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사신 파티 결성 -->
라키아네 백작이 나서서 사람들의 의사를 묻고, 시간 약속을 하고 나한테 와서 보고했다.
“다들 내일 저녁에 시간이 난대요. 리더가 쏘는 거니 당연히 없는 시간 내서라도 와야죠. 사실 리더 이외에는 여기서 할 일 없잖아요? 다만…….”
“응?”
“레이몬드 자작에게는 말 안 했어요. 거절할 것 같아서요. 공작님이 직접 전해주실래요?”
킥킥 웃으며 내게 부탁하는 라키아네 백작 때문에 나는 아닌 밤중에 또다시 엘릭의 방문 앞으로 가야만 했다. 아까보다 유난히 방문이 크게 느껴졌다. 마치 나를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어……, 저기…….”
“네?”
라키아네 백작은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그녀는 혹시 내가 엘릭과 사이가 좋다고 착각하는 걸까? 말 그대로 착각이다! 엘릭과 내가 사이가 좋다니. 나조차도 존재를 믿을 수 없는 문장이 아닌가!!
“어, 어차피 약속은 내일 밤이고……. 내일 얘기하면…….”
“그동안 자작에게 다른 약속이라도 생기면?”
“야, 약속? 그러면 어쩔 수 없죠 뭐…….”
엘릭이 따로 약속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이 곳에 와서 엘릭은 그다지 밖으로 나다니지도 않고, 딱히 루페닌 왕국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고작 하루 사이에 약속이 생길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백작은 칫, 하며 일부러 말 끝을 길게 늘여 말했다.
“자작만 왕따시키는 거에요? 너무한데요, 공작님.”
“왕따시키는 게 아니라 약속이 있다면 어쩔 수 없…….”
당연하겠지만, 짜증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깜짝 놀랐다.
“힉!”
“아까부터 남의 방문 앞에서……. 용건이 있으면 노크를 하고 들어와서 말씀하시죠, 공작님.”
엘릭이다!!! 엘릭, 진짜 실물 엘릭이다!
나는 당황해서 속으로 외쳤다. 아니 잠시만. 실물 엘릭이 있는 건 당연하잖아? 여긴 엘릭 방문 앞이니까.
나는 무엇을 하러 왔는지 드디어 기억해내고는 엘릭에게 말했다.
“여, 여긴 무슨 일이야?”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공작님.”
그 공작님이라는 호칭 좀 딱딱 끊어서 발음하지 않으면 안 되나? 무섭잖아. 나는 옆의 라키아네 백작을 힐끔 보았다. 아, 백작이 옆에 있으니까 반말을 못 하는 거구나. 하긴, 그는 사교계의 그 누구 앞에서도 나와 친하게 보이는 것이 싫겠지.
“그게 다름이 아니라……, 무사히 여기까지 도착한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내일 저녁에 다 같이 한잔 하러 갈 건데 혹시 시간이 나면 같이 가지 않……, 을……, ……까나……?”
거, 거절하겠지? 왜냐면 아직 그 정도까지 친해지지는 않았는걸! 내가 조마조마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엘릭은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알겠습니다. 시간 비워 두지요.”
뭐, 거절할 줄은 이미 알았으니까 어쩔 수 없지……. 거절이 아니잖아?! 내가 그를 다시 쳐다보자 그는 뭘 보냐는 듯 내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 강렬한 시선에 맞붙지 못하고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으응, 시간 내줘서 고마워.”
거의 도망치듯이 그 앞을 탈출해 온 나는 휴 하고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쉬었다. 엘릭에게 꾸벅 인사하고 천천히 걸어온 라키아네 백작은 왜 그렇게 달아나듯 자리를 피했냐며 웃음기 어린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을 피하며 재빨리 내 방으로 들어왔다.
“저를……, 안아 주세요!”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나온 직후 젊은 미남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그건 행복일까 난감일까? 음식을 잘 가리지 않는 나로서는 당연히 행복일 터였다. 하지만 갑자기 왜? 나는 당혹감보다 궁금증이 먼저 생겼다.
멜은 모래색이 섞인 회색빛 머리카락이 피부색보다 밝은 색으로 느껴질 정도로 목덜미까지 완전히 토마토처럼 물들어서는 카펫 위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나에게 안아달라고 외친 것이다. 나는 머리를 말리다 말고 샤워 가운 째로 침대에 걸터앉으며 그에게 영문을 물었다.
“저, 그 때……, 너무 부끄러워서 제대로 말을 못했지만……. 그치만 제가 그 날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아직 한참 어린 루시나가, 그……, 좀 더 힘들게……, ……하게 되는……, 것은…….”
“흐응?”
나는 그의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억지로 좀 더 말을 시키려고 잘 못 알아들은 척 했다.
“그러니까……, ……저어……, 루시나는 아직 어리니까 제가 대신 봉사하게 해 주세요!!”
힘겹게 겨우 겨우 말을 잇다 못해 결국 멜은 눈을 꼭 감고 소리쳐버렸다. 루시나는 침대 위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멜을 바라보았다. 나는 쿡쿡 웃으며 멜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루시나에게 손대지 않았는걸. 네 말대로 아직 어리잖아.”
멜은 흠칫하며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다 큰 성인 남성 주제에 그런 표정이라니……. 생각보다 자극적이다.
"그래도 하고 싶어?"
"……."
그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무슨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는지 깨닫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도 멜은 수줍은 얼굴로 한 번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럼 네 입으로 분명히 말해 볼래? 나는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네가 나한테 봉사하고 싶다면 하게 해 달라고 똑바로 내 앞에서 말해 봐."
"……으음, ……하, 하고 시, 싶……."
나는 침대에 팔꿈치를 괴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그리고 얄밉도록 여유 넘치는 어조로 루시나를 꼬옥 껴안고 그에게 명령했다.
"들리도록 말 안 하면 하게 안 해줄 거야."
내 말에 그는 흠칫하더니,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내 발목 앞으로 기어와 후들거리는 목소리로 작게 외쳤다.
"저, ……저, 저어……."
"으응?"
좀 더 크게 말해 보라고. 나는 귀를 살짝 기울여 그의 다음 말에 주목했다. 그러나 바닥까지 용기를 긁어모은 멜의 다음 도전은 무척이나 큰 소리가 되어 나왔다. 예상보다 더.
(신고당해서 노블 중략)
…….
그날 밤은 정말 간만에 맛본 영양분 덕분에 다음 날 아침 나는 오랜만에 허리를 쭉 펴며 생기 넘치는 얼굴로 일어날 수 있었다. 처음이라 그런지 의외로 멜은 꽤 거친 면이 있었다. 여전히 말로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루시나는 어느샌가 내 품 안에서 귀까지 빨갛게 물든 채 잠들어 있었다. 루시나를 조금 더 자게 내버려 두고 나는 방문을 열었다.
“……?”
쥬얼이 방문 앞에 쪼그려앉아 새빨개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여기 있는 거야? 어라? 잠은 제대로 잔 거야? 언제부터 있었어?”
쥬얼은 후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고개를 억지로 끄덕이고 자기 방으로 타타탁 달려갔다. 나는 어제부터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는 거지? 뭔가 목적이라도 있는 건가……?
========== 작품 후기 ==========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