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공작님, 제발! -->
"공작님께서는 좋은 향기가 나네요. 우리 상회에서 나온 어떠한 향수보다도, 아니, 세상의 그 어떠한 꽃 향기보다도 더 유혹적인……."
은근한 그의 말에 나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는 향수를 쓰지 않아요."
"그럼 이 향기는 저의 환상인걸까요? 후후, 이상한 남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죠? 하지만 정말로 환상이 아닌 향이 나는걸요."
향의 탓인지 마란 후작의 말이 조금이지만 감정적으로 변했다.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선 밖을 구경만 하던 나와 반대로 마란 후작은 내가 자신의 뜻대로만 넘어오지 않자 조금 초조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초조함을 반듯한 얼굴 뒤에 완벽히 숨긴 채 내게 부탁했다.
"이전에 했던 약속 말입니다만, 공작님께서 좀더 정확한 스케줄을 말씀해주시면 제가 초대장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나는 몰랐다는 듯 괜히 놀란 척 눈을 크게 떴다.
"어머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나중에 인연이 있다면 조만간 또 만나겠죠."
예의상 한 말인줄 알았다는 듯 그렇게 말하자 마란 후작은 하하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인연이라니요. 저는 우리들의 사이를 그런 우연으로 묶고 싶지 않답니다. 게다가 공작님과 저는 친구잖아요. 그냥 제 저택에 찾아오시면 제가 없는 날이 많기 때문에 미리 다음 약속을 잡아두려는 겁니다. 저는 보기보다 공사구분이 확실한 사람이라서 보통 사이라면 이렇게까지 하진 않아요. 공작님께만입니다."
"후응, 그렇군요. 언제쯤 시간이 되려나……."
그의 말투의 느낌이 묘하게 친근하게 바뀌었다. 나는 호호 웃으며 여유롭게 대답했지만 후작이 왜 그렇게까지 다음 시간에 연연하는지는 몰랐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건가?
"건국 축제즈음이면 아마 수도에 있을 거에요. 이번 축제에는 참석하기로 했거든요. 그 때 다시 뵈어요."
후작은 비교적 순순히 계획을 말해주는 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 때가 너무나도 기다려질 겁니다."
"아이, 후작님도 참."
입에 발린 말이었지만 꼭 그런 의도만은 아닌 듯 했다.
"페릴이라고 불러주시겠어요? 더불어 제게도 공작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영광을 주셨으면 기쁘겠습니다."
페릴이라면 그가 처음 자신을 소개했을 적에 말했던 그의 퍼스트 네임이었다. 나는 승낙하며, 게다가 거기에 일부러 경칭을 떼고 친근하게 불렀다.
"좋아, 페릴. 페릴이라고 불러도 되지요?"
일부러 반쯤 떠보듯 시키지도 않게 한층 말을 낮췄지만 오히려 후작은 그런 행동에 놀라거나 불쾌해하기는커녕 더욱 반가워했다. 이걸로 그가 내게 접근하는 이유의 절반은 확실해졌다. 나는 그와 나의 거리를 좁힐듯 말듯 한번 당겨보았다.
"물론이지요, 세이시아!"
"페릴도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와도 좋아요. 편지 보내줄테니까."
맛있어 보이는 그의 달콤하고 음흉한 눈길이 아니더라도 일단 페릴 마란 후작은 제국의 이름난 대 재력가로서 호의를 받아두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정계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는 사람이지만 완전히 나와 다른 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럼 저는 이만 방으로 가볼게요. 페릴도 잘 자요."
내가 더이상 그의 방에 머물지 않고 일어나려 하자 페릴은 약간 아쉬운 듯한 시선을 주었지만 시크하게 일어났다.
"방문 앞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내일 아침식사는 하고 가시는 거죠?"
"음, 페릴이 원한다면."
나는 둘 중 어느 쪽의 대답인지 모를 애매한 말을 하며 빙그레 미소짓고는 문을 열었다. 다음에 만날 때가 나 역시 기대된다.
***
르팔을 떠나 세레티로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 비교적 젊은 세레티의 영지 대리인은 전 세레티 성의 집사였는데 유렌이 자신의 직위를 밝히자 곧장 수선을 떨며 영주님께서 오셨으니 방을 내어놓고 음식을 차려올리라 알렸지만 유렌의 제지로 간소한 절차를 거쳐 성 안을 잠시 안내만 하기로 했다.
나는 미르와 함께 유렌의 방에서 창문을 열고 세레티의 경치를 구경했다. 영주의 방에서 보이는 세레티는 내 영지의 성에서 내려다보던 시렌느 공작령의 풍경보다 넓고 푸르진 않았지만 훨씬 더 번화해보였다. 내 영지에서 수입을 유지하려면 농사만 적절히 지으면 되는데 이런 상업도시에서 수입을 늘리려면 매일 처리해야 하는 일이 꽤 복잡할 듯 했다.
"그나저나 여기가 유렌의 영지구나……."
"아니, 시아의 영지입니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유렌이 내 중얼거림에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부부 사이에 영지가 따로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소유지가 있더라도 방금처럼 대리인을 내세워서 관리만 시킬 뿐 직접 다스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부부잖습니까. 여기도 당신의 소유지입니다."
"하지만 유렌이 황제에게 받은 건데 적어도 소유권정도는 유렌이……."
"저 또한 당신 소유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같은 의미겠죠."
부드럽게 말한 유렌의 발언에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밖을 힐끔 바라보며 일러두었다.
"이곳은 용병들이나 모험가들이 매우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입니다. 밖에 나가는 건 위험하니 그동안은 방 안에서만 지내다가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가지요."
"……."
나가보고 싶었는데…….
내 영지도 아닌 곳에서 한가하게 놀며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었는데…….
다른 데 나가지도 말고 오직 방 안에서만 지내라니……. 너무해에……. 여행 온 목적은? 응? 응??
커다란 붉은 빛 눈동자에 물기를 적시며 금세라도 넘쳐흐를 듯한 애틋한 시선으로 유렌을 바라보자 그는 차마 내 눈빛을 거부하지 못하고 미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르가 씨익 웃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미르헬과 함께라면 위험하진 않을 테니까. 흥……, 이건 그 때의 답례입니다."
마지막 말은 미르에게 한 것이다. 아마 며칠 전의 미르의 배려를 신경쓰고 있었나 보다.
"좋아! 나한테 맡기라구!! 내가 아주! 잘! 시아를 보살펴줄테니까. 쮸쮸쮸 시아 이리와♥♥♥"
미르는 유렌의 말에 의기양양하게 내 등을 와락 껴안았다. 이곳에 머무는 며칠간 미르는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 잔뜩 돌아다녔다. 그 방향은 유렌과 다르게 귀족들만 다니는 깨끗하고 깔끔한 거리나 유명하고 값비싼 음식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미르는 평민의 거리를 평민에 가까운 옷차림을 하고 돌아다니며 낡은 가게와 허름한 음식점을 자연스럽게 드나들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르는 무척이나 능숙하게 맛있는 음식점을 찾았고 고른 데이트장소도 실패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십수 년을 이렇게 돌아다녔으니까 인간의 마을 거리에서 어디가 유명한 식당이고 어디가 맛없는 식당인지정도는 겉으로만 봐도 알아. 그리고 대체로 거리의 구조도 잘 알고 있지. 이거 맛있지? 응?"
미르의 주장에 유렌은 점심식사로 주문한 스튜에 적신 빵을 먹여주며 내게 물었다.
"시아, 맛 괜찮습니까?"
유렌은 둘째 날부터 격일로 자리를 비우고 나와 미르를 따라왔다. 미르는 못마땅하다는 듯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유렌을 바라보았다.
"……야, 너 일 안하냐? 세레티에 일하러 온거 아냐? 그 영지 인수 어쩌구 한다며 나한테 시아를 맡겼잖아?"
"그것도 일이지만 이건 시찰입니다, 시찰."
"시찰? 무슨 시찰을 이틀에 한 번씩 해?"
미르는 어이없다는 듯 유렌에게 말했다. 유렌은 길거리 시찰을 빙자해서 미르와 단 둘만 두기 불안하다며 하루 걸러 따라와서 결국 이틀에 한번은 셋이서 함께 돌아다니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꽤 많이 끌게 되었다. 며칠간 우리는 영지에서 조금 유명해지게 된 것 같다. 아아, 유렌도 이럴 때 가끔씩 보면 아직 어린애라니까. 귀여워어♡ 내가 유렌의 잎을 붙잡아 잎짱을 끼자 그 모습을 노려보던 미르는 반대쪽 내 잎을 한장 쥐고 자신의 양손으로 꽉 껴안았다.
유렌이 영지 일로 잠시 아침부터 자리를 비운 날. 영지 동쪽의 큰길 옆, 닭이 그려진 푸른 간판의 식당의 한쪽 윈도우는 전면이 유리였다. 그 곳에 미르와 단둘이서 수프를 한 컵씩 주문하고 앉아 있으면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여행자들의 길목이라는 말이 사실인지 특이한 차림의 특이한 이방인들이 심심치 않게 지나다녔다.
나는 후추가 위에 가득 뿌려진 수프를 한 모금 마시며 몸을 떨었다.
"으으, 역시 추운 날은 스프가 제격이지."
분명 예전엔 추운지도 모르고 따뜻한 실내에서만 지냈고, 왠지모르게 몸이 춥다면 뜨거운 홍차나 초콜릿 한 잔을 조금 마셨지만 이곳에 오면서 어쩐지 소박해진 것 같달까, 고작 4토크짜리 스프 한 컵으로 겨울을 버티다니. 요 며칠간 미르를 따라다니며 서민들 거리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고급 스테이크에서 길거리 붕어빵으로 퇴화한 것 같은 미묘한 기분이지만 그래도 서민 문화는 나름대로 즐길 만 했다. 나는 스프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야, 저 여자 죽인다."
내가 한 말은 아니다. 물론 미르가 한 말도 아니었다. 나는 앞 유리창에 비친 뒷모습을 흘끔 바라보았다. 한 검은 가죽두건을 쓴 키큰 용병이 이 쪽을 보며 자신의 동료에게 말하고 있었다.
흥, 내가 예쁜 거야 당연하지. 매일매일 꽃잎을 보송보송하게 닦는 것은 물론이고 꽃잎색이 예쁘게 나게 하기 위해 깨끗한 물을 마시고 잎의 톱니 끝과 줄기들도 언제나 부드럽게 관리하고 있는걸. 이렇게 예쁜 장미꽃은 보기 힘든 거니까 눈 앞에 있을 때 잘 봐둬.
"얼굴 좀 봐봐, 살결이 완전 새하얗다. 저런거 처음이야. 머릿결도 좋고 생긴것도 완전 인형같잖아."
동료 용병은 촌스럽게 감탄을 내뱉는 그를 못마땅하다는 듯 보더니 나를 보았다. 그리고 흠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매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병신아, 귀족이잖아! 주둥이 닥치고 뒤로 물러서."
"뭐, 귀족? 귀족이 왜 이런 데 오겠냐? 너야말로 병신 아냐? 부유한 집안 외동딸이거나 하는 거겠지 뭐. 귀족들은 내가 봐서 아는데 옷부터가 우리들과는 다르다고."
옆의 용병은 동료가 워낙 자신감있게 귀족이 아니라고 말하자 그에 동요해서 혹시나 하며 나를 다시 살펴보았다. 나와 미르는 눈에 너무 띄지 않기 위해서 평민들의 겉옷을 입고 있었다. 미르는 그제서야 그들이 나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리며 뒤를 휙 돌아다보았다. 하지만 유렌이 그랬을 때와는 달리 두 용병은 뭘 보냐는 듯이 빤히 미르를 쳐다보았다. 키는 크지만 상대적으로 마른 편인 미르는 덩치부터가 유렌에게 밀린다. 실제로 힘은 무지막지한데 외모만큼은 전혀 위압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미르가 그 점을 간과하고 늘 유렌이 하는 것처럼 남자답고 당당히 행동한다는 것이다.
"어이, 너 내 여자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유렌이 같은 행동으로 같은 대사를 했다면 용병들은 유렌의 눈빛과 태생적인 기품과 남성성에 위축되어 꼬리를 말았겠지만, 미르는 본래 여자같은 얼굴인데다가 평민 위장 중이다 보니 빈티가 줄줄 흐르는 옷에 원체 키가 크고 근육이 슬림해서 겉에서 보면 상당히 말라보였다. 그 용병 둘은 부실해보이는 미르의 모습에 풋 하고 비웃었다.
"네녀석의 여자라고?"
"야야, 여자 쪽이 아깝다! 그렇게 비쩍 말라서 걸어다니기나 하겠냐? 그나저나 이 녀석도 완전 기생오래비처럼 생겼잖아? 혹시 너도 계집 아냐?"
미르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이것들이……."
미르는 둘 중 앞으로 나선 용병 하나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휘어잡았다.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이미 구경꾼들은 식당 안팎으로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런 구경꾼들이 성가셨는지 미르는 으르렁거리며 주변을 향해 일갈했다.
"꺼져, 뭐 구경났다고 쳐다보는거야, 이 털갈이 하는 그렘린 같은 것들이!"
하지만 목소리만 빼면 여자다운 미르의 호통에 물러서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좋은 구경났다며 이리저리 사람들을 더 불러모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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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순히 이 편수와 댓글을 교환하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랜만에 구걸해보네요ㅠㅠ 댓글좀 굽신굽신ㅜ
오늘은 날씨가 춥지 않은데 털양말 털바지 털외투를 입고 나갔더니 더워 죽을뻔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