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사신 파티 결성 -->
나는 고급 미술품이나 입지 않을 옷을 한 방 가득 모으는 흔한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취미가 없었다. 기껏 돈을 쓰는 곳이라면 과일 정도일까.
그러니 이번에 천 골드 정도 썼다고 해서 딱히 과소비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안 쓰던 돈을 한번에 많이 쓰니 손이 덜덜 떨린다.
“공작님, 공작님! 저거 봐요! 괜찮지 않아요?”
라키아네 백작은 쿡쿡 웃으며 나를 불렀다. 그녀가 그렇게 재미있어하며 불렀을 정도로 이번의 노예는 특이한 상황이었다. 노예 판매자가 더 비싸게 팔기 위해 약을 먹여뒀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장치해 놨는지 모르겠지만 그 노예의 장난감은 정말 출발 직전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성노예를 판매할 때 종종 있는 확인작업이었다. 하지만 판매자가 일부러 그렇게 장치해뒀을 정도로 그 남자의 것은 평균보다 더 컸다. 반대로 다른 부분에서는 아름다운 노예에 비해 조금 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에 일부러 거길 보란 듯이 세워놨던 걸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같았는데, 공식적인 경매인 만큼 아마 약보다는 최면을 건 것 같았다.
그 작업이 어느 정도의 효과는 있어 귀족 여자들과 일부 남자들 사이에서 낙찰 경쟁이 벌어졌지만 나는 그냥 그렇다는 듯 시큰둥했다.
라키아네 백작 역시 동감하는 눈치였다.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뭘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직 크기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바보일 뿐이에요.”
“그러게요. 저 정도야 어차피 널리고 널린 사이즈기도 하고.”
“……?”
라키아네 백작의 핀잔에 마란 후작 역시 동감했다. 나는 깜짝 놀라 후작을 쳐다보았다. 후작은 저 정도쯤 된다는 말일까? 아니면 허세? 확실히 저건 크기가 컸다. 유렌보다는 조금 작으려나.
내 시선을 느끼고 나에게 살포시 눈웃음을 준 후작은 다시 그 남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세이시아는 어때요? 저만한 크기는?”
“에……, 뭐어, 그럭저럭은.”
맛있어 보이지만 그다지 먹고 싶지는 않았다. 비슷한 사이즈에 얼굴은 잘생긴 세르를 상상했기 때문일까. 당연하겠지만 세르가 더 낫다. 그 남자 노예는 어떤 갈색 망토의 참가자에게 낙찰되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경매는 계속 이어졌고, 오늘은 날이 아닌지 내 마음에 드는 노예는 아직까지 아까의 그 소년 하나밖에 건질 수 없었다.
“루페닌에서도 살 수 있으니 너무 여기서 많이 구매하진 않아도 돼요.”
라키아네 백작은 하품을 하며 슬슬 경매가 끝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야말로 괜찮은 물품이 나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원래 경매장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최후에 등장하기 마련이다.
“……어라?"
나는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았다. 단 위에 올라온 것은 드물게도 검은 천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저래서야 속을 확인하기 힘들잖아. 나는 진행인들이 곧 그 노예의 전신을 가린 천을 벗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매 진행자는 노예의 얼굴도 확인시켜주지 않은 채 경매 시작가를 먼저 외쳤다.
"백 골드, 이번의 물품은 백 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비싸다구요? 노예 하나에 백 골드?? 아니,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백 골드!? 사기 아냐?? 십 골드가 아니라?
나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라키아네 여백작의 말에 동감했다. 지금까지 노예 경매 시작가는 삼 골드에서 십 골드 사이였다. 아까 내가 낙찰받은 최고급품도 고작 십 골드부터 시작해서 950골드에 끝났다. 결코 싼 가격은 아니다.
백 골드부터 시작한다면 예상 낙찰가는 아마도 천오백에서 이천 골드 사이일 것이다. 아까도 천 골드에 낙찰받고 나는 바가지 쓴 기분이었는데, 이번 것은 더 비싸잖아.
"자, 경매를 시작합니다!!"
진행자의 말과 동시에 검은 천이 노예의 머리에서 벗겨져 나왔다. 순간 나는 그 노예가 아직도 검은 색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그는 생각대로 파릇파릇하고 아주 아름다운 어린 소년이었는데 의외로 구릿빛의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흔한 남부쪽 출신 노예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남부계 출신은 아니었다. 이목구비는 중부인과 다를 바 없다. 유렌처럼 혼혈인 것 같지도 않았다. 미묘하게 피부색이 달랐다. 그들이 햇볕에 타서 생기있는 어두운 피부색이라면 이 쪽은 창백한 어두움이었다. 갈색 톤이지만 핏기가 없다.
"케르타국의 불법 노예라구요? 아닙니다! 이래보여도 아크샤 왕국 출신의 확실한 노예 혈통 어미에게서 태어난 돌연변이입니다!! 이 머리색을 보십시오."
역시 내 예상대로 그것은 까만 두건이 아니라 실크처럼 윤기가 도는 새카만 머리털이었다. 설사 검정에 가까운 짙은 녹색이나 푸른색이라고 해도 지금 보이는 만큼 이 정도로 진한 흑발은 흔하지 않다. 게다가 그 소년의 머리카락은 밝은 무대조명에 비춰진 부분마저 새까맣다. 진짜 흑발이다. ……마치 엘릭의 머리색처럼 말이다.
"머리색 뿐 아닙니다. 자그마치 오늘 매물 중에서, 아니 역대 매물 중에서 손꼽힐 정도의 미색이 보이십니까? 결코 흔치 않은 기회입니다!"
그 말대로 얼굴 역시 어디 하나 빠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소녀로 착각해도 될 만큼. 미르와도 견줄 만한 미모였다. 그치만 나는 미르가 있으니까 그 얼굴에는 넘어가지 않아, 절대로.
피부색도 특이하고 희귀한 흑발인 만큼 사람들은 미친듯이 값을 올려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 골드에 가까이 가자 고액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는지 하나씩 빠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진행자는 다시 손짓했다.
천이 다시 떨어지고 그 소년의 매끈한 상체가 드러났다. 그 나이대 소년답지 않게 매우 균형잡힌 근육에 팔다리가 굉장히 길었다. 성인이 되면 아마 상당한 장신이 될 것이다.
"저기저기, 공작님은 흥미 없어요? 희귀한 타입은 그다지 안 끌리나보죠?"
사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흔히 보기 힘든 희귀한 노예였기 때문에 라키아네 백작은 난간을 잡고 가까이서 열심히 살펴보았다. 꼭 희귀해서 별로라기보단, 단지…….
생기가 없어보인달까,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달까. 뜨거운 남자를 좋아하는 내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 그 얼굴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내 마음에 직접적으로 와닿지는 않았다.
결국 이대로 끝나는 건가. 나는 흥미가 뚝 떨어져서 무심하게 아래를 쳐다보았다. 가격을 올리며 경쟁하는 사람들은 나와 반대로 그 소년에게 매료된 것 같았다. 그래, 그 진자줏빛의 눈동자…….
어딘가에서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전혀 매혹시키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을 흔들어놓을 수는 있는.
그러고 보니 그 소년, 어째서 그 드물다는 검은 머리일까?
나는 다시 한 번 그 소년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해 가격 경쟁을 벌이는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눈동자는 새파랗게 겁에 질려 있었다. 가격 경쟁이 어느정도 가라앉아갔다. 최고 천이백 골드까지 가격이 올랐다.
진행자 역시 이쯤에서 멈출 것을 예상했는지 그 소년의 나머지 옷을 벗겨내릴 손짓을 준비했다. 뭔가 더 대단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무심결에 그 소년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나는 마침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패널을 힘껏 치켜들며 외쳤다.
“잠깐!!”
사람들 앞에서 맛있는 미소년이 하체까지 홀랑 벗겨지기 직전에 내가 제지를 하자 구경꾼들은 불만스러워했고 진행자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나는 지갑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노란 종이를 꺼냈다.
“1만.”
“……!!”
1만이라니. 노예 한 마리에 자그마치 1만 골드라니. 현재 가격대가 천 골드를 겨우 넘는 상태인데 어떻게 일만이나 주고 사겠단 말이 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결심했다. 그를 데려갈 것이다. 최대한 멀쩡한 상태 그대로.
나는 혹시나 이 이상의 허튼 짓을 하지 못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그 상태 그대로일 경우에만 1만 골드에 사도록 하겠어.”
“무슨 변덕이에요, 공작님?”
백작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내 행동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나는 중요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아마도 무척이나 괜찮은 제물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따지면 양심적인 가격 아닌가. 나는 유렌에게 사준 검이 7만 5천 골드라는 것을 계속해서 되새김질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단순취미로 한번에 1만 골드나 결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진행자는 그 소년을 경매에 내보낸 원주인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당연히 웬 떡이냐 하고 원주인은 찬성하겠지. 혹시나 하고 진행자는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1만……, 1만 골드. 혹시나 이 중에서 1만 골드 이상을 부르실 분……, 계십니까?”
방금까지 그 소년을 낙찰받을 뻔한 어느 남자는 작게 욕설을 퍼부으며 외쳤다.
“마지막 부분까지 빠짐없이 보여준다면 그 이상을 부를지도 모르지!”
어차피 못 살 것 벗은 모습이라도 구경해 보자는 심보겠지. 하지만 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1만 골드나 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다. 애초에 1만 골드라니. 아예 상식을 벗어난 가격 아니던가.
“그런 짓을 했다간 아까도 말했다시피, 1만 골드나 내고 살 생각 없어. 나만 볼 수 있으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자존심이 꺾여버린 꽃은 흥미 없다. 그 이전에, 꺾여버렸다가는 쓸모가 없어진다.
========== 작품 후기 ==========
1. 덧글이 있다면 어찌 연참하지 않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