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63화 (163/226)

<-- 7. 사신 파티 결성 -->

어디로 답장을 보내란 걸까?

내 서류업무 보조를 맡고 있는 제인을 호출해서 주소가 적히지 않은 편지봉투를 보여주며 누구에게서 어떻게 받은 거냐고 물어보았다. 제인은 그 편지에 대해선 전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어쩌면 매일 들어오는 편지가 너무 많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편지를 들여오는 것은 제인뿐이 아니다. 다른 루트에서 편지를 담당하는 하인은 내 직속인 카딘이다.

하지만 매일 우편함과 전달처에서 우편물을 정리해 갖고 오는 카딘조차도 문제의 편지가 어떤 방식으로 들여지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대부분 무늬 없는 편지봉투니 그런 튀는 것이 섞여들어오면 바로 기억합니다. 제 쪽을 통해서 온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식 기관에서 온 것도 아니며 우편부를 통해 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거다. 다른 가문 등에서 전령이나 하인을 시켜 직접 배달시키는 사적인 편지 말이다. 그런 편지는 종종 상세한 주소가 쓰여 있지도 않으며 카딘이나 제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 내게로 오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펜을 들었다.

***

"흠?"

리스피아는 할 일을 끝내고 오던 중 빨간 색의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비교적 인적이 드문 뒷문의 한 쪽에 떨어져 있었는데 그는 최대한 빨리 달려가서 봉투를 주워들었다. 여왕님의 향이 배어 있었다.

"……?"

편지를 뒤집어 보았다. 봉투 뒤에는 '언제나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대에게'라고 특정 이름을 지정하지 않은, 혹은 오히려 특정 누군가를 딱 집어 말하는 듯한 표현이 쓰여 있었다. 리스피아는 혹시나 하며 편지를 열어보았다. 특별히 봉인되어 있지 않은 편지봉투 속에 든 것은 조금 짙은 오렌지 핑크의 작은 카드였다.

「오후 다섯 시의 티 타임에 정원으로 와주시지 않겠어요? -세이시아」

"……저를 초대하는 걸까요?"

만약 시아가 리스피아의 감시를 눈치챘다면 그렇겠지만, 전혀 눈치챈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막연하게 의사를 전달할 이유도 없다. 그냥 불러서 얘기하거나 정령을 통해 명령했겠지?

"아니면 누구한테 보내는 건가요?"

카드를 살랑살랑 흔들던 리스피아는 갑자기 팟 하고 중요한 사실이 생각났다. 누구한테 보낸 거면 뭐 어때. 편지는 주운 사람이 가지면 되는 거지.

이걸 구실로 한번 더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리스피아는 들뜬 기분이 되어 카드를 봉투 안에 고이 넣고 소중하게 품 속에 집어넣었다.

오후 4시 58분.

단정한 제복 차림으로 방금 끓인 찻물과 다과를 세팅한 카딘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렌은 티타임은 나만의 시간으로 남겨두려고 하지만 미르는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쭉 달라붙어서 같이 차를 마시며 감시하기 때문에 카딘이고 라르슈고 도무지 내게 눈길을 줄 수가 없었다. 간만에 미르가 어디론가 가버린 날이 오늘이다. 유렌이 일일히 내게 무언가 하기 전부터 미리 보고하는 대신 미르는 멋대로 기획하고 말없이 훌쩍 일을 저지르고 마지막에 그 완성품을 보여주며 칭찬을 원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하는지 요새 도무지 모르겠단 말야.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나가질 않나. 간만에 미르 없는 티타임이지만 오늘은 손님이 올지도 모르니까 카딘과 놀아줄 수는 없었다.

"손님이 찾아오면 이 쪽으로 안내해."

"……네."

카딘은 아쉬운 듯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다가 바로 눈 앞으로 휙 떨어지는 편지봉투를 보고 흠칫했다.

"……??"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와 함께 새싹처럼 연한 녹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깜박였다. 이 뜰에 가득한 식물과 같은 기운을 품고 있어 가까이 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에, 엘프닷! 키큰 백발의 엘프가 내 바로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 리스……피아?"

나는 그가 떨어뜨린 편지봉투를 주워올렸다. 내가 무명의 누군가에게 무작정 전달하기 위해 뒷뜰 입구에 두었던 초대 카드였다. 하인에게 전달되는 편지는 흔히 앞문보다 뒷문으로 자주 들어온다. 그 쪽이 하인들이 주로 오가는 출입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까지 해서 초대장을 놔뒀는데, 엘프가 주워오다니.

분명히 말해 그 편지를 내게 부친 사람은 엘프가 아니다. 엘프 특유의 달콤하고 생생한 향이 조금도 묻어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엘프가 만진 천이나 장신구에는 물로 씻어내지 않는 한 최소 사흘, 특히 흡수가 빠른 종이라면 일주일 이상은 향이 남는다. 보통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라면 알 수 있다. 리스피아와 전에 만나고 나서 사흘정도는 엘프 맛을 보고 싶어 안달했단 말이지.

하지만 그 편지에는 특유의 체취는 전혀 없이 그 압화의 향만 남아 있다. 체취가 약한 인간이 심지어 목욕 직후 쓴 편지일 것이다. 그 정도로 인간의 냄새 없이 화향만 남아있다.

"이게 길에 떨어져 있어서 주워 왔어요."

엘프는 상냥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편지를 옆으로 휙 치웠다. 그깟 편지고 뭐고 뭐 어때. 이 엘프는 생각지도 못했던 월척인걸.

붕어를 낚으러 갔다가 참돔을 낚아온 기분이다. 나는 엘프가 또 도망가버리기 전에 벌떡 일어나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가지 마!!"

다급한 듯이 들리는 내 외침에 리스피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갈 생각이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플로라……?"

내가 초 긴장한 것이 무색하도록 그는 담백한 표정이었다. 뭐야, 그동안 못 만나서 초조하기 그지없었던 건 나만이었던 거야? 그렇지만 그렇게 보기엔 리스피아의 시선도 적잖이 강렬했다. 뜨거운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는 집중해서 나를 보고 있었다. 기분좋은 시선이다.

"여기 있어, 명령이야!"

순간 나도 모르게 아랫사람을 대하듯 말이 나와버렸다. 나는 아차하고 초조하게 리스;피아의 반응을 쳐다보았다. 엘프는 흔히 내 아래의 아이들이라고 말해지지만, 명백한 내 권속은 아니다. 나는 식물의 왕이며, 엘프는 아무리 식물 맛이고 식물과 닮았어도 엄연한 동물류에 속한다. 그가 말을 안 들으면 어쩌지?

원래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기에 그냥 가 버리면 어쩌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리스피아는 순종적인 대답을 했다.

"가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있겠어요. 대신 그 동안은 계속 관찰하게 해 주세요."

관찰? 그냥 보게 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건가?

"응! 보게 해 줄게! 그러면 되는 거지?"

리스피아는 살며시 웃음지었다. 계약 성립이다.

나는 잡아둔 리스피아에게 우선 차를 권했다.

"홍차 마실래? 아니면 스피아차? 녹차?"

"그럼 녹차로."

"좋아, 선물받은 녹차 잎이 있으니까 그걸로 할게. 좋은 거랬어."

나는 다시 카딘을 불러 녹차를 내오도록 했다. 녹차는 엘프가 주로 마시는 차라서 제대로 우려내는 법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시렌느 영지의 도서관 사서와 아젤 본인정도밖에 녹차를 제대로 끓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카딘 역시 내가 녹차를 가끔이지만 마신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든 배워놓았기에 적당히는 할 줄 알긴 하지만 아젤님만큼의 실력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리스피아는 먼 곳에서 고향의 맛을 볼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드는지 남기지 않고 한 잔을 다 마셨다.

"세이지의 아들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좋은 맛이군요."

"세이지?"

다른 엘프의 이름일까?

"네, 세이지는 흑림 하이엘프들의 수장이에요. 나이 차는 조금 나지만, 그래도 저와는 어릴 때부터 꽤 친했지요. 세이지에겐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는 꽤 뛰어난 엘프에요. 차 끓이는 솜씨, 잎을 따는 솜씨, 그리고 요리며 사냥, 정령술, 씨앗 심기까지 못하는 게 없죠. 저와 달리 성격도 좋고 말이에요. 게다가 세이지의 아들은 엘프들 중에서 최고의……."

"내가 관심있는 건 지금 없는 엘프보다 내 눈앞에 있는 리스피아인걸."

"……."

아름답다. 엘프의 언어는 그 발음조차 맑고 부드러웠다. 멍하니 리스피아의 혀놀림을 바라보던 나는 그의 시선이 내가 아닌 찻물에 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의 관심을 다시 끌기 위해 자극적인 발언을 무심코 내뱉었다. 리스피아는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저……, 말인가요?"

자그마하게 리스피아는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럼 당연히 관심이 있으니까 이렇게 잡아둔 거지. 흥미도 없는데 왜 같이 다과를 하자고 했겠어? 게다가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내 정원에서.

"……."

그러고 보니 리스피아는 내 정원에 어떻게 들어왔지? 높은 담과 경비장치, 비행 마법 금제가 걸린 공중 결계 투성이인 내 가장 중요한 정원에.

"잠입은 엘프에게는 무척이나 쉬운 일이에요. 더군다나 이렇게 나무와 풀 투성이인 곳은."

그는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활짝 웃었다. 순간 주변이 새하얗게 변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처음 봤을 땐 겨울 호수만큼이나 차가운 표정이었던 엘프가 이렇게나 밝고 아름답게 웃을 수도 있구나. 그는 아주 기뻐 보였다. 내 발언이 적잖이 기분이 좋았나 보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으로."

순간 의자에서 일어난다 싶었더니 휙 하고 리스피아는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어리둥절해하며 벌떡 일어났을 때 위쪽에서 기척이 들렸다. 다과 테이블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던 큰 스피아나무의 위에서 새하얀 머리타래가 흘러내렸다.

가느다란 스피아 나무의 가지 끝에 매달려 리스피아는 작은 꽃봉오리 한 송이를 내 머리에 꽂아주었다. 그리고 후훗 하며 약간 수줍게 웃었다.

"봐요, 나무 꼭대기는 벌써 이렇게 꽃봉오리가 맺혀 있어요. 플로라 님께 바칠 장신구로서 허락을 받고 한 송이 가져왔어요."

나무 꼭대기까지 다녀왔어!? 게다가 지금은 손가락 몇 개로 몸을 전부 지탱하며 매달려 있었다. 그럼에도 산들바람에 살랑이는 머리칼 몇 가닥을 제외하면 리스피아의 몸은 흔들림이 없었다.

바로 작년즈음까지만 해도 실력 있는 정원사가 지배하던 이 정원은 영양상태가 좋아서인지 스피아 나무의 꼭대기는 굉장히 높았다. 거길 몇 초만에 다녀왔다고? 나무와 협상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고작 일이 초만에 이 복잡한 가지를 제치고 소리 없이 꼭대기에 도달했다는 건데…….

나는 사락, 하는 옷 스치는 소리 한 번으로 다시 제자리에 앉은 리스피아를 쳐다보았다. 엄청 빠르다! 게다가 소리도 없어.

"저기, 리스피아. 손 줘봐."

내 요구에 리스피아는 냉큼 두 손을 내밀었다. 아니, 하나면 돼. 그런데 손이 정말 예뻤다. 옅은 복숭아빛 살결에 꽃잎 물이 든 것처럼 발그레하게 물든 손끝, 가지런히 정돈된 손톱까지. 분명 길고 두께감도 있어서 여자같은 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충분히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유렌의 손이 보기보다 굉장히 보드랍다고 생각했는데, 100% 엘프의 손은 마치 비단으로 짠 것 같았다. 왜 굳은살이 안 생기는 거야? 방금처럼 한 손으로 체중을 전부 지탱했는데.

"이래보여도 꽤 오랫동안 저와 함께 해 온 손이거든요."

리스피아는 보란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손의 표면 감촉은 부드럽지만 힘을 준 손바닥은 놀랄 정도로 단단했다. 바늘로 찔러도 잘 안 들어갈 것 같았다. 신기하게 만지작거리자 리스피아는 뺨을 살포시 물들이며 대답했다.

"엘프는 인간과 달리 표면 조직이 매끌매끌하게 치밀해지면서 손이 단단해지거든요. 꼭 드래곤의 비늘 같죠?"

"……드래곤 만져본 적 없는데."

리스피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드래곤 키우고 계시잖아요, 둘이나."

아, 세르와 미르를 말하는 거구나. 엘프는 직감적으로 타인의 본질을 귀신같이 알아맞춘다던데 세르와 미르까지도 통찰한 모양이다. 그런데 어떻게 둘이나 키운다는 걸 잘 알지?

"그거야 매일 보고 있으니까요."

으음, 하긴 황궁에서 세르라면 매일 마주치겠네. 미르도 아마 훌쩍 사라져서 황궁 쪽으로 가는 것 같으니…….

내가 이해한 것과 리스피아가 말한 의미가 조금 많이 다른 것도 같았지만 나는 그러려니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