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73화 (173/226)

<-- 7. 사신 파티 결성 -->

엘릭은 한참을 나를 끌고 걷다가 마침내 사람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저녁 노을이 맺히는 시간, 어두컴컴한 골목은 왠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답답하다는 듯 안대를 신경질적으로 풀어버렸다. 곧 깜박이며 드러나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무방비한 상태로 본 나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함과 동시에 잎 끝이 오그라들 정도로 위축되었다.

아름다웠다. 그 때도 본 적이 있지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이 눈동자가 더 아름다운 것 같다. 같은 눈동자지만 기억 속의 것과 지금 보이는 것은 다르다. 마치……, 무언가에 홀릴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나는 기분만 느낄 뿐 실제로 황금빛 눈동자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당연한 것이다. 그 눈동자가 최면이나 매료의 힘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간에 내게는 절대 통하지 않는다. 내 유혹이 그의 육체에도 통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세계가 다른 것이다.

“안대 하고 있으면 답답해……?”

나는 주제에서 벗어난 얘길 했다. 그러나 엘릭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내 질문에는 대답해주었다.

“……익숙해져서 별로.”

엘릭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눈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날 밤에, 내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너는 페릴 마란과 같이 잤겠지?”

나는 흠칫했다. 민감한 얘기였다. 내게 있어서 민감할 리는 없지만 적어도 엘릭과 함께 나누고 싶은 적당한 얘기는 아니다. 그가 왜 그런 얘기를 묻는 건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라기보다 너 방해한 걸 자기 입으로 인정하고 있어? 왜지? 나를 괴롭히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

엘릭은 여전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대답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한순간 거짓으로 대답할까 했지만, 대체 무슨 거짓을 말해야 하는지, 그가 내 대답으로 무엇을 유추해낼지조차 나는 추측할 수 없기에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아마도.”

그는 한순간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움찔하는 반응을 보인 엘릭은 잠시 후 되물었다.

“아마도라는 말은, 어쩌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난을 좋아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맛만 보고 끝났을지도 모른다. 일 관계의 만남이 될 수 있는 사람과는 신중하다. 보통 사람이 식사시간에 공적인 업무를 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최근에 상황의 여의치 않아 지금 난 배고파서 죽을 것 같다던가, 노예 경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녀석이 나타나면 무조건 사먹을 작정이라던가 하는 개인적인 상황은 굳이 말할 필요 없을 것 같다. 엘릭도 내 저녁 메뉴같은 얘긴 별로 듣고 싶지 않을 거고.

“너랑 그 녀석은 무슨 관계지?”

“전에 르팔에 방문했을 때 우연히 만나서 내가 그에게 안내를 받았어. 그리고 조금 친해진 것 같아.”

아마 그가 나에게 품고 있는 것은 그렇고 그런 감정이겠지만.

“이름을 부르는 것도?”

아……, 이름? 그가 나에게 세이시아라고 부른 것 때문이구나. 마지막 날 밤에 어째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했었지. 나도 비공식적인 상황에서는 그를 페릴이라고 부르고.

"치, 친하면 이름 정도야 부를 수도 있지. 친해지고 싶으면 보통 이름 알려달라고 하잖아."

"……그럼……, 너는 왜 내 이름을 부르는데?"

엘릭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화난 건가? 얼굴을 붉힐 정도로? 그러고 보니 나는 첫 만남부터 엘릭을 이름으로 불러왔다. 처음에는 소꿉친구였다는 설정을 듣고 자연스럽게, 그 다음부터는 얼결에, 그리고 이제 와서 호칭을 바꾸기도 좀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그를 부르는 호칭은 엘릭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 이름을 부른 적 없고, 전에 말했던 위협에 가까운 '공작'이 그가 나를 칭한 단어의 전부였다.

이, 이, 이름을 막 부르는 게 기분나빴던 거구나! 그래서 날 죽이려고 한 거였어!!

나는 드디어 원인을 깨달았다. 그리고 수정했다.

"레, 레이몬드 자작!"

"……."

"……님?"

***

"경매장 특등석 티켓이라니, 역시 대장이시네요!"

라키아네 백작은 나를 한껏 치켜세워 주었지만, 정작 일회용 경매관 티켓을 구해온 것은 마란 후작이었다.

"하하, 괜찮지 않습니까? 비밀만 지켜주신다면 레이몬드 자작도 함께 가지 않으시겠어요?"

이종족이 아닌 일반 인간 노예를 외국에서 사 오는 행위는 그렇게 숨겨야 할 일은 아니다. 다만 노예제도가 금지된 우리 나라까지 노예를 사오고서도 계속 노예 취급 하면 문제가 되는 거지만. 그렇지만 미혼 남녀가 노예시장에 자주 드나든다는 것도 결코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기에 가급적 노예를 사는 귀족들은 사교계에 자신의 이름이 노예시장과 함께 올라오지 않도록 본명이나 얼굴을 감추고 노예를 구입하곤 한다.

마란 후작은 이제 유렌이나 미르 대신 엘릭을 꼬드기려고 해 보았지만 엘릭은 흥, 하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제 말없이 돌아온 이후로 계속 저 모양이다. 이제 이름 부르는 것도 그만뒀으니 아예 나랑은 관계를 끊어버리겠다는 건가…….

설마 지금까지 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따라다녔던 건 이름 부르는 걸 그만두게 하기 위한 기회를 잡기 위해서? 흐음, 일리는 있다. 그런 사소하면서도 신경쓰이는 내용은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좀 그럴 테고. 하지만 엘릭이 그렇게 소심한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나 역시 엘릭의 반응은 조금 고민이다. 그렇지만 엘릭이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니 될 대로 되라며 포기하고 말았다.

"그럼 루크, 오늘 밤에 우리랑 같이 경매장에 갈래?"

마란 후작은 이제 프쉘드리만 후작에게까지 동행을 권했다. 지금까지 일부러 남의 막사, 남의 마차 쪽으로 찾아오지 않으면 굳이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종종 우연히 마주칠 때조차 내 눈치를 보며 날 계속 피하던 프쉘드리만 후작은 마란 후작과 어릴 적 친구 사이라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내가 안 보는 뒤에서는 마란 후작과 대화-거의 언쟁에 가까운 것 같지만-를 자주 나누고 있었다.

갑작스런 제안을 받은 프쉘드리만 후작은 버벅거리며 얼굴이 새빨개진 채 나를 힐끔 보더니, 마란 후작에게 작게 소리질렀다.

"돼, 돼, 됐어!! 필요없어!!"

"그래? 아쉽네. 그럼 우리끼리 갈게."

프쉘드리만 후작은 마란 후작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포기하자 당황한 눈치였다. 왜 두 번은 안 물어봐? 그런 표정으로 마란 후작을 바라보았지만 마란 후작은 너무나 깔끔하게 거절을 받아들였다.

프쉘드리만 후작이 안절부절 못하는 걸 재밌어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는 꽤 악우였다.

우리가 지금부터 갈 곳은 적당한 신분 없이는 못 들어가는 경매장이니 복장도 어느정도 예의를 갖춰야겠지. 타지에서 드레스 차림을 하는 것은 번거롭지만,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마란 후작이 지부에서 마련해 주었기에 비교적 편하게 드레스를 입고 경매장 앞까지 갈 수 있었다.

라키아네 백작은 녹색 가발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깃이 달린 가면을 손에 쥐었다. 나도 검은 드레스에 붉은 가면, 새하얀 가발로 머리카락을 감추었다. 마란 후작도 화려한 무늬가 있는 가면 분장을 하고 밤의 마케를 검은 마차로 가로질렀다.

유명한 경매였기 때문에 신분 확인 검사도 철저했다. 단지 패와 이용권만 보여주면 되는 거지만 혹시나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간단한 소지물과 복장을 눈으로 검사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은근히 식은땀이 흘렀다.

검사가 끝나고 이름 모를 건물의 지하로 들어간 우리는 비상 출구의 위치를 확인받은 후 자리로 안내받게 되었다. 시간이 아슬아슬해서인지 우리와 비슷한 검은 코트, 회색 드레스, 보랏빛의 커튼 모자를 뒤집어쓴 가면의 참가자들이 좌석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인기 경매라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불법이라 몰래 경매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이미지로 정치적 타격이 오면 곤란하기에 남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한밤중에 경매를 시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공식 보안 위원들도 곳곳에 보였다.

시작시간이 되고 경매가 시작하기 전 갖가지 소개말과 흥밋거리들이 무대 위에 나왔지만 나는 그다지 재미있게 볼 수는 없었다. 지루하고 진부하게까지 느껴지는 영화관의 광고 같았다. 마란 후작은 ‘진짜 불법 경매’에서는 저런 불필요한 도입부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불법인 인간, 이종족, 위험 물품을 경매 위주로 팔고 끝내는 것이다.

“앗, 이제 시작하나 봐요!”

라키아네 백작의 외침에 나는 곧장 눈을 무대 위로 두었다. 좋은 좌석이라 그런지 무대가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 작품 후기 ==========

정령은 마족과 기본적으로 잘 안 통합니다.

엘릭 한정 눈치없는 시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