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공작님, 제발! -->
미르에게 멱살을 잡힌 한 용병은 만만해 보이는 젓가락같은 녀석이 잡은 손을 도무지 풀 수가 없자 좀 당황한 듯 싶었다. 둘의 덩치는 꽤 차이가 있지만 키는 비슷해서 더 힘들었다. 그에 그 용병은 빽 소리를 질렀다. 소리 높이기. 전형적인 시비에서 몸싸움으로 이어지는 초기 단계였다.
"뭐, 뭐야, 이거 못놔!?"
그에 미르 역시 자신을 계집이라 칭한 것을 용서하지 못하겠는지 맞받아쳤다.
"왜, 걸어다니지도 못하는 기생오래비 하나 힘으로 못 이기겠냐?"
그 용병은 미르의 손에 붙들려 발버둥쳤다. 주변의 구경꾼들은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싸움을 더 부추겼다. 그리고 워낙 오가는 사람이 많다 보니 여기서 이런 시비가 붙는 것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가게 주인은 침착하게 나가서 싸울 것을 권장하였고, 미르는 그들을 끌고나가 거리로 내동댕이쳤다.
나는 말리는 것도 잊고 주변에 휩쓸려서 안절부절 못하며 그 둘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이 몸을 계집 취급하는 것들이 많아서 짜증나던 중이었는데, 감히 같잖은 것들이 길거리에서 나의 시아를 희롱해?"
날 건드리지 않았는데……. 멀리서 꽃잎 좀 구경했던 것 뿐일텐데. 오히려 미르의 성질을 건드렸겠지. 여기뿐 아니라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미르는 몇 번씩 여자로 오해를 받곤 했던 것이다. 여행중에는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두툼한 망토를 걸친 탓이다. 그 와중 쌓인 스트레스가 두 용병의 자극으로 폭발해버린 것 같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던 행인들은 대로 한가운데서 소란이 일어나자 저마다 웅성거리며 얘기를 나누었다. 예로부터 말하길 싸움 구경과 꽃 구경은 놓칠 수 없는 세계 2대 구경거리 아니던가.
"왜 싸우는 거야?"
"여자를 두고 시비가 붙었대. 저기 저 여자."
정작 싸우는 미르와 두 용병이 아니라 그 싸움의 원인인 내게도 쏠리는 시선이 상당했다. 으, 쪽팔려. 꽃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호기심에 접근한 사람들의 시선은 꼭 나를 거쳐 지나갔고, 몇몇 남자 행인들은 내 꽃잎을 보며 감탄하기도 했다.
"시비 붙을 만 하네. 우아, 죽이게 예쁘다."
"어떻게 작업 한번 걸어볼 수 없을까?"
"아서라, 너 같은 건 감히 말도 못 걸어. 저 정도쯤 되면 눈이 높아도 보통 높은 게 아닐텐데."
하지만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는 여자들도 있었다. 남자 여럿이서 나를 두고 싸운다는 것은 보통 여자들에게 질투를 유발할 수 있는 시츄에이션이다. 하지만 나는 전생때부터 워낙 이런 일이 많았기 때문에 지금은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미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혼자 두 용병을 상대하려들자 그 용병 둘은 흠칫한 표정이었다. 미르는 차가운 비웃음을 띄우며 손 끝에 거대한 붉은 화염을 일으켰다.
"마, 마법사?!"
미르는 봤지? 라며 의기양양하게 씨익 웃었다. 커다란 마법에 놀라는 사람들의 틈에서 삐익, 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쇠구슬이 울리는 듯한 그 고음의 경고는 도시 치안대의 신호음이었다.
***
"……그래서 거리에서 소란을 피운 죄로 경비대에게 잡혀왔다구요?"
거리에서 위험한 공격마법을 시전하면 이런 큰 도시에는 몇개 있는 대단위 마나 파장 감지센서가 울리기 때문에 곧장 경비대가 달려와 체포한다. 마법사가 사용하는 공격마법으로 인한 기물파손이나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 최근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커다란 거리에 몇 개를 설치한다고 했다. 워낙 신상이라 고대의 남자 미르는 몰랐던 것이 당연했다. 다른 자잘한 마법은 알아낼 수 없지만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강한 마나의 파동은 곧장 감지해서 경비대를 불러모으게 된다.
유렌은 한심하다는 듯 오랏줄에 꽁꽁 묶여 있는 미르를 쳐다보았다. 그는 미르를 잡아온 경비대를 향해 말했다.
"제가 책임질테니 그만 풀어주도록 하세요. 후우, 그나저나 당신도 참 순순히 잡혀왔군요."
그 자리에서 신분패를 보여주며 귀족이라고 밝혔으면 적어도 이런 꼴로 잡히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미르에게 신분패를 보여주지 말라고 했다. 케르타의 왕족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더이상 거리를 맨얼굴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문제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
대신 영주인 유렌의 앞으로 이렇게 끌려왔지만 말이다.
미르는 자신의 줄을 풀어주기 위해 경비대가 근처로 접근하기도 전에 힘으로 밧줄을 뚝 끊어버렸다. 그 괴력을 본 경비대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미르는 짜증 폭발이라는 듯 소리쳤다.
"뭐냐고, 정말!! 길거리의 사내새끼들은 죄다 시아에게 눈독들이고! 시아는 신분을 숨기라고 말하고! 벌레들한테 겁주려고 마법 좀 썼더니 체포당하고! 짜증나!!"
악악대며 스트레스를 발산하는 미르의 허리를 나는 뒤에서 부드럽게 껴안아주었다.
"참아, 참아. 어쩔 수 없잖아. 대신 내일부터는 방안에서 나랑 놀자."
거리에서 그 꼴을 보였으니 다시 밖을 돌아다닐 수는 없겠지. 나는 간만의 외출을 이제 접기로 하고 미르를 달랬다. 미르는 내 말에 귀가 솔깃해서 화를 전부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단 둘만 있는 좁은 밀실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둘만의 달콤한 스위트 타임을 보내자니? 조, 좋아! 좋아!!"
그런 말은 안 했어!
"어쨌든 좋아!"
미르는 그 말에 확 들떴지만 유렌은 오늘따라 기분이 무척이나 좋지 않아 보였다. 표정은 그대로 웃는 채였지만 유렌의 기운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유렌에게 다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유렌, 무슨 일 있었어?"
"……아, 그게……. 지금 조금 불쾌한 손님이 와 있습니다."
유렌은 나직하게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손님?"
유렌은 한숨을 쉬었다. 미르와 내가 외출한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유렌은 설명할 것도 없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뒤로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든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라엘 위스피닌 공자.
유렌의 이복형인 그는 위스피닌 공작을 닮아 은발의 머리에 유렌보다 더 진한, 진짜 남부인의 짙은 코코아빛 피부를 갖고 있었다. 키는 유렌과 비슷했으나 우성인 엘프의 유전자를 많이 이어받아 부친과 이목구비가 닮지 않은 유렌과 달리 위스피닌 공작의 모습과 약간 닮아 있어서 진짜 공작의 아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라엘의 뒤에 위스피닌 공작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위스피닌 공작은 나를 보더니 자비롭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시오, 시렌느 공작?"
존댓말을 쓰던 이전과 달리 한층 낮아진 말투였다. 같은 공작이지만 그는 내 남편의 아버지였기에 관계상 위스피닌 공작이 나보다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내 남편의 아버지일 경우에서 뿐이다. 유렌은 그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공작의 태도는 짐덩어리인 아들을 맡기고 굽신거리던 전과는 사뭇 달랐다. 이젠 그 아들도 짐덩어리가 아니고, 내가 맡은 것이 아니라 동등한 부부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곳에 오셨다는 얘기를 마란 후작으로부터 들었소. 안 그래도 요즘 가업을 장자에게 물려주어 한가해 있던 참에, 후작에게 그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방문한 것이오. 마침 운이 좋았지. 그런데 이 아들녀석은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를 박대하는군."
이런. 마란 후작은……. 사업차 여길 왔다고 했으니 당연히 위스피닌 공작을 만나게 되는 것일텐데. 우리에 대해 위스피닌 공작에게 말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했어야 하는데 그만 간과하고 말았다. 위스피닌 공작과 유렌에 대해 전혀 모르는 마란 후작이 유렌의 아버지인 공작에게 조금의 의심도 없이 순순히 우리에 대해 말해버린 것도 당연하다.
"허나 내가 어째서 내 아들이 결혼한다는 얘기를 타인의 입을 통해 들어야만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군. 철없는 내 아들이 무엇이라 말했는지는 대충 알겠지만, 공작, 자네까지도 남편의 부친에게 결혼소식을 알리지 않는 것에 동의하다니."
위스피닌 공작은 마치 유렌이 나와 결혼하고 나서야 유렌에게 아버지 행세를 하고 내게 장인어른 취급을 받아야겠다는 듯 행동했다. 나는 유렌을 바라보다가, 다시 위스피닌 공작에게 말했다.
"저는 유렌의 의사를 존중해주고 싶습니다."
"집안의 기강은 가장이 잡는 것이오. 그대는 내게 결혼소식을 알릴 수 있었소. 그리고 별개의 얘기이지만 그 마란 후작이 공작께 관심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그대는 내 소중한 아들의 배우자이니 이제부터라도 처신을 바르게 해 주었으면 하오."
눈썹을 꿈틀하며 그렇게 말하는 위스피닌 공작의 눈은 내 옆의 미르에게 살짝 머물렀다. 나는 주춤했지만, 그 맞은편에 선 유렌의 눈빛으로 인해 내가 공작에게 위축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뻔뻔하게 나갔다.
"고작 스무 번째 아들의 결혼 소식 따위에 바쁘신 위스피닌 공작께서 방문하실 리가 없을 테이 종이를 아껴 식권보호에 기여하고자 초대장을 보내지 않은 것을 너무 불쾌해하지는 말아주세요."
"……무슨 소리요?"
"당신은,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해 당혹스러운 공작의 되물음에 유렌이 딱 잘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위스피닌 공작이 또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유렌은 그를 몰아붙였다.
"당신이 뒤늦게 내 부친 행세를 하며 시아에게 빌붙으려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혼 소식도 알리지 않았던 겁니다. 이제 와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당신은 내가 어릴 때 단 한 번도 내게 찾아온 적 없고, 나는 오직 내 어머니에게 자랐습니다. 그 뒤로는 스스로 무관심 속에서 당신 아들들의 괴롭힘을 감내하고 모든 것을 해와야만 했습니다. 그런 주제에 이제서야 아버지 행세라니. 어이가 없군요."
점점 감정적으로 변해가는 유렌의 팔을 조용히 감싸안으며 나는 그를 물러서게 했다. 과하게 침착을 잃었으니 마음을 조금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위스피닌 공작에게 내가 말했다.
"오늘은 유렌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니 다음에 다시 방문해주시겠어요?"
공작은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이는군. 대신 오늘은 늦었으니 이 쪽에 머물겠소."
"물론이지요. 집사, 저 분을 서쪽 처소로 안내해주시고 극진히 대접하세요. 아들의 집에 있는 동안은 자기 집처럼 편하게 지내주세요."
*식권 : 식물의 권리. (비슷한 말로 인권 등이 있다)
*털갈이 하는 그렘린 : 짜증나는 녀석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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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헉ㅜ, 당분간은 노블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너무 노블만 나온다고 하셔서 일부러 예정된 노블 하나를 뺐는데……, 음……. 노블 콜?
마란 후작은 2챕 이후에 다시 나옵니다! 그때까지 숙성시켜서 먹을거에요!
슈는 아직입니다! 3챕 이후 슈가 나올 땐 좀더 임팩트한 등장을……, 시키고 싶다능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