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사신 파티 결성 -->
“키스해 버린다.”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릭을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지. 죽이겠다? 잎맥 따라 잎을 분리해 주마? 꽃을 똑 하고 따버리겠다? 땅에서 뽑아낸 다음 잔뿌리를 하나하나 뜯어내 버린다? 으윽, 잔인해!
하지만 내가 들은 말은 조금 다른 어감인 것 같은데? 평소 그의 말투와 달리 위협하는 듯한 강조점이 없었다. 엘릭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는 무표정이었다.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엘릭의 반응은 없었다.
……아아, 농담이었구나.
나는 농담 하나에 그렇게나 긴장해서 가슴을 졸인 나 자신에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엘릭은 왜 또 안 하던 짓을 하고 난리야. 깜짝 놀랐잖아. 생각해 보니 내 꼴이 의외로 우스워서 나는 그대로 하하하 웃어버렸다. 엘릭은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으잉? 갑자기 화난 것 같다?
설마 정말 화난 건가? 내가 뭔가 잘못이라도 했나? 설마 웃는 타이밍이 틀린 건가?! 내가 다시 긴장타고 있는데 엘릭은 난간을 화풀이겸 탕 치고는 열받는 것을 억지로 참는 것처럼 카펫을 발로 꾹꾹 누르며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걸어가버렸다.
“……아…….”
뭐가 문제였던 거지? 정말 모르겠네.
***
"공작님께서 오늘 밤에 둘 다 침실로 데려오라고……."
루시나는 자신을 부르는 멜의 말에 갑자기 얼굴의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하지만 루시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마 괜찮은 주인일 것이다. 멜 씨도 굉장히 좋은 주인님이라고 말씀하셨고.
하지만 지금까지처럼은 살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에 루시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옆의 검은 피부와 검은 머리를 가진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지 않았다. 낮에는 멜이 시종 일을 하기 때문에 계속 단 둘만 방 안에 머물렀다. 그동안 몇 번이고 무료함에 못 이겨 소년에게 말을 걸었지만 둘은 그다지 공통된 화제가 없었고 그 소년은 결코 자신의 이야기는 하려 들지 않았으므로 결국 어느샌가 루시나 혼자 떠드는 꼴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멜은 둘의 반응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리다가 네리아의 재촉에 정신을 차리고 루시나 먼저 욕실에 밀어넣었다.
"자, 일단 옷 갈아입기 전에 목욕부터 하자.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깨끗하게 씻어야 해."
"이제부터 머리손질도 치장도 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 없어요! 제가 같이 들어가서 목욕을 도울 테니 둘 다 한번에 씻기세요."
네리아의 말에 지금껏 아무 반응이 없던 흑발 소년은 흠칫했다. 자신의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았다. 멜이 어떻게든 네리아에게 설명하려고 해 봤지만, 애초에 노예로 팔려온 것은 그들이었다. 부탁이 통할 리 없었다.
"네리아 님, 이 애는 누군가가 자기 몸을 보는 걸 굉장히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최우선은 주인님이라구요. 게다가 그런 응석이 통할 입장이 아니잖아요? 주인님을 계속 기다리게 할 셈이에요?"
확실히 노예 입장인 이상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입장이니. 하지만 조용하던 흑발의 소년은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는지 네리아에게 주장했다.
"나는 남에게 몸을 보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만에 팔려왔어요! 이제 와서 주인……, 님 이외의 타인에게 몸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 그건 주인님께 물어봐도 좋아요."
실제로 시아가 그를 만골드에 산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고 다른 이유였지만, 흑발 소년은 지금 이 상황만 벗어난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네리아는 소년이 저렇게나 당당히 주장하는 걸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갈아입을 옷을 건네주었다.
"당신은 머리가 더 기니까 머리를 말리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먼저 씻고 나오세요."
안 그래도 매일 저녁 목욕한데다가 그간 내내 방에만 있었으니 지저분할 리는 없겠지만 흑발의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옷을 다 갈아입고 물기에 반쯤 젖은 채 나온 흑발의 소년을 붙들고 머리를 말린 후 손톱을 짧고 매끈하게 다듬었다. 시아에게서 딱히 명령이 내려온 것은 아니지만 네리아는 그 두 노예가 시아의 밤 장난감이 될 거라고 당연히 믿고 있었다. 그래서 주인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세세한 부분까지 가르치고 세팅해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손톱과 발톱은 늘 짧게 깎으세요. 주인님의 몸에 절대 상처가 생기면 안 돼요. 가장자리를 다듬는 과정은 가위, 니퍼, 줄, 오일 순서에요. 여기서는 시종들이 전부 해 주겠지만 혼자서 하는 방법도 알아두세요. 사람이 모자랄 때도 있으니까.
네리아의 설명은 멜과 달리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 노골적이라 루시나의 얼굴은 점점 더 새하얘졌다.
"불필요한 털은 뽑아서 없애세요. 수염도 포함해서. 당신들은 아직 어리니까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지만."
다른 하녀에게 둘의 머리손질을 맡긴 네리아는 라벤더 향수를 꺼냈다.
"주인님은 강한 향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은은하게 나는 라벤더와 장미 향은 좋아하시거든요. 목욕 직후 한 방울이에요. 절대 그 이상 뿌리면 안 돼요. 또 여러 가지 향이 섞인 향수도 피하세요."
잠자코 듣고 있던 흑발 소년은 거의 푸르스름하게 질린 루시나의 뺨을 보고 네리아에게 물었다. 아마 이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하인이 네리아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 주인님이란 분 말인데, 설마 우리 둘을 하룻밤에 다 상대할 작정인가요?"
"그건 그 분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네리아라는 시녀는 지위가 높은 만큼 주인께 무척이나 충성스러운 것 같았다. 네리아는 둘의 기본적인 단장이 끝나자마자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 모습을 본 멜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자신이 데려가겠다며 루시나의 손을 붙잡았다.
루시나는 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아까부터 무언가에 대해 쭉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잠시 뭔가를 떠올리다가 금세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고개를 휙휙 젓고는 다시 심각한 목소리로 ‘안 되겠지…….’라고 중얼거리거나 뭔지는 몰라도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멜은 공작님께서 머물고 계신다는 방으로 들어가 침실 방문을 두드렸다.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장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공작이라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게 아니었을까? 루시나는 얼결에 멜의 손에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멜이 밖에서 문을 닫는 소리가 뒤로 들려왔다…….
========== 작품 후기 ==========
정말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곳에서 끊지 않는 건데 말입니다..
키스따위 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