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31화 (131/226)

<-- 6. 공작님, 제발! -->

저택의 자주색 하녀복을 입은 한 메이드가 훌쩍거리고 있었고 그곳의 가장 높은 시녀로 보이는 나이든 메이드가 잠옷 차림의 위스피닌 공작 앞에서 그를 말리고 있었다.

"공작 전하, 요, 용서해주세요!"

"시끄러워! 당장 그 계집애를 그냥……."

위스피닌 공작이 나나 다른 고위 귀족들 앞에서의 공손함은 집어던지고 시녀들 앞에서 역정을 내고 있었다. 나는 공작이 틀어쥔 시녀장의 멱살을 억지로 놓게 하고 그에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소란인가요? '나의' 시녀들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유렌의 성의 시녀이지만 나의 시녀이기도 하다. 후작은 내가 등장하자 흠칫하더니, 손을 탁 놓고는 내게 말했다.

"마침 잘 오셨소. 이곳은 손님 대접이 좋지 못하군. 저런 눈치없는 계집애를 시녀라고 내 방에 들여놓질 않나……."

나는 공작을 한번 쳐다보고, 아직도 떨고 있는 젊은 시녀와 나이든 시녀장을 바라보았다. 시녀장은 내 시선에 예쁘장한 십대 후반 정도의 어린 시녀를 감싸안았다. 그 어린 시녀의 이름표에는 미리아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일단 제 시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미리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녀는 겁에 질려 있다가 내가 상냥하게 묻자 쭈뼛거리면서 대답했다.

"저, 저어……, 아침식사에 차를 따르고 있었는데 공작각하께서 갑자기 제 치마 밑으로, 그, 소, 손을 넣으시길래……. 깜짝 놀라서 뿌리치느라 차를 그만 공작전하의 무릎에 엎질러 버렸어요……."

옆에서 차를 따르다가 엎었다면 공작의 옷 위에 차가 흘렀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화를 내는 거겠지. 하지만 그 이전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위스피닌 공작, 미리아의 말이 모두 사실인가요?"

"물론 사실이지, 저 계집애가 내게 뜨거운 차를 쏟았단 말이요! 저 계집의 처분권을 내게 준다면……."

나는 공작의 주장을 끊고 말했다.

"확실히 잘못을 했다면 사과를 해야겠지. 그리고 사과만으로 끝낼 수 없는 일이라면 그만한 대가를 치루어야 하고."

내 말에 미리아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공작이 슥 음흉한 미소를 짓자, 나는 웃으며 공작에게 말했다.

"위스피닌 공작, 미리아가 차를 쏟은 이유는 공작이 미리아의 치마 속을 만졌기 때문이라고, 아까 스스로 인정했겠지요. 보통 시녀의 치마 속은 절대 실수로 만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유렌과 나의 저택의 시녀들은 창녀로서 고용한 것이 아니고 가사와 저택의 일을 돕기 위해 고용한 겁니다. 공작, 미리아와 미리아의 고용주인 유렌에게 지금 당장 사과하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기 바랍니다. 대가라면 미리아에게 정신적 피해보상을 한 후 이 저택에서 나가서 다시는 들어오지 않는 것이 적당하겠군요."

내가 싸늘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위스피닌 공작의 만족어린 얼굴은 점점 흐트러졌다. 마침내 코코아 빛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그는 옆의 탁자를 탕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내, 내, 내가 어째서 시녀 따위에게……."

분노 이전의 당혹스러움이 위스피닌 공작의 시선에 가득차 있었다. 갑작스런 내 배신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멋으로 대상업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금세 깨닫고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내게 소리치려고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하십시오, 위스피닌 공작!"

버럭 소리지르는 공작의 말을 맞받아친 굵고 큰 목소리는 내가 아니었다. 탁, 소리가 나며 문짝을 열어젖힌 유렌이 한 손에 버둥거리는 라엘 공자를 쥐고 방으로 들어와 공자를 내동댕이쳤다. 라엘은 얼굴이 벌개져서는 유렌에게 대들었지만 힘으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 곧 부루퉁한 얼굴로 잠잠해졌다.

"아래층에서 시녀 하나를 붙들고 소란을 피우고 있더군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여기는 당신들의 집이 아닙니다. 불청객이면 불청객답게 당신들에게 잘 곳을 내준 공작각하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감사히 하룻밤만 지내고 곧장 돌아가시지요."

정말 존댓말 같지 않은 유렌의 반말 맛 존댓말이었다. 나는 소란이 일어날 것 같아 미리아와 다른 시녀들, 그리고 집사장을 밖으로 내보냈다. 어제와 달리 위스피닌 공작 앞에서 너무나도 당당한 유렌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괜찮은 걸까나?

"무슨 소리냐! 나는 네 아버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잔해따위에 붙들려 있지 않기로 했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 당신과 피가 이어져있다는 것 따위 나는 인정 못해! 절대로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냐. 내게 아버지 따위는 없어!"

강조해서 말하는 유렌의 표정은 매우 강경했다. 어제의 그 망설임따위는 찾아볼수도 없었다. 나는 조금 놀라서 멍하니 손을 놓고 유렌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유렌은 그 긴 다리로 위스피닌 공작의 바로 앞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네 놈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나는 네녀석의 아버지다! 너는 위스피닌 가문 소속이며 나는 당연히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 금전적인 권리와 그 권익을 모두 다."

공작은 유렌의 눈앞에서 이죽거렸다. 하지만 유렌 역시 그런 공작의 속셈을 진작부터 알고 있어선지 말에 있어 한 치도 물러섬이 없었다.

"난 성인이며 법적으로 당신에게 조금의 간섭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엘프의 나이로서는 미성년이지만, 그것 역시 당신이 나를 시렌느 공작가에 넘긴 것 인해 권리는 당신에게서 시아에게로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본래 그 대가로 당신에게 지참금을 줘야 했지만 당신이 거부했다지요?"

유렌은 한번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그리고, 법적으로 따져서 당신에게 하등 득 될 게 없잖습니까? 불법으로 협력종족의 여자를 거래해서 강간하고 그 의사도 묻지 않은 채 강제로 불명예스러운 첩으로 들인 범죄자인 당신의 입장에서는."

"이, 이 녀석이……!"

공작은 미간을 쭉 일그러뜨렸지만 유렌이 그 말을 꺼내자 그 역시 자신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득이 될 수 없으면 쳐내는 것이 당연하다. 공작은 뭐 좀 이득될 것을 얻으러 왔다가 결국 모욕만 당한 상황이 불쾌했지만, 그 기분을 겉으로 과히 드러내지 않고 유렌에게 외쳤다.

"좋다, 너는 이제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헛소리 하지 마십시오. 처음부터 당신과 나는 그 어떠한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모친의 원수인 당신을 끝까지 증오할 뿐."

유렌은 마지막까지 그를 깔보듯이 비웃었다. 위스피닌 공작은 나에게도 '남편에게 잡혀사는 계집'이라며 욕설에 가까운 한 마디를 남기며 다시는 오지 않겠다면서 자신의 아들을 끌고 그대로 쾅쾅 소리를 내며 나가버렸다. 아마 이번 일로 크게 데인 듯 했다.

마지막 말로 보아 공작은 내 언행을 유렌이 다 시킨 것으로 오해한 듯 싶었다. 남편에게 잡혀산다라……. 그 말을 내가 곱씹고 있을 때, 유렌은 위스피닌 공작의 마차가 급히 저택의 정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창밖으로 천천히 바라보며 후, 하고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좀 홀가분하네요. 시아, 괜찮아요?"

나, 나야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지……. 만 유렌은 괜찮은걸까나? 아버지 얼굴도 마주보기 싫어했으면서. 유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표정이었지만 어제보다 훨씬 개운해진 듯 했다.

"결국은 제가 마무리지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아가 아니었다면 이번에 그를 대면해서 아까같이 침착한 말을 할 용기는 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타인이라면 모르지만, 나는 내 부친……, 아니, 위스피닌 공작과 마주치는 것이 정말 질색이었으니까. ……트라우마였던 것 같아요. 그 남자는."

유렌은 그렇게 말하며 순식간에 내 허리를 포근히 껴안아왔다. 이제서야 진짜 유렌같았다. 나 역시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그를 마주안아주었다. 괜히 유렌의 영지로 오자고 해서 쓸데없는 일만 겪은 것 같아 조금 미안한데.

"유렌, 잠깐!!"

쾅, 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문소리와 함께 미르가 붉은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들이닥쳤다. 그리고 나를 덥석 껴안고 유렌을 바라보았다.

"그 위스피닌 어쩌구 하는 영감 퇴장했으니까 이제 떨어져! 이제 시아는 내꺼야, 그동안 못한 애정표현 실컷 할거야!"

미르는 힘껏 떽떽거렸다. 유렌은 한 걸음 물러서 미르가 나를 만지작하게 내버려두었다. 나는 방금 미르가 한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미르."

"응? 응응?"

"처음으로 유렌 이름을 불렀네?"

언제나 '너'라던가, '혼혈'이라던가, '야'라고만 불렀잖아. 미르가 유렌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천천히 친해져가게 되다니.

미르는 내 말에 살짝 귀 끝을 붉혔다.

"아, 그……."

약간 망설이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미르의 뺨에 얼굴을 가져가며 훗 하고 웃었다. 괜찮아, 부끄러워하…….

"그, 그걸 전부 눈치채고 있었던 거야? 미르한테 그렇게나 많이 관심을 가져주다니! 시아! 너무 기뻐!!! 언제나 나만 보고있었던 거지? 그런거지? 응? 미르도 언제나 시아를 보고있어!!!! 사랑해!!!!!"

미르는 장미즙을 짜내듯 내 허리를 와락 껴안고 내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대고 부비부비 문질렀다. 나는 호흡곤란으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우읍!! 읍!!"

이거 놔! 일단 놓고 말해! 귀엽다는 거 다 취소!!!

***

유렌의 영지에서의 며칠이 지나고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약속대로 나는 미르의 말 위에 탔다. 이제 슬슬 혼자서 승마하는 걸 배워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는 내 아래의 말을 바라보았다. 아니, 역시 무리이려나. 꽃 혼자 어떻게 말을 타겠어. 말에는 흙도 없는데.

"그렇게 빳빳하게 앉아 있으면 피곤할테니까 나한테 기대."

미르의 말에 내가 살며시 미르의 가슴에 등을 기대자 미르는 말고삐를 잡지 않은 한 손으로 내 허리를 껴안았다. 나는 괜히 모르는 척 허리를 틀어 그의 가슴에 뺨을 대고 부드럽게 문질렀다.

"미르."

"으, 응?"

조금 들뜬 목소리로 그가 내 부드러운 부름에 작게 대답한다. 나는 달콤한 음색으로 미르의 옷 단추를 살짝 물었다.

"시아 졸려."

순식간에 그의 목덜미가 새빨개졌다. 당황한 듯이, 하지만 행복하다는 듯 미르는 좀더 강하게 내 허리를 안았다.

"……응, 이대로 잠들어도 돼. 도착하면 깨워줄테니까."

그의 붉은 겉옷이 내 머리 위로 덮어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심장박동을 조금 더 가까이서 듣고싶어 더욱 얼굴을 가까이 대려고 뺨을 부비적댔다. 미르의 품도 굉장히 따뜻했다.

===

감기 1주일째에요ㅠ

살려달라.

시아가 미르에게 애교를 부리는 장면...인데 제대로 된걸까...

머리가 아파서 글을 잡고있기 힘드네요 흑흑 곧 낫겠죠?

다음 편 다음챕터로 넘어가기 전 드디어 외전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