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공작님, 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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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렌이 안내한 식당은 전망이 좋은 3층 건물이었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달린 고급 레스토랑은 우리 말고도 몇몇 상인이나 귀족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상인들이 손님을 접대하는 용도로 자주 오기도 하는 듯 비즈니스 얘기를 하는 남자들이 많았고, 분위기 탓인지 젊은 남녀들이나 준남작 급의 귀족으로 보이는 귀부인들끼리 서로 얘기를 하고 있기도 했다.
셋이서, 그것도 남녀가 섞여서 오는 경우는 드물어서 웨이터는 우리를 창가의 4인용 테이블로 안내했다. 유렌은 내 맞은편, 미르는 내 옆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야 먹여주기가 편하고, 옆에 앉아야 나한테 달라붙어 부비거리기 편하니까 자연히 잡힌 자리배치였다.
"시아 뺨은 너무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것 같아~♡"
"아이 참, 남들 보는 데서 그렇게 달라붙지 마."
미르 정말 응석쟁이라니까. 그치만 귀여워. 나는 발그스름하게 풀어진 루비 빛 눈동자로 내 얼굴에 뺨을 비비는 미르를 남들 눈치를 보며 살며시 밀어냈다. 둘만이었다면 이대로 넘어뜨려져 줬겠지만 식당에서 과한 스킨십은 금물이지. 미르는 나를 껴안고 바싹 붙어 앉았다.
"그리고 엉덩이도……."
거, 거긴 만지지마아!!
은근슬쩍 남의 눈에 안 띄게 몰래 엉덩이에 손을 가져다대는 미르를 살짝 꼬집었다. 하지만 팔을 꼬집는 내 손에 그는 더욱 흥분해서 주저없이 손을 밀어붙였다.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나를 이런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당연히 유렌이었다.
"식당에서 쫓겨나기 싫으면 단정하게 계십시오."
미르는 쳇,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여전히 붙잡은 채였지만 그래도 엉덩이가 아니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그 때 마침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다 주었다. 메뉴판을 펼친 나는 가능 메뉴에 감탄했다.
"우와, 고기랑 과일이랑 샐러드도 있다."
"이 정도의 고급식당이면 겨울에도 야채가 공수되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쉐프가 만든 맛있는 식량으로 배부르게 식사까지 끝내고 다시 거리로 나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던 나는 겨울이라 일찍 어둑해져가는 하늘 너머로 성문 앞을 바라보았다. 마차와 짐꾼들이 있는 대 일행이 성문 앞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저기 저건 뭐 하는 거야?"
유렌은 내가 가리키는 곳을 보더니 대답했다.
"상인들의 출입단속입니다. 상인이외에도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영지에 들어갈 때는 따로 물건 검사를 하게 됩니다. 가끔 밀수입을 하거나 금지된 물건을 몰래 파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저렇게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엄청 큰 상단인가봐?"
"그렇겠죠. 아마 손꼽힐 정도의 거상이 아닐까요? 이 옆의 위스피닌 영지는 상인들의 주요 출입 통로이니 저만큼의 대 일행이 오간 적도 많습니다."
나는 그 줄을 기웃거렸다. 위스피닌 영지의 외성 밖에 이 도시가 있었으니 여기를 거쳐 영지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다. 그곳에 줄을 서 있는 짐꾼이나 호위 용병들은 오랜 여행에 꽤나 지쳐 보였다. 물건이 많으니 검사작업도 오래 걸리는 모양이다. 상단의 마차와 짐마차들에는 육각형 안에 백합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어디서 본 마크인데?
시렌느 영지는 워낙 구석진 마을이다 보니 저런 큰 상단이 다니지는 않는데. 물론 용병도 없고 마법사도 없다. 농사 하나로 흥한 영지라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그런 영지에서나 수도의 벨벳 로드(귀족들이 다니는 화려한 번화 거리)만 다녀본 나에겐 이렇게 직접 돌아다니면서 여러가지를 겪는 것이 아주 좋은 경험이 되었다. 전에 유렌이 말해줘서 이 사람들이 용병이라는 것도 한눈에 알아보게 되지 않았는가.
줄을 선 사람들을 따라 성벽 앞까지 주욱 걸어가보았다. 유렌은 내 뒤에서, 미르는 내 바로 옆에서 따라왔다. 어느 순간부터 유렌이 걸음을 뚝 멈추었다. 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유렌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하얗고 높은 위스피닌 영지의 외성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르는 유렌이 최근 침착함을 잃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하다. 물론 그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나도, 유렌이 이곳에 가까이 올수록 기분이 언짢아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르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 먼저 여관에 가서 기다릴게. 둘다 해 지기 전까지는 들어와야 해."
"응."
"그리고 너, 시아 무사히 데려와."
유렌에게 그렇게 말한 미르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간만에 단 둘이구나. 이것이 미르 나름대로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가끔, 정말 가끔이지만 그는 참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유렌은 미르가 떠나자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더니 내 옆으로 두 걸음 걸어와 내 손을 잡았다.
"가고 싶지 않은 거지?"
"……."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안에 들어가지 말고 그냥 옆으로 지나서 갈까?"
나는 천천히 그의 손을 감싸쥐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위스피닌 영지를 빙 둘러서 가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내일 안에 도착할 수는 있었다. 유렌은 좀더 내 손을 강하게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오늘 그는 너무나도 연약해보였다. 왠지 모르게 보호본능을 자극한다고나 할까. 뭐, 뭔가 너무 귀여워!!! 오늘은 미르보다도 귀여워! 꼬옥 안아주고 싶어. 언제나 그는 나를 안아주고 보호해줬는데 오늘은 왜인지 반대로 내가 유렌을 지켜주고 싶었다. 아, 아, 안아도 될까? 두근두근! 몰래 유렌의 등에 손을 뻗는데, 갑자기 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와서 그만 멈칫해버렸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다 지난 일이니까요. 위스피닌 영지는 번화한 상가들이 많으니까 거리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그냥 이대로 가도……."
나는 유렌의 호의를 모두 받아주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기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유렌이 해주는 것이라면 절대 사양하지 않고 무엇이든 받았지만, 오늘의 그의 기분은 좀 복잡한 것 같았다. 나는 결심했다. 그래, 불편하면 어때. 그냥 여기를 뛰어넘고 가자고.
그렇게 결정하기 위해 유렌에게 입을 열려는 그 때,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나는 놀라서 위를 바라보았다. 줄을 선 앞쪽 마차에서 반갑다는 표정의 금발 남자가 창문을 열고 이 쪽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거 누구십니까! 시렌느 공작님과 위스피닌 백작님 아니십니까? 혹시나 했는데 정말 두 분이시군요.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굉장한 우연이네요!"
성문 입구 옆에서 대기하던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금발의 남자가 부드러운 동작으로 마차 위에서 내려왔다. 매끄럽고 흰 피부에 눈매가 조금 날카로워 보이는 미남이었다.
……파티에서 본 적 있는 남자였다. 잿빛이 섞인 부드러운 금발을 한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는 짙은 블론드 눈썹과 갈색과 푸른 색, 녹색이 조금씩 섞인 눈동자를 하고 있었는데 훤칠한 인상에 하늘색의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반듯하고 뾰족한 칼라가 깔끔한 그의 성격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 같다. 시트린 상회의 총 책임자이자 주인인 마란 후작이었다.
그럼 이 상단이 시트린 상단이구나! 어쩐지 백합 문양의 육각형 무늬가 어디서 많이 본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트린 상회의 화장품 병에 새겨져 있던 무늬였다. 드물게 상쾌한 느낌이라 나도 시트린 상회의 샤워소프는 자주 쓰고 있는 편이다.
시트린 상회는 흑의 대공령에 주로 물건을 독점공급 가까이 많이 판매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마리오타 자크루, 초대 적의 대공의 방계 가문이라고 했다. 선대의 친분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번 대의 마란 후작도 흑의 대공파! 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었으면 편리할 텐데, 원체 상인의 친분이란 변통이 심하니 정계에서 그는 거의 중립과 같은 입장이었다. 중립은 별로 중요치 않게 생각해서 상대하지 않았기에 나는 그와 그다지 말을 나눠본 일이 없다. 특히 마란 후작은 적의 대공과의 혈연관계도 무시할 수 없고 흑의 대공쪽과의 사업적인 깊은 친분관계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세리안과 마란 후작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젊은 시절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달라 의견충돌이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세리안과 함께 있을 때는 구경도 못했고, 세리안이 없을 때 단 한번 직접 인사만 해 봤을 뿐이다. 유난히 마란 후작이 화려한 인상이고 반짝반짝 빛난다고나 할까, 워낙 시선을 끄는 특이한 분위기라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나 마란 후작은 멍하니 내 얼굴에 시선을 빼앗긴 듯 하다가도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자작은 있습니까?"
"이번에 오빠는 함께 오지 않았어요."
우와, 그거 다행이군요, 사실 시렌느 경은 좀 무서워서 말이죠, 라며 후작은 생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실례한다는 듯 다시 옷차림을 가다듬고,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전에 말씀드린 적 있다시피 페릴이라고 합니다, 공작님께서는 남편 분의 친가에 방문하실 예정이신가요? 그런데 수행원이 안 보이네요. 둘만입니까?"
마란 후작은 주위를 이곳저곳 둘러보며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유렌이 했다.
"같이 온 사람은 여관에 있습니다. 내 영지로 가는 간단한 여행길이고 내가 있으니 특별히 호위 따위는 필요없습니다."
자칫 자만으로도 들릴 수 있는 유렌의 말에 마란 후작은 눈썹을 들어올렸다. 미묘한 감정의 표출이었다.
"하긴, 뭐 그렇겠군요. 백작께서는 검 실력만으로 제국에서 손에 꼽는 인재 중 하나라지요? 서서 얘기하기 뭣하니 비록 좁지만 마차 안으로 모시고 싶은데 어떻겠습니까?"
마란 후작은 유려하고 능숙한 예법으로 짐 검열이 끝날 동안 함께 마차에 앉아 대화하지 않겠느냐고 정중히 제안해 왔다. 나는 유렌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 거절하려고 했지만 유렌도 그다지 싫은 눈치는 아니었고(사실 그냥 멍해보였다), 어쩌다 보니 마차에 앉아 그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으으, 이러려고 온게 아니었는데, 마란 후작의 깔끔한 외모와 매력적인 화술은 뭔가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유렌도 특별히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으니 일단 얘기하고야 있지만 후작은 상인, 그것도 고급품을 주로 유통하는 상단주라는 지위상 농업 위주의 영지를 가진 내 입장에서 크게 필요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고 그 또한 내게 잘 보여서 얻을 이득이 특별히 없었다. 오히려 상업의 주요지에 위치한 영지의 주인인 유렌이라면 모를까. 마란 후작은 유렌보다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친근하게 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도, 세레티에도 처음이란 말씀이지요?"
세레티는 유렌의 영지 이름인데, 그렇게 따지면 위스피닌 영지도 르팔, 시렌느 영지도 엘소르트라는 지역명이 있었다. 지금 이곳 리온과 르팔, 세레티는 서로 붙어있었는데도 지역명이 각각이었다. 시렌느 영지는 주변의 산과 숲까지 넓은 공간을 전부 통틀어 엘소르트 지역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말이다. 르팔과 세레티 사이에는 넓지만 작은 동산이 있었기 때문에 두 땅이 처음부터 나눠지게 되었고 리온은 르팔이 위스피닌 영지가 되면서 외성이 만들어지자 그 외성벽 밖에 생기게 된 상인들의 작은 거주지가 마을로 발전하면서 영지의 길목 역할을 하는 도시로까지 번화한 케이스라 그렇다고 하더라. 뭔가 지역 하나에도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 같다.
"이상하네요, 바로 옆에 남편 분의 고향이 있는데도 들어가지 않고 고작 리온에서 머무르시겠다니."
"일단 여기 여관까지 잡아두었기 때문에……."
"르팔에 들어가면 제가 가장 좋은 호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시트린 상회에서 운영하는 숙박업소를 공작께도 보여드리고 싶군요. 아아, 이제 곧 검열이 끝날 것 같네요."
내게 은근히 호감을 내비치는 마란 후작은 자꾸 자신과의 동행을 제안하며 다른 쪽에서도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고자 정중하면서도 조금씩 호의를 권했다. 그는 나를 위스피닌 영지 안으로 자기가 데리고 가고 싶은 듯 했다. 위스피닌 공작은 흑의 대공 휘하의 사람이고 시트린 상회 역시 흑의 대공의 후광으로 큰 거나 마찬가지이니 둘은 꽤 친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동업이지 않은가. 마침내 후작은 나에게 넌지시, 하지만 분명히 제안을 했다.
"제게 공작님을 접대할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마침 저도 이곳에서 잠시 머무를 예정이었으니 상업 영지의 아름다움을 직접 안내해 드리지요. 르팔의 밤은 무척이나 화려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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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 눈에는 지금 밥을 익히고 있는데 간식이 앞에서 알짱대는 모양으로 보일듯요. 일단 밥이 우선이지만 기회가 되면 간식도……. 라는 여자의 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