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사신 파티 결성 -->
다행히 여기는 숲에서 조금 벗어난 곳이라 나뭇가지들에 빛이 가려지지 않아 달빛에 어렴풋이나마 모든 것의 윤곽이 비쳐 보였다. 아직은 별이 밝은 계절이라 다행이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불을 켜기도 전에, 혹은 불을 켜자마자 내가 있는 곳이 발각되어 버릴 것이다.
기사들 틈새로 가기엔 내가 방해가 될 수 있고, 누군가를 슬쩍 부르려니 이 난전 속에서 실력있는 기사가 어디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엘릭을 찾자니 엘릭에게서 내 목숨이 위험하다.
일단 시야가 트여도 마물이 당장 달려들 수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 싶어서 가장 높아 보이는 나무 밑둥을 향했다. 하지만 내가 막사를 나온 순간부터 위험 지대에 들어섰다는 것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간신히 싸움터를 피해 지나쳤다고 생각한 순간 뒤에서 서걱, 하고 고기가 썰리는 소리가 섬찟하게 들려왔다.
"……."
나는 걷던 것을 일순간 멈추었다.
"……뭐 하고 있어? 바깥보다 안이 더 안전하다고 말한 건 너였을 텐데!!"
그 목소리의 의미를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길고 탄탄한 팔이 내 몸을 안듯이 옭아왔다. 이질적인 혈향이 묻어나오는 팔이다. 그리고 마물의 짙은 피냄새.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도 느낄 수 없었던 걸로 보아 그는 엘릭이었다.
……엘릭?
엘릭의 팔이란 이런 느낌이구나. 전에도 이 팔에 협박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그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억세고 단단해서 위협적으로만 느꼈던 신체의 일부가 나를 보호하고 있을 때는 이렇게나 부드러운 느낌이라니, 정말 신기했다.
그런데 정말로 방금 마물에게서 날 지킨 거야!? 마물에게 나를 찢어서 던져주는 것이 아니고? 모르긴 몰라도 방금 한 짓을 보면 적어도 그는 지금 날 죽일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의외로 여제의 명령을 중요시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라도 있나?
나는 정신을 차리고 희미한 달빛에 반사되는 그의 새까만 머리칼을 쳐다보았다. 보이진 않지만 그는 분명 빨리 내 말에나 대답하라는 듯 짐짓 압박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어, 그게, 우리가 불리한 거 같아서 내가 밖을 좀 밝힐까 하고……."
"됐어! 잘 보이니까!!"
댁이야 잘 보이겠지만 인간은 보통 이렇게 어두우면 전투능력이 떨어지거든요. 그나저나 엘릭의 팔에 이끌려 보호되는 사이 이마에 무언가가 자꾸 닿았다. 그의 목 쯤의 위치에 걸려있는 것이었다. 무심결에 만져보니 부드러운 가죽 재질의 안대였다. 설마 지금 안대를 안 하고 있는 건가?
단 한번 봤던 그의 아름다운 호박색 오른쪽 눈동자를 새삼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나는 눈을 바짝 떴지만 역시 이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자세히 본다는 것은 무리였다. 사람 형상이 보이긴 하지만 마치 실처럼 가늘고 희미하게 형태가 반사될 뿐이며 색을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성격은 몰라도 그 눈 하나만은 정말 아름다웠는데……. 엘릭이야 자기 눈을 싫어할진 몰라도.
그는 한쪽 눈을 가린 안대 때문에 전의 유렌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었다.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벗고 싸울 생각인 것 같았다. 불빛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일지도. 그는 오드아이인 자기 눈 색을 들키는 것이 싫어서 안대를 하고 다니니까 절대 남에게 발각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 없이는 안대를 벗지 않는다.
"내가 다 처리할 테니 신경 꺼."
"혼자서? 이렇게 많이??"
"한다면 해!!"
한다고 우기니 어쩌겠어. 엘릭은 내게 소리치는 동안 소리를 듣고 달려든 마물 셋을 검 한번에 해치워버렸다. 절대 그 칼솜씨가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다.
나, 난 방해될 거 같으니 어디 구석에 결계치고 숨어있어야지. 살짝 몸을 빼려는데 엘릭이 내 어깨를 조금 더 꽉 잡고 자신에게로 잡아당겼다. 순간 두근 하고 잎 안쪽에 물기가 맺혔다. 왜, ……왜 그러는 거지?
"이제 와서 다른 덴 더 위험하니까 여기 그대로 있어!"
그,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꼭 안을 것 까지야 있나. 지키는 입장에서 보면 사방에서 적이 덮쳐올지 모르니 품 안에 넣는 편이 가장 안전하겠지만, 그 상대가 엘릭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말 날 지키려고 이러는 게 맞는 것인지 아니면 방심했다가 뒤통수를 칠 생각인지 불안불안한 느낌이다. 하지만 정 죽일 생각이었다면 처음에 그대로 뒀겠지. 일단은 그를 믿고 얌전히 있어보기로 했다.
내 등이 완전히 그의 허리에 밀착될 정도로 엘릭은 나를 안듯이 강하게 붙잡았다. 격하게 팔을 휘두르다 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 때문에 검으로 베는 동작 하나하나를 할 때마다 강하게 요동치는 근육의 움직임이 내 등에 그대로 느껴졌다. 팔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의 팔에 안기는 것은 익숙하다. 유렌이나 미르였다면 자연스럽게 그대로 팔에 감겨들어 흐느적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대가 엘릭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보면 굉장히 어색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견딜 수가 없어 어깨를 꼭 움츠렸다. 내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자 엘릭은 내가 무서워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더 세게 안으며 종종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투가 평소와 달리 억지로 대답하라는 압력이나 위협을 섞지 않아서 나는 더더욱이나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그의 말에 선뜻 정신이 들었다. 고함 소리, 기사들의 검 휘두르는 소리, 물건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시체와 충돌하는 소리. 수많은 소리들의 안에서 그냥 눈을 감고 엘릭이 그 말대로 전부 처리하기만을 기다렸다.
마물의 공격이 잦아든지는 한참 되었다. 이젠 어둠과 고요함 속에서 그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엘릭은 아직이라고 말했다. 그의 피부가 긴장하고 있는 것은 알 수 있다.
"몇 마리가 남아있을지도."
그는 피아노 건반 가장 왼쪽 부분처럼 낮고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다. 마물의 기척은 마족인 엘릭이 가장 잘 알 것이다. 하지만 그 엘릭조차도 확신하지 못할 정도라면 아예 다 없어진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혹시나는 혹시나일 뿐이다. 지금까지 기다려 놓고 마지막 순간에 뛰쳐나갔다가 마물에게 찢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기사들 역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지 주변은 점차 고요해져만 갔다. 아마 엘릭의 지시가 없는 탓이 가장 큰 것 같았지만.
엘릭이 갑자기 내 허리를 꾹 끌어안자 나는 놀랐지만, 곧 있을지 모를 위험을 대비해 언제든 뛰어나갈 수 있게 준비하는 것 같았다. 그 상태로 5분, 10분, 15분…….
20분이 넘어가자 슬슬 엘릭의 지시가 없음에 이상함을 느낀 몇몇 기사들이 작은 소리로 같은 편의 무사함과 마물의 물러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엘릭은 그제서야 내게서 손을 놓았다. 남자를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가 엘릭의 손이 주는 압박감이 사라지자 묘한 허전함이 느껴졌다.
엘릭은 재빨리 안대를 단단히 매고 큰 소리로 기사들에게 지시를 시작했다.
"불을 켜고 적이 물러갔는지 확인하도록!"
========== 작품 후기 ==========
싸울 수는 잇겠지만 원래 꽃은 싸우지 않아염.
게다가 농장에서 자란 식물이라 원래 잘 싸우면 그게 이상한 설정이고…….
그래도 아무도 안 볼 때는 능력껏 싸우겠죠 뭐.
오늘은 조아라에서 노블레스 하루 무료일로 정했다는데, 소설이 아직 노블부분이 아니니 저는 의미가 없네요 ㅠ 빨리 써서 몇가지 서비스신 넣으려 했는데 한참 더 써야하니;
몰아보시려고 아직 안보신 분만 그 부분 봐두세요... 라고 할려고 했는데 그만 깜박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이 시간에 올리네옄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