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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110화 (110/226)

<-- 6. 공작님, 제발! -->

유렌은 이윽고 그 무표정한 얼굴에 미미한 조소를 띄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챘다.

"결투 신청입니까? 기꺼이 받아들이지요."

엘릭은 굳은 표정으로 유렌을 노려보았다. 유렌도 표정에 조금 여유가 서린 것만 다를 뿐 마찬가지였다. 결투라는 말에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결투?

결투!

결투래!

백작 둘이서 검으로!

공식 파티나 연회 중에 귀족간의 갈등으로 인해 결투신청이 즉석으로 이루어지면 주최측에서는 곧장 그 결투를 독려하고 공증인과 무기를 마련해 준다더라. 성정이 난폭했고 제멋대로였던 선황제는 피를 보는 것을 좋아해서 일부러 이런 법-황궁 내에선 어디서든 목숨을 건 혈투 가능, 단 시시한 대련은 내 앞에서 하지 마.- 을 만들어놨다고 하는데, 선대의 법을 현 여제가 뜯어고쳐서 공식 연회에선 불가능하고 비공식 연회에서만, 그것도 둘 다 검을 쓸줄 아는 귀족일 경우에만 살인이 일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가능하도록 재정비했다. 평민이 귀족에게 결투신청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파티장에서 화가 나 함부로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오히려 정식 결투가 더 안전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법률이었다. 지금은 비공식 연회였고, 결투하는 두 인물은 동등한 작위에 둘 다 기사급. 유렌은 정식 기사가 아니었지만 검 실력으로 백작위에 올랐으니 충분히 법적 결투가 가능한 상황이다.

흥미있는 장면에 구경꾼들이 끝없이 모여들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사이에 그 둘 이외의 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백의 기사단 단장인 아이서스 경과, 백의 기사단 기사이자 엘릭의 기사학교 동기 휴이든 자작이었다.

"청의 기사단 레이몬드 백작 아닌가? 무슨 일이지?"

비록 백의 기사단이 아니고 청의 기사단 출신이었던 엘릭이지만, 임시 기사단의 총지휘자도 같이 맡고 있는 아이서스의 입장에서 단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 없던 조용조용한 기사인 엘릭이 첫 소동을 일으킨 것에 그는 놀라 물었다. 휴이든 자작은 그들 얘기를 계속 듣고 있었으므로 한 가지 사항을 추측해냈다.

"치정 문제 같은데요."

"뭐!!?"

"레이몬드 경이 저기 저 백작의 안주인 되는 여자에게 댄스 신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 백작이 열받아서 레이몬드 경을 도발했고, 그 뒤로 저러네요."

휴이든 경의 성격상 매우 느릿하고 성의 없는 대답이었으나 상황을 매우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아이서스는 경악했다. 기사로서 결코 얽혀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가 정치와 치정이었다. 그건 둘째쳐도 그 레이몬드 경이 치정 싸움이라니! 고자로 소문난(……), 아니, 이건 아니고. 상급 기사들은 주변 상황을 신경쓰며 행동에 조심을 하지만 젊은 일반 기사들이 대놓고 유흥가를 자주 드나든다는 점은 기사단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 경은 처음부터 단 한번도 유흥가는커녕 술잔에 손 대는 모습조차 본 적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스캔들도 단 한번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여자 문제로 다른 귀족과 갈등을 일으키다니. 당혹스러워하는 아이서스 경의 뒤로, 전 단장이자 현 부단장, 그리고 기사 동기인 세리안이 다가왔다.

휴이든 자작과 아이서스 경이 놀란 듯 세리안을 바라보았다. 세리안은 마치 이 상황을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이 뒤에서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세리안은……, 결투신청을 받은 위스피닌 백작의 처형이다. 즉, 치정싸움의 원인이 된 여성의 친오라버니인 것이다.

"뭐, 젊은 사람들이 서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논쟁을 벌이는 일은 흔한 것 아니겠습니까? 둘다 실력있는 검사이니 아마도 검으로 대화를 해 갈등을 풀어나가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자리에 황제 폐하가 참석하지 않아 다행이지만, 뭐, 이런 파티 때는 흔히 있는일 아니겠습니까?"

웃기고 있네. 검으로 대화는 개뿔. 이건 대련이 아니고 목숨 걸고 하는 결투잖아. 게다가 파티 도중 이루어지는 정식 결투는 만 1년전에 마지막으로 네 명의 부상자를 내고 끝난 이후 처음이었다. 아이서스 경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세리안 역시 유렌과 엘릭의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은근한 말로서 부추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세리안은 예전 기사 동기였을 때부터 무서운 녀석이었다. 그 카리스마와 결단력, 엄청난 두뇌와 판단력으로 검을 쓰지 않고 자그마치 황실 기사단 단장에 젊은 나이로 발탁되더니 금세 그만두고 이번엔 부단장이 되었다. 아이서스 경은 세리안을 전 단장으로서 높여야 하는지 현 부단장으로서 낮춰야 하는지 판단이 되지 않았으나, 비슷한 나이다 보니 친구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의 세리안의 태도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투라는 말에 마악 옆문으로 입장하던 금발의 장신 남자, 황태자의 귀가 쫑긋하더니 곧장 붙들고 있던 둘째 황자를 놔두고 군중 앞으로 나섰다.

"결투 말입니까? 제가 공증인이 되어드리지요. 하악하악."

쟤 눈이 저렇게 반짝이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맑은 푸른빛이 도는 보랏빛 눈동자는 무엇인가에 관한 강한 흥미를 품고 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엘릭과 유렌, 둘의 검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황태자에게서 풀려난 둘째 황자 이룬다인은 형이 손을 놓자마자 바로 예쁜 세이시아에게 달려갔다. 시아는 세리안에게 끌려와 이 결투의 상황에 기겁하고 있었다. 결투라니, 엘릭과 유렌이 갑자기 결투라니이!!!! 무슨 일이야? 왜? 어째서?!!

"오랜만, 시아야, 나 방금 와서 그런데 이거 무슨 상황이야? 저 사람 네 남편이지?"

"나도 몰라!!"

***

나는 어이가 없었다. 댄스 신청 한번 잘못해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다. 사교계의 필수 스킬이 댄스가 아니던가. 물론 대놓고 타인이 파트너 앞에서 댄스를 추자며 유혹하듯 매달린 상황이라면 당연히 유혈사태가 일어나겠지만, 댄스의 예절만 지킨다면 남녀 누구든지 악수 비슷한 의미로 춤을 출 수 있는 것이다.

난 틀림없이 다른 이유로 둘이 불화가 생긴 것이라고 믿었지만 아무래도 그 이유는 정말로 엘릭이 내게 유렌 앞에서 댄스신청을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사람들의 소문은 즉석에서 만들어져 당사자가 그 자리에 있는데도 즉석으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내가 예전부터 엘릭과 유렌 사이에 양다리를 걸쳤다는 과거가 이 자리에서 자동으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난 엘릭 손도 잡아본 적 없다구! 아니, 손 정도는 잡았지만…….

여자들을 후려먹던 세기의 바람둥이인 유렌 위스피닌과, 여자라고는 개미만도 못한 취급을 하던 세기의 ○자(?)인 엘릭 레이몬드. 결코 소유가 불가능할 것 같은 두 남자를 동시에 노예로 만들어버린 여자라는 소문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파되었다. 내 옆에 있던 라키아네 백작이 말했다.

"오우, 몰랐는데. 공작님, 3년 전부터 레이몬드 경의 동정을 먹어버리고 레이몬드 경을 공작님의 전속 성노로 만드셨다면서요?"

아니야! 아니라구!!!! 랄까 믿지 말란 말이야!! 대체 뭐야, 그 성인물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상황설정은?!!

한편, 내 갈등과 무관하게 둘의 결투는 파티 장의 외야로 나갈 필요도 없이 정원 근처에서 즉시 진행되었다. 이제는 거의 형식이 된 공증인의 맹세 절차는 1분도 되지 않아 끝났고, 공평하게 지급된 황실 문장의 철 검을 들고 두 사람은 공터에서 마주보았다. 떠밀리듯이 진행된 거라 내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나는 유렌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미처 묻지도 못했다. 잠깐, 결투라면 죽을 수도 있지 않아?! 무, 물론 유렌이 죽을 리는 없지만. 그리고 공식 결투는 상대를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것까지는 금지되어 있지만 즉사하지 않을 만큼의 상처나 출혈은 허용한다. 결투 이후 너무 심한 상처로 불구가 되었다거나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렀다는 얘기는 종종 들어본 적 있다. 아니, 뭐 일단 귀족이니만큼 치료사와 마법사가 상비되어 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유렌은 가만히 검을 쥔 손을 앞으로 뻗어 아래로 조금 기울여 늘어뜨렸다. 가라앉은 시선으로 엘릭을 응시했다. 엘릭은 검 끝을 위로 향하게 쥐었다. 둘의 검술은 방식이 달랐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유렌의 검무에 눈을 떼지 않으면서 세르를 찾아 징징거렸다.

"잉잉 세르! 유렌은 괜찮을까? 엘릭은? 응?"

"물론 괜찮고 말고. 자, 이리 와서 잘 봐."

나를 군중의 맨 앞에 세우고 직접 결투를 관전하게 자리를 마련해준 느긋한 세르의 말대로 둘의 실력은 정말 막상막하라서, 결말이 쉽게 나지 않았다. 영화에서처럼 칼 몇번 부딪치고 칼빵 하나로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공증인을 자진한 황태자는, 마치 눈속에 하나씩 새기겠다는 듯 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황태자가 검만 쥐면 사람이 바뀐다는 소문도 진짜 사실이었나 보다. 저 사람 황태자 하지 말고 전문 결투 공증인 해야 하는 거 아냐? 이루의 말이 기억났다. '형은 검술을 매우 좋아해', 였던가. 아무리 그래도 검 상대할 때 만큼의 의욕의 절반이라도 사람 상대할 때 보여보라구. 인기가 배로 폭발할 텐데 말이야. 물론 지금도 꽤 생긴 얼굴로 인기는 좋지만.

"히잉……."

나는 울먹이면서도 볼 건 다 봤다. 말이 결투지, 실제로 엄청나게 빠르고 흥미진진한 접전이 펼쳐졌다. 자그마치 둘 다 검 실력 하나만으로 백작위에 오른 남자들이다. 제국에서 손에 꼽을 만큼의 실력자인 것이다. 그런 실력자들이 나 때문에 싸우다니, 묘하게 싫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엄청 좋았다. 날 위해 두 남자가 싸워주다니, 하악하악! 하지만 마냥 철없이 기뻐하기에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게다가 날 위해서 싸웠다기엔 엘릭 쪽이 조금……. 엘릭은 나를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엘릭은 내가 너무 싫어서 싸우고 있고, 유렌은 내가 너무 좋아서 싸우고 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나는 당연히 유렌을 응원해야만 했다. 내 남편이기도 하잖아. 그, 그치만 대체 둘이 왜 싸우는 거야? 정확한 이유가 뭐야??

지금 당장 싸우고 있는 유렌을 붙잡고 물어볼 수는 없잖아. 주변 정황을 지켜본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본 결과 유렌이 나와 춤을 추고 난 엘릭을 따라가서 시비를 걸었고 화가 난 엘릭이 유렌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는 추측이 나왔다. 역시 엘릭 나 엄청 싫어하는구나, 내 남편이랑 결투까지 하려 들 정도라니. 왠지 씁쓸했다. 그러던 와중 유렌의 검이 먼저 엘릭의 소맷자락을 스쳤다. 찰랑, 하고 붉은 색의 셔츠 조각이 날아올랐다. 순간 핏방울로 착각해서 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 직후 엘릭의 검 끝이 유렌의 귀 끝을 스쳤다. 이번에는 진짜 피가 났다. 으아앙 어떡해, 더 못 보겠어! 하지만 나는 끝까지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분명 결투인데, 목숨이 걸린 상황인데도 두 사람의 춤추는 듯한 검날의 어울림은 마치 한 폭의 예술장면 같았기 때문이다.

둘은 코트를 벗고 달라붙는 베스트 차림으로 맞붙고 있었다. 팔 다리의 길이가 장난 아니라서 꼭 모델같은 두 남자의 격렬한 움직임은 마치 만들어진것 처럼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훨씬 빨랐다. 하프시코드에서 빠르게 연주되는 음악처럼 느리게, 가끔 빠르게 검날이 맞붙고 챙 하는 소리를 이루며 떨어졌다. 만들어진 대련 같았다. 그러나 결코 대련은 아니었으며, 둘의 접전은 내가 느낀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끝났다. 거의 30초 내에 열서너번 정도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 것 뿐이다.

결투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나는 거구나.

유렌이 팔을 뻗어 엘릭의 왼쪽 얼굴 부분을 노렸을 때 엘릭은 순간적으로 피하듯 얼굴을 틀었다. 맞다, 저 안대……, 속을 들키면 안 되잖아? 약점이 있다는 것은 결투에서 치명적인 핸디캡이 되므로, 엘릭은 싸울 때도 각별히 주의하는 듯 하다. 안대가 벗겨져서도 안 되고 그가 안대가 벗겨지는 것을 극도로 기피한다는 심리적 불안감을 결코 들켜서도 안 된다. 그러나 유렌은 엘릭의 움직임을 읽었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단숨에 안으로 파고들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면 상대적으로 키가 큰 유렌이 유리하다. 하지만 유렌은 몇 번의 훼이크로 방심을 유도한 뒤 단번에 그의 안대를 잘라내버렸다.

"!!!"

빈틈없던 그의 신형이 무너지고, 엘릭은 일순 검보다 안대 쪽에 신경을 기울였다. 그가 끈이 잘려 떨어지려는 안대를 다시 손으로 붙잡았을 때 유렌은 이미 검 끝을 엘릭의 목에 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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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를 사이에 둔 결투는 예전부터 로망으로서 전승되어져 온 내용인데 요즘들어 이런 소설이나 영화내용을 보기 힘드네요. 오히려 요즘은 새로운 것이 식상하고 고전이 신선한 느낌.

엘릭과 휴이든은 제국 기사학교 동기, 세리안과 아이서스는 황실 기사 입단 동기입니다. 넷 다 처음부터 단순 직업기사가 목적이라서 플로렌스 아카데미는 나오지 않았어요. 황실 기사가 되려면 일반적으로 명문 기사학교를 졸업해야 하는데 제국의 명문 기사학교는 모두 15살 가량에 일괄 입학해서 18세에 수료합니다. 졸업 직후 실력에 따라 적당한 기사단에 배분되며 뼈빠지게 정년까지 일하게 되지요(?). 플로렌스 아카데미 제국 기사학교보다야 훨씬 수준이 높지만, 그래서 오래 걸리기 때문에 그냥 기사만 목표라면 잘 가지 않지요. 입학은 자유지만 대체로 13살때부터 평균적으로 수료하는 데 5-8년간, 길면 10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한창 때 공부 대신 수련을 해야 하는 기사들은 대체로 플로렌스 아카데미를 나오지 않습니다.

……라는 설정을 적어놓지 않으면 나중에 또 까먹습니다ㅜ

단 기사학교 동기는 생일만 좀 차이가 있을 뿐 다 나이는 비슷한데 황실 기사단은 3-4년마다 한번씩 뽑기 때문에 동기는 4-6살정도의 나이차가 납니다. 엘릭과 휴이든은 비슷한 나이지만 아이서스랑 세리안은 동갑 아니에여. 3살인가 4살인가 차이날걸요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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