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68화 (168/226)

<-- 7. 사신 파티 결성 -->

"밖에서?"

나는 하얀 외투를 주섬주섬 입고 막사의 커튼을 걷었다. 마란 후작은 내게 아직 할 말이 남아있는 듯 했다. 리더에게의 사안일까, 개인적인 일일까. 아무래도 전자의 탈을 쓴 후자인 듯 하다.

그는 이번 사신행에 대해 몇 마디를 맛보기로 늘어놓더니 어느새 슬그머니 내 개인 막사에 대해 주제를 옮겼다. 겉말이야 부드럽고 신사적이었지만 결론은 안에 들어가 봐도 되냐는 뜻이다. 유렌이나 미르도 없어 외로웠으니 별로 거절할 이유는 없다. 전에 시험삼아 눈으로 관찰한 결과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리스피아 효과였지만.

안으로 불러들여도…….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고민을 한껏 즐기며 그와 대화하고 있을 때, 익숙치 않은 목소리가 우리 옆에서 날카롭게 들렸다.

"공작, 그리고 후작. 기사들의 개별 호위에 방해가 되니 각자의 막사 안에 들어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둘 다?"

차갑게 쏘아붙인 그 대사는 생각지도 못한 엘릭의 존댓말이었다. 우와, 나 엘릭이 존댓말 쓰는 거 처음 봐. 비록 얼음이 쨍쨍 울리듯 싸늘한 발언이었긴 하지만. 하긴 그도 기사고 인간이고(반이지만) 사회인인만큼 남의 앞에선 존댓말을 쓰는 것이 당연하겠지. 확실히 그건 그래……. 내 앞에선 계속 반말이었지만.

은근히 분하다.

엘릭은 밝은 푸른색의 왼쪽 눈으로 나와 마란 후작을 노려보듯 뻣뻣하게 응시했다. 조금도 굽히지 않은 시선이었다. 게다가 빨리 안 들어가냐는 눈치까지 주는 것 같았다. 아니, 잠깐만. 리더는 난데?

하지만 엘릭은 리더인 나와 부리더인 마란 후작과 별개로 여제께서 직접 지명해 팀에 넣은 고급인력으로 엄연히 기사들의 통솔자라는 높은 직위가 있다. 기사 관련으로는 나로서도 그에게 딱히 대놓고 뭐라 명령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마란 후작은 내가 이미 마음 속으로는 승낙한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엘릭에게 '오늘 후작은 나랑 같은 막사에서 잘 테니 그렇게 알고 기사들에게 전해두세요' 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마란 후작의 시선은 새까맣게 잊은 채 엘릭만 마주 노려보았다. 사실 기사고 뭐고 핑곗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잘 안다. 기사들이 순찰하는 것은 야숙하는 장소 일정 반경의 외곽이므로 굳이 위험한 곳으로 가지 않는 한은 자기 막사에서 자지 않아서 딱히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 그건 저번 사신행으로 겪어 알고 있다. 왜 날 방해하는 거야?

"저기, 공작님."

조심스러운 마란 후작의 부름에 엘릭은 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잔잔한 눈빛이지만 그 속에 위협을 섞어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란 후작은 의도를 알 수 없는 웃음으로 답했다. 내가 맹하니 엘릭만 바라보는 사이 남자들끼리의 눈짓 몇 번이 서로의 사이에 오간 것이다.

엘릭이 흠칫해선 마란 후작의 웃음에 대해 잠시 고민하는 동안 나는 엘릭의 앞에 가까이 다가갔다.

"내, 내가 뭘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마란 후작에겐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이듯 외치자 그는 눈을 내리깔고 나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내 일에 방해가 되니까."

"그깟 호위 아무려면 어때! 오늘 밤은 전혀 안 위험하다는 건 식물인 내가 제일 잘 알거든?"

엘릭은 마란 후작의 앞이라 그런지 대뜸 나를 노려보며 겁주지 않는 대신 후작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간결하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마물의 존재도?"

……그, 그건 확실히 나로서는 보지 않고 존재를 감지할 수 없지만, 적어도 큰 마물은 없다. 식물도 눈은 있다. 그런 큰 생물이 숲 안에 있다면 눈에 명확히 보이겠지. 식물이 없는 곳에 있거나, 존재가 눈에 띄지 않는 마물이라면 나도 느낄 수 없지만.

최소한 이 반경 안에는 위험한 생물이 없다. 그러나 마물이 숲 밖에서 숲 안으로 한밤중에 숨어들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는 차마 답변할 수가 없다. 내가 본 마물에 한해서는 그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확실히 넌 죽지는 않겠지. 하지만 다치지도 않을 것 같아?"

나는 가만히 말하는 엘릭의 위협에 숨을 죽였다. 다치기 싫으면 찌그러져 있으란 건가? 나쁜 놈. 난 이래봬도 식물의 왕이다. 마족 따위에게……, 따위에게……!

으윽.

나는 고개를 홱 돌리고 토박토박 걸어 내 막사 커튼을 젖힌 후 인사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닫힌 커튼 뒤로 그의 강렬한 시선이 맺히는 듯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졸지에 혼자 남겨진 마란 후작에 대해서는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였다. 정말로, 엘릭은 대체 왜 날 그렇게 싫어하는 걸까? 혹시 내가 세이시아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갑자기 불안감이 생겼다.

***

넝쿨째 굴러들어온 후작을 차버리고 밤새 뭔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에 이리저리 뒹굴다가 결국 나는 잠을 설치고 말았다. 역시 남자 없이는 편히 자는 게 무리인가. 잠자리도 불편하고 좁고 답답하다. 쿠션이 필요한데……. 싱싱한 젊은 남자, 그것도 채식을 즐기는 남자. 게다가 엘프면 더 좋고. 그치만 엘프는 없으니까 역시 멜이나 마란 후작을 오늘 밤에 꼬셔 볼까? 이른 아침 부스스한 얼굴로 막사를 나와 여섯 시의 태양빛을 받으며 이슬로 세수하던 나는 바로 근처에서 들리는 바스락 소리에 귀를 쫑긋했다.

무언가가 있는 소리는 나는데 기척은 없다. 설마 마물인가 하고 잠깐 긴장했다. 하지만 온 몸이 경직하기도 전에 그 생물이 바로 엘릭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뭐, 뭐야……. 깜짝 놀랐네.

그는 놀란 눈을 한 나를 힐끗 보았다. 깔끔한 제복 차림인 걸 보니 새벽 일찍 일어나서 순찰 중이었나 보다. 의외로 일을 엄청 열심히 하는구나. 그의 역할이 내 호위라서 하기 싫다며 대충대충거릴 줄 알았는데…….

하긴 그런 프로정신이 있었으니 젊은 나이에 출세를 했지.

나는 별 생각 없이 물끄러미 엘릭을 쳐다보다가, 마침 아무도 없자 원래의 성깔을 내보이며 나를 위협하는 엘릭의 매서운 눈초리에 그만 흠칫하고 말았다. 뭐, 뭐야! 왜 그렇게 날 싫어하는 건데?! 맨날 협박이야!!

엘릭은 칫, 하며 작게 내게 속삭였다.

"밤에는 잠이나 자. 쓸데없는 짓 말고."

"쓰, 쓸데없는 짓 아냐! 필요영양소 공급이라구!!"

나름대로 타당성 있어 보이는 내 변명에도 아랑곳않고 그는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알 게 뭐야? 내가 듣기 싫으니까 하지 마!!"

쫄아서 흠칫했다. 아니, 근데 잠깐만. 듣기 싫으니까, 라고?

엘릭은 이미 저만치 몸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오늘 밤엔 기필코 차선책으로 멜이라도 안고 자야겠다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마차는 건조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했다. 그 후 휴식 시간에 마차가 멈춘 순간 마란 후작과 마주쳤지만 후작은 '다음 번에는 끝까지' 하자는 암시를 주었다. 정말 능글맞은 사람이다.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날 저녁, 나는 멜을 호출했지만 멜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기만 하고, 도무지 나와 눈을 마주치려 들지 않았다. 정말 순박한 시골 청년이다. 아무래도 조금 더 키워야 할까. 밥상 차리는 데 시간이 걸리는 타입이었지만 향으로 유혹해서 억지로 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첫경험인 남자에게 그런 짓을 했다가 다음 날 아침 제대로 걷지 못한다던지 하는 후유증이라도 생기면 안되니까.

결국 멜을 그냥 돌려 보낸 나는 차선책으로 엘레스트라를 불러냈다.

그러나 식전이나 식후에 마시는 정도의 물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까지 편안한 밤을 보낼 수는 없었고, 그 다음 날 내 막사 앞에서 보초를 서던 엘릭에게 살해당할 뻔 했다. 듣기 싫단 게 이거였구나. 여제에게서 특별히 명령서를 받은 그는 나를 지키느라 내 근처에서 잠을 잤던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구!!

상금이라도 있어? 출세라도 시켜 주나? 아니면 단지 날 괴롭히려고? 정말 마족이란 이해를 못하겠어어!!

========== 작품 후기 ==========

튕튕 튕튕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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