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47화 (147/226)

<-- 6. 어른이 되는 법 -->

어지러울 정도로 화향이 짙게 가득 찬 방에서 유렌은 취한 듯 아련한 시선을 내리깔며 자신의 앞에 누운 시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시아의 연한 분홍빛 앞머리가 살랑살랑거리며 보드라운 뺨을 간지럽혔다. 언제부턴가 쌕쌕 고른 숨소리를 내고 표정도 한결 편해진 시아는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않았다. 3일째다. 그녀가 성장을 위해 수면에 들어간 것은.

이미 꽃은 정상적으로 피고 있다고 엘라임은 말했으나 유렌으로서는 알 수 없다.

정령왕 둘은 시아를 이 곳에 혼자 두기 불안한 듯 했지만 굳이 이 쪽으로 오지 않아도 시아를 지켜볼 수 있는 듯, 연결고리로 실프 하나를 남겨두고 정령계로 돌아가버렸다. 그 실프는 지금 유렌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다. 정령을 볼 수 있는 체질의 하프엘프라는 것이 신기하지도 않은지, 실피드나 엘라임이 유렌을 대하는 태도는 단지 시아의 먹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런 점에서는 미르나 세르 역시 다를 것 같지 않았다. 미르와 세르랑 같은 등급의 먹이라면 그렇게 기분나빠 할 일도 아닐 텐데.

"그런데……."

그런 건 상관없어. 유렌은 시아의 귓가에 대고 나직한 목소리로 조르기 시작했다. 빨리 이 눈꺼풀 속의 예쁜 눈동자로 나를 바라봐 줬으면 좋겠어. 빨리 당신의 부드러운 입술로 내 이름을 불러 줬으면 좋겠어. 깨어나 곧바로 나에게 명령을 내려 줬으면 좋겠어……, 부디 어서 일어나서 그렇게 해 주세요, 응?

"……야, 너 시끄러워. 시아가 잠든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렇게 징징 보채는 거야? 앙?"

반대편에 앉아있던 미르가 책을 탁상에 뒤집어놓으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드래곤은 원래 수십 년간 잠을 잘 수 있는 생물이라 겨우 3일정도는 낮잠에 속한 별로 긴 시간도 아니겠지만 유렌은 달랐다.

"상관 마시죠. 시아가 아픈데 옆에서 딴 짓이나 하고 있는 주제에."

"딴 짓이라니! 이런 거라도 안 하면 안정되지 않으니까 그런 것 뿐이야! 너처럼 달라붙어서 앵앵대면 시아한테도 방해만 될 뿐이라고!!"

"쉿. 시아 깨잖아요."

"……."

미르는 무심고 소리를 높였다가 유렌의 경고에 핫 하고 입을 다물었다.

"시아의 잠을 방해하지 말고 딴짓이나 마저 하세요."

"……."

저 짜증나는 혼혈 같으니라고! 시아만 아니었어도 그냥 콱…….

콱……, 할 수 있을 지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소드마스터 따위……, 제길!

시아가 잠든 사이, 그 둘은 별로 사이가 좋은 채 유지될 이유는 없었다. 유일한 중재자인 세르는 시아가 깨어났을 때를 대비해 서류 처리를 하는 중이고 미르는 가끔, 유렌은 계속 잠든 시아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있다.

언제나처럼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시아에게 달라붙는 것은 유렌보다는 미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시아가 없기 때문에 더 침착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미르였고 시아가 없으니 더 불안해하는 것은 나이가 한참 어린 유렌이었다. 미르는 중얼거리며 읽던 책을 놓고 시아의 옆으로 다가왔다. 시아 얼굴 한번 조용히 구경하다가 가야지.

그 순간, 시아의 몸이 움찔한다고 느낀 것은 그의 착각일까. 유렌은 놀라 숨을 죽이고 시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빛이 나는 듯한 것을 보고 미르 역시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유렌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했다. 어찌할 바 모른 채 시아에게 손을 뻗은 순간, 아까부터 희미하게 비치던 그 빛은 시아의 마지막 모습을 머리에 새겨넣으라는 듯 은은하게 빛나더니, 한순간에 시아의 육체는 유리가 깨어지듯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아름답고 희귀한 크리스털이 조각나 흩어지는 것처럼.

몸이 전부…….

깨 져 버 렸 다.

유렌은 당황한 머릿속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급히 그 유리조각에 손을 넣었지만, 유리조각처럼 보이는 투명한 빛의 잔여물은 스르륵 흩어 사라질 뿐이었다. 순간 멍하니 있던 유렌과 미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아?"

그 둘이 어떠한 반응을 제대로 보이기도 전에 유렌의 머리 위를 맴돌던 실프는 여유롭게 허공을 유영하는 것을 멈추고 파르르 떨었다.

〈여왕님께서 정령계로 돌아가셨어요! 나도 정령계로 가야겠어요.〉

"정령……, 정령계라고?"

기쁘다는 듯이 외치는 작은 실프의 말에 유렌은 귀를 흠칫 세웠다. 실프의 말을 듣지 못하는 미르는 의아하다는 듯 유렌을 쳐다보았다. 실프는 유렌의 말에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즉시 바람이 흩어지듯 사라져버렸다.

유렌은 그래도 시아가 완전 사라진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미르에게 말했다.

"없어진 게 아니라 정령계로 돌아갔다고 하네요. 시아는 괜찮겠죠? ……미르헬, 혹시 정령계로 워프할 수 있습니까?"

미르는 여전히 멍하니 시아가 흩어진 자리를 보더니 유렌에게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게 되면 내가 정령이지 드래곤이냐? 아으윽! 그나저나 정령계라니, 대체 시아를 언제 볼 수 있는 거야?! 억지로 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는 시아에게서 떨어지면 오래 살아있지 못하는데……!"

역시 미르라고 해도 참을성이 그닥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

〈여왕님…….〉

나는 전혀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부드럽고 가볍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실프들이 내 뺨을 간지럽히며 일어나라고 조잘거렸기 때문이다. 기분이 왠지 개운하다. 나는 눈을 뜨고 내가 있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주변에는 연초록의 부드러운 잔디가 깔려 있었고 따스한 느낌의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환했다. 여긴 엽록소가 무척이나 충만한 곳이다. 나는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시고 산소를 내뿜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정령계인가?〉

전대 플로라가 말해준 대로 정령계는 물질계보다 편안했다. 마치 잠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랄까. 나는 새하얗고 반투명한 분홍빛 천을 몸에 두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발에 쓸리는 사락사락한 잔디의 감촉은 털이 많은 융단같았다. 하늘은 푸른 색이 아니라 분홍빛이고 흙 대신 하얀 모래가 뿌려져 있지만 습도와 온도, 그리고 식물이 자라기에는 충분한 영양분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여기가 나의 정령계…….〉

하지만 이 곳의 식물은 역시 진짜 식물이 아니다. 식물은 물질계에서 살 수밖에 없다. 나는 물질계에서 이곳과 동일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에 반해 나의 정령계에서의 영향력은 다른 원소 정령들에 비해 크지 않았다.

흐응, 뭐 아무래도 좋다. 유렌이랑 미르랑 세르는 조금 더 기다려도 되겠지? 지금은 살랑살랑한 바람들 사이에서 낮잠이나 한숨 자고 싶어. 나는 잔디의 정령들이 발을 부드럽게 닦아주는 것을 내버려두고, 실프 몇을 머리카락에 올려둔 채 그대로 풀 의자 위에서 몸을 눕혔다.

그 순간 쾅, 하고 정령계의 경계가 울리는 소리가 들려 나는 깜짝 놀랐다. 급히 밖을 내다보니 물줄기가 그대로 내 정령계의 끝자락을 적시며 아래의 식물들을 흠뻑 젖게 했다. 과격한 노크를 한 것은 엘라임이었다.

〈왜 빨리 열어주지 않는 거야! 플로라, 보고 싶었쪄잉~♥〉

엘라임은 그대로 날아와서 내게 덥석 안겼다. 비록 소년에 더 가까운 앳된 얼굴을 하고는 하나 그 역시 청년의 모습이다. 내가 버티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풀 위로 풀썩 쓰러질 뻔 한 나를 내 전속 정령인 엘레스트라가 성인 남성의 모습이 되어 받쳐주었다. 그러고 보니 엘레스트라도 있었지. 이 곳에선 무리 없이 실체화가 가능한가 보다.

그보다 이거 놔, 이 물아!! 으으, 생생해지는 내가 싫다……. 나른한 기분에 힘입어 가만에 낮잠을 즐겨 보려고 했는데 다 망했어.

엘라임을 떼내 준 것은 역시 실피드였다. 하얀 종이봉투를 들고 온 실피드는 엘라임을 한대 때려서 나한테서 떨궈낸 후에 정령계로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둘 다 경계선면에 서 있었다. 거의 내 정령계의 끝이라고 할 만한 곳이다.

〈허락받지 않으면 못 들어와?〉

〈개방되지 못한 곳은 허락 없이 들어오기 어렵지. 식물의 정령계나 전기의 정령계, 냉기의 정령계 같은 곳 말야. 하지만 원소 정령계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어. 들어온 정령은 모두 그 원소의 왕의 제약을 받아야 하지만. 다만 하급 정령이나 플로라와 계약한 저 엘레스트라같은 경우는 여기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

그럼 실피드만 허락해야지.

엘라임이 플로라 너무해, 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안 들리는 척 했다. 그렇지만 결국 엘라임은 무조건 들어오겠다고 찰싹 달라붙어서 내 정령계로 초대받는 데 기어이 성공했다.

〈풀밖에 없네.〉

엘라임은 하얀 색의 넉넉한 옷 위에 물빛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괜히 초대받는 분위기를 내며 그는 물 외투를 풀밭 위에 올려놓았다. 물 외투 아래 깔린 잔디들은 힘껏 물을 흡수했고, 점점 물 외투는 녹아갔다.

실피드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전대 플로라는 전대 엘라임과 노아스(땅의 정령왕)를 부려먹어서 엄청나게 호화롭게 정령계를 꾸몄어. 그리고 샐리온(불의 정령왕)은 발도 못 들여놓게 했지. 아, 그렇지. 이건 집들이 선물. 모자라면 내 정령계에 와서 더 갖고 가도 돼.〉

실피드가 아까부터 갖고 있던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호기심에 급히 봉투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연두색 리본으로 묶인 집들이 선물세트 박스가 있었다.

납작한 박스를 열자 종이에 작게 싸인 실라이론과 실라페 한 마리씩, 그리고 작게 묶인 실프가 여섯 마리 있었다. 실프 선물세트다.

……굳이 이렇게 작게 만들어서 종이에 쌀 필요가 있었나?

실피드는 선물하는 기분을 내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그 모습을 보고 빈손으로 온 엘라임은 급히 녹아가는 외투 조각의 잔해로 다시 하늘색 물 리본을 만들어 자신의 머리에 묶었다. 그리고 나에게 들이밀었다.

〈프, 플로라! 내 선물은 바로 나야!〉

〈…….〉

===

흥, 따, 딱히 널 위해 올리는 건 아니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