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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149화 (149/226)

<-- 6. 어른이 되는 법 -->

〈꽃인 내가 기껏해야 흙인 너를 올려다보고 있어야 하는 거야?〉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하게 날 내려다보고 있던 노아스는 새카만 흑요석 빛 눈동자를 잠깐 내리깔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화내는 거야?! 흐, 흙 주제에……!! 까만 슈트에 풀자국이 생긴 채 그는 잠시 놀란 내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노아스는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서슴없이 구부린 후 내 앞에 무릎을 반쯤 꿇고 앉았다. 그의 코코아빛 머리칼이 내 얼굴 언저리쯤과 같은 높이가 되었다. 나는 칫, 하며 당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제야 겨우 눈높이가 좀 맞네. 나는 여왕님처럼 내 머리카락을 살며시 뒤로 넘기며 눈을 내리깔아보며 그에게 명령어조로 말했다.

〈난 플로라야. 이번에 새로 정령왕이 된 꽃의 정령 여왕이지. 그럼 네 소개를 해 봐.〉

노아스는 말간 흑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동굴 저편에서 울려오는 것처럼 낮고도 풍부한 저음이었다. 마음에 들었지만 그가 흙이라는 사실에 괜히 뾰루퉁해져서 이유 없이 짜증을 냈다.

〈나는……, 노아스.〉

〈나, 나 어리다고 무시하는 거야? 말이 너무 짧아!〉

〈…….〉

노아스는 조용히 나를 쳐다보다가 약간의 텀을 두고 대답했다.

〈……미안.〉

〈흥!〉

나는 괜히 노아스에게 틱틱거리며 고개를 휙 돌려 그를 외면했다. 그 모습을 보던 엘라임과 실피드는 뒤에서 속삭였다.

〈노아스 저 놈, 역시 속성상 식물한테는 약한 거야? 내 말에는 최소한의 대답만 하더니. 나쁜 놈.〉

〈내 말에는 대꾸도 안 했어.〉

노아스는 땅의 정령왕. 정령왕이라고 해도 정령은 정령이니 하급 정령들과 비슷한 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땅은 바람이 표면의 모래를 날려보내도, 물이 스며들어 적셔와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식물이 어디로 뿌리를 내려도 그대로 품어주고 모든 영양분을 전부 뽑아가도록 해 준다. 노아스와 가장 가까운 것은 어찌 보면 식물의 정령왕인 나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밟고 있는 땅보다는 내 위에 있는 바람과 물에 더 관심을 많이 준다. 그것들이야말로 내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노아스를 깔고 앉아서 엘레스트라를 쪽쪽 빨아먹으며 실피드의 정령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엘라임은 자기도 내 밑에 깔리고 싶다고 말했지만 나는 수경재배용 식물이 아니므로 거부했다. 그 다음 단계로 내 정령계를 꾸미는 것을 셋이서 자진하며 도와주었는데 가장 많은 일을 한 것은 노아스였다. 환경상 당연하려나. 나랑 개인적인 친분도 없는데 괜히 고생한 노아스에게 약간 미안하지만, 그치만 땅의 중요성을 평소에 식물이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노아스를 당연하다는 듯 부려먹었다. 친분이야 나중에 쌓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 게다가 그와 나는 태생상 앞으로 무척이나 가깝게 지낼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뜨거운 샐리온을 두려워하거나 적당한 양의 엘라임을 맛있어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식물계의 내력인가 보다.

***

잔디 빼고는 아무것도 없던 내 공간에 강이 생기고 정령들이 돌아다니며 동산과 숲이 만들어졌다. 내 정령계가 비록 다른 원소정령들에 비해 좁다곤 하지만 전부 케어가 불가능할 만큼 넓었기 때문에 바뀐 공간은 비교적 한정되어 있었지만 나는 식물 뿐인 평화로운 숲의 중간에서 이산화탄소를 한껏 들이마시며 노아스에게 명령했다.

〈나 졸려. 잘 거니까 하급정령한테 시켜서 침대 만들어 줘.〉

〈으음.〉

〈그리고 이리 와서 흙으로 나 좀 덮어줘.〉

나는 노아스의 뺨에 서슴없이 얼굴을 부비다가 단단한 근육질 팔뚝을 잡아끌어 내 위에 덮었다. 오랜 잠을 잘 때는 역시 흙 속이 편하다. 실피드와 엘라임에게는 이미 잘 거라고 얘기해 둔 상태고, 나는 땅의 하급정령들이 만든 푹신한 흙 침대에 잔디들을 올려놓고 그 위에 꽃잎을 가득 깔아놓은 후 신발을 벗고 올라갔다. 실프는 내 신발을 건네받아 옆의 낮은 나무탁자에 올려놓았다. 역시 흙 침대가 기운을 충전하기에는 제일이지. 그리고 내 옆에 노아스를 놔둔 채로 넓은 꽃잎을 덮었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나는 옆에 나무를 심고 잎으로 침대를 감싸게 하느라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나는 노아스의 생각보다 부드러운 팔을 베고 누웠다. 기분이 상쾌한 게 피톤치드가 발 끝부터 가득차는 느낌이다. 노아스가 옆에서 자꾸 꼼지락대자 나는 그의 뺨을 길게 쭉 늘여 잡아당겼다.

〈우웅, 가만있어. 냠냠.〉

완전히 자리를 잡은 나를 보고 엘라임은 끼어들고 싶어했지만 휴면 중인 식물에게 과다한 수분 보급은 자제해야 한다. 실피드는 조금 쉬다가 우리 정령계에도 놀러오라고 말하며 엘라임을 끌고 돌아갔다. 나는 노아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인형을 다루듯 그를 꼬옥 껴안았다. 후후후, 역시 최고급 흙이야. 벌써 10%쯤은 충전된 기분이 나잖아?

외모로만 따지자면 그는 무척이나 보기 드문 장신의 미남이었으나 나는 지금은 남자보다 흙이 더 고팠기 때문에 전혀 그가 남성으로서 신경쓰이지 않았다. 이건 영양 많은 흙이다. 흙일 뿐이다. 흙 맛도 나잖아? 오랜만에 비료보다도 좋은 고급 흙을 맛본 나는 당분간 노아스를 손에서 떼기 힘들 것 같았다.

〈저기, 저……, 어……, 플로라……?〉

노아스는 당황해서 무표정하던 얼굴에 식은땀까지 흘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푹신한 그의 등에 팔을 둘러 더 꼭 껴안으며 대꾸했다.

〈뭐?〉

〈자세가……, 이상한데.〉

뭔가 말랑말랑한 게 가슴에 자꾸 닿는다며 노아스의 얼굴이 살짝 당혹감으로 달아올라있었으나 나는 피곤한 마음에 개의치 않고 그의 팔을 더욱 더 끌어당겼다.

〈안 이상해.〉

〈하지만 이런…….〉

가만히 있으란 말야, 흙 주제에!! 나는 더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귀를 잎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다시 충전을 끝내고 깨어날 때까지 그를 놓지 않았다.

***

조금 이른 듯한 봄. 정오의 햇살은 크리스털처럼 영롱히 부서지며 평화로운 시렌느 공작가의 저택의 붉은 지붕을 덮었다. 나는 충전이 완료된 몸을 이끌고 정원에 누워 뒹굴거렸다. 햇볕이 내 몸을 고르게 데워주었다.

아아, 행복해. 바람도 시원하고 공기도 맑고 물도 좋아. 나는 정원에 심어진 풀들과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다가 실프의 부름에 가끔 응답해 주며 반쯤 나른해진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내 얼굴에 그늘이 생기자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창밖에서 보자마자 달려온 것 같은 유렌이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내 얼굴 옆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달콤한 유렌의 향이 느껴졌다.

"오셨으면 말을 했어야죠."

"유렌이 2등이네."

뜬금없는 대답에 그는 어리둥절해했다. 나는 며칠만에 보는 유렌의 얼굴에 손을 뻗어 살며시 쓰다듬었다. 역시 조금 덜 충전되었지만 오길 잘 했어. 여기서……, 미르랑 세르랑 유렌을 먹어서 나머질 충전하면 되겠지?

먼저 나를 발견한 미르는 나를 위해 복숭아 주스를 가져오겠다며 주방으로 달려갔다가 주스가 만들어지자마자 나에게로 뛰어왔다. 나는 미르의 복숭아 주스를 건네받으려고 했지만 어느새인가 그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주스를 쥐고 빨대를 내 입에 물려주었다. 전의 미르는 남에게 무언가를 먹여주는 것에 서툴렀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자연스러워졌더라?

나는 미르의 뺨에 얼굴을 부비며 그의 옷깃을 잡고 매달렸다.

"오랜만이니까……, 셋이 같이 놀자. 세르는 어디 있어?"

유렌은 쿡쿡 웃으며 미르의 위에 올라앉은 내 등을 껴안았다.

"유감이군요. 세리안은 내일 아침에 돌아옵니다. 시아가 없는 동안 이곳의 거의 모든 일을 해결한 게 세리안이니까요. 대신 내일 밤은 세리안에게 양보하기로 하지요."

미르는 나를 인형 안듯 세게 껴안은 채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단단히 잠근 후 얇아서 빛이 새어나오는 레이스 커튼을 치고, 아직 환한 방 안에서 유렌은 내 하얀 원피스의 단추를 찾아 헤맸다. 그는 내 옷에 여밈단추가 하나도 없자 조금 당황한 듯 하다. 만든 거니까 단추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 다음부터는 단추도 형상화해야겠다. 내가 알아서 벗겨 보라고 그에게 눈짓하자 유렌은 품 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들었다.

"조금만 찢을게요."

나는 잠시 쉬다가 접한 그의 뜨거운 시선에 묘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이라 내 육신은 부드럽게 대해주길 기대하고 있을 텐데 유렌과 미르는 오히려 그동안 쌓인 게 많아서 급하게 달려들게 된다. 침대 위에서 거칠게 덤벼드는 건장한 청년 두 명 때문에 묘하게 가빠지는 숨소리를 진정시킬 수 없다.

"이 몸으로는 처음이니까……, 천천히 해줘?"

미르는 내 팔을 긴 손가락으로 감싸쥐고 손끝에 진한 키스를 반복했다. 묘한 의미가 있는 후끈한 전희에 손톱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흐응, 그래, 몸이 바뀌었겠지?"

유렌은 내 하얀색 원피스 자락 끝을 단검으로 살짝 찢었다.

"바뀐 몸은 처음이니 먼저 자세히 관찰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드릴게요."

찢긴 부분을 손으로 쥐고 그대로 튿어낸 유렌은 마치 꽃잎처럼 쉽게 찢기는 원피스를 원하는 만큼 잡아뜯고 넝마로 만들어 내 몸에서 떼어냈다.

"머리색이 조금 진해진 것 말고는 바뀐 데가 없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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