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공작님, 제발! -->
***
틀림없이, 모두 계획이었던 것이다. 굳이 파티에 있는 나를 찾아온 것도. 아니, 거기까지 계획일리는 없지. 마침 내가 사람이 많은 파티장에 있었기 때문에 원래 예정되어 있던 기회를 그가 좀 더 빨리 잡은 것이라고 치자.
이 제국의 귀족 대부분이 모여 있는 곳이다. 사교계에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미르는 완연한 귀족 복장. 파티복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귀족 행세를 해도 전혀 무리없는 의상이었다. 그런 미르가, 제국의 2대 미로 유명한 나에게 사람들 앞에서 둘의 은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목덜미 키스에 이어 남들 앞에서는 절대 하지 않는 키스 마크까지 대놓고 남긴 직후 나에게 청혼했다.
그 일이 어떤 여파를 몰고 올 것인가 짐작하기 전에 이미 몇 가지는 확실했다.
즉시 내 혼사길이 막히는 것과, 미르와 내 관계가 공표되다시피 되어서 내가 이 제국에 있는 동안은 결코 그를 거부할 수 없게 되는 것.
미르는 이번에는 내가 인간 행세를 하는 동안의, 그, 드래곤의 말로는 '유희' 랬나. 아무튼 내 유희를 자신이 전부 먹어버리려고 온 것이다. 내가 그의 유희를 죄다 호로록 삼켜버린 것처럼. 미르를 왕에서 끌어내리는 게 내 목적이었다면 아마도 미르는 내 남편이 되는 게 목적인 듯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단 한가지 미르의 철저한 계획을 무너뜨린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두달 전 내가 결혼한 사실을 그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알았다면 유렌을 저렇게 본체만체 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유렌은 의혹과 질투심 어린 눈으로 나를 안고 있는 미르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결혼이라니."
한자씩 씹어 뱉듯 강한 어조로 말하는 유렌의 목소리가 바로 내 뒤에서 들렸다. 그리고, 미미하게 떨리는 뜨거운 유렌의 손이 이번에는 반대로 나를 돌려 세워 자신의 품 안에 단호하게 가두었다.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녹아내릴 듯 뜨거운 품 속에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눈 앞에서 나를 뺏긴 미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너는 뭐지? 시아의 애인 중 하나인가?"
오히려 너무 당당한 미르의 말에 유렌 또한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딱딱하게 반문했다.
"당신이야말로 누구지요? 설마 사막에서 만났다던 시아의 전 애인입니까? 맞습니까, 시아?"
유렌은 현명하게도 둘이서 싸우는 것보다 내게 확인하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내가 유렌과 떨어져 있던 기간은 사막 출장 때밖에 없었으니 간단히 추측 가능한 일이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끄덕끄덕하는 걸 보고 유렌은 빙긋이 미소지었다. 으윽, 조금 미안한데. 오늘 밤에 유렌이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많이많이 귀여워해줘야 겠다. 비록 그가 내가 여왕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래도 지금은 내 남편이 유렌이니까. 미르가 온다는 걸 미처 말하지 못한 점도 미안하고.
"그렇습니까. 그러면 시아가 혼자 사막에서 외로워할 때 달래준 애인 중 하나가 바로 당신이군요. 그 때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 시아가 많이 심심해했을텐데 기꺼이 제 아내와 저 대신 놀아주셨다니, 남편으로서 당신에게 감사드리지요. 하지만 기껏 여기까지 찾아오신 점은 죄송하지만 지금 남편은 저이니 첩 이상의 자리는 못 드립니다."
유렌은 첩이라는 단어와 대신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유렌의 말에 미르는 한동안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그 대사를 수없이 속에서 곱씹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나 대신 유렌의 앞으로 위협적인 표정을 지으며 걸어갔다. 그 긴 다리로 한 걸음 걸으니 바로 유렌의 코앞이었다. 나는 유렌의 품에 어깨가 꽉 안긴 채였기에 미르도 차마 거칠게 남자의 언어로 유렌에게 말하진 못했다.
"네가……, 시아의 뭐라고?"
"남편이라고 방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아아, 설마 시아가 저에 대해 당신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까? 시아와 당신은 그렇게까지 깊은 사이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당신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군요. 역시 시아는 당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나 봐요."
유렌이 일부러 남자 얘긴 빼고 말해달라고 나한테 말했었지. 그래서 유렌도 미르의 존재에 대해 몰랐고, 나는 미르가 종종 질투하기 때문에 미르 앞에서는 세르나 유렌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뭐라고?!"
유렌의 그 신랄한 말빨이 이런 때에 활용될줄은 몰랐다. 안 그래도 성격이 급한 편인 미르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앞뒤 없이 유렌의 품에 파묻히듯 갇혀 있는 나를 다시 빼앗아서 끌어당겼다. 이, 이번에는 발이 아예 공중에 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미르를 살며시 밀어내고……. 익, 이익!! 이거 왜 안 밀려나?
미르의 무식한 힘을 잠시동안 잊었나 보다. 꿈쩍도 않는 미르의 어깨를 힘주어 밀다가 결국 포기하고 부탁했다.
"미르, 잠시만 내려놔 봐."
"싫어."
"……."
그는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에 배신감이라도 느끼는 건지 뾰루퉁해서는 나에 대한 소유욕을 대놓고 말투에 담아 드러냈다. 원래 내 말을 잘 듣는 녀석도 아니었지. 그럼. 이 상황을 가만 둘 유렌이 아니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엄하게 말했다.
"제 아내를 내려놓으시죠. 게다가 시아도 싫어하는 것 안 보입니까?"
"시아한테 남편이 있단 얘긴 못 들었어."
미르는 따지듯 물었다.
"……유렌과는 그 후에 결혼했으니까."
나는 미르에게 안긴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유렌과 결혼했으니 미르와는 결혼을 못 한다. 내가 이혼하지 않는 한은. 왜냐하면 난 제국민이고 제국법상 배우자는 단 한명만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첩의 수는 제한이 없었지만 어차피 첩이라는 것 자체가 정식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그저 정부의 다른 이름일 뿐. 진짜 가족의 구성은 오직 일부일처만 가능하다. 예외가 있다면 왕 정도일까. 왕과 여왕은 후계를 위해서 원한다면, 혹은 자식을 많이 만들라는 원로 귀족들의 압박을 받아, 혹은 정략적으로 배우자를 여럿 둘 수도 있었다. 정식 배우자와 그 아래에는 가족상 서열이 존재하긴 하지만 말이다.
굳이 제국 말고서도 카덴에서 복수의 배우자를 둘 수 있는 곳은 오직 케르타 뿐이었다. 아내를 여럿 둘 수 있긴 하지. 심지어는 평민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진짜 아내라고 할 수 없었다. 말이야 아내지, 그냥 성노 아닌가? 국제적으로 케르타의 아내는 결코 아내취급받고 있지 않았으며 권위도 없다. 즉, 그 쪽의 여자들은 그냥 아내의 가짜 이름만 받았을 뿐이지 그냥 성노예였다. 다른 나라 역시 말이야 둘째남편 셋째남편이지만 결국 그것은 정부와 첩을 다르게 말하는 것이며 정식 배우자는 모두 단 하나뿐이다. 남편 좀 여러 명 있으면 뭐 어때서. 난 능력도 있는데. 하지만 법적으로 그런 걸 어떡하라구.
미르는 내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유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렌……, 이라고. 네가? 아아, 그래. 에메랄드색 눈동자. 확실히 너에 대해선 들었다. 시아의 '첩'인 유렌이라고. 그리고 세르라는 녀석도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 같고."
내가 미르 앞에서 얼마나 유렌유렌 세르세르 해댔으면 그걸 다 기억하고 있는 거지? 그 말을 들은 미르는 마치 일생의 숙적을 앞에 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히도 유렌이 보고 싶었나 보다, 나쁜 의미로.
미르는 거만하게 유렌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별다른 트집을 잡을 게 없자 혀를 차며 혈통을 쥐고 늘어졌다.
"인간 혼혈인가."
'엘프 혼혈'도 아니고 '인간 혼혈'이라니. 그리고 미르는 나를 바라보며 떼쓰기 시작했다. 말이 떼지, 다 큰 남자가 자신보다 훨씬 덩치 작은 여자를 붙들고 달달 흔들며 하는 말이 협박과도 비슷했다. 그나마 앙앙대는 말투와 순진한 딸기색 눈동자가 귀엽기라도 하니 다행이지. 응? 아니야, 무섭긴 어디가 무서워. 귀엽잖아!
"순혈도 아닌 종을 남편으로 삼다니, 시아, 저 녀석한테는 네가 너무 과분해! 그냥 쟤랑 이혼하고 나랑 살자, 응? 하자는 거 뭐든 다 해줄 테니까!"
내가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유렌이 다시 내 손을 쥐고 자기 쪽으로 당기며 반박했다. 미르가 너무 꼭 잡고 있어서 손만 당겨졌을 뿐 완전히 끌려가진 않았지만 말이다. 유렌이 미르를 노려보는 눈길이 엘릭 못지 않게 매섭다. 그는 아까 미르가 자신에게 한 것처럼 미르의 행색을 보더니 비웃었다.
"당신이 무엇을 해 줄 수 있습니까?"
"뭐?"
"대체 나의 시아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보아하니 불 속성의 '레드' 같은데, 당신이 시아에게 매달리는 건 오히려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란 생각은 한 적 없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시아가 뭘 원하는지,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합니까? 어떤 물을 좋아하는지, 어떤 순서로 식사하는지, 목욕시킬 땐 얼마나 세심하게 대해야 하는지, 온도는 어느 정도가 알맞은지, 그리고 밤에는 무슨 체위를 좋아하는지까지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모른다면 일단 그 손부터 놓고 시작해보지요. 아까 시아가 '놓으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억울하게도 미르는 그 중에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내가 처음 보는 과일에 정신이 팔려 열대과일만 먹는 걸 봤으니 고기 취향이 어떠한지 모르고, 목욕을 시키기보다는 같이 욕실에 들어가면 그짓만 종일토록 했었다. 그래서 난 미르가 없을 때만 제대로 씻을 수 있었다. 온도는 언제나 물이 증발해버리지 않게 미지근한 정도였으며 그곳 욕실은 물 온도조절 장치가 아예 없었다. 체위라고 말하자면 언제나 미르 쪽이 리드했기 때문인데다가 그는 내 다른 남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싫어했으니 내가 전에 어떤 체위를 좋아했는지도 전혀 물어본 일이 없었다. 미르 스스로 내가 좋아하는 반응을 보이는 체위를 탐구하는 건 좋아했지만 미르는 아는 체위가 별로 없어 응용범위라고 해도 넓지 않고 한정적이다. 나는 뭐든 다 좋아해서 탈이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유렌도 평소에 내 말을 잘 안 듣긴 마찬가지잖아, 그냥 솔직하게 미르가 나를 안고있는 게 거슬린다고 말하지.
미르보다 유렌이 몇센티는 더 컸기 때문에 유렌이 살짝이나마 미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세르가 드래곤이라는 것도 한 눈에 알아본 유렌이 미르의 정체를 알지 못할 리 없지. 유렌의 줄줄히 이어지는 말에 잠시 나를 잡은 손에 힘을 풀던 미르가 다시 도로 내 몸을 꽉 자신에게 붙였다. 꽥! 너무 세잖아! 압사당해 다 죽어가는 꽃 한송이를 살린 것은 세르였다. 잠시 다른 곳에 신경쓴 사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소란스러운 입구 쪽으로 온 세르는 미르에게 눌리듯 안긴 나와 내 손을 뺏기지 않겠다는 듯 바싹 잡고 있는 유렌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니네 뭐 하냐……?"
그는 성큼성큼 걸어오며 유렌의 팔에 걸린 내 외투에 눈길을 주었다.
"아, 이제 돌아가려고? 좋아. 돌아가지. 그런데 이 녀석은 대체 누구지?"
세르는 말도 안 되는 모습을 연출 중인 적발 사내에 대해 존칭을 써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귀족들에게 기본적으로 공손한 세리안의 평소 모습과는 달랐다. 그만큼 황당했겠지. 그리고 미르는 또 뭐냐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고개를 들어 세르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끼어든 은발의 남자를 대하는 미르의 태도 역시 좋을 리 없었다. 그는 오만한 태도를 고수하며 아래위로 세르를 훑어보았다.
"……."
"……."
한순간 침묵이 뒤덮더니 나를 안은 미르의 팔이 순간적으로 풀렸다. 하지만 아주 살짝이었을 뿐, 역시 놓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르도, 미르도 드래곤이었다. 동족인 것이다. 그럼 혹시 둘은…….
에이, 설마 동족이라고 해서 아는 사이겠어? 색깔도 완전히 다르잖아! 드래곤들 인맥이 그렇게 넓겠어? 하는 걱정도 잠시. 미르는 멍하니 세르의 얼굴을 보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나를 안은 팔 힘이 더욱 단단해졌다. 근육이 긴장하고 있는 것이 그와 밀착해 있는 나에게도 느껴진다. 이윽고, 미르는 내게도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내뱉듯 매우 작게 외쳤다.
"카이세르……!"
"넌."
세르는 고양이처럼 눈을 휘었다.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며 오히려 한 발짜국 미르 앞에 다가온다. 그래, 나이상으로는 세르가 훨씬 많다고 들었다. 세르는 드래곤들 사이에서 한창 때인. 청년쯤 되는 나이라고 들었고, 미르는 아직 한참 어린 성체가 갓 된 드래곤이라고 했다. 세르는 가만히 미간에 손을 가져다대고 몇 초 침묵하다가, 매우 오랜만에 듣는 그 목소리로 말했다. 원치 않는 상대에게는 들리지 않는다는 언령.
〈꼬마 미르헬이냐?〉
===
댓글이 많아서 행복한 비명ㅋㅋㅋㅋ.
미르헬이 순진해서 좋아하신다는 분도 있던데 미르헬 과연 순진할까요ㅋㅋ.
시아도 지금 바람둥이라고 몇몇 귀족에게 욕먹고 있습니다. 다만 이루와 흑의 대공과 세리안의 빽 덕분에 직접적으로 심한 악담이나 나쁜 소문은 안 퍼지고 있죠.
두 번째 이유는 시아가 귀족이기 때문이고, 세 번째 이유는 남자를 여럿 둘 정도로 미모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예 욕을 안 먹는건 아니에요. 뒤에서 여러가지 나쁜 소문이 나고 있다는 내용은 본문에서도 몇번 언급되었지요. ㅋㅋ 바람둥이의 숙명?
미르와 유렌의 만남. 그리고 마지막 긴장을 잠시 해소하는 세르의 등장. 이 장면은 매우 강렬하게 쓰고 싶어서 오래 전부터 계획해 왔던 건데, ……그 계획 다 어디갔어!!!!ㅠㅠㅠㅠ 왜 키보드를 잡으니 전혀 생각했던 거랑 딴판인 전개가 나오는거요!! 아오 진짜ㅠㅜㅜㅜㅜ 간만에 미르가 나와서 꽤 즐겁게 쓰긴 했는데 그래도 불만족입니다!
이것저것 자잘자잘한 것을 추가하다 보니 정황상 임팩트가 그리 크지 않아서 실망입니다. 일단 올리긴 합니다만 나중에 수정하게 되면 가장 딴판으로 바뀔 확률이 큰 장면입니다. 소설의 큰 전환점 중 하나이므로 천천히 읽어보고 수정해야겠어요.
그래도 챕터 말 미르와 유렌의 삼각갈등은 잘좀 써봐야지. 나 왜이러지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