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어른이 되는 법 -->
내 병세에 죄책감과 불안감을 가진 미르와 반대로 내가 아픈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를 언제나와 똑같은 시선으로 핥기만 하는 세르의 진심의 깊이가 어떤지, 나는 약간이나마 짐작이 가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는 자신 때문에 내가 받은 영향에 조금도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그 감정의 깊이가 변화하지도 않았다. 내가 아프기에 걱정은 되지만 나 때문에 아프니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다. 단지 내가 나이다. 그것만이 세르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 건가. 미르와 다르게 주변 환경에 눈꼽만큼의 영향도 받지 않는 건가. 세르는 내 것이지만, 내가 그를 명확히 이해할 날은 아직 한참 먼 것 같았다.
금욕 생활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굶는 거야 익숙했으니 별로 새삼스럽게 느낄 것은 없다. 이미 예전에 많이 먹어둬서 별로 배가 고프지도 않고.
오늘 역시 눈을 뜨긴 했지만 멍하다. 햇볕이 안 들어오니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내 손을 보았다. 조금도 시들지 않고 팽팽한 것을 보니 정말 마력을 넘칠 만큼 많이 비축해 둔 것 같았다. 손톱 끝이나 머리칼 끝이 미세하게 생기를 잃고 노랗게 변하면 비축된 마력이 바닥난 것이니 다시 나와도 되겠지만, 그러기엔 한참 먼 것 같다.
으으, 으으으, 으으으으으. 역시 안 되겠어. 나는 마법등으로 방을 조금 밝힌 후 바로 어제도 불렀던 유렌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유렌~♡ 들어와서 옆에 있어주면 안 돼?"
"그런 예쁜 목소리로 유혹하지만 않으면 옆에 얼마든지 있어드릴 수 있어요."
말은 그렇게 불안하게 해도, 그는 너무 보고 싶었다는 듯 반가운 표정으로 내 침대 옆에 살짝 기대서기만 했다. 언제나 버릇처럼 이어지는 그 이상의 접촉은 완벽히 절제되고 있다. 원래는 상체가 커서 자세가 불편한지 허리를 잘 숙이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은 만지지 않고 나를 가까이 보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침대에 엎드리다시피 했다. 달콤한 그의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아응, 좋아……. 그치만 괜히 몸이 후끈거린다. 물과 햇볕만 끊은 것이 아니고 남자 또한 끊었기 때문에 유렌은 나와 같이 있으면서 나를 만질 수 없다는 것에 무척이나 애가 타는 듯 했다. 그는 한숨을 후 내뱉으며 내 옆에 꿇어앉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연애 전 시절 같네요."
흐응, 그 때의 유렌은 절대로 그런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구. 오히려 얼음장같이 차가웠지.
"제가 차가웠다는 것은……. 시아의 착각일 뿐이에요. 정말로."
"그래……?"
하지만 지금의 유렌은 뜨겁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나를 끈적하게 응시하는 중이다. 그 시선에는 조금의 주춤거림도 없다. 나는 내장기관이 녹는 듯한 감촉에 허리를 일으킬 수가 없었다. 으으, 배고파!! 유렌 먹고 싶어, 미르랑 세르도 먹고 싶어!!!
그는 조심스레 내 베갯잇을 톡톡 건드리다가 살며시 내 귀 가까이에 입술을 대고 음색이 무척이나 낮으면서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창백하게 누워 있는 시아의 얼굴은 무척이나 야해요. 마음대로 이리저리 만져버리고, 억지로 이것저것 하고, 결국은 힘이 없어 반항하지 못하는 불쌍한 시아를 한 입에 콱 잡아먹어버리고 싶어……!"
"으으, 싫어……!!"
"하지만 안심해요. 아픈데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다 나으면 하겠다는 거야?? 싫어! 지금 당장 해 줘! 그런 얘기를 하니까 안 그래도 배고픈데 더 배고파졌잖아!!
미르와 달리 유렌은 이불을 덮어씌우고 마구 만지면 안 될 것 같다. 세르와 미르는 그래도 최후의 최후까지 써먹을 수 있는 이성적인 자제력이 본성의 밑에 깔려 있었기에 안 되는 선까지는 반드시 참을 수 있지만, 유렌은 겉으로만 이성의 이름을 한 튼튼한 방어막 하나로 그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을 뿐 그 아래의 본질에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끝없는 흥분이 아슬아슬 위험하게 눌러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성격이 급한 것은 미르인데 한번 흥분하면 가장 무서운 것이 유렌이다. 나는 유렌을 자극하는 것은 그만두고 비스듬히 침대에 누워 그의 얘기를 들었다.
"시아 님. 방 온도는 괜찮으신가요?"
"응. 괜찮은 것 같아. 너무 따뜻한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정도면……."
눈이 스륵 감기는 게 에너지 보급이 없다 보니 자연적으로 동면을 취하려 드는 현상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영양공급을 해선 안 된다. 될 수 있는 한 깨어 있는 게 좋겠지만 잠을 이길 순 없다.
"얼마 전에 엘 씨가 봐주러 오긴 했지만 조만간 이트리샤 가의 저택에 한번 더 가보는 게 좋겠지?"
"그럴까요. 그럼 내일쯤 서신을 넣고 준비하도록 하지요."
"괜찮을까……."
"괜찮을 겁니다. 상태가 조금씩이지만 나아지고 있다잖아요? 아아 그나저나 제 2황자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응. 그 쪽에 놔두면 나중에 읽어 볼게."
이루 녀석, 전에 한 말처럼 이트리샤 가에 잠입하자는 쓸데없는 내용을 또 쓴 것은 아니겠지? 아아, 하긴 내가 아파서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고 하니 걱정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일지도 모른다. 나중에 읽고 걱정 말라는 답장을 써 줘야지.
***
으응, 안 되는데……. 나 만지면 안 되는데……. 그치만 좋아아……. 잠결에 어렴풋이 유렌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다고 느꼈지만, 그 감촉이 너무나 미지근했기에 나는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가장 처음으로 불만스럽게 팔짱을 끼고 내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유렌이 보였고, 그 옆으로 살랑살랑 바람을 몰고 있는 실피드가 있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그가 이끄는 바람이었던 것이다.
"……으응?"
오랜만……, 이긴 한데, 갑자기 실피드가 웬일이야? 핫, 설마 내 육체가 한계가 되어버려서 내 육체 대신 사용할 곤충 샘플을 채집해 왔다는 얘긴 아니겠지?! 싫어!! 죽어도 싫어!!!
나는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앉아 후다닥 경계태세를 취했다. 실피드는 개의치 않고 내게 다가와 이불을 걷어냈다.
"플로라, 너……."
"으, 응? 뭐, 뭐, 뭐가?!"
"어쩐지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역시나였군."
그는 잠옷 차림의 내 몸과 얼굴을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놀란 듯한 표정의 실피드 뒤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한 엘라임이 튀어나왔다. 엘라임은 빙긋 웃으며 내게 달려들어 와락 뺨을 부볐다.
"자, 잠깐……! 만지지 마!"
이 미네랄과 무기질이 풍부한 영양덩어리 같으니라고! 내 몸에 손 대지 마!! 나는 엘라임을 밀어냈지만 매끌매끌한 뺨을 비비면서 내 얼굴에 물기를 주는 엘라임은 걱정 말라는 듯 물로 작은 거울을 만들어내 내 앞에 보여주었다.
"후응, 날 거부하지 않는 게 좋을 걸? 어차피 곧 영양이 많이 필요할 텐데. 자, 이거 봐."
나는 그가 비춰주는 거울을 무심코 쳐다보다가 흠칫 놀랐다. 저, 저건…….
"뭐야 이게!"
단단하게 물방울 모양을 잡고 있는 연녹색의 꼭 오므려진 꽃봉오리 끝이 아주 살짝 벌어지며 그 사이에 달콤하게 익은 진주빛 장미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뭐, 뭐야! 진짜 피는 거야?? 벌써??? 말도 안 돼!
싫어, 어떡해! 이런 거 남한테 못 보여줘!!
나는 급히 벌어진 꽃봉오리 위를 가렸다. 엘라임은 붉은 부분을 가리는 나를 향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가리는 거야? 이제 곧 성체가 되는 거니까 축하해야지!"
"시, 시끄러! 너같은 물은 꽃의 섬세함을 몰라!"
"흐흐흐, 날 물로 보지 마! 적셔버릴지도 몰라, 에잇!!"
엘라임은 내 목을 붙잡고 끌어안아 물기를 계속 가했다. 앗, 앗, 안돼! 나는 급히 침대에서 기어내려 유렌의 뒤로 숨었다. 얼결이지만 정말 오랜만에 잡은 유렌의 손은 무척이나 따스했다. 그는 조금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시아, 괜찮은 겁니까?"
"괜찮……. 으, 으응? 이제 괜찮네??"
깨닫자 마자 몸을 전혀 무리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정말 아픈 게 다 나은 건가? 그럼 이제 유렌과 세르와 미르를 마음껏 쪽쪽 빨아먹을 수 있는 건가? 아아, 행복해!! 먼저 미르부터 찾아서 벗겨놔야지!!
나은 것을 깨닫고 들뜬 내 뒤로 실피드가 제지를 가했다.
"일단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봐. 너는 지금 정령의 일생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시기인 성체가 되는 과정에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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