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어른이 되는 법 -->
나는 그의 말에 멍하니 대꾸했다. 내가 부서질 걸 그가 알고 있었다니. 진심일까?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미르가, 그런 식으로 나를 속여 사기계약을 할 줄이야.
"정말로 그런 거야?"
"맞아, 사실이야."
미르는 살며시 눈꺼풀을 반쯤 감은 채 내 귀에 가벼운 숨을 불어넣듯 가까이서 상냥하게 속삭였다.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았다. 애정이 가득 담긴 말투와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꽃잎 속까지 저릿저릿해질 정도로 강렬하고 숨막히는 욕망 때문에 나는 본능적으로 몸이 굳어졌다.
으으, 미르 이 나쁜 놈, 아픈 건 싫은데……. 내가 이렇게 고생할 줄 알고 그런 약속을 했단 말야? 옆에 계속 있어 달라는? 미르한테 속다니, 식물생의 치욕이다!
그는 두통이 일 정도로 차갑게 타오르는 눈동자를 내 눈 바로 앞까지 접근시켰다. 발톱이 붙어 있는 발가락 끝부터 솜털이 돋은 잎순 끝까지 감전되는 듯한 오싹함이 느껴진다. 두려움. 공포. 혐오. 어느 쪽일까. 나는 놀란 눈으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눈을 피하고 싶지만 맹수 앞에 놓인 꽃처럼 고개를 돌리는 목 근육조차 굳은 듯 하다. 심장이 싸늘해지는 것 같다. 그 위를, 미르의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눈빛이 마치 손길처럼 헤집는다. 그는 고해라도 하듯 내 위에서 말한다.
"나 역시 네가 아픈 건 싫어. 네가 아프게 되면, 지금처럼, 나의 몸이 몇 배나 몇십 배나 혹은 몇백 배나 더 아프거든. 지금도 이렇게나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데……."
울 정도로 절절한 그런 미르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심장은 찢어져도 금세 다시 자라나잖아."
드래곤 하트라는 심장 속 핵만 다치지 않으면 그렇다고 한다. 칼에 심장이 찔려도, 핵만 다치지 않으면 재생할 수 있다. 천 년 이상 묵은 드래곤 하트는 웬만한 검기에도 깨지지 않는다고 한다. 즉, 드래곤은 거의 무적과 마찬가지다. 미르는 반쯤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맞아. 나는 튼튼하니까 다친 것도 금방 낫지."
시선이 오가던 도중 갑자기 미르가 내 몸을 이불로 덥석 덮어씌웠다. 바, 반칙이다, 심판! 심판!! 나는 하얀 이불이 내 얼굴을 덮쳐오자 너무 놀라서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지만 가드를 올린 팔 마저도 전부 덮혀버려 이불에 완전히 감싸인 해바라기씨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미르는 내 해바라기씨를 껍질 위로 와락 끌어안았다.
"결코 감각이 죽는 일은 없어. 그러니까 몇 번이든 더 찢어지고, 또 다시 붙고, 그리고 찢어지고, 끝없이 아프게 되는 거야. ……나는 어쩌면 너보다 약할지도 몰라."
약간 쉰 듯이 거친 소리가 섞인 그의 목소리가 답답한 이불을 한 겹 사이에 두고 울려왔다. 숨이 막힌다. 답답해. 뭐야, 이거. 무서워. 놔줘. 하지만 미르는 비교적 침착한, 어찌 보면 침울해 보이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말한다.
"꽃인 네가 불인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러울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네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이런 결과를 불러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그 사실을 숨긴 건 후회하지 않아. 내가 너와 함께 있기 위해서 너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 역시 조금도 나는 후회하지 않아. ……나는 그런 생물이니까."
알고 있다. 그는 분명 그런 남자다. 결국 선명히 새겨지는 것은 질투심과 집착. 그것 뿐이다. 정확히 드래곤이라는 것이 어떠한 종족인지 전부 만나보지 못한 내가 멋대로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미르라는 남자만큼은 선천적으로 그런 감정이 무척이나 강하게, 그리고 일방적으로 표출된다.
나는 답답했지만, 이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백하듯 외치는 그의 아파하는 목소리에 차마 그의 복부를 걷어찰 수는 없었다.
"시아, 이런 내가 싫어졌다고 하더라도……."
대신 나는 바보같은 소리를 하는 그의 다리 사이를 재빨리 힘껏 걷어찼다.
해바라기씨를 풀고 겨우 신선한 공기를 들이켰다. 한번, 두번, 세번, 심호흡을 하고 난 뒤 엉망이 되어 구겨진 이불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다지 아픈 표정은 아니지만 움찔해서 나를 놓아버린 미르의 놀란 표정 위에 역으로 뒤집어씌웠다. 이불 위로는 접촉해도 된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위험한 건 직접 접촉이니.
"미르 이 바보!"
나는 이불에 돌돌 말린 미르의 허리로 추정되는 중간 부위를 힘껏 체중을 싣고 밟았다. 아래의 단단한 감촉의 근육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고 두 번이나 더 밟았다. 그리고 그의 이불 밑 어깨 부위를 붙잡고 말했다.
"꽃이라고 해서 무시하는 거야?! 이익, 익!!!"
몇 번이나 그의 어깨를 쥐고 흔든 나는 갑작스런 체력소비에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끼고 그를 잠시 놓았다. 하지만 올라탄 몸을 비켜줄 생각은 없다. 대신 나는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의 배를 타고 앉아서 소리쳤다. 미르는 그대로 다 맞아 준 후에 얌전히 내 말을 들었다.
"꽃의 마음도 그렇게 가볍지 않아! 나는 미르가 나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미르를 좋아한단 말야!! 네가 나를 좋아하는 한 나도 절대로 미르가 싫어지지는 않아. 절대!!"
그런 당연한 말을 외치고 기운이 빠져서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3분정도 미르를 탔다고 몸이 말이 아니다. 미르의 위에 올라있는 것은 체력 소모가 무척 크다. 미르는 한동안 그 자세로 멍하니 있다가 몸을 덮어씌운 이불을 찬찬히 걷어냈다. 곧이어 하얀 이불보가 걷히고 드러난 그의 표정은 약간 멍한 표정이었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나를 응시했다. 단물 빠진 짙은 눈동자에다가 표정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그 눈꺼풀은 원색의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순간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덮쳐왔다. 이미 마성의 제어능력이 생긴 지는 시간이 조금 되었지만 여전히 그런 자제심 없는 위험한 시선은 나에게 있어 거리낌의 대상이 된다. 미르도 분명 그것을 알고, 내 눈에서 그에 대한 두려움을 본 순간 그렇게나 초조하다는 듯이 내게 매달리고, 반복해서 내 감정에 의심을 하고, 나를 달콤한 껍질로 속여서라도 끝없이 달라붙어 애정을 확인받으려 한다.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는데.
"그 말은……. 영원히 나를 사랑하겠다는 의미야?"
미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선언한다. 여전히 와닿는 시선이 뜨겁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드럽게 이불이 내 몸을 감싸안았다. 더불어 미르의 단단한 팔뚝 역시도.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파. 내가 대신 아플 수 있다면 몇 번이라도 그걸 감수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놓을 수 없으니까. ……네가 때리는 거라면 무조건 맞아 줄게. 네가 하는 폭언은 무엇이든 기꺼이 들어 줄게.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일지도 몰라."
그는 힘없이 속삭였다. 나는 가만히 이불 속에서 그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미르는 세르에 비하면 아직 어린 드래곤이다. 비록 주체할 수 없는 집착과 욕망을 전부 한 상대에게 숨김없이 내보이며 결코 놓을 수 없다고 뼛속까지 끝없이 새겨질 정도로 다짐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내가 걱정되는 것이다. 그가 달콤한 딸기맛 사탕 껍데기로 그 집념을 가려주지 않으면 나는 늘 긴장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좋아한다. 그러니 화낼 수도 없다.
"무서운 거 가려줘."
"응."
나는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 그에게 명령했다. 미르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시 바라본 그의 눈동자는 익숙한 딸기사탕색이었다. 이전까지 나를 향해 숨김없이 드러냈던 음탕한 소유욕이 마치 전부 거짓이라는 듯이.
"나는 아직 어려서 감정 조절이 서툴러. 네가 나를 멀리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만으로 이렇게 폭발해 버리다니. 카이세르님만큼만 커도 완벽히 자제할 수 있을 텐데……. 우웅."
미르는 입술을 깨물고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했다. 세르는 미르보다 나이가 배 이상 많다고 말했다. 정확히는 미르가 드래곤 중에서도 어린 거겠지만. 둘의 나이차는 의외로 컸지만 드래곤 입장에서는 큰 나이차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세르는 감정 조절이 능숙한 건가?"
평소의 그는 이상하게도 감정을 크게 내보이는 일이 드물다. 단지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다들 별로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그 모습이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는 모습이라면 세르의 진심은 어떤 모습일까?
"카이세르님은 시아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드래곤이야. 해츨링 시절에는 평소엔 침착하다가도 화가 나면 성격이 정말 불같았다는 소문이 있어. 실버 일족인데도 말이지. 그리고 나는 레드 일족인데도 성격이 보통보다는 느긋한 편이었어."
색깔로 성격을 판단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이라며 미르는 덧붙인다. 그나저나 의외네. 성질 급할 것 같았던 미르는 다른 드래곤에 비하면 느긋한 편이었고, 절대 화내지 않을 것 같았던 세르는 어릴 때 불꽃같은 드래곤이었다니……. 전혀 상상이 안 가는데.
"카이세르님 역시 나만큼이나 네게 가지는 집착이 클 거야. 일생 단 한번 뿐인 상대자니까. 네가 누군가에게 온전히 소유될 수 없는 몸이니 불안감 역시 크겠지. 하지만 단지 내색하지 않을 뿐이야……. 나한테 있어서는 그건 신의 경지지만."
미르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건 그렇다 쳐도, 내가 아픈 것 말인데."
갑자기 화제를 그 쪽으로 돌리자 미르는 멈칫했다.
"확실히 미르와 세르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맞지만……."
미르는 나를 안은 팔을 흠칫 떨더니 나를 살며시 놓았다. 나는 계속 말했다.
"그런 건 신경 안 써."
미르는 여전히 짙은 눈동자를 하고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아직은 긴장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눈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속삭였다.
"왜냐하면 미르는 내 거니깐."
그의 눈동자 속 묘하게 일렁이는 불꽃을 보았다. 아직은 두렵지만, 내 안에 이미 받아들인 것인 이상 언젠가는 그를 감싼 껍질 없이도 그 뜨겁고도 뜨거운 불꽃을 완전히 끌어안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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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어제 올리려고 했는데 바이러스땜에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