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43화 (143/226)

<-- 6. 어른이 되는 법 -->

***

아침은 언제나 얇은 레이스 커튼 사이로 새어나오는 달콤한 햇볕과 함께 맞이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오늘부터는 조금 달랐다. 어둠침침한 방에서 나는 꽃잎이 마를 듯 안 마르는 감각을 느끼며 침대 속에서 기어나왔다.

으으, 햇볕 쬐고 싶어.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산책하며 마른 잎을 아침이슬에 적시고 태양광선을 맛보고 싶지만 그것 역시 안 된다. 안 되는 게 뭐가 이리 많아.

이불 속에서 멍하니 익숙한 온기를 찾아헤매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착착 감겨드는 유렌의 살갗도, 부드럽게 안아주는 세르의 팔도, 강렬하게 바싹 끌어안고 놓지 않는 미르의 열기도 없었다.

혹여 실수로라도 날 만져서는 안 되니까 카딘과 라르슈를 포함한 모든 시종시녀들을 별관으로 보내버리고 넓은 저택에 나 혼자서 지내야 한다.

나는 소일거리를 찾아보려다 포기하고, 어제 마지막으로 본 유렌의 애틋한 표정을 기억해냈다. 울 것 처럼 힘겹게 고개를 돌리는 그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귀여워서 안아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안아줄 수는 없다. 미르는 부루퉁한 표정이었지만, 드래곤 하트가 반 이상 새까맣게 타들어간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세르는 침착하게 나를 보살펴줬지. 서로 접촉하지 못하는 한 위안이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나는 침대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서 베게를 껴안고 우울해했다. 옆 방에 있는 유렌과 미르를 부를까? 아니, 보게 되면 못 참을 것 같아. 안 부르는 게 나을 거야. 나는 침대 속에서 한참을 고뇌했다.

그리고 두 번째 날 밤 역시 그렇게 희미하게 저물었다.

세 번째 날은 이대로 있을 순 없다는 생각에 방 청소를 하기로 했다. 약간 그늘진 방에서 이것저것 서랍을 열어보며 청소를 했다. 사실, 평소에 워낙 네리아가 깨끗이 정리해 두는 방이었기에 특별히 청소할 것도 없고, 그저 물건들을 한 번씩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는 것밖에는 할 만한 게 없었다.

한쪽 서랍에는 화려한 보석이 박힌 팔찌와 온갖 케르타 풍의 장신구들이 들어 있었다. 미르가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하나씩 선물해 준 것이다. 그리운데……. 생각해 보면 겨우 반 년 전이지만, 그래도 막상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 보니 꽤 오래 지난 일 같았다.

미르, 그 때는 정말 막무가내였지. ……아냐, 지금도 똑같잖아?

그리고 반대 쪽 서랍에는 내가 애지중지하며 실크 보물상자에 보관하고 있는 드워프제 장미석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왜인지 그리운걸. 유렌이 내게 청혼했을 때 바친 목걸이……. 드워프제라 그런지 지금 봐도 너무 반짝반짝거리고 예뻐보였다. 마치 보고 있으면 그대로 빨려들어가서 다시는 나올 수 없을 듯한 환상적인 분홍빛. 으음, 나는 넋을 잃고 목걸이 보석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너무 예쁜 것 같아. 유렌이 준 거라서 그런가?

목걸이 옆에는 유렌이 어머니의 유품이라며 내게 보관해 달라고 건네준 작은 푸른 보석 반지도 끈에 매여진 채 있었다.

나는 보석을 하나하나 세다가 지쳐 다시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대신 방 옆에 딸린 드레스룸이나 정리해 보기로 했다. 드레스 룸을 청소할 생각으로 들어갔지만, 엄청난 양의 옷들에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옷장만 휘적거려 보는 걸로 결정했다.

옷장 서랍 맨 아래에는 세르가 처음으로 나에게 골라준 내 데뷔식 때의 붉은 드레스가 깔려 있었다. 그 위에는 피팅 룸에서 처음으로 세르가 내게 엄청난 짓을 했을 때 내가 입고 있었던 풍성한 드레스…….

……청소를 하려니 자꾸 먹는 것 생각이 나서 안 되겠다. 나는 그만 옷장 문을 닫고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유렌도, 미르도, 세르도 먹어선 안 되고 만지거나 핥아도 안 된다. 그렇다고 침대에 있어봤자 나아지는 것도 없다. 셋과 가장 많이 뒹굴었던 곳이 바로 이 침대이기 때문이다.

세르와는 거의 세르의 침대에서 놀고, 유렌과 할 때도 유렌의 침대에서 노는 경우가 많지만 유독 미르는 내 침대에 먼저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끔은 자기가 나를 안고 침대로 안내하지만 평소에는 미르가 먼저 나를 따라다니며 내 침대에도 기어들어오는 식이다. 나는 욕망보다 심심함이 앞서게 되자 방에서 혼자 버티는 걸 포기하고 옆 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살며시 열었다. 갑자기 햇볕이 많아지자 살짝 포만감이 느껴졌지만 이쪽 방도 커튼을 쳐 놔서 많은 빛을 받지는 않았다. 으으 아쉬워.

"저어기."

옆 방은 유렌의 방이었는데, 유렌은 없고 미르가 대신 내 방앞을 점령하며 소파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유렌은 검 수련을 할 시간이다. 아니면 세르와 함께 일을 하고 있겠지. 둘은 그나마 할 일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나는 과도한 스트레스 방지를 위해 일을 쉬고 있었는데, 아무 일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누워만 있으려니 견딜 만은 한데 좀 심심했다. 내가 문을 빼꼼히 열고 고개를 내밀자마자 책을 덮어놓고 바로 후다닥 내 앞으로 달려왔다.

"시, 시아! 무슨 일이야? 뭐 불편한 거 있어?! 아파?! 아니면 심심해?! 놀아 줄까?!"

미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너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지 나와 접촉될 만큼 다가서지는 않았다. 이럴 때만 사려깊은 모습이라니까, 정작 평소에는 그렇게 떼쟁이면서.

대신에 별 내색 않고 꾸욱 잘 참는 세르와 달리 미르는 나를 끌어안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태도로 내 주변을 맴돌았다.

"보면 키스하고 싶어지니까 안 보려고 했는데……. 시아가 불렀으니까 봐줄게. 그런데 무슨 일 있어?"

미안하지만 딱히 큰 일은 없고……. 그냥 혼자 있기 뭣해서 부른 건데. 나는 미르를 약간 어두운 방 안으로 들이고 이불을 다시 끌어당겨 침대에 앉아 말했다.

"외로우니까 옆에 있어 줘."

"앗, 시아시아, 외로웠쩌? 나도 시아가 없어서 너무너무너무 외로웠어!!!"

미르는 기쁘게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령과 얘기를 해도 되지만 정령에게 있어 내 방은 일부러 좁고 어둡게 만들어 자연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다른 정령에게는 좋지 않은 환경이 된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이틀이나 버텼다구! 미르는 나를 만지지 못하고 내가 베고 있던 베개를 대신 쓰다듬으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시아……, 나 때문에 아픈 거지? 미안해. 많이 아파? 내 탓에 시아가 이렇게 힘들어하다니……. 미르 괴로워……."

"으, 으응, 아냐, 절대 미르 때문이 아니……."

"하지만 나 때문인 것은 맞잖아. 시아가 나랑 있으면 자꾸 물을 마시는 것도, 내가 조금만 힘 조절을 잘못 해도 아프다고 말하는 것도, 전부 내가 불의 드래곤이기 때문이잖아? ……그래서 이제 내가 싫어진 거야?"

잠깐, 후자의 경우는 불이랑 관계 없거든?

나는 물기가 그렁그렁한 미르의 눈빛에 움찔했다. 뭐, 에, 엘 씨의 말에 따르면 확실히 이 정도로 과다한 마나를 받게 된 원인은 거의 전적으로 미르와 세르에게 있다. 하지만 나도 좋다고 자제력 없이 있는 대로 받아먹었으니 꼭 미르 때문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게다가 나는 미르가 좋으니까, 그 정도로 신경 쓸 리 없잖아. 그나저나 새삼 이런 일로 기가 죽다니, 풀죽은 미르도 귀여운 면이 있…….

어느새 툭, 하고 미르의 손에 들린 베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대신 그는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서 애틋한 느낌이 가셨다. 그리고 당연하면서 무척이나 뻔뻔스럽게 이런 말을 했다. 마치 속삭이는 것 같은, 소름끼칠 정도로 부드럽고 낮은 음색이었다.

"그래도 상관 없어. 네가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결코 내 손에서 너를 놓아주는 일은 없을 거야. 시아는 내 거니까. 약속했지?"

갑자기 진지하고 묵직한 분위기로 미르가 무표정인 채 강조하듯 한 말에 나는 흠칫 소름이 돋았다. 뭐, 뭐야!! 귀엽지 않아!! 무서워!! 게다가 그 발언은 어떻게 된 거야? 괜히 자기 때문이라고 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 아니었어!? 무, 물론 나는 미르 때문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진 않지만…….

마지막까지 귀여울 수는 없는 거야!???

나는 미르의 눈동자가 검붉은 빛으로 물든 것을 보고 흠칫한 느낌에 미르에게서 2cm가량 멀어졌다. 미르는 계속해서 내게 질문했다. 종종 보이는 새빨간 불꽃 같은 빛의 끈적한 시선을 감추지 않은 채. 미르의 시선은 내게 고백하고 소유욕을 드러냈을 때와 거의 흡사했다. 분명, 내 착각이 아니다. 평소의 그는 단지 이 정도의 욕망을 딸기사탕이라는 달콤한 껍질 속에 뒤집어씌운 채 그 껍질의 단 맛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얇은 껍질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소름끼치는 집착 같은 사랑. 단지 그것이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걸 후회해?"

"나, 나는 그런……."

미르는 빙긋 웃었다. 평소와 다른 짙은 웃음이었다.

"너는 어리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 식물의 정령왕이 불의 화신인 레드 드래곤과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약속인지도 모르고 있지.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미르는 내가 떨어뜨린 2cm의 거리를 단숨에 좁힘과 동시에 아까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는 서로의 거친 숨소리까지 들리도록 한다. 그는 무척이나 흥분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미르……."

"그래도 난 상관 없어."

타버릴 듯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나를 주시하면서 그가 선언한다. 네가 깨지더라도 놓아줄 생각 없어, 라며.

===

이 녀석의 평소 모습이 본성일 거라고 생각하신 분은 없겠죠 ㅎㄷㄷ

사막 편에서도 몇 번 보였지만, 이게 본성입니다. 캐릭 설정때부터 이랬어요.

미르는 질투심 21.7%, 소유욕 78%, 불 0.3%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아는 전생의 기억 때문에 소유욕 캐를 무서워하죠. 과연 이 둘의 앞날은?! ……이래봤자 별거 업슴.(진짜)

그리고 엘은 남자 아니에요, 몸만은 여자입니다! ㄷㄷ 본체는 여자에요. 평소엔 남자로 변신하고 다니는 것 뿐이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