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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109화 (109/226)

<-- 6. 공작님, 제발! -->

"전 그것보다 공작님의 얘기를 더 듣고 싶은데요? 후후, 이런 걸 물어도 되려나? 실례라면 죄송해요. 그 유명하던 위스피닌 가의 엘프 혼혈은 어떤지 묻고 싶어서요."

막상 나를 데려온 플란은 안 듣는 척 하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짝사랑중인 그녀는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겠지, 나와 여백작의 얘기는 연애사라기에는 좀 그렇지만.

랄까, 유렌 얘기……?

"유렌 위스피닌 백작이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여자들 좀 울린 선수라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와의 하룻밤을 잊지 못해 쫓아다닌 여자도 많다고. 그렇다면 밤일 하는 면에서는 쓸만할 텐데 어떤가요?"

보, 보통 여자들끼리는 이런 얘길 하는 건가? 하긴, 귀부인들 사이에서 하는 대화를 들어봐도 남편의 성적 능력에 관한 화제가 매번 등장하니까, 나랑 라키아네 백작처럼 첩이 있는 여귀족끼리는 이 정도가 당연할지도 모른다. 엄격한 자리도 아니고 자유로운 연회이니까.

"역시 그렇겠죠. 유렌의 테크닉은 세르보다도 미르나 라르슈와 카딘보다도 좋으니까요. 으음 두번째는 세르일까나. 세르도 잘 하지만 세르는 너무 느긋한 면이 있어서, 그치만 세르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놀이를 잘 알기 때문에 심심하지 않아서 좋은걸요. 전에는 끈으로 묶어서 하기도 하고 초콜릿으로 거길……."

친오빠 세리안이 아니라 세르라는 이름의 내 애인쯤으로 생각하나 보다. 라키아네 여백작이 응응 흥미롭다는 듯 내 말을 듣고 있는데 더는 못 참겠는지 플라니아 공녀가 붉어진 얼굴로 말을 가로막았다.

"저기……. 그런 것 말고 첫만남이나 결혼하게 된 사건을 듣고 싶어요."

그, 그렇게 담백한 얘기를 원하다니!?

"플란은 제국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런 얘기를 거북해하더라구요. 제국의 남자를 노린다면 너무 순진해도 인기 없어요, 플란. 만약 좋아하는 남자와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을 때 그가 여성상위를 요구하거나 스타킹 신은 채로 발로 해주길 원하면 어떻게 해버릴래요?"

라키아네 백작이 쿡 웃으며 플라니아 공녀의 말에 가볍게 대꾸했다. 그 말에 플라니아 공녀는 갑자기 머리끝까지 빨갛게 익어서 당황감에 고개를 저었다. 쩔쩔매는 모습이 불쌍할 정도로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말도 안 돼요! 절대 그 분이 그럴 리 없어요! ……그런데 여성상위가 무슨 뜻이에요?"

라키아네 백작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번엔 나를 바라보았다.

"후후후, 그나저나 '그 분'이라니, 플란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한 모양이네요. 그보다 플란이 듣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공작님 첫만남 얘기 해주실건가요?"

그녀도 영 관심없지는 않는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플라니아 공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맞아, 흑의 대공이었지. 하지만 흑의 대공은 그때 그 여자애랑……, 이거 말해줘야 하나?

굳이 지금 바로 말해서 여심을 울릴 필요까진 없겠지? 그나저나 유렌과의 첫만남이라……. 으응. 유렌이랑 이제 겨우 만난 지 반 년이 되었구나. 게다가 만나고 4개월만에 결혼. 그 중에서 2개월 반은 내가 타국에 출장가 있었던 시간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번갯불에 사과 구워먹듯 결혼에 골인했다. 정략결혼도 이것보다는 오래 걸릴 텐데 말이다. 그치만 너무 좋은걸 어떡해. 연애하던 시절(?)도 그 애틋함(?)이 너무 좋았고 결혼해서 늘 붙어다닌 이후로도 너무너무 행복했다.

"유렌과는, 어차피 정략결혼인데다가 오빠인 세리안이 그냥 들여온 첩이라 처음에는 별로 흥미 없었어요. 그 다음부터 사귀게 된 케이스다 보니 딱히 할 얘기는 없는데. 으음. 어느 순간부터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할까나……."

꺄악, 난 몰라! 다시 생각하니까 왠지 부끄럽잖아! 백작과 나눈 얘기보다 그 쪽이 더 부끄러워!! 둘은 나를 다그치듯 졸라서 유렌과의 에피소드를 두 개나 이끌어냈다. 처음 데이트했을 때랑 고백했을 때. 그리고 나는 라키아네 백작이 라미닌이라는 금발머리의 애인과 만났을 때의 얘기도 들었다. 라미닌은 봉급이 중간쯤 되는 정식 기사였고, 어느 귀족가의 둘째 아들로서 라키아네 백작이 스무 살에 갓 들어왔을 때부터 사귀던 애인이었는데 스물 다섯에 백작이 작위를 물려받자마자 두 번째 첩으로 들어왔다더라. 물론 첫번째 첩은 정략용으로 작위와 동시에 들여온 타국의 귀족 영식이었다. 라미닌 정도 되면 굳이 첩 말고도 괜찮은 남작의 딸이나 돈 많은 상인의 딸 하나쯤 낚아서 그럭저럭 괜찮게 살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굳이 첩살이를 하려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첩하고 사랑해서 결혼하게 되는 일은 드물지요. 첩과 사랑이야 하게 될 수 있지만 첩과 결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더 큰 문제니까요."

라키아네 여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라미닌을 힐끗 바라보았다. 시원시원한 생김새에 키가 크고 옅은 색소의 금발 남자인 라미닌은 상당히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였는데 또래 남자들과 얘기하면서도 종종 백작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에도 금발 라르슈가 있었지. 라르슈는 좀더 어려보이고 머리 색도 밝은 금발보다는 황금빛의 진한 색에 가까웠다. 게다가 좀 더 섬세한 이목구비에 얼굴형 자체는 남자답다기보다 여성스러웠다. 라미닌과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라미닌도 괜찮게 생기긴 했지만 역시 라르슈가 더 예뻤다. 나중에 데려오게 되면 자랑해야징.

그나저나 나야 뭐 특수한 케이스로서 별 문제 없이 결혼을 할 수 있었지만 보통의 첩들은 지위가 낮은데다 가망도 없어서 첩이 된 것일텐데, 그 상대와 다시 무난하게 결혼하게 될 정도의 지위상승이 단번에 가능할 리 없었다. 백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평생 결혼하지 않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백작이 중얼거렸다. ㅇㅇ 나도 유렌과 만나기 전에는 결혼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작위가 있어도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그냥 미혼의 예쁜 여백작(…)으로 살다가 가려고 했지.

미녀가 셋이나, 그것도 그 중에서 둘은 공인된 제국 최고미녀인데 남자들의 시선이 이 쪽으로 쏠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여백작은 버릇대로 한번 주변에 단 눈웃음을 쳐 주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인간에게 쓰는 기술은 더 본능적이고 직접적인 유혹이었는데 그녀가 하는 유혹은 우회적이면서 애매한 의미를 전하며,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어장관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나처럼 타고난 것과는 달리 갈고 닦아야만 가능한 기술이다! 성정이 좀더 본질에 가까운 엘프나 드래곤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다수의 인간을 상대로 할 때는 이것도 유용해 보이니까 잘 배워놔야지.

자연스레 화제가 몸매관리나 마사지 샵에 대해 흘러갔다. 응응 몸매관리도 중요하지! 마사지도 좋아해서 예전에는 숙련된 시녀들에게서 마사지를 받았었는데, 전에 우연히 여자보다 남자의 손 쪽이 바디 마사지에 훨씬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 여자의 손으로는 제대로 만족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일단 미용 목적으로는 여전히 시녀들에게 받고 있긴 하지만 뼈마디에 가하는 힘과 손이 닿는 면적은 결코 여자가 남자의 크고 단단한 손을 따라올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의 손은 대체로 너무 거칠어서 내 연한 피부에 흠집이 나 버린다. 특히 카딘이나 라르슈는 생각보다 손이 굉장히 거칠고 굳은살이 두텁게 박혀있어서 강하게 문지르면 빨개지고 아프기까지 하다. 그래도 유렌은 손이 보드라우니까 유렌이 마사지해주는 게 제일 좋아. 유렌은 바빠서 자주 해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야. 유렌도 내 몸에 오일이나 크림을 발라 마음껏 만지는 걸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때론 너무 즐겨버려서 곤란할 때도 있다. 끝나면 온 몸이 꽃가루로 끈적끈적……, 으흠, 유렌 탓이야.

"그나저나 플라니아 공녀님. 그, 대공 말인데……."

그 뒤로 한참을 다양한 화제로 재잘거리다 슬슬 그녀에게 대공의 약혼녀에 대해 말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어서 플라니아 공녀를 향해 나직히 말을 걸었다. 하지만 공녀는 사파이어 귀걸이를 찰랑이며 고개를 저었다.

"약혼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건 자유잖아요."

그, 그렇단 말은 설마 알고 있었던 건가? 당연하지, 뭐 유명한 소문이니까. 머리카락을 꼬며 왠지모르게 초조해져 있는데 플라니아 공녀가 갑자기 무언가를 보더니 흠칫 놀랐다. 그녀의 시선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가 홀 안에 들어오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한참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던 참이라 고위 귀족들이 슬슬 입장하고 있었는데 이번 건 진짜 대물이었다.

"대공?"

플라니아 공녀의 짝사랑 상대 아니던가. 하지만 나는 순간 난감해졌다. 대공이 옆에 전에 만났던 그 금발의 로리를 끼고 온 것이다. 이 분별없는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로리콘 인증하러 온 거야?! 딱 봐도 부녀간의 체격차인데? 앙?

여백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플라니아 공녀의 짝사랑 상대가 이트리샤 대공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들이 갑자기 입장한 누군가에게 관심을 주자 의아한 모양이었다.

"응? 이트리샤 대공작 전하 아니에요? 요즘들어 사적인 파티에 종종 참석하신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신년 연회에까지 방문하시다니."

신년 연회는 마음껏 즐기기 위한 연회이고 유일하게 평민과 하급 귀족도 마음대로 올 수 있는 연회라 사대 대공가 등의 도도하고 이름있는 귀족들은 자기 집에서 따로 고급스러운 연회를 열곤 했다. 적의 대공은 온 것 같지만 청의 대공은 참석하지 않았다.

흑의 대공은 검은 예복 차림으로 지루하다는 듯 큰 키에다가 고개까지 고고하게 쳐들고 들어와서는 일단 사람들이 제일 적은 구석 자리부터 탐색했다. 그런 행동에 아랑곳않고 옆의 금발 소녀는 예의바르면서도 생기 도는 표정으로 어린 공주님 같이 풍성한 실크 속치마로 속을 가득 채운 쉬폰 드레스를 살랑거리며 또래의 소년소녀들이 있는 곳을 힐끔거렸다.

"레인, 왜 그런 표정 짓고 있어? 신년 연회는 편하게 즐기라고 있는 거야. 너도 피곤하지 않다고 신년 연회는 좋아했잖아."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소녀의 말투에 대공은 앞으로 흘러내려온 검은 머리를 대충 쓸어넘기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 때와 지금은……. 아무래도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요. 게다가 나는 당신처럼 너그럽지 않으니까요. 신년이라고 해서 수고장을 쓰거나 축하말을 건네는 것은 한 적 없습니다."

달콤하고 낮으며, 질척한 벌꿀을 연상시키는 유렌의 목소리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훨씬 뭐랄까, 우수에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사자의 포효 소리처럼 위협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위압적인 그런 목소리에 아무 거리낌이 없는지 소녀는 고개를 끄덕했다. 상당히 간이 크거나, ……아니면 둔하거나?

"응 뭐, 상관없지. 레인은 레인이니까. 나는 일단 조금 돌아다닐게."

소녀의 치맛자락 위에 매인 큼직한 리본이 움직임에 따라 팔랑거린다. 그녀는 아는 얼굴이 있는지 일단 높은 귀족들부터 하나씩 인사를 건네갔다. 하지만 허리를 숙이지는 않았다. 그냥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오길 기다리고 우아하게 빙긋 웃어보일 뿐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그 소녀가 높은 지위의 귀족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너무나도 고아하고 품위있는 행동은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대공의 누구? 숨겨둔 딸?"

여백작이 크게 흥미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귀족은 수비범위 외로 치고 정치적, 사업적 관계가 없다면 큰 흥미를 갖지 않는 성격이다. 말이 딸이지, 닮지 않은 둘은 아무래도 무슨 정치적인 특별한 사이로 오해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플란은 조금 떫은듯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약혼녀. 전에 만난 적 있어요. ……보는 것 만큼의 어린 소녀는 아니에요. 아마도 예상하는 것 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플라니아 공녀는, 어쩌면 체념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긴 약혼녀까지 나타났는데 자신은 대공과 아무런 진전이 없으니까 말이다. 짝사랑에 실패해본적 없는 나는 애틋한 그녀의 시선에 왜인지 기분이 묘해졌다. 그러던 와중 그 소녀가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플라니아 공녀와 나를 한번씩 바라보더니 사뿐사뿐 걸어왔다.

"또 만났네요, 플란."

오랜만에 듣는 맑은 음성이었다. 마치……, 그래. 내가 느꼈던 이상한 기분은 그것이었다. 그 소녀의 목소리에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마나가 섞여들어 있었다. 즉, 보통 인간의 목소리와 무언가가 달랐다. 인간인 척 하고 있지만 인간을 먹이로 삼는 내가 그것을 분간 못할 리는 없다. 그리고 그 소녀의 마나는 생명의 마나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그녀는 생물이 아니었다.

아무리 마법사에 정령사에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런 미묘한 변화는 알아내지 못한다. 나와 다른 정령들만이 위화감을 느끼는 것인가. 그 미세한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인 플라니아 공녀와 라키아네 여백작은 자연스레 그녀를 바라보았다. 플라니아 공녀는, 그 소녀의 앞에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이에요, 엘 님."

뭐야, 만난 적 있다더니 둘이 아는 사이였어?

나는 의아함에 플라니아 공녀와 금발의 작은 소녀를 번갈아보았다. 그 엘이라는 소녀는 공녀에게 웃으며 화답한 후 또다시 내 앞에서 한번 부드럽게 눈짓하며 싱긋 웃어보였다. 여자아이 특유의 아기자기한 행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결코 어리지 않을 거라는 공녀의 말이 이해되었다. 엘은 나를 직접 바라보며 말했다. ……왜 나를?

"그때부터 쭉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새로운 장미의 주인을."

엘은 그렇게 말하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은하늘빛 눈동자를 느릿하면서도 경건하게 깜박였다. 그때부터, 라면 처음 만났던 그 카페를 말하는 것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나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고? 왜? 남자에게라면 작업멘트로 받아들였겠지만 이 소녀는 여자였다. 어려서 성별이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재확인해 보았는데, 틀림없이 여자다.

"그 때는 레인이 옆에 있어서 말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생 당신과의 인연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서야 여왕을 만나게 될 줄이야. 이것이 운명이란 걸까?"

***

세리안은 예의상 눈앞의 남작에게 포도주를 권했다. 시아에게 자신의 둘째 아들을 선물하고 싶다고 계속 청탁을 넣는 한 지방남작이었다. 세리안은 귀찮음을 숨기고 적당히 대꾸해 주었다. 남자라면 굳이 지방 남작의 아들을 상납받지 않아도 넘쳐난다. 게다가 이 남작의 얼굴을 보자면 그 아들 얼굴도 짐작이 가는군. 그런 저급한 수컷과 자신이 같은 꽃을 공유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아끼는 여동생을 생각하는 오빠의 입장에서도 절대 줄 수 없다. 게다가 시아는 편식이 꽤 심하니까 아마 그런 남자는 설탕 발라서 갖다 줘도 스스로가 먹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세리안이 확답을 않고 계속 술만 권하자 남작은 입맛을 다시며 주는 대로 받아마셨다. 초조했지만 윗사람(자작인 세리안)이 주는 거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결국 취해서 실려가는 남작에게서 관심을 돌린 세리안은 여자들과 얘기를 나누는 시아를 다시 바라보았다.

"……흐응?"

시아 앞에 있는 소녀. 저건 누구지? 처음 보는 여자였다. 뭐, 아직 소녀이니 오늘이 처음 참석하는 파티일수도 있겠지. 밀크티 빛의 고전적이며 풍성한 쉬폰 드레스에 큼직한 리본 탓인지 꽤 어려 보인다. 하지만 세리안은 익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저 드문 색깔의 살갗과 비어있는 듯한 눈동자. 게다가 금발은…….

흔한 외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세리안은 곧 오래 전 만났던 한 사람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있을 법 한 출연자였기에 금방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지만.

아아, 머리카락이 길어서 몰라봤다. 세리안은 눈을 깜박였다. 50년 전에 한번 본 적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반바지도 망토도 로브로 아니고 소녀틱한 치마라니, 그건 도대체 무슨 행세란 말인가. 그새 취향이 바뀌었나?

"그런데 엘리아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그 말을 끝으로 엘이라는 소녀는 처음으로 진짜 소녀같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정령과의 거래에는 대가가 필요하겠지? 내 부탁을 들어주면 나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한 가지 들어줄게. 그러니까 혹시 내가 필요하게 되면 꼭 내가 있는 곳으로 와줘. 플로라."

플로라……?

역시 말했구나! 그 영감이 자기 애소녀한테 내 정체를 말했어!! 무슨 남자가 그렇게 입이 가볍담? 이러다가 잠자리 상대한테 국가 기밀까지 털리겠네! 으음, 그건 좀 비약적인가? 대공은 여자 경험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았으니까풉. ……남자가 동정인지 탈동정인지 아니면 걸레인지 알 수 있는 능력은 최근에 생긴 거니까(추가로 여자도) 유렌과 세르의 전 경험을 비교해보지 못한 건 좀 아쉽지만. 으음, 지금은 나와 여러 번 했던 상태니까 왜인지 알기 어려워졌다. 내 기운이 섞여버려 그런 걸까, 내 쪽이 그 둘의 기운을 빨아들여 그런 걸까나.

아니, 그런데 부탁이라니? 이런 어린 소녀가 나한테 할 부탁이라면, 뭐가 있단 말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물으려고 했지만 이미 소녀는 멀찍이로 사라진 후였다. 그 직후 세르가 내 뒤에서 나를 불렀다.

"……세리안?"

"그래그래, 불청객(아까 그 남작)도 쫓아냈으니 이제 오빠랑 있자, 우리 시아."

세르가 쿡쿡 웃자 나도 방긋 웃으며 세르의 품에 안겼다. 우와아아앙 옵빠 품이다아!! 아잉 좋아. 역시 오빠가 최고야. 남자의 맨가슴에 얼굴을 부비는 건 좋아했지만 옷을 입은 상태에서 하면 얼굴에 단추가 비벼져서 좀 아프다. 그래도 좋아!!!

"그런데 아까 엘리아스와 무슨 얘기라도 했어?"

세르는 내 보들보들한 뺨을 큼직한 손으로 쥐어올리며 귀엽다는 듯 눈웃음을 짓다가 갑자기 처음 듣는 사람 얘기를 꺼냈다. 엘리아스라니?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곧 웃으며 넘어갔다.

"뭐, 별일 없으면 됐어."

***

유렌은 엘릭이 탐탁치 않았다. 세르가 엘릭을 여동생 상대로서 딱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그는 엘릭이 위험한 라이벌로 여겨졌다. 그리고 은근히 유렌에게 라이벌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은 엘릭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엘릭은 걸음을 잠시 멈추고 물었다.

"네 녀석, 무슨 볼일이지?"

아까부터 계속 엘릭의 뒤를 따라온 유렌의 기척을 엘릭이 모를 리 없었다. 숨기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따라온데다가, 엘릭은 감이라면 누구보다도 뛰어난 마족 출신이다. 유렌도 감각이 뛰어난 엘프 혼혈이지만 둔한 인간의 피가 섞였기 때문일까, 순혈과는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달랐다.

엘릭의 목소리는 나직하지만 매우 공격적이고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그도 유렌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저 녀석, 루페닌 숲에서부터 재수없었어. 둘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유렌은 일단 자신의 작전 중 하나로서 엘릭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별로……. 그저 기사단 최고 기대주라는 자의 검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무시하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단어 자체는 그냥 진짜로 궁금하다는 의미였다. 엘릭은 미미하게 기분이 상해 그에게 대꾸했다. 소드마스터에 가장 근접한 제국의 몇 안 되는 유망주 중 두 명의 대화에 주위의 귀족들이나 기사들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건 적어도 너보다는 내가 낫다는 의미겠지."

딱히 최고 기대주가 되길 원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유렌의 기를 죽이기 위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릭은 타오르는 마음을 억누르며 그에게 적대감을 표했다. 왠지 모르게 자존심 싸움이 되어가는 둘의 대화에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것에 엘릭은 기분이 나빴지만 유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관심을 유도했다.

"글쎄요, 나는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고작 그 실력으로 나보다 낫다고 말씀하시다니, 자존심 상하는군요."

그래, 그런 주제에 감히 내 시아를 빼앗으려고 했단 말이야? 실력 자체로는 사실 유렌도 엘릭을 100%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의 마력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게다가, 마검사는 아닌 듯 하지만 뭔가 깊은 근원에 침식당해 있어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엘릭도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6서클은 날로 먹은 게 아니다. 덧붙여 엘프의 기술도.

"뭐야?!"

역시 그걸 알고 있는데도 상대적으로 인생 경험이 적고 나이도 어린 엘릭이 도발에 걸려들었다. 반면 처음부터 그를 도발할 목적으로 접근한 유렌 역시 엘릭을 눈앞에 마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질투심이 일었으나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평이한 감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 앞에서, 내 여자에게 댄스 신청을 하며 보란듯이 그 손을 잡아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쥐었다. 명백한 도전이 아니고 무엇인가. 유렌은 시아의 손을 쥔 엘릭의 혼란스러운 시선과 떨리는 손을 보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유렌 자신도 그때는 질투로 인해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으니까.

엘릭은 푸른 눈동자를 형형히 빛내며 한 걸음 내딛었다. 유렌을 꼿꼿이 쳐다보던 그는 유렌의 키가 자신보다 커서 그가 약간이지만 올려다봐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릭도 큰 편이고, 여전히 성장기였지만 그래도 짜증나는 것이다. 유렌 역시 엘릭의 마치 귀공자같은 아름다운 동안의 외모와 검사답지 않은 뽀얀 뺨이 거슬렸다.

엘릭은 주저없이 장갑을 벗어 유렌의 발 아래 보란 듯 떨어뜨렸다. 시선은 여전히 도도하고 위압적으로 유렌의 녹감람석 빛 눈동자를 찌를 듯 응시하고 있다.

"당장 따라나와."

===

하악하악 질투플은 왜이렇게 재미있을까요.

아직 엘릭 공략은 이제 겨우 프롤 단계입니다. 게다가 엘릭은 시아에게 단번에 반하지 않는 종족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엘릭 지지도가 유렌보다 훨씬 낮겠지만 그래도 질투플레이는 좋다능. 엘릭은 아직 시아에게 아주 조금 미묘한 감정만 느끼고 있지만 그래도 질투플레이는 로망이라능. 유렌은 곧 등장할 자기의 진짜 라이벌을 아직 모르고 엘릭만 신경쓰고 있지만 그래도 질투플레이는 재미있다능.

곧 유렌과 미르의 질투심 놀이도 나옵니다.

세르와 유렌은 서로 협력관계다 보니 안 싸워서 좀 시시했는데 이번 챕터에서 그 염원을 실컷 풀듯.

그나저나 빼빼로가 너무 가늘(?!)다고 싫어하시는데요, 물론 굵기와 길이는 맛동산과 비슷하게 나오고 표면구조만 참고할 생각입니다.

그, 그런데 가늘지만 않으면 긴 것도 괜찮나요? 으아니 그건 한입에 다 안들어갈듯. 그럼 조금씩 먹으면?

스틱이라고 했는데도 여전히 과자 얘기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시는군요.

……여기서 말하기 좀 그렇지만 굳이 말하자면 과자=핸들입니다.

핸들은 시아가 애인들 잡고 조종할 때 손에 쥐는 거에요. 남자핸들.

능숙해지면 발로 운전도 가능.

아니, 더 어렵게 설명해버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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