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사신 파티 결성 -->
***
"그럼 짐을 싸자~♪"
출발 일주일 전. 짐이야 시녀들이 전부 챙겨주겠지만 나는 전에 겪은 조난 덕분에 중요한 필수품은 직접 선별해 몸에 지니고 있는 편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언제나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백에 로션과 샴푸, 옷가지랑 구두를 집어넣다가 문득 멈추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방에 넣었던 것들을 다시 도로 빼낸 후 양손 가득 옷가지를 들고 옆에 있는 미르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미~르~!"
"무슨 일이야 시앙♥"
벌떡 문을 열고 생글생글 나를 맞이한 그는 곧장 내 몸을 들쳐안고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르의 방은 유렌의 방과 함께 내 방을 사이에 끼고 있었는데 당초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흰색과 회색을 베이스로 무척이나 세련되고 기능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미르는 쓸데없이 화려하기만 한 방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아니, 케르타 국왕 시절의 방은 굉장히 쓸모없고 사치스러운 장식 투성이었는데.
미르는 나른한 눈으로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국왕의 성격! 진짜 내 성격과는 다르지. 이젠 국왕도 뭣도 아니니까."
유희 중일 때의 역할에 맞춰 일부 취향이나 성격을 다르게 설정해 그에 맞춰 '연기'하는 일도 드래곤들 사이에서는 잦다고 한다.
"그럼 세르도?"
"글쎄. 그렇다고는 해도 원래 성격과 크게 차이가 나면 연기하기 어려우니까 대체로 큰 틀 안에서 비슷비슷한 편이야. 굳이 말하자면야 내가 수백년 전에 본 카이세르 님의 성격은 조금 무신경하고 냉랭한 편이었던 것 같아."
무신경하고 냉랭한 성격의 세르……. 상상이 잘 가질 않는다. 내가 아는 그는 매우 직설적이고 남의 속마음을 귀신같이 읽으며 필요할 때는 다정하고 나를 언제나 잘 감싸안아주는, 그런 어른스러운 이미지다. 그런 세르가 냉랭하게 변해버린다니……. 그건 싫다.
내 연인 중에 나이도 경험도 가장 많고 능력 역시 제일 강한 세르. 전부 속박했다고 생각했음에도 부족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더더욱 모든 것을 알고 전부를 붙들고 싶은데 지금으로서는 아직 무리다. 몇 년 알지 않았으니까. 아직 모르는 것도 많다. 그건 세르뿐 아니라 미르와 유렌 역시 마찬가지. 그런 불안한 느낌 반 기대 반으로 나는 미르를 쳐다보았다. 미르는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옷가지를 보더니 아, 하고 생각난 듯 외쳤다.
"짐 준비하고 있었어?"
"응. 같이 해."
"그래, 벌써 일주일 남았구나……."
미르는 새삼 놀랐다는 듯 다시 달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짐을 싸자는 내 말을 무시하고 나를 그의 무릎 위에 앉혔다.
"잠깐, 나 짐 싸러……!"
"……같이 있을 수 있는 게 고작 일주일……."
미르는 팔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리는 나를 다시 붙잡으며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 잠깐만, 고작 일주일이라니? 미르도 나랑 같이 루페닌으로 떠나는 거 아니었어?
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이 곳에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니, 난 여기서 할 일이 있어."
"에에엥?"
그건 또 무슨 소리래. 나는 틀림없이 미르가 나를 따라올 줄 알고 있었다. 그건 1더하기 1이 2인 것과 같을 정도로 당연하게 내가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나랑 같이 가지 않겠다고? 벌써 나한테서 독립할 셈?
그는 당혹스러워하는 나에게 웃어보였다.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으니까 이유는 묻지 말아줘."
나는 기이하게 어른스러운 미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임신 선언 같은 것만 아니면 된다. 그가 그렇게 결정할 정도면 꽤 중요한 일인 것이 틀림없다. 미르는 대신 탁상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주머니를 내 목에 달아주었다. 미르의 무한주머니다.
"이게 없으면 난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니까 주는 건 안되지만 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빌려주는 건 가능해. 시아도 열 수 있게 해 뒀어.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도 돼."
나는 그 주머니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만지작거렸다. 비닐 같은 독특한 감촉이다. 드래곤의 사치, 방수와 강화,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다. 그런 다중 마법 물품이라니,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미르."
"응?"
그는 고개를 살짝 내 쪽으로 기울여 나의 귀에 대고 작게 답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도 내가 함께 가 달라고 하면 어쩔 거야?"
"그 어떤 일도……."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시아의 부탁보다 중요하지는 않아. 같이 가자면 갈게. 안 그래도 가고 싶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미르의 무릎 위에서 나는 폴짝 뛰어내려와서 말했다. 나와의 여행을 포기할 정도라면 분명 중요한 일이겠지. 그러니까 하고 싶으면 해봐.
미르는 실실 웃으며 다시 내 허리를 휘어감고 그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얼결에 끌려들어간 내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으응~♡ 시아……!"
나는 하트를 흩뿌리는 미르의 아래에서 격렬하게 안기면서도 문득 고개를 들어 커튼이 쳐진 커다란 방 창문의 틈새를 쳐다보았다. 늘어진 하얀 커튼 틈으로 정원수의 녹색 잎사귀를 투과해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이 보였다. 그런 느낌…….
지금의 내 머릿속에는 미르 말고도 그 때 고작 한 번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 리스피아, 그 엘프가 일부 들어와서 도무지 지워지지 않은 채 머무르고 있었다. 백색에 가까운 은빛 긴 머리와 머리로는 떠오르지 않지만 몸으로 기억하는 나무 향기.
……그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
당연히 여왕님을 관찰하고 있지요.
'여.왕.님♥'
리스피아는 근처 숲의 천년목 위에 앉아 턱을 괴고 그 실낱같은 커튼 틈새로 보이는 시아의 행동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거 이거, 대낮부터 뭘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후후후. 그는 그렇게 웃으면서도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표정을 하고 있다.
꿈틀대는 듯 주름 투성이인 굵은 나무기둥의 모습이 마치 천년을 산 노인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천년목. 종종 전 대륙의 무성한 활엽수 숲에서 두어 그루 보이는 나무다. 비록 크게 자라는 천년목이라곤 해도 수백 년 이상 묵은 나무가 아닌 이상은 결코 사람 하나가 편히 올라탈 정도까지는 굵지 않다. 나뭇가지는 울퉁불퉁하고 제멋대로 뻗어 있는데다가 엄청나게 높이 솟아 있어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꼭대기에 손이 닿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 천년목의 맨 끄트머리 가지 위에서 거의 드러눕다시피 평지처럼 않아 있는 리스피아는 조금도 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쿠션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움직임이 매우 자연스럽다.
"응응, 저런 걸 하는 거구나……."
잘은 안 보이지만 무방비한 커튼 틈새로 둘이 무엇을 하는지 엿볼 수는 있다. 숲에서의 감시와 잠입만큼은 엘프를 따라갈 종족이 없다. 더군다나 살 만치 산 베테랑 엘프, 정착하지 않고 늘 나돌아다니며 실전과 수련을 통해 감각을 키워 온 방랑엘프 리스피아라면야 더더욱 기척 감추기에 뛰어날 수밖에 없다. 상대가 비록 드래곤이라고 해도 리스피아는 절대 들키지 않으며 대담하게 계속 쳐다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여왕님은 그의 위치를 단박에 알 수 있을 테지만 그녀는 조금도 리스피아가 지금 자신을 보고 있을 거란 의식은 하지 않고 있다. 생명이 가득한 숲에서 비슷한 식물성 생명력을 가진 엘프 한 마리를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발견할 확률은 높지 않다. 리스피아는 존재감 없는 엘프의 종족 특성을 이용해 마음껏 스토킹 중이었던 것이다.
"아, 저런 데까지 핥는 건가? 좋은 감촉일 것 같아~. 특히 저 목덜미……."
리스피아는 입술을 쪽 핥으며 창문 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일반인이 보기엔 그저 손톱보다 작은 저택, 깨알만한 창문정도겠지만 리스피아의 시력으로는 그렇고 그런 데까지 샅샅히 다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 저걸 할 땐 커튼을 치는 걸까? 햇볕이 들어와서 잘 보이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엘프는 낮에도 애정표현을 거리낌없이 하니까, 아니, 오히려 시력이 좋은 종족인 만큼 많은 것이 보이는 낮에 집중적으로 애정표현을 하기에 밤에만 애정표현이나 이런저런 일을 하는 인간종족들의 행동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낮에 하려면 밤처럼 어둡게 커튼을 쳐야 한다니. 이상하군.
파닥파닥 새의 날갯짓이 들려왔다. 리스피아는 얇은 편지가 발목에 묶인 매가 다가오자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매는 편지를 건네고 다시 옆의 나뭇가지에 앉았다. 편지의 첫줄을 읽은 리스피아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또 일입니까?"
어쩔 수 없잖아, 라는 듯 매는 깔끔 떠는 젊은 신사처럼 날개를 부리로 몇 번 다듬고 단정히 접은 후 고개를 저었다. 리스피아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 와서 플로라 님과 만난 것은 기쁩니다만 이래서야 여유를 제대로 즐길 수가 없겠군요."
매는 방금까지 즐기던 것은 여유가 아니고 뭐냐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리스피아는 성년이 된 직후부터 쭉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늘 나돌아다녔기에 엘프 마을의 일에도 거의 참가하지 않는다. 가끔은 부족 일을 도우라는 엘프 족장의 부탁으로 여기에 한 번쯤이라는 생각으로 심부름을 오긴 했지만 그 이상은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이지의 부탁……. 이라지만 너무하는군요. 제가 식물 이외에는 흥미 없다는 것을 알고 시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왕의 얼굴이고 뭐고 다 잊었다구요."
리스피아는 그렇게 불평하면서도 매에게 전해두라고 말한 후 천년목의 가장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바로 뛰어내렸다.
***
달맞이꽃이다. 은은한 향을 머금고 있는 얇은 달맞이꽃과 함께 편지가 툭 떨어졌다. 나는 몽롱해지는 향을 몇 번 들이키다 편지를 살며시 펼쳤다.
「달맞이꽃의 밤, 이유 없이 보고 싶은 발끝.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그 때와 똑같은 글씨체다. 나는 제비꽃 편지를 서랍 맨 윗칸에서 꺼내 두 글씨를 대조해 보았다. 낯간지러운 내용에 비해 깔끔하고 아름다운 글씨체. 정말 누가 보낸 걸까? 궁금해 돋아버릴 것만 같았다. 으으. 누구야, 누구!
나는 가만히 앉아 편지를 보낸 사람을 상상해보았다. 이토록 섬세한 글씨체는 틀림없이 길고 예쁜 손에서 나올 것이다. 글씨가 작지 않은 걸 보면 손도 작지 않다. 글자 모서리가 둥근 것을 보면 성격도 둥글둥글하고 친절한 사람이겠지? 줄 맞춰 고른 크기로 깔끔하게 쓰여진 글자들은 매우 단정한 성격을 의미할지도. 지금 깨달았는데 편지봉투가 둘 다 똑같은 모양으로 찢어져 있다. 일부러 뜯기 편하게 봉투 끝에 칼집을 내 놓은 것이다. 이 정도의 배려심과 꼼꼼함은 남자 중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설마 여자가 나한테 이런 러브레터삘 나는 편지를 보내진 않았겠지? 문장력이 대단하면서도 결코 제국에서 흔히 쓰는 직설적인 표현을 한 마디도 쓰지 않는 것을 볼 때 외국인이거나 성격이 미묘하게 내성적이거나, 둘 중 하나다.
제비꽃 편지에서도 내게 답장을 요구하는 것 같은 한 줄의 문장이 있었고 이 편지도 내 답장을 바라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편지봉투에는 내 이름 외에 어느 단어도 적혀 있지 않다.
========== 작품 후기 ==========
리스피아 아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