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사신 파티 결성 -->
협정을 맺은 국가인 만큼 엘프의 법에 대해 알고는 있겠지만 엘프의 법에 그러한 조항은 없었는지 여제는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난감해했다. 그래도 여제는 그 엘프의 말에 승낙했다.
"좋소. 제국에서 마련한 곳에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것이 제국 내라면 어디든지 상관없겠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제국에게 요구해 주시오."
"알았어요. 필요하게 된다면."
허례허식은 물론 쓸데없는 겉치레 말 하나 하지 않은 채 정말로 용건만 간단히 전한 엘프는 그 길로 휘 고개를 돌리고 나가버렸다. 고고함을 넘어 도도한 수준이라며 엘프는 다 저런가 하고 그 모습을 본 몇몇 귀족들이 말했지만 나는 단지 엘프의 향이 옅어지는 아쉬움을 느낄 뿐이었다. 조금 더 보고 싶었는데……. 이런 아릿한 그리움은 처음 느껴본다. 오늘 처음 본 엘프에게 그리움이라니. 믿을 수 없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우웅."
멍하니 서서 군침 닦는 나를 보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유렌은 슬슬 우리도 돌아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엘프 같은 것은 됐어요. 우리 빨리 돌아가요."
벌써 귀족들은 거의 회의실을 빠져나간 상태다. 회의장은 시녀와 시종들이 남은 정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할 일에 대해 생각하며 유렌이 열어주는 출입문으로 나섰다. 여제의 태도로 보아 이번 사건에서도 나는 꽤 주요직을 맡게 될 것 같다. 저번처럼 즐길 수 있는 일이면 좋을 텐데. 아, 물론 저번 사막 횡단은 최악이었지만.
혹시 이번에야말로 그 때 갈뻔 했던 젤타 왕국으로 간다던가? 만약 그렇다면 절대 벌레 같은 게 거기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 있어서는 엄청 곤란하지. 그래도 벌레는 그 때의 기사단들이 대충 처리해 놨다고 하니까 안심해도 되겠지? 유렌은 생각하는 내 옆으로 즉시 따라붙었다. 그러다가 바로 나의 옆에 서 있는 엘프 대표인 리스피아를 보고 흠칫하며 그를 경계한 채 딱딱한 말투로 엘프에게 물었다.
"뭡니까."
나는 유렌의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에? 그 엘프잖아? 무슨 일이지? 아직 안 가고 있었나……? 랄까 왜 이 곳에 있는 거지? 엘프는 내가 회의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의 곁으로 작정하고 접근한 듯 싶었다. 나만을 응시하는 그 시선을 느낄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다.
그치만 향 엄청 좋다……. 뭔가 굉장히 잘 익은 것 같은 향이었다. 엘프의 고기는 역시 맛있겠지? 당연히 생으로 먹는……. 아,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자. 괜히 먹고 싶어지잖아. 나는 스릅 하고 흐르는 군침을 삼켰다. 누구 건지도 모르는 걸 먹으려 들면 안 되겠지? 혹시 주인이 있는 엘프인지도 모르잖아.
리스피아는 은빛의 머릿결을 사라락 날리며 내 앞에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조금 더 거리가 가까워진 것을 보니 나를 자세하게 보기 위해서인 행동 같았다.
"당신은."
응?
그 엘프는 회의장에서와 사뭇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목소리 역시 그 때의 경계심 뿐인 차가운 음성이 아니었다. 적당한 체온으로 달아올라 보드라워진 목울림과 달콤한 박하사탕같은 음색이 다정하게 귀를 적신다. 마치 취한 듯 눈 아래를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빙긋 미소짓는다. 엘프의 미소는 솜털이 곤두설 만큼 아름다웠다.
"무슨 꽃인가요, 당신은?"
혀가 녹은 듯 아련한 목소리다. 나는 그가 내 향에 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치만 엘프는 처음이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망설이는데 엘프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내 뺨에 닿았다. 가늘어서 그런지 마치 양털처럼 가벼우며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한순간 내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렸다.
"데려가도 되나요? 채집해 가서 키워도 돼요? 정말 아름다운 식물님……."
내 눈이 옆으로 돌아가자 엘프는 다시 말했다. 이미 뻗은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심취한 시선이다.
"이름이 있나요? 잎을 만져도 됩니까?"
"아, 아……."
물론 되지! 라며 소리치려 했던 나는 유렌에 의해 막혀버렸다. 유, 유렌이 있었지. 하긴, 순간일지언정 엘프에게 정신을 완전히 빼앗겨버렸으니 화낼 만 하지……!
"그만하세요."
유렌은 나 대신에 그 엘프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여왕님의 허락 없이 함부로 손을 대지 마십시오. 데려가는 것도 안 됩니다!"
"……엥?"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엘프는 잠깐 멈칫하더니 의문조로 말했다. 멍한 표정이었다.
"ξιδε ψΩΦΣΠYΞ?"
"ψΩaiuΦ!"
유렌은 그 언어에 똑같이 응수했다. 알고 있는 말인 것 같다.
그것은 확실히 예전에 들어본 언어……, 지만 그것과는 뭔가 다르다. 정령어와 닮았을 뿐, 그렇지만 닮았기 때문에 내겐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새가 우는 듯 맑으면서도 감미롭고 낮은 그 음감은.
엘프의 말이다.
바람의 소리보다 더 분명하며 물의 소리보다 더 정형화되어 있는 그 언어는 내가 알 수 있는 뜻을 소리 안에 내포하고 있었다. 보통은 모르겠지만 나는 정령이기에 뜻이 있는 언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알아들을 수 있다. 나는 내가 여왕이냐고 물은 리스피아의 앞으로 다시 다가가서 말했다.
"나, 난 채집용 식물이 아니라 여왕 플로라야."
엘프에게라면 채집당해도 좋지만 말이야.
"플로라……. 그럼 당신은."
엘프는 한쪽 무릎을 꿇고 나보다 더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에 매료당해 오히려 엘프를 멍하니 쳐다본 것은 나였다.
"자연의 정령왕님이시군요."
그것은 자신이 섬기는 자를 대하는 태도같기도 했지만 그보단 마치 응석을 부리는 애완동물의 자세같기도 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 시선에는 흥미와 호의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곳에서 그런 모습을 하고 계시는지요."
부드럽게 질문하는 리스피아를 여전히 유렌은 좋은 눈길로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후후 웃으며 유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내 옆으로 끌어 팔짱을 꼈다.
"노, 놀이하는 거야. 인간 놀이."
"놀이? 상관없어요. 채집해도 됩니까? 매일 물도 주고 잘 보살펴 줄게요."
정령왕이라고 밝혔는데도 리스피아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채집용에서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그 후로 다른 곳에 갈 줄 알았던 엘프 리스피아는 계속 나를 졸졸 따라왔다. 그 시크한 미형의 얼굴과 큰 키를 볼 때마다 두근두근 참을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웃는 얼굴로 뒤에서 졸졸졸 따라오는 모습이라니! 어쩜 이렇게 꽃을 유혹하는 심리를 잘 아는 거지?
나는 무심코 그를 쳐다보다가 크고 길어서 잘 보이는 엘프의 귀가 살짝 아래로 쫑긋하는 것을 봐버렸다. 귀! 귀 움직였서!! 신기해! 너무 귀여워어어!!!!!!
"이제 그만 가보지 않아도 됩니까?"
보다 못해 못마땅하다는 표정의 유렌이 엘프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잘 곳은 나중에 찾아도 되니까요."
잘 곳을 찾는다……, 라. 설마 황도 내에서 노숙할 생각은 아닐 테고. 아마 인간을 믿지 못해서 자신이 선택한 숙소나 여관에서 묵을 생각이었겠지만……. 흐음.
"그런데 왜 엘프씨는 황궁에서 머물지 않으려는 거야?"
엘프는 유렌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내 바로 왼쪽에 붙어걸으며 나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응했다.
"리스라고 부르세요, 난 처음부터 누구에게도 리스라고 부르게 하지 않았지만 당신에게라면 환영이에요. 원래 엘프는 낯선 곳에서는 자지 않아요. 더군다나 흑림의 엘프라면 더더욱 인간을 믿지 않죠. 인간과의 협약 중에는 그 곳에서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모양이지만 저는 단지 부탁받은 일을 하는 것 뿐이니까 꼭 거기서 자야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저는 할 일이 있어요."
"할 일이 뭔데?"
"식물을 채집하고 관찰하는 것."
리스피아는 싱글싱긋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그렇지만 식물을 다치게는 절대 하지 않아요. 단지 좋아할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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