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67화 (167/226)

<-- 7. 사신 파티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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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축제는 이전부터 쭉 가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이런 식으로 출장일이 생겼을 때부터 계획이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출발 하루 전날 축제가 열리는데다 리스피아가 한번 더, 한번 더 하며 물고 늘어지는 것을 확실히 티타임까지만 하고 딱 끊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여운에 잠겨 엘프에 녹아버려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먹는 바람에 완전히 무산되어 버렸다. 크게 할 일도 없는 리더였지만 아예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르 덕분에 짐 챙기는 문제는 줄었다곤 해도 이것저것 남은 준비도 해야 하고 전달 사항도 있고, 결국 축제 대신에 나는 리스피아를 선택했다.

뭐, 약속이 있었던 후작과도 얘기가 오갔으니 그냥 내년에 참석해도 되지만 말야.

"어~디~가 제일 가고 싶어요?"

루페닌 왕국으로 향하는 도중. 마차 안에서 라키아네 여백작은 귀족을 위해 뽑혀 나온 관광 가이드 책자를 이것저것 짚어가며 체크 표시를 했다. 나는 어젯밤 한숨도 못 잤기 때문에 정신이 흐릿했다.

출발부터 굳이 자기 마차 비워놓고 나한테 올 필요는…….

이미 영양보충은 충분하므로 잠자지 않아도 되지만 육체의 휴식은 여전히 필요하다. 가만히 흙에 발을 묻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나는 신을 벗고 남에겐 보이지 않는 흙의 정령을 발에다 돌돌 감아놓은 상태라 저절로 휴식 모드로 들어가 말수가 적어졌다.

하지만 라키아네 백작은 여행에 꽤 들뜬 듯 반응이 적은 나임에도 아랑곳않고 만족스럽게 떠들었다.

"마케의 보석경매는 온갖 희귀한 보석들이 많이 나온대요. 뜻밖의 귀중품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 하지만 날짜가 아슬아슬한데. 그렇지, 노예 경매는 참석할 수 있겠어요! 물론 변장 정도는 해야겠지만 우리들이 도착하는 시기가 딱 노예 경매 시기와 맞아떨어지니까 하룻밤 정도만 시간을 내면……."

"엘프도 살 수 있나요?"

노예 경매 하니까 드디어 생각났다.

리스피아는 제국에 남고 나는 떠나야 한다. 리스피아 말로는 내 출장이 끝날 때까지 제국에서 기다리겠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영 같이 살 수는 없다. 애초 시작이 엔조이였듯 리스피아는 리스피아의 일, 내게는 내 일이 있다. 하지만 다른 엘프라면 얘기가 다르지. 개중에는 내 연인이 되겠다고 하는 엘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엘프 연인이라면 최소 일이백년은 함께 있을 수 있겠지? 나는 꽃이다. 그것도 여왕이다. 꽃의 여왕. 타종족보다 꽃에 약한 엘프 한둘 홀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벌써부터 엘프 없이는 안될 것 같아…….'

그 코코넛 밀크 같은 엘프즙에 중독된 것 같다. 엘프 서너 송이쯤은 사육해도 전부 먹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우선 엘프를 찾는 게 급선무. 이번의 엘프는 귀부터 잘근잘근 먹어버려주겠어. 으응, 기대돼♥

백작은 갑자기 나에게서 엘프 얘기가 나오자 의아한 듯 대답했다.

"갑자기 웬 엘프를……? 아, 설마 공작님은 그 때의 엘프 전령이 마음에 드신 거에요? 마케의 이종족 노예 금지법은 굉장히 엄격해서 마케에서는 엘프를 사는 게 불가능하지만 루페닌 왕국에선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그것도 만에 하나의 확률로 운이 좋아야 하겠지만요."

"엘프는 인간보다 비싸겠죠?"

"남자 엘프는 최상급 인간 남자 노예의 30배정도, 여자 엘프는 상태에 따라 가격이 꽤 다르겠지만."

의외로 싸네? 만약 나라면 보통 인간 수컷과 리스피아를 비교했을 때 리스피아에게 3000배는 더 많은 점수를 줄 텐데.

내가 이해를 못하는 표정이자 라키아네 백작은 설명을 덧붙였다.

"제국에서는 엘프가 흔하지 않아서 보통 잘 모르시던데, 안 그래도 드문 엘프 중에서 성노로 사용되는 엘프는 매우 극소수에요. 수요의 대부분이 사실상 금지된 실험용이나 악취미인 박제 콜렉션 용이죠. 여자 엘프는 제압이 충분치 않다면 쉽게 자결하고, 남자 엘프 역시 비슷해요. 실험실행이나 네크로필리아에게 팔아넘길 수밖에. 게다가 여자 엘프와 달리 남자 엘프는 억지로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엑?"

"말 그대로, 원하지 않으면 아무리 자극을 주고 협박을 해도 발기가 안 된단 거죠. 인간과 달리 식물 성분이나 마법약에 내성이 있어서 최음제도 통하지 않고. 여자 엘프 또한 마찬가지라 인간 성노보다 성적인 면에서는 떨어지거든요."

역시 그런 건가……. 리스피아의 말 중에서도 그런 얘기가 있었지.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안 선다고.

하지만 해 봐야 알겠지. 엘프들이 지금까지의 리스피아와 비슷하다면 꼬시는 건 아마 매우 쉬울 것이다. 잎을 살랑살랑 흔들어서 엘프를 유혹해 아무도 없는 방에 가두고 넘어뜨리면 그걸로 끝! 만약 그럼에도 조금도 안 선다면 내 꽃생을 회의적으로 뒤돌아봐야 하리라.

"관상용으로라면 아예 못 구한다는 얘긴 아니지만, 그것조차 구하긴 쉽지 않을걸요? 어쩔 수 없으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요. 공작님은 엘프의 외모가 취향이신가본데 그런 비쩍 마른 남자는 거기도 별로 튼튼하지 않을 게 뻔하잖아요?"

아냐! 역시 대부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무, 물론 나도 처음엔 크기를 기대하기보단 단지 향과 맛을 기대했을 뿐이지만……. 그치만 한번 맛을 본 이상 절대 가만둘 수 없을 정도라고.

'정 안 되면 시간을 내서 엘프가 사는 곳에 한번 찾아가 볼까?'

식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사막만 아니라면 대체로 내가 갈 수 없는 곳은 거의 없다. 정령계로 한 번 돌아간 후에 엘프가 있는 숲 속으로 다시 나가면 금방이잖아. 조금 노골적인 헌팅같지만 그래도 루페닌 왕국에서 끝까지 엘프를 못 찾는다면 한 번 해 보는 거야!!

***

"잠깐 휴식합시다!"

선두에 선 마부의 휴식 명령이 떨어졌다. 내가 데려온 시종은 멜과 네리아. 그 중에서 내 말을 몰 마부는 멜이었지만 문제는 내가 일행 중 가장 선두에서 지휘해야 할 리더라는 것이다. 멜은 마부 경험만 조금 있는 시종일 뿐 전체적인 말들을 통괄할 정도로 뛰어난 숙련자는 아니었기에 내가 탄 마차 대신 뒤에서 짐마차를 몰고 있었다.

휴식하자는 말은 약 한시간동안 말을 쉬게 하고 물이나 여물을 먹이자는 의미였다. 보통 중간중간 있는 곁길에서 멈추겠지만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흔히 마케에서 하르아이나까지 가는 일반 통행로가 아니라 더 빠른 지름길이기에 말을 맬 수 있도록 말뚝이 박혀 있는 곁길은 매우 드물었다. 마부들은 말에게 물을 떠다주기 시작했다. 휴식 중에는 마차에서 내려 물을 마시거나 볼일을 봐도 된다. 거의 내리지 않고 시종을 불러 해결하지만 말이다. 지금 멈춘 곳은 숲길이었다. 깊은 숲이 아니라 잘 닦인 흙길이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기에 길 안내자 겸 마부는 난감하다는 듯 내게 말했다.

"곧 성문이 닫힐 시간입니다. 마침 날도 어두워지고 있으니 여기서 이대로 자리를 펼까요?"

지도를 보면 적어도 하루 정도는 더 숲길을 가야 한다. 하지만 더 어두워지면 잘 곳을 준비하는 것도 고역일 것이다. 들어서 알고 있지만 하르아이나의 수도에서 마케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사전 조사 때 일직선으로 쭉 가자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했다가 깨진 후 나는 상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길 중에서 가장 빠른 루트를 정했다. 유렌은 분명 직선로로 이주일만에 마케까지 갔다던데, 흥.

이 길은 꽤 빠른 만큼 험한 길이었다. 여제가 충분히 고급인력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위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마케에 도착할 때 까지는 매일 침대에서 자는 건 상상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이 중에서 이런 경험이 별로 없는 건 나 뿐이지? 나만 빼고 전부 기사 아니면 상인들, 그것도 아니면 숙련된 시종들 뿐이다. 여행을 밥 먹듯 해온 것이 틀림없으며 필요하다면 노숙도 한두 번 했을 리 없다.

나 역시 흙과 어울려 잔 적은 있지만 그냥 흙의 정령을 깔고 자거나, 사막에 표류하며 모래 위에서 뒹굴었을 뿐이니까…….

"오늘은 여기서 노숙합니다! 위험한 동물은 근처에 없으니까 안심하고 지시대로 자리를 준비해 주세요. 강은 동남쪽으로 300m정도 거리에 있으니 강에서 씻고 싶으면 따로 보고하고 가도록."

내 말에 시종들은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첫 리더로서의 사신행에 이런 하드한 루트를 선택한 순간부터 다들 나를 놀랍다는 듯 쳐다보았었다. 나로 따지자면 빨리 일을 끝내고 미르와 유렌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지만. 그리고 리스도.

잠자리가 제아무리 불편해 봐야 남자 위에 있으면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에 그렇게나 누누히 강조당했던 잠자리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사전 조사를 무척 철저히 하셨나봐요, 공작님. 진행이 괜찮은데요?"

내 뒤로 마란 후작이 살며시 다가오며 말했다. 뒤에서는 시종들이 임시 막사를 치느라 정신없다. 나는 후작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귀엽게 생겨서 밤엔 이끌려다니는 타입이 아닐까 했는데, 설마 의외로 리드하는 것도 능숙하다던가……?"

마란 후작의 말끝이 점점 낮아졌다. 나는 훗 하고 웃으며 그의 어깨를 스쳐지나갔다.

"글쎄요……."

다들 옹기종기 모여앉아 식사를 하는 것은 모험담 책에서야 종종 나오지만 귀족 여행에서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나는 막사 안에서 네리아가 가져다주는 요리를 먹으며 지도를 펴 놓고 내일 루트를 눈으로 훑었다. 사실 지도보다는 그냥 맨눈으로 관찰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지도는 거들 뿐.

당분간은 날씨도 괜찮고, 이 상태라면 3주반 정도에 산간 지역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 나는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지금 있는 낮은 숲이 아니라 골짜기에 가까운 깊은 산 속을 가리켰다. 이 곳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근처의 식물들이 필요 이상으로 싱싱하다. 광범위 가드닝을 취미로 즐기는 사람이 여기에 살 리는 없을 테고. 아마도……. 영양 가득한 인간의 핏물을 때 아니게 많이 머금었겠지.

동물은 내 소관이 아니므로 무슨 몬스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모른다. 대신 식물의 손상이 그다지 없는 것으로 볼 때 요즘 여러 나라에서 큰 이슈인 육식 몬스터의 급격한 증가나 난폭한 마물의 등장이 이 근처에서 있는 것 같다. 나야 안전하겠지. 그렇지만 나머지 사람들이 걱정이다. 아무리 엘릭이라고는 해도……, 혼자서 상대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걸 위해 기사 몇을 여제가 추가해 주긴 했지만, 혹시나의 상황이 되면?

위험 지방에는 보통 주민보호를 위해 병력을 파견하지만 그 쪽은 국경의 사이인데다가 불법 상인들이 이용하는 루트라 그런지 발견이 늦는 것 같다. 나는 고민하다가, 여제의 '쓸만한 기사들'을 믿고 이대로 돌진하기로 했다.

엘릭을 믿어보겠다고 결심한 순간, 막사의 문이 열리고 네리아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마란 후작님께서 밖에서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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