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어른이 되는 법 -->
엘은 가볍게 말하고는 훗 하고 웃음지었다. 그리고 미르와 유렌과 세르에게 먼저 데려갈 테니 나중에 천천히 따라오라는 말을 하며 나를 안고 성큼성큼 앞질러 걸어갔다. 미르는 불만스럽게 뺨을 부풀렸지만, 어찌 할 수 없었으므로 일단은 수긍한 것 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엘이 남자라니, 정말 남자였다니, 아니, 하지만 여자아이 모습이 진짜 모습이라고 말했는데? 그럼 뭐가 진짜 성별이 되는 거야?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미청년인데 말야.
"저기, 그러고 보니 그럼 대공전하와의 관계는……?"
"으음, 레인 말인가? 특별할 것은 없는데……. 레인은 내 제자이자 후계자야."
엘은 잠시 생각하려다가 바로 즉답했다. 제자, 혹은 후계자. 나는 한동안 기억 속에서 레이니안 이트리샤 대공을 제자이자 후계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에 대해 끄집어내 보았다.
「검제라 불리우던 전쟁 영웅 엘리아스 이트리샤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레이니안 이트리샤는 서른 살이 되던 해 양부이던 엘리아스에게 대공 자리를 물려받았고, 그 스승의 명성에 걸맞게…….」
엘리아스라.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란 말야.
"……."
그러고 보니, 응접실 초상화에 걸린 초대 대공 엘리아스의 모습과 엘은 무척이나 닮아 있다. 아니, 거의 똑같았다. 나는 초상화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당연히 초대 대공은 현 대공과 닮았을 거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블라인드 현상으로, 지금껏 전혀 그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데 당신!
"거, 거, 검의 정령이 아니었어!!?"
"검의 정령?"
엘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낮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긴 검의 정령일 리가 없지. 둘은 검의 정령과 계약자 관계가 아니라 단순한 사제관계일 뿐이었구나. 대공의 공손한 태도는 그래서였던 것이었다! 나 말고 미르나 세르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고, 유렌 역시 이름을 듣는 순간 눈치챈 듯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만 몰랐던 것이다! 유렌이 그 상황에서 내게 일일히 설명해 주는 것도 난감했으니까.
미심쩍은 내 물음에 무슨 일이냐는 듯 엘은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자신의 입으로 엘리아스라는 본명을 밝힐 때 당연히 알아봤어야 했다. 하지만, 하지만 어째서 그 전설 속 인물인 마검사 엘리아스가 아직도 살아있는 거야? 게다가 남자인지 소녀인지 모호한 모습으로!? 나는 내 앞의 인물이 그런 유명인이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왜 이 곳에 있는지에 두 번 놀랐다.
엘리아스 이트리샤. 아젤님이 가르쳐 주신 역사 수업 시간에 질리도록 들은 이름이다. 이 제국을 세울 때 제국의 수호룡인 블랙 드래곤 하르아이나와 함께 나타나 큰 공을 세우고 황제에게서 직접 대공작위를 받았다는 금발의 귀공자. 외모에 걸맞지 않는 그 실력이 검제라는 별호를 달 정도로 뛰어난 소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엘리아스 이트리샤가 양자로 들인 제자가 바로 현 대공인 레이니안 이트리샤다. 상식적으로, 닮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와 대마법사의 평균수명을 고려해 봤을 때 당연히 아직 살아있을 확률이 높다. 너무나 어린 모습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당신은 대, 대공의 약혼녀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날 속였어!!"
"아아, 그런 소문이 있기는 하지. 다만 진실은 아니야. 레인은 나를 이 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와 약혼한 척 하며 타인들을 속이고 있는 것 뿐. 정작 약혼녀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몇 가지 연기와 행동만으로 모두 그렇게 믿는 거지. 약혼녀라고 그의 입으로 말한 적은 없지 않은가?"
그, 그건 그래. 우와……. 이루가 알면 실망하겠는데. 그 녀석, 대공의 약혼녀를 만나겠다면서 잠입이니 뭐니 계획해 가며 완전 들떠 있던데 말야.
"지금의 내 정체가 초대 대공이라는 사실이 들키면 여러가지로 귀찮아지니까. 그러니까 그대도 당분간은 나에 대해 비밀로 해 주었으면 해. 사탕 줄게."
내게 종이에 싸인 작은 레몬 사탕 하나를 살며시 쥐여 주며 엘이 말했다. 뭐야. 사탕? 입막음료? 하필 레몬 사탕이라니,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치만 맛있냠냠.
엘은 사탕 껍질을 셔츠 주머니에 구겨넣고는 나를 안은 채 부드럽고 자상하게 마차로 안내했다. 미르와 유렌이 타고 온 시렌느 가문의 마차가 아니라 대공가의 마차였다. 겉에서 보는 크기는 별 차이가 없는데 디자인 탓인지 약간 더 넓고 휑한 느낌이 든다. 보통 큰 마차가 아닌 이상 정원은 4명. 엘과 나는 이 마차에, 미르와 유렌, 세르는 뒷 마차에 탔다. 엘은 나를 가볍게 안아들어 가장 안쪽 자리에 앉히고, 햇볕이 들어오지 않도록 직접 커튼을 꼼꼼히 쳐 주었다. 나는 햇볕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햇볕을 가능한한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삼 그의 가느다란 팔에서 나오는 힘에 감탄했다. 소드 마스터를 한 입에 씹는 실력자라고 했었지.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까 볼 때마다 놀랍다.
"지금 기분은 괜찮은 건가? 마력 과다라고는 하지만 육체를 혹사시키는 방향으로 마나를 소비하려 하면 몸에 무리가 가니 이후로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자택으로 돌아가면 2개월 정도 병가를 내도록 해. 그리고 푹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걸세."
나는 사탕을 입에 넣은 채로 빨며 자상한 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엘의 나이가 많은 탓인지, 젊은(60세) 이트리샤 대공과는 달리 이 사람은 알고 보니 배려심이 깊고 무척이나 상냥했다. 자잘한 것에 신경도 많이 써 주는 것 같고. 까칠한 이트리샤 대공 같은 거랑은 달라! 여전히 정체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앞으로 조금씩 친하게 지내봐야겠다.
마차에서 엘과 내가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는 동안 다른 마차에서 미르가 드래곤 하트를 활활 불태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으, 윽……. 역시 집에 돌아가면 미르를 좀 만지작거리면서 예뻐해주는 게 좋겠지?
……아니, 잠깐. 그런데 나는 집에 돌아가더라도 미르를 못 만지잖아?
흐흐흑, 말도 안 돼! 병 때문에……, 고작 이런 병 따위에 패배해서 미르를 만지지도 먹지도 못하게 되다니!!
엘이 곧 나아질 거라며 부드러운 말로 나를 위로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차가 도착하자 힘없이 나가려는 나를 엘이 마차에 태울 때처럼 안아들고 집 안까지 데려다 주었다. 누구냐고 묻는 네리아와 제인에게는 이트리샤 가 출신의 의사라고 대답한 엘은 네리아에게 몇 가지 주의를 주고 제인에게 두 달간 푹 쉬게 해 달라는 충고를 했다. 특유의 침착하고 있어보이는 분위기가 무척이나 신뢰감을 주었는지 내가 걱정했던 병가 신청은 금세 받아들여졌다.
"걱정 마, 그 동안 일이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 가능하니까. 시아는 빨리 나아야지."
뭐, 이렇게 말해 주는 믿음직한 오빠가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게 일체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에 엘은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좀 더 도울 것 없냐고 물었다. 물론 미르는 필요없다고 버럭거렸고 나 역시 초면에 이 이상의 요구는 할 수는 없어 주춤했다.
"괘, 괜찮아요. 이제 침실에서 옷 갈아입고 씻는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으니까."
"물로 씻으면 안 돼."
"……아."
그러고 보니 씻으면서 물을 피부와 뿌리로 흡수하기 때문에 물을 먹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나는 어떤 물도 마시면 안 되는 상태. 그러면 어떡하지? 씻으면 안 되나? 으으, 씻지도 못하다니.
"정령이 씻지 않는다고 더러워지지는 않겠지만, 인간의 육체를 입었으니 불쾌하긴 하겠구나. 마법으로 닦아 줄 테니 물은 가까이 하지 않도록 해."
"마법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무언가가 내 몸을 쓸고 지나갔다. 물이 아니라 바람 같았다. 그리고 확인해 보니 끈적하던 땀이 씻겨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별다른 느낌은 전혀 없지만 씻겨져나간 듯하게 보이긴 했다. 마법으로 씻겨지는 것은 처음이다. 기껏해야 마법으로 물을 만들어서 씻는 물 마법 정도만 당해보았고, 물 없이 씻겨지는 것은 처음 본다.
"간단한 클리어 마법이야. 약하게 쓴 거지만, 내가 없을 때는 저 쪽의 레드 드래곤이나 실버 드래곤에게 해 달라고 하면 되네."
"네에."
"자, 그럼 나는 이만. 다음에 볼 때는 건강한 모습이길."
제인을 시켜서 저택까지 데려다 주길 제안했지만 엘은 그럴 필요 없다며 혼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쩐지 마차를 곧장 돌려보내더니, 마법으로 저택까지 갈 수 있었구나.
나는 엘이 커튼을 치고 불을 꺼 놓은 방에서 한동안 서성이다가 얌전히 있으라고 한 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방에서 살며시 내밀었다. 옷을 갈아입고 온 유렌이 문 밖에 서 있었다. 유렌은 나를 보고 놀란 듯 내게 다가왔다.
"오늘은 이만 쉬십시오. ……너무 가까이 있어드릴 수는 없지만, 혹시 무엇인가 필요하시면 바로 부르실 수 있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유레엔! 나, 나……, 유렌이 필요해!! 벌써 네 시간째 유렌이랑 접촉을 안 했단 말야! 하지만 이런 짓을 했다간 50년 이상 유렌과 만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으므로 나는 애절한 표정만 지어보였다.
"그, 그런 귀여운 표정으로 바라보시면……. 하면 안 되는 짓을 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유렌 역시 나를 만지지 못해서 애달아하는 듯 했다. 나, 나도 하면 안 되는 짓 당하고 싶어! 그치만 역시 안되는 거겠지…….
금욕처방을 받은 첫번째 날 밤, 나는 그냥 문을 안에서 걸어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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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바빠요ㅠㅠㅠ
빨리 다음 편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