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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118화 (118/226)

<-- 6. 공작님, 제발! -->

***

다음 날 아침은 어제보다는 나았다. 뒷일을 우려해 세르의 방에서 나와 간신히 내 방까지 도착해서 잠들었는데 나는 내 오른쪽에 누워 있는 유렌의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고 내 왼쪽에 달라붙어 누운 미르는 내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이건 샌드위치인 건가? 묘한 상황에 멍하니 일어나서 내 등에 파고드는 미르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갑자기 내 어깨를 유렌이 덥석 안았다.

"시아, 깼습니까?"

"우응."

유렌도 일어나 있었구나. 나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즉시 미르도 잠에서 깨어나 내 손목을 쥐어당겨 내 손등에 키스했다.

"잘 잤어?"

"오늘은 일이 있습니다. 일단 아침식사를 준비해 오라 이르겠습니다."

유렌은 미르의 행동에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고 그렇게만 말하며 방에서 나갔다. 우와, 어제 대화가 잘 해결된 건가? 왜인지 둘 사이에서 긴장된 분위기가 해소된 느낌이다. 시종인 라르슈가 금발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쟁반을 들고 왔다가, 갑자기 미르를 보더니 딱 멈춰섰다.

"……."

"……?"

당황할 만도 하지. 어제부터 내 새로운 첩에 대해 집안 사람들도 입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으니 카딘이나 라르슈도 새로 온 첩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소문에 제지가 없었으니 더 빨리 퍼졌다. 그런데 그 첩이 사실은 케르타의 전 왕, 그것도 라르슈의 주군이었지 않은가.

그러나 미르는 태연하게 손을 저어보이며 말했다.

"누구야? 시아의 직속 시종은 남자야?"

"……네 부하였잖아! 호위자 라르슈, 기억 안 나?"

보다 못해 내가 지적해 주자 미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중얼거렸다.

"끝난 삶(유희)에 대해서는 보통 언급하지 않아. 흠, 하지만 확실히 기억은 나. 그 금발 노예 맞지. 엄청 말 안 들었던."

남말 하고 있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잖아? 보통 노예가 아니라 네가 굴복시켜서 호위자로 삼았잖아! 나중에 알았지만 미르는 잊은 것이 아니라 그냥 기억나지 않는 척 한 거라고 한다. 드래곤은 장난의 삶에 미련을 갖지 않으니,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고 일부러 현생(새 유희)에서 없는 인연을 만들 필요도 없으니까. 그러면 재미없잖아, 라면서. 나에 대해서는 유희가 아니니까 나는 예외인 듯 하지만.

"그런데……, 내가 줬긴 하지만, 저 녀석을 그냥 시종으로 쓰고 있는 거야?"

미르는 멍하니 라르슈의 자수정 귀걸이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하지만 내가 관심을 보이며 되묻자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냐, 밥이나 먹자."

잼과 빵이 있는 쟁반을 침대 옆 탁상에 내려놓은 라르슈는 한동안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서 미르를 쳐다보다가, 내게 물을 분위기가 아니라고 느꼈는지, 아니면 미르 앞이라서 그런 건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미르는 가장 먼저 방금 구워 온 동그란 빵을 한입 크기로 찢어 머루잼을 발라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얌전히 침대에 누워 여왕님처럼 받아먹었다. 미르는 일부러 나에게 빵을 먹이면서 내 입술에 자신의 손가락 끝을 닿게 한다던가, 고의로 내 입가에 잼을 묻히게 한 후 입술로 핥아먹었다. 유렌이 먼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들어오다가 우리 모습을 보고 미르에게 충고했다.

"무슨 짓입니까, 시아에게 먹이는 음식은 반드시 자신이 먼저 맛보고 맛이 괜찮은지, 덜 구워진 부분은 없는지 확인해야 하잖습니까."

……유렌도 그렇게는 안 하잖아?

미르는 유렌이 주는 잘못된 정보에 수긍하며 빵을 한입 베어먹어 보았다.

"으음, 그렇구나. ……이 빵은 괜찮은 것 같은데……?"

베어문 빵조각을 쳐다보는 미르의 중얼거림에 유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직 쟁반에 남은 여러 개의 빵 중에서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유렌은 다른 빵을 작게 찢어내 우유에 적시고 자신의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 부드러워진 빵을 키스로 직접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그가 먹여주는 말랑말랑 흐물흐물한 빵을 우물거리며 불평했다.

"유렌, 이런 건 먹기도 먹이기도 너무 불편하잖아. 그냥 내가 내 손으로 먹을……."

"그, 그거 좋은 방식이다! 시아, 아침밥 전부 내가 먹여줄게!!"

가만히 남은 빵을 집으려는 나보다 훨씬 미르가 빨랐다. 그는 유렌이 알려준 방식에 흥분해서 냅다 쟁반을 뺏어들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올렸다. 자, 잠깐만!!! 나는 잠에서 덜 깬 채로 어설프게 대충 저항해 보았지만 결국 소용없었고 미르가 먹여주는 아침식사를 끝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식사 후에는 옷을 갈아입히는 차례였다.

이런 겨울에 드레스룸은 따끈한 침대 위보다 추워서 가기 싫었다. 드레스룸에서 내 옷을 가져온 유렌은 천천히 내 잠옷 상의를 잡아당겨 벗겼다. 매우 능숙하게 내 옷을 전부 벗기는 모습을 미르가 옆에서 하악거리며 관람했다. 미르는 내가 알몸이 되자 곧장 나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유렌이 제지하며 그를 혼냈다.

"미르헬, 당신은 거기서 가만히 옷 입히는 방법이나 배우세요. 시아를 보살피는 법은 아직 제가 더 익숙하니까."

"……나도 곧 따라잡을 수 있어뿌."

달랑 한 마디로 미르를 쫓아낸 유렌은 속옷부터 차례대로 입혀주기 시작했다. 유렌 취향의 살짝 비치는 분홍 색 레이스 팬티, 유렌이 좋아하는 얇은 실크 브래지어, 그리고 유렌이 자주 내 다리를 만지작거리며 감촉을 즐기는 매우 얇은 스타킹, 그나마 팬티가 엿보이지 않게 해주는 안전하고 두꺼운 속바지, 유렌이 만지기 편해서 좋아하는 종아리 길이로 팔랑거리는 모직 겹 스커트와 유렌에게 안겼을 때 조금도 걸리지 않는 작은 조개 단추가 달린 면 블라우스. 밟기 편한(?) 중간굽의 구두. 내 평상복이다. 속은 야하지만 겉은 단정하면서, 유렌에게는 실용적이고 남들에게는 철통방어라는 걸까. 야한 모습은 그를 비롯한 애인들에게만 보여주면 충분하다는 건가. 유렌 취향이 그랬으니 자연히 나 혼자 입을 때도 이런 식으로 차려입게 된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미르는 유렌이 손을 떼자 곧장 나를 잡아당겼다.

"아냐아냐, 뭔가 달라. 시아는 그런 수수한 것보다 다른 패션이 더 어울려! 내가 실습해볼게."

그래도 잘 어울린다고 유렌이 항상 칭찬해주는데 수수하다니……. 나와 유렌이 주춤하는 사이 미르는 후다닥 달려가서 드레스룸을 급하게 뒤졌다. 이윽고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았는지 뭔가를 한가득 들고 나와서 내 앞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유렌에게 배운 대로 내 옷을 서툴게 벗기고 자신이 골라온 의상을 입혔다.

조그만 진주로 장식된 보라색의 얇은 속옷들과 굉장히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스타킹이었다. 레이스가 윗부분에 달린 새하얀 스타킹 위에 가터벨트까지 입힌 후에 무릎 위 길이의 짧은 분홍색 치마를 입혔다. 치맛자락은 짧아서 종종 들춰지며 스타킹 윗부분의 맨살이 엿보이면서도 프릴이 풍성하게 달려 있어 굉장히 귀엽고 어려 보였다. 꼭 소녀인형같은 차림이었다. ……보통 때 누가 이렇게 입고 다녀!? 게다가 나는 기혼의 여공작이라고!! 이런 모습으로 절대 못 나가!

마무리로 허리에 리본을 매 준 미르는 만족스럽게 나를 껴안았다. 인형을 껴안듯이.

조금만 움직여도 살랑 살랑살랑살랑하며 가벼운 치맛자락이 허벅지 아래에서 흔들렸다. 이건 이거대로 에로한 옷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미르 변태애!!! 이런 짧고 팔랑거리는 옷 좋아하는거지!!!

"유렌, 일 안하고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시아, 이 서류들……, 뭐야, 그런 옷은."

세르가 펜을 귓바퀴에 꽂은 채 안경을 쓰고 내 방으로 들어오다가 내 옷차림에 멈칫했다. 나는 미르를 가리켰다. 얘가 이랬어 잉잉.

세르는 외알안경을 치켜올리며 미르와 나를 번갈아보다가 내 머리에 쓴 예쁘지만 화려한 보석 장식을 벗겨주었다.

"확실히 잘 어울리긴 하지만 지금 입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일하는데도 남들이 자꾸 시아의 다리를 쳐다볼지도 모르고."

그건 싫었는지 미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세르는 빙그레 웃으며 잠시 서류를 옆에 내려놓고 내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하얀 베이지색의 옷 한벌을 들고 나왔다.

"자, 이걸 입어봐."

세르가 입혀준 의복은 유렌 것보다 더 단정해 보였으며 미르 것보다 더 귀여운 옷이었다. 넓은 치맛자락이 발목 위까지 퍼져 있는 원피스였다. 꽤 큼직하지만 심플한 디자인의 리본이 여럿 달려 있어 마치 소녀들이 입는 것처럼 귀여워 보였다. 하지만 부드러운 천이 주름 하나 없이 잘 다려져 있어서 빈틈없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넓은 커프스를 흔들어보이며 따뜻하고 편하다는 생각에 냉큼 그 위에 숄을 걸쳤다.

"좋아. 나 오늘 이거 입을래."

……어, 그런데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옷을 못 고르는 건가?

***

일하는 동안 제인과 라이언 경이 쌍으로 나를 달달 볶았다. 새 첩을 들여서 어쩌자는 것이냐고, 유망한 기사인 위스피닌 백작과 그나마 수지 맞는 결혼을 해서 땡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스스로 가정파탄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며, 그 붉은 머리의 첩은 도대체 정체가 뭐고 언제 만났으며 첩이면서 어찌 그리 거만한 태도인 것이냐는 둥 말이 많았다.

으응, 인간은 역시 불편해. 무슨 첩이니 남편이니, 복잡한 제도가 이리도 많담. 정령들에게 있어서는 여왕과 여왕의 애인의 자리라면 충분한데.

"세리안님께 듣긴 했지만 그 붉은 머리의 남자, 정말로 세리안 님과 안면이 있는 타국의 귀족입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작위와 성을 밝히지 않는 겁니까?"

제인은 그렇게 물었다. 물론 가신이 내 첩에 대해 그렇게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다. 게다가 제인은 직접적으로 내 직속도 아니었고. 하지만 지금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남편, 유렌 위스피닌 백작에 관한 것이다.

제국에서 결혼한 귀족이 첩을 들이는 경우는, 한 쪽이 그저 명목상 배우자가 된 평민의 경우거나, 부부 사이가 완전히 파탄나서 대놓고 맞바람을 피우는 경우 뿐이다. 그들은 가능성 있는 백작과 결혼함으로 세대교체를 한 시렌느 가문이 안정세를 찾아가고 나 역시 유렌과 사이가 좋아 보이자 모든 일이 잘 풀리겠거니 행복해하다가 내가 첩을 들이자 그런 안심이 깨지지 않을런지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나와 유렌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물었다.

"아무 문제 없는데요."

실제로도 전혀 변화 없는 나와 유렌의 태도를 그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인은 그에 그치지 않고 유렌과의 잠자리가 불만스러운지에 관해서도 물었다. 그보다 남의 부부 관계에 무슨 그런 참견씩이나……. ……라이언 경은 그에 관해 일절 묻지 않았다. 안 물어보니까 더 불안하다, 새삼 잊어가고 있던 그 정원에서의 일이 다시 기억나버리잖아! 오래된 일이라 그때만큼 쪽팔리지는 않지만 그 격렬한 모습을 본 라이언 경은 도저히 나에게 유렌과의 잠자리가 시원치 않은지 묻질 못했다. 나라도 그랬겠지만.

"그리고 그 때 신년 연회에서 그 남자와 백작 사이에 사소한 언쟁이 일어났다는 소문과 어제 오후, 그것도 저택 대로변에서 둘의 다툼이 있었기에 세이시아 님의 결혼생활이 곧 파탄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알고 계십니까?"

제인의 말에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 알고 있지……. 그러나 내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유렌이 문을 열고 나오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음대로 이혼시키지 마십시오. 아무리 인정했다고는 해도 저는 그런 서툴고 불안한 남자에게 시아의 인생을 맡기진 못합니다."

서툴고 불안한 남자라면 미르일까. 하긴 미르가 성격이 조금 급한 면이 있지. 그다지 서툴거나 불안해 보이진 않지만. 제인은 당연하다는 듯한 유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별 문제가 없다 하시면 감히 참견을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 붉은 머리의 사내에 관한 관리는 잘 하시기 바랍니다. 신분이 낮은 측실이 공작의 총애로 너무 과한 권리를 얻게 되면 집안의 기강이 흐트러집니다. ……알고 계시겠지만요."

제인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그 하루 새 미르가 얼마나 우리 집안사람들에게 도도하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원래 걔 성격이 그렇다는 걸 보통은 알 리가 없지. 아마 미르는 내가 총애하든지 말든지 그렇게 오만하게 굴 것이다. ……케르타의 국왕이던 라이만 키시이렐(미르의 전 유희명)의 성격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유렌은 내 옆에서 영지의 세금 상납일정과 상단 출입, 밀 수확물 저장상태와 그 금액에 관해 보고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장을 찍고 결재를 끝마쳤다. 미심쩍은 부분에 관해서는 재조사를 해서 올리라고 제인에게 말해두었다. 그는 전년도 자료를 찾아본다며 서고로 향했다. 미르가 들어오면서 서재와 내 사무실이 침실에서 좀더 멀어지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침실 바로 옆에서 일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자꾸 침실 쪽에 눈이 가게 마련이거든. 중간중간 땡땡이치는 것보다 빨리 집중해서 끝내고 일찍 돌아가서 쉬는 게 낫잖아.

유렌은 간단한 전산작업이 골치아픈지 계속 부드러운 자신의 백금발을 손끝으로 꼬아대며 뚫어지게 서류들을 들여다보았다. 그 정도는 비서나 보좌관에게 시켜도 되지 않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유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하인에게 시중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해서 우리 집에 처음 첩으로 올 때 직속하인은커녕 다른 시중인 하나 데려오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공작가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원래 엘프란 타인의 손을 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므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유렌은 씻는 건 물론이고 옷 입는 것, 식사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했다. 백작위를 받은 후에도 바쁘니까 누군가에게 시킬 법도 한데, 나에게 가끔 부탁하는 것 외에는 전혀 남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그는 워낙 사소한 것에 꼼꼼하고 철저하기에 하인에게 뭔가를 맡기면 답답해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류처리는 다르잖아. 나는 당연히 유렌이 내 보좌관인 제인과 라이언 경, 내 아랫사람인 카딘이나 라르슈와 네리아 정도는 부려먹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설마 지금까지 혼자서 전부 한 거야?"

어째 유렌이 무언가를 처리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길래 아직 익숙치 않아서 그러려니 했는데, 남의 도움을 받지 않아서 오래 걸렸을 줄이야.

"다른 사람의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혼자 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것도 어릴 때부터 유렌이 해오던 버릇과 자라면서 겪은 인간불신 탓인 걸까. 나 역시 영지 일을 할 때는 제인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혼자서 다 하기에는 몸이 모자라고 체력이 받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유렌은 자기 영지에 한번도 가본 적 없잖아? 다음 주에 같이 가 볼래?"

"제 영지 말씀이십니까?"

유렌의 영지는 위스피닌 공작령의 북동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위스피닌 공작령은 제국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내가 케르타로 출장갔을 때 그 근처를 스쳐지나간 적이 있다. 공작도 상인 출신이고 거의 상업도시와 그 주변도시 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내 구석진 영지와는 다르게 꽤 작으면서도 높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내 영지야 그저 넓은 땅덩어리와 주위의 숲, 산들밖에 볼게 없지만. 그래도 내 영지가 수입은 가장 안정적이었다. 덕분에 꽤 부를 쌓을 수 있었고. 농사를 위주로 한 땅에서는 나처럼 식물 종족 출신이며 공기의 습도나 물과 흙의 양분 종류에 민감한 성격이라면 누구나 대박을 낼 수 있다.

……으음, 보통은 불가능한 조건인가.

어쨌든 그의 새 영지에 같이 가보자는 얘기에 유렌은 의외로 들뜬 듯 했다. 말하길 잘 한 건가? 나는 세르에게도 여행일정에 대해 알렸다.

"백작령으로 여행? 나는 여기서 일해야 하니까 너희끼리 다녀와. 이 시기에는 기사단이 꽤 바쁘니까. 대신 한 달 이상 질질 끌지는 말고 일찍 돌아와."

추수절 직후에서부터 겨울을 거쳐 씨를 뿌리는 시기 직전의 봄의 건국 축제쯤까지가 귀족들이 가장 바쁜 시기였고, 덩달아 기사들도 이것저것 새롭게 정비하느라 바빴다. 반면 평민들이 농사를 짓는 동안은 귀족들도 자기 영지에서 매우 느긋하게 지낼 수 있다.

나도 물론 바빴지만 유능한 보좌관을 둔 덕분인지 그럭저럭 일은 무리없이 끝마쳤다. 지금 가면 아마도 한가한 영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세르는 지금쯤 영지에 가보는 것도 좋을 거라고 말하며, 짐은 미리 준비해두라고 말했다. 가는 데 넉넉잡아 일주일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네리아에게 이번 주말에 떠날테니 짐을 챙겨두라고 말했다. 네리아는 자신도 동행하느냐고 물었다. 원칙대로라면 동행하는 게 당연했지만, 유렌은 귀찮은 시종이나 시녀는 데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네리아는 갈 필요 없어. 빨리 갔다가 빨리 돌아오니까 여기서 기다려."

"어딜 가는데? 응응? 나 두고 가는 거 아니지? 같이 가는 거지? 응응응??"

네리아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미르가 문을 벌컥 열며 다그쳤다. ……아, 맞다. 미르는 어쩌지?

유렌이 그렇게 들떠있는데 미르도 같이 데려간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유렌에게 반은 빼앗겨서 자기에겐 50%밖에 신경써주지 않는다며 시무룩해있는 미르를 두고 가기도 그런데…….

미르는 혹시라도 내가 놓고 간다는 말을 할까봐 강아지같은 표정을 지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귀, 귀엽잖아! 내가 고민하는 동안 유렌도 주머니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시아, 역시 마차 타고 가는 게 편하겠죠? ……미르헬, 당신은 준비 안 하고 여기서 징그러운 표정으로 뭘 하고 있습니까? 안 갑니까?"

"어디 가는데?"

"여행."

유렌은 별 말 없이 그렇게만 일렀다.

"갈 거면 짐 준비하고, 안 갈거면 시아 짐 챙기는 거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뒷방에서 기다리세요."

"갈 거야! 흥!"

미르는 후다닥 뛰어나가 자신의 주머니를 들고 나한테 매달렸다. 잠깐, 지금 출발하는 거 아니래도! 그리고 겨우 주머니 하나만 챙기는 거야? 다른 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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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주인공이 식물인 소설2

짧은 3P 여행입니다. 이번 여행으로 미르와 유렌의 관계가 적대시→그나마 좀 나음으로 바뀔 지도 모르고 아닐 지도?ㄷㄷㄷ;;

결국 최종적으로는 어떤 관계를 원하시나요?

일단 정해놓은 건 있지만 여러분들이 원하는 여캐 하나를 사이에 둔 두 남캐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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