤로 급하게 달려온 전령이 나에게 편지 석 장을 전했다. 텔레포트 스크롤은 보통 한 명만 이동 가능하고 값이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에 웬만하면 스크롤로 전령을 이동시키기보다는 마법 통신구를 통해 연락하는 편이 더 나았다. 루페닌 왕국과 하르아이나 제국 사이에는 마법 통신탑이 충분히 있었기에 별달리 힘들이지 않고도 안전하게 지령을 전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일단 무척 피곤해 보이는 전령을 쉬게 한 후 내 방에서 편지를 뜯어보았다. 첫 번째 편지는 여제의 지령서였다.

“…….”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전쟁이라고?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첫 줄부터 충격을 받은 나는 한참을 당황해하다가 겨우 기분을 가라앉히고 다음 줄을 읽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여제가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이런 산골짜기 왕국으로 피난 혹은 휴가를 보내지는 않았을 거라고.

내용은 대충 이 정도였다.

제국의 영원한 숙적이자 적국인 젤타 왕국이 이번에 우리 제국의 세 번째 황자인 페트로 하르아이나 크라이덴과 손을 잡고 전쟁을 선포했다. 카덴 곳곳에 출몰하는 마물과의 상관관계는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제국의 마법 검사인 이트리샤 대공 측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젤타 왕국과 마족, 그리고 페트로 제 3황자가 밀접한 관련이 있을 확률이 높다.

회색의 편지 봉투에는 엘프 족의 대리자인 리스피아가 써 놓은 루페닌 숲의 출입 허가증과 엘프 마을의 지도, 제국의 지원 약조서가 동봉되어 있다.

일행의 리더는 마란 후작에게 양도, 엘프 마을까지 찾아가는 것 역시 최소한의 호위만 데리고 비공식적으로 하길 바란다. 루페닌 왕국에는 여제의 호출로 귀환한다고 알린 후 진행할 것. 제국으로,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귀환 요망.

그나저나 이거 완전히 특수 요원이잖아! 여제는 그렇게까지 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가. 분명 흑의 대공의 입김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 그는 나를 마법과학적인 근거에 입각해서 믿고 있다. 정령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말했었지.

저번에 일을 잘 했다고 해서 이번에는 한가하게 놀러 온 줄 알았는데 결국……. 내가 정령사라는 것도 이럴 때 무척 편리하게 이용되는구나. 나는 여제의 준비성에 새삼 감탄하며 머릿속으로 날짜부터 계산하기 시작했다. 지금 바로 루페닌 왕국의 국왕에게 ‘여제가 호출했다, 일행의 리더는 마란 후작에게 양도한다’, 고 알린 후 최소한의 호위로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을 데려가야 한다. 만약 내가 개인적인 이유로 엘프 마을에 가기 위해서라면 그저 정령계를 통해 엘프 마을 위치를 찾으면 된다. 처음 찾는 거지만 아마 몇 분도 안 걸릴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임무였다. 정령으로서가 아니라 정령사로서 임한다. 왜냐하면 그런 ‘유희’니까 말이다. 마물도 나오는데 호위가 필요없을 리가 없다. 최고로 능력 있는 기사를 데려갈 것이다.

……누구?

“…….”

엘릭밖에 없잖아!

나는 지령서를 들고 엘릭의 방으로 찾아갔다. 엘릭은 방에서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의 사건 이후로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는 엘릭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잖아! 나는 처음 엘릭이 우리 팀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라키아네 백작이 한 말이 생각났다.

‘여제께서는 사람을 잘 쓰기로 유명한데, 어째서 우리 팀에 그 사람을 넣었을까요?’

필요하니까 넣은 것이다. 바로 지금. 나는 엘릭의 앞에 지령서를 내려놓았다. 이 내용을 알게 되는 것은 나, 내 대리가 되어 줄 마란 후작, 그리고 나와 함께 행동할 엘릭, 이렇게 셋 뿐일 것이다. 엘릭은 천천히 내게서 지령서를 건네받아 읽어내려갔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 부분에서 잠시 눈동자를 멈추더니, 곧 그 아래를 건성으로 읽어내렸다. 엘릭은 지령서를 다시 내게 건네주었다. 담배라도 있으면 피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는 비흡연자지만, 그 정도로 절박해 보였다.

“……출발은?”

“오늘 밤.”

“준비는?”

“국왕에게 출국 보고를 한 다음 마란 후작님에게 인수인계. 그 다음에 간단한 짐만 챙기면 나는 준비 끝이야.”

“그럼 밤까지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출발하지.”

바로 출발하다니, 엘릭은 아무 준비 안 해도 되는 건가?

“검 하나로 충분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루페닌 왕국의 국왕에게는 여제 폐하가 급히 부르셔서 호위기사 하나와 함께 어서 돌아가 봐야 한다는 말을 전한 후 마란 후작에게 지령서를 보여주며 리더를 인계했다.

후작은 내가 홀몸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듣고 무척이나 걱정스러워했다.

“시녀나 하다못해 시종 하나도 안 데리고 가세요? 걱정되는데…….”

“케르타에서는 시녀 한 명도 없이 잘 살았는걸요. 그보다 최대한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도와주세요.”

엘프 지원병은 굉장한 도움이 된다. 제국 측에서 엘프를 적으로 돌림으로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이익을 포기하고서라도 얻어낸 협약이다. 건국 직후의 영토 전쟁에서 엘프 지원병은 전쟁의 승패를 반 정도는 결정지을 정도로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 정도의 정예 지원병의 존재가 적국에 들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타격이다. 제국에 들어서서도 방심할 수 없다. 전쟁이 선포된 이상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자국의 스파이다.

여제는 상대가 방심한 순간의 일격, 그것도 선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 전쟁을 국가적 손실 없이 최대한 빨리 끝낼 생각인 것 같았다. 힘의 밸런스가 안정적으로 변해가는 이런 애매한 시기에 전쟁이라니,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 그래도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에 최대한 주력하고 있는 여제로서는 징병 위주의 군사 모집을 하기보다는 귀족들의 사병을 끌어모으고 타국에 도움을 청하는 것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전쟁 뿐 아니라 전쟁 이후의 회복기가 최대한 짧아질 수 있게. 그것이 현재 제국의 최우선 순위였다.

타국의 눈에는 우리 나라가 걱정할 것 없는 여유로운 강대국으로 보일지 몰라도 전쟁의 위기에는 오히려 약소국보다도 기반이 약해 흔들리기 쉽다. 짧은 순간 너무 갑자기 비대해진 국가는 조금의 충격으로도 쉽게 산산조각으로 분리되어 버린다. 제국의 역사는 아직 초창기.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잠깐, 생각해 보니 난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잖아!?

마란 후작은 걱정스러운 내 표정을 오인한 건지 남은 내 사람들을 전부 그가 책임지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네리아도, 멜도, 루시나와 쥬얼도. 하긴 마란 후작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중요한 물건들을 미르의 주머니에 집어넣고 있는 나를 보고 쥬얼이 왜 갑자기 짐을 챙기냐고 물었다. 아랫사람이고 관련 없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같은 편인 라키아네 백작에게도 속이는 판에.

적을 속이려면 자기 편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황제 폐하의 호출 때문에 나는 먼저 제국으로 돌아가봐야겠어. 너랑 루시나는 마란 페릴 후작님께서 당분간 대신 맡아주실 거야.”

“에엣!?”

“급하게 돌아가는 거라 못 데려가서 미안한데, 그 동안 후작님 말 잘 듣고, 사고치지 말고…….”

쥬얼은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어, 언제? 언제 가는 거에요?”

“지금 당장.”

쥬얼이 아무리 귀엽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아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쥬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지금 제국이 좀 소란스럽거든. 일이 정리되면 마란 후작님과 함께 돌아오면 돼.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얼마나 걸리는 거에요? 저 버리시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 있니. 네리아도 멜도 두고 가는 거야. 아아, 그렇지. 이걸 줄게.”

우는 소리를 내는 쥬얼에게 나는 단지 머리를 쓰다듬는 정도밖에 달래줄 수 없었다. 문득 한 가지가 떠오른 나는 미르의 주머니를 열심히 뒤졌다. 겨우 손 끝에 잡히는 딱딱한 것을 꺼내어 확인했다. 혹시나 해서 여유분으로 두어 개 만들어 뒀던 신분 증명용 금패였다.

나라 어딜 가나 패의 기본 모양은 동일했다. 특히나 평민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금패에는 시렌느 가문의 문양과 이름이 적혀 있었다. 쥬얼은 중얼거렸다.

“뭐라고 적혀 있어요?”

“쥬얼은 일단 제국에 도착하면 글부터 배워야겠다. 이건 신분 증명패야. 시렌느 공작가의 이름이 쓰여 있어. 이게 있으면 누구든 내 저택에 들어올 수 있으니까 갖고 있으렴. 아마 쓸 일은 없겠지만.”

조금쯤은 안심이 되었으려나? 쥬얼은 내 말에 무척이나 감동한 듯 한동안 반짝반짝 빛나는 패를 들고 내 얼굴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생각보다 순진한 표정에 후후 웃음지었다.

워낙 급하게 떠난다고 알려놓은 터라 호화로운 배웅은 무리지만 왕실 식구 중에서 왕자 두 명이 직접 나와서 우리를 배웅했다. 나는 여유롭게 배웅을 받아주었다. 이걸로 루페닌 왕국 측은 제국을 후히 대접했다는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나도 좋고, 루페닌 왕국도 강대국의 눈에 잘 들었다는 기분상 좋고. 하지만 그 길로 수도를 빠져나가자마자 나와 엘릭은 방향을 틀었다. 수도를 나올 때까지는 기록이 남기 때문에 수도를 굳이 빠져나와야만 몰래 행동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누군가가 우리를 추적하더라도 이대로 아크샤 왕국 쪽으로 가서 마케를 통해 제국에 돌아갔다고 생각하겠지. 마케의 텔레포트 게이트의 사용 흔적을 추적당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마케는 그 어떤 국가의 편도 들지 않는 중립국인데다 카덴 최강의 마법 보안으로 철저하게 고객의 모든 정보가 보호되고 있다. 마탑이 제국에 후한 것은 그만큼 제국이 마탑에 많은 보조를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뿐이다.

“적이 마족이라면 역시 정령을 쓰는 편이 미행을 따돌리기 쉽겠지?”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우리에게도 미행이 붙어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편이 좋다. 그래야 혹시 나중에라도 있을 지 모르는 마법 추적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를 처분하고 나도 말로 갈아타는 게 좋을까……? 잠깐, 나는 말을 아직 못 타는데?”

나는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승마가 서툴다. 조금이라면 탈 수 있지만 능숙하게는 무리다. 하물며 이런 장기전은 절대 불가능. 원래도 세이시아는 큰 낙마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고, 세르나 유렌은 나를 감싸는 데 급급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내게 승마를 배우라고 권하지 않았다. 게다가 귀족들의 승마라고 해야, 특별히 훈련받는 기마병이 아닌 이상 말 그대로 산책의 수준이다.

으으……. 벌써부터 리더의 권위가 흔들리다니. 엘릭 녀석, 틀림없이 나를 쓸모없는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제길, 억울하다, 억울해!!

승마를 못하는 건 나였기 때문에 변명하진 않겠다. 그러나 엘릭은 설마 나를 배려해서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마차를 처분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다.

“마차로 갈 수 없는 곳이 나올 때까지는 이대로 타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체력 보존은 중요하니까. 대신 고용하는 마부는 자주 교체해야겠지만.”

“저, 정말?!”

우와아……. 엘릭 정말 좋은 녀석이구나. 나를 위해서라고는 볼 수 없지만…….

========== 작품 후기 ==========

3황자는 처음부터 배신시킬 목적으로 만든 캐입니다. 아무도 눈치채진 못했겠지만 지금 다시 잘 찾아보시면 배신스러운 느낌이 나실 거에요... 아마?

이루(2황자)랑 헷갈리지 마세욬ㅋㅋㅋ

젤타 왕국이랑 루페닌 왕국 이름 헷갈려서 몇 번 실수를 한게 있습니다...

젤타 왕국은 제국 옆에 있는 적국, 루페닌 왕국은 대륙의 서쪽에 있는 제국의 속국입니다. 전에 나무 잘라서 갖다바치는 나무국이라고 말한적 있었죠....

소설로 따지면

젤타 : 나쁜놈/악역. 마지막에 뒤통수를 침. 나름의 정의가 있음.

루페닌 : 멍청한 부하. 약하기 때문에 때리면 말을 잘 듣지만, 끝까지 지켜보지 않으면 뒤에서 배신할지도 모름.

이 정도. 시아는 루페닌 감시역으로 루페닌 왕국에 갔습니다. 근데 이제 감시는 누가 함.

틀린 이름은 찾기 기능으로 나중에 다 수정해 놓겠습니다 ㄷㄷ;

원래 이 장면은 흑의 대공 소설과 겹쳐지는 설정이었습니다. 흑의 대공은 이때 한참 마족에 대해 조사하고 열심히 싸우고 있겠죠. 그 쪽이 더 히어로 같아 보이는 것은 처음부터 그쪽이 히어로로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 [꽃의 여왕]은 그 뒤에 만들어진 소설입니다.

전쟁 얘기 나오는 것 보면 이쯤이 소설 클라이맥스같지만 사실 클라이맥스는 이것보다 좀 더 뒤입니다. 그거 나오면 완결 다되간다고 보시면 됩니닼ㅋㅋㅋㅋ

유렌은 다음 챕터에 잠깐 나오구요, 엘릭 공략은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거의 완결될 때 공략한다고 처음부터 말해뒀다능 제 잘못 아니라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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