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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140화 (140/226)

<-- 6. 어른이 되는 법 -->

***

"카이세르?"

미르가 세르의 급 출연에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로드인가 하는 사람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왜 이곳에…….

게다가 갑자기 뿅 나타난 세르에게 놀라지 않았을까 엘과 대공을 쳐다보았지만 대공은 무덤덤한 표정이고 엘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반응이었다. 마치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로드에게는 너를 봐줄 수 있는 실력의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러 간 거야. 로드가 소개시켜 준 마법사가 바로 엘리아스 이트리샤였고. 그나저나 운이 좋게도 마침 이 곳에 있었군요, 엘리아스. 저 둘이 의사는 잘 찾아냈나 봅니다."

엘은 그 말에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말로 이 사람이 나를 치료할 수 있는 의사란 말인가? 검의 정령이 아니고? 어찌되는 상황인지는 몰라도 일단 나랑 유렌이랑 미르가 번지수는 맞게 찾아온 것 같다. 엘은 무척이나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아스는 본명?"

"맞아. 내 진짜 이름이 엘리아스 이트리샤. 지금은 밝히기 곤란한 이름이지만 그대들을 대할 때는 본명을 사용해야겠지. 자, 자세히 봐줄 테니 플로라에게서 둘 다 떨어져 주겠어?"

정말 의사같은 엘의 말에 유렌은 나를 고이 앉힌 후 옆으로 약간 물러섰고, 미르는 좀 미심쩍다는 듯이 내 팔을 놓지 않고 주춤하다가 세르의 핀잔을 들었다.

"미르헬, 괜찮으니까 떨어져. 엘리아스는 하르아이나 이외에도 우리 일족의 로드와도 아는 사이이고 몇 번이나 신뢰관계를 쌓아왔으니까 믿을 만 한 인간이야."

미르는 내 팔을 조금씩 놓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우음……, 그 하르아이나와 아는 사이라는 게 불안한데요."

"……그러고 보니 너는 하르아이나와 사이가 무척 나빴지."

미르의 태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엘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나를 진찰했다. 어린아이같은 정말 작은 고사리손으로 나의 이마와 심장 근처를 짚으며 겉보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멍하니 엘의 행동에 몸을 내맡겼다. 정확히는 어떠한 행동을 취할 기운이 없다는 것이 맞겠지만.

그런데 엘리아스라니,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무엇인가가 기억나려고 했지만 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여성스럽고 나름 어울리는 이름인데……, 무엇인가가 걸리는 게 있다.

그치만 정령의 이름이 아니면 흥미 없었다. 한참을 나를 자세히 살피고 있는 엘은 몇 번이나 확인하듯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확신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이트리샤 대공은 옆에서 엘의 행동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게 기대에 찬 표정이다. 어째서일까?

잠시 후 엘이 가볍게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이런 증세의 정령은 드물지만, 나라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치, 치료 가능한 거야? 다행이다! 정말 죽는 줄 알았어!!

"무슨 증세인가요?"

무엇 때문에 내가 아팠던 건지는 나 역시 궁금하다. 하지만 먼저 엘에게 물어본 것은 유렌이었다. 엘은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망설이다가 증상의 원인을 말해주었다.

"육체가 있는 미성년의 물질계 정령에게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증상인데, 굳이 이름붙이자면 마력 과다증. 육체를 통해 공급되는 마나의 양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갑자기 너무 많아질 때, 그걸 견디지 못하고 육체가 무너지거나 혹은 정령체와 육체가 분리되려고 하는 현상이지. 제어능력이 떨어지는 어린 정령에게나 생기는 문제야. 정령체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육체에는 무리가 가게 되지."

부, 분리되다니! 나 엄청 위험할 뻔 했잖아! 진짜 곤충 맛 볼 뻔 했잖아!!?

"아마도 몇 주에서 몇 개월 내내 강한 마력을 일방적으로 공급받은 것 같은데……."

엘은 말을 흐렸지만 내 뒤를 힐끔 쳐다보는 게 짐작이 간다는 표정이다. 나 역시 이유를 이제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세르랑 미르가 원인이다! 안 그래도 정령 친화력이 있는 유렌이나 라르슈에게서 마력을 공급받는 것만으로도 배부른데, 무한 마력을 가진 드래곤인 미르와 세르 쪽에서 추가로 냉기의 마력과 열기의 마력을 일방적으로 퍼붓다 보니 그것이 전부 중화되어 내 육체에 쌓이게 된 것이다. 인간으로 따지면 안 그래도 평소식이 고칼로리인데 갑자기 기름투성이 고급 요리가 2인분이나 추가되어서 전부 먹느라 고도비만에 걸렸다는……. 그런 상태라고 할까.

그럼 치료를 위해서는 설마…….

내 설마설마에 엘은 긍정했다.

"아직 육체가 무너질 정도는 아니니까 이대로 마나의 외부공급을 끊으면 돼. 나을 때까지 끊은 후에도 성체 정령이 되어 제어능력을 완벽하게 가질 때까지는 지속적으로 마나를 받는 양을 조절해야 해."

나는 땅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뭘 끊으라고? 남자를? 말도 안 돼!!

"다른 방법은……, 없나요?"

의사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은 안 될 일이지만, 그래도 절망적인 내 질문에 엘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정령의 메커니즘은 물질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마법 아티팩트로는 정령력을 조절할 수 없고 세르나 미르가 어떻게든 해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외부적 요인을 차단하는 것 말고 그대를 도울 방법은 없어."

…….

"미성년인 이상 충분한 마나 조절이 불가능한 것은 당연한 일이야. 아직 그대는 어리니 급히 굴지 않아도 시간은 많아. 여유를 가지도록 해."

냉정한 의사의 판결에 나는 우울감에 잠겼다. 뭘 포기하라고? 절대 있을 수 없어! 과일은 끊어도 물과 남자만큼은 절대 못 끊어! 흑흑!!

가만, 나는 평소에 내가 얼마나 많은 것에서부터 마나를 얻는지 생각해 보았다. 태양광, 수분, 땅의 영양분, 인간의 음식, 과일, 남자…….

심지어는 단순히 타인과의 접촉만으로도 조금이지만 마나를 얻고 있었다.

내 물! 내 과일! 내 햇볕!!! 심지어 접촉과 음식마저도! 식물생 낙이었던 것 중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끊었다간 분명 금단증상이 일어날거야. 벌써부터 초조해져서 손톱을 물어뜯게 된다. 심지어는 아픈 와중에도, 어젯밤에도 내 몸상태를 걱정하는 유렌을 붙들고 바나나우유를 꾸역꾸역 뱃속에 밀어넣어 채웠는데!!

유렌은 나를 위로하려는 듯 내 팔에 손을 가져다 대려다가 식물은 접촉만으로도 마나를 얻는다는 세르의 말에 흠칫하며 손을 뗐다. 만지는 것도 이젠 마음대로 못 하는 건가? 이럴 바엔 그냥 원없이 세르랑 미르랑 유렌을 냠냠 마시고 곤충이 되어서……. 아니지, 그래도 곤충이 되는 것 보다는 낫잖아. 조금만 더 참으면 될 거야. 분명 그럴 거야!

엘은 내 이마에 잠시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순간 마력을 빼앗기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 들긴 했지만, 나는 멍하니 있다가 기분이 점차로 더 편해지는 느낌에 얌전히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사라진 듯 하다. 우와, 신기해. 엘 씨는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건가?

"마나를 조금 중화시켰으니까 완벽한 치료는 되지 못하더라도 조금은 몸이 나아질거야. 이제 혼자 일어설 수 있겠지? 그럼 이제 사후관리만 철저히 하면 되겠군."

"……그 마나 중화라는 거, 세르가 계속 해 주면 안 되는 건가요?"

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와 드래곤 종족의 마나 종류는 달라. 다루는 법도 다르지. 나 역시 정령의 힘을 일부 빌어 존재하는 육체지만 나는 완벽한 자연의 근원은 아니기에 겨우 절반 정도 도와주는 데 그칠 수밖에 없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나 섰다. 유렌은 떨리는 내 팔을 잡아 주려다가 만져서도 안 된다는 소리를 기억하고 멈칫했다. 나는 내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미르와 유렌을 뒤로하고 의사 엘에게 감사표시를 했다. 엘은 뭘 이 정도로 그러냐는 듯 웃음지었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아이 얼굴에 안 어울리는 어른스런 속이다.

"그럼 이제 내가 그대에게 부탁을 좀 하려고 하는데……."

나한테, 부탁?

부탁이 있다고는 했지. 그런데 이 정도로 유명한 마법사가 나한테 할 부탁이란 도대체 뭘까?

"내 부탁은 간단해. 그대에게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나는 벽에 기대서서 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무슨 부탁이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꽃과 대화하기랑 나무와 대화하기, 과일 먹기와 물 흡수하기 정도일 텐데. 엘은 안심하라는 듯 빙긋 웃었다. 처음이다. 기껏해야 8세경의 외모다운 순수한 미소를 이제서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엘은 가녀린 팔뚝으로 바로 자신의 가슴팍을 당당하게 짚으며 외쳤다.

"이 내게 최강의 육체를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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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랑 컴 고장이 겹쳐서 ㅠㅠ 많이 늦었네요;;

하지만 뉴 컴이 생겼으니 아마 소설연재가 더 빨라질... 것 같지는 않군요. 컴퓨터 속도와 소설연재는 딱히 큰 관련이 없네요 ㅎㄷㄷ

개인지는 발송 대기중입니다! 곧 발송되고 이제 곧 재고판매도 할거에요^^

3월부터는 정상 연재로 돌아갑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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