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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106화 (106/226)

<-- 6. 공작님, 제발! -->

엘라임은 내 다리를 놓지 않은 채 계속해서 따뜻한 혀로 핥으며 헤죽 웃었다.

〈그래그래, 엘라임이야. 처음부터 내가 엔다이론으로 변장해서 기운도 숨기고 대신 소환당해줬지. 실제로 이렇게 연한 색 엔다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구. 역시 어린 플로라는 경험이 적어서 속이기도 쉽고 맛있어♡〉

그래서 이 녀석, 진짜 엔다이론이 아니니까 내 말을 듣는 시늉만 했던 거구나! 나는 진한 색의 엔다이론이 이 엔다이론을 보고 함부로 부르거나 직접적으로 야한 짓을 말린 적 없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대신 나에게 말했지, 그 변태 엔다이론을 매우 조심하라고.

나는 울컥해서 엘라임을 발로 걷어찼다. 엘라임은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흐흐 웃으며 내가 걷어찬 그의 뺨에 내 발을 불잡아서 좋다는 듯 문지르며 음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악 하악 플로라님 좋아잉♥〉

"꺄악! 실피드!"

나는 그 때 이후 처음으로 실피드를 불렀다. 내가 후다닥 엘레스트라에게 꼬옥 안긴 것을 보고 다시 나를 만지작거리려는 엘라임 때문이었다. 얘 무서워!! 행동이 진짜 변태 같아!!!

그리고 순식간에 나타나 준 연녹색 옷의 백발 청년이 엘라임의 멱살을 쥐고 내게서 떨어뜨렸다. 히죽거리던 엘라임의 표정이 싹 굳었다. 실피드는 냉랭한 연녹색 눈동자로 엘라임을 내려다보며(실피드의 키가 약간이지만 더 컸다) 말했다.

〈……자꾸 어딜 나가나 했더니만, 너, 여기서 대체 플로라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엘라임은 다시 그 표정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멱살을 붙잡은 실피드의 주먹을 탁 쳐냈다. 그리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무슨 짓이냐니? 대대로 물과 식물의 정령들의 친밀한 사이를 모르는 건 아니겠지, 우린 그냥 친목을 다지기 위해 가벼운 스킨십을 가지려던 것 뿐이었다구! 물과 꽃의 사이에 바람이 끼어들 일이 아냐!〉

그게 어디가 가벼운 스킨십이야?!! 나는 호소하는 엘라임의 말에 그의 정강이를 또 한번 걷어찼다. 찰방, 하며 물을 차는 것 같은 느낌밖에 나지 않았다. 에잇, 분하다!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마셔버리겠어!!

나는 실피드와 막상막하의 논쟁을 벌이는 엘라임의 심장에 힘껏 빨대를 꽂았다.

***

〈물의 정령과 얼음의 정령은 형제와 같은 존재이고 물의 정령과 식물의 정령은 연인과 같은 사이이지. 전대 엘라임도 전대의 플로라와 그래왔고, 이번 대도 마찬가지. 이번 대의 엘라임이 태어나자마자 전대 플로라가 후계만 남기고 소멸했으니까 엘라임이 처음 본 것은 얼마 전의 너였겠고, 아마도 연인으로서의 감정을 느꼈을 거야.〉

"……."

실피드의 설명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연인으로서의 감정을 느껴서, 그래서 나를 덮치려고 했다고?

〈……너한테만 그렇게 애처롭게 구는 것뿐, 엘라임은 변태지만 좋은 녀석이야.〉

애처롭다는 단어를 잘못 사용한 것 아닌가? 게다가 변태지만 좋은 녀석이라니, 그건 이미 좋은 녀석이 아닌 거잖아!!

실피드는 아까 살벌하게 엘라임과 노려봤다는 것으로 그 녀석과 사이가 나쁜 줄 알았지만 의외로 내 앞에서 그를 두둔해주었다. 가장 유동성 있는 정령 둘이니까 의외로 소꿉친구같은 친밀한 사이라고 한다. 실피드는 땅의 정령왕 노아스와, 엘라임은 불의 정령왕 셀리온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 이라기 보단 상극이라 의견충돌이 잦다고 한다. 나는 식물인 만큼 물을 마시고 바람과 친하고, 땅을 기반으로 잡아 살고 있지만 불은 쥐약이다. 전대 플로라도 전대 셀리온에게만은 유일하게 함부로 굴지 못했다는데, 막상 나무와 마른 풀을 먹이로 삼는 셀리온은 플로라를 매우 좋아했다더라.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랄까, 완전한 기생관계랄까.

으음, 나도 셀리온 님을 뵙기가 두려워진다. 불이라는 것만으로도 꽤 껄끄러운데 말이다. 나는 늘 불님이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면 하고 기도하고 있다. 적당한 태양빛의 따뜻함은 좋지만, 열기가 너무 과해서 삶은 꽃이 되는 것은 더없는 형벌이다.

심장에 빨대가 꽂혀 쓰러진 몸에서 움찔움찔 물을 흘리던 엘라임이 주변의 욕조로 물을 충전하고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내게 양팔을 벌려 또 달려들었다.

〈플로라니임~♥〉

나는 물을 먹다 지쳐 잠시 내버려두었던 엘라임이 갑자기 부활하자 기겁을 했다. 여, 역시 엘라임! 물탱크의 양부터 달랐다. 무한의 물 먹는 식물인 내가 지속적으로 물을 빨아들이지 않으면 다시 원래대로 채워져 버리는 건가. 극렬한 변태 퀄리티에 나는 덜덜 떨며 다시 옆에서 대기하던 엘레스트라의 등 뒤로 숨었다. 그러나 엘라임 앞에서 엘레스트라 등 뒤에 숨는 것은 엘라임에게 스스로 뛰어드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엘레스트라야 아까는 기를 써서 엘라임에게 저항했지만 사실 어디까지나 명령의 우선권은 엘라임에게 있었다.

〈좋아, 엘레스트라! 그대로 붙잡아서 나한테 상납해!〉

어째서 이렇게 귀여운 나의 엘레스트라가 이런 변태 밑에서 태어난 거야!! 게다가 나는 거의 알몸이었다. 아직 이곳은 욕실, 나는 아직 수건 한 장만 걸친 상태였던 것이다. 엘레스트라는 방심한 사이 내려진 상급자의 절대명령으로 일단 내 몸을 덥석 잡은 직후 당혹스러움을 느낀 듯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엘레스트라가 강제 명령에 따르기 직전에 실피드는 엘라임을 한 대 쥐어박았다.

〈그만 하랬지!!〉

왜 때리냐고 악을 쓰는 엘라임을 무시하고 실피드는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엘라임과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실피드는 왠지 형과 동생 사이같았다.

〈그나저나 플로라, 못본 새 많이 컸구나.〉

"내가?"

키는 하나도 크지 않았고, 못본 새라고 해도 몇 개월 전인데 클 리가 없잖아. 고개를 갸웃하자 실피드는 부드러운 연녹색 눈동자에 다정함을 띄우며 말했다.

〈키 얘기가 아니야. 성체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야. 아마 십 년도 안 걸리겠군. 그간 마나를 많이 먹었나 본데.〉

마나라는 걸 내가 그렇게 많이 먹었던가? 고작해야 유렌과 세르를 몇 번 먹었을 뿐인데.

〈이 속도대로 갔으면 좋겠지만, 너무 많이 마력을 흡수하지 않게 주의하고, 또 성장기니까 너무 오래 굶지도 말고. 그리고 엘라임 녀석이 또 미성년자를 덮치려고 하면 날 불러. 이만 가 볼게.〉

실피드는 여기에 그다지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인지, 급하게 엘레스트라와 엘라임을 데리고 가버렸다. 나는 식어버린 욕조 물로 대충 몸을 마저 닦은 뒤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괜히 물을 마셔서 배만 불렀잖아. 여기서 유렌까지 더 먹으면 배불러 죽을지도 몰라! 우욱, 두고 보자, 엘라임!!

***

올해의 신년은 눈과 함께 시작되었다. 어젯 밤부터 내린 눈은 거리를 덮고 우리 집 저택까지 새하얀 벨벳 커버로 덮어버렸다. 자연계의 모든 정령은 눈을 좋아한다. 나도 정령답게 눈이 오는 날은 기분이 좋다. 나가서 놀고 싶었지만 오늘은 갈 곳이 있다.

황궁에서 신년 축하 연회 초대장이 왔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년 황실 연회는 딱 3회 열린다. 1월 1일 하루 열리는 신년 파티와 3월 중순의 봄에 열리는 건국 기념일 파티, 9-10월달에 열리는 추수절 연회.

몇 년에 한번 있는 황실 기사 발탁 축하 연회와 다른 국가의 중대사가 결정되었을 때(황족의 결혼 등) 열리는 황실 연회는 오직 초대를 받아야만 방문할 수 있으며 추수절 연회도 초대장이 발부된다.

하지만 신년 축하 연회와 건국 기념일 파티, 이렇게 두 가지는 제국의 귀족이라면 누구든지 입장할 수 있는 연회였다. 나는 이런 커다란 황실 연회에 방문하는 게 처음이라 왜인지 쓸데없이 두근거렸다. 작년 신년 파티와 건국 기념일 파티는 내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양중이었기에 일부러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작년의 추수절 파티 기간에 나는 한창 결혼식 준비로 바빴지.

물론 황실에서도 성대한 연회 말고 보통의 자유참석 파티는 종종 있는 편이다. 황족의 생일이나 사신 방문 축하 파티 등이 그 예이다. 황실에서 열리는 것이니까 성대하지 않을 리는 없지만 연회에서처럼 타국 고관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방문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그, 그러니까 이번 연회는 엄청나게 큰 연회라는 거지? 만남의 장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을 다 만나볼 수도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이 온다. 게다가 나에게 있어서도 처음 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웬만하면 지금까지의 파티나 연회는 평민 참석 불가, 무조건 백작가 이상의 귀족이거나 낮은 귀족일지언정 혈통과 연줄이 있어야만 참석가능했지만, 이번 연회는 그런 규제가 없이, 즉 자작이나 남작, 평기사며 준남작의 파트너인 평민들까지도 몇몇 참석하는 곳이었다. 그 수가 엄청나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말해 평민과는 거의 얘기해본 적이 없다. 있다고 해야 시녀나 시종, 그리고 장사꾼들 뿐이다. 그래서 오늘 파티는 어쩐지 두근두근한다. 황궁의 홀 전체를 개방하고 일부 야외에서까지 파티가 열린다고 하니, 참석한 사람들을 다 볼수도 없을 거다.

오늘 신년 축하 연회에 가기 위해서 입은 하늘색의 드레스는 유부녀가 입기엔 너무 색이 고왔지만 세르는 무슨 생각인지 처녀 때와 같이 내게 그런 화려한 옷들을 추천했다. 게다가 머리도 단순히 틀어올리지 못하게 하고 화려하게 장식시켰다. 드레스 위에 퍼 숄을 두르게 하고 발등이 드러나는 굽 높은 구두를 신겨서 나를 마차에 태웠다.

유렌은 진한 밤색 베스트와 딱딱해 보이는 날씬한 재킷차림, 세르는 붉은 계열의 긴 코트를 입었다. 간만의 외출이었기 때문에 신경을 쓴 건지, 머리 스타일부터 구두까지 완벽하게 차려진 모습이 둘 다 굉장히 멋져보였다. 하지만 둘 다 경장에 가까운 옷차림이었다. 이런 개방 연회 때는 오히려 딱딱한 정식 복장을 하는 쪽이 어색하다고 했다. 어쩐지, 세르가 특별히 골라준 내 옷도 길고 따뜻하지만 왠지 단순하고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보통 드레스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시아는 몸매가 예쁘니까 이브닝 드레스도 역시 잘 어울리는구나."

"웅?"

"이런 옷 처음 입어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풍성한 치마 아랫자락을 제외하면 상체에 너무 달라붙었지만 나름대로 편했다. 원래는 야회 복장인데, 밤까지 계속되는 이런 연회에도 입고 오는 경우가 있다.

"오늘이면 플로렌스 아카데미에서 입학식을 하고 있겠지. 조만간 아젤에게서 편지가 올지도 몰라."

세르가 눈이 내리는 창 밖을 보며 들떠있는 내게 말했다. 플로렌스 국제 아카데미는 아젤님이 간 학교. 특정 국가 내가 아니라 국가 사이의 국경에 위치하며 전 대륙의 출신들을 무관하게 받아들이는 명문 국제 학교였다. 몇달 전에 잘 도착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입학하게 되면 또 편지를 쓰겠다고 말했다. 나도 열심히 답장을 적어야지. 그 쪽 학교는 매년 1월 1일에 입학식을 하는데, 여름 방학이 없고 오직 겨울 방학만 있다고 했다. 즉, 가을의 추수절이 끝나고 다시 내년 1월 1일까지 긴 방학을 맞는 것이다. 겨울 방학에 여기로 와 줄까? 와 주겠지?

마법 우표가 붙은 마탑 의뢰의 등기우편을 제외하고, 보통 인편으로 보내는 일반 우편으로 편지가 오는 것까지는 약 1개월 이상이 걸린다. 플로렌스 아카데미는 여기서부터 그다지 멀지 않으니까 따로 사람을 사서 우편을 보내면 2주만에 도착하기도 한다. 국경을 넘는 시간을 제외하면 빠른 편이다.

마차에서 내리니 역시 이 곳이 북쪽 지방이라 그런지 퍼 숄에 긴 장갑으로 무장한 상태인데 추운 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마차에서 내려 궁 안의 정원으로 들어가니까 마치 온실에라도 들어온 듯이 바깥과는 매우 큰 기온차가 났다. 여름에밖에 와본 적 없어서 몰랐는데, 실제로 황가를 수호하는 드래곤의 안배로 황궁 내의 정원은 몇 군데만 제외하면 봄에서 가을을 오가며 온실의 온도를 거의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계 전부 갖가지 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왕.

이게 바로 드래곤의 마법이구나, 하고 새삼 감탄했다. 피어 있는 꽃을 보니 정말로 드래곤의 9클래스라는 게 실감이 난다고나 할까. 유렌은 지금 6클래스 아냐? 그럼 3클래스만 올리면 유렌도 이런 걸 할수 있는 거네?

……그런데 그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가 말하길, 7클래스인 흑의 대공과 6클래스인 자신의 마법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난다더라. 그렇게 따지자면 9클래스는 진실로 신의 영역인 것이다.

따뜻한 정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퍼 숄과 겉옷을 받아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겉옷을 다 받아주려면 힘들 텐데, 그들도 주요 귀족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나갈 때 알아서 찾아가라는 듯 옆에 걸어둔다고 한다.

개방된 곳이라 그런지 이름을 부른다거나 안내하는 시종은 없었고 대신에 디저트와 칵테일을 들고 돌아다니는 시종들, 온갖 음식이나 과일이 담긴 뷔페 테이블과 자유롭게 얘기하고 앉을 수 있는 의자, 그리고 가운데에는 부드러운 잔디 위에 벨벳이 깔린 원형 공간이 중간에 있었다. 파티 플로어인 것이다.

나는 유렌과 세르의 팔을 양손 가득 꼭 쥐고서 갸웃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직 이곳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보고서는 홀 내로 들어갔다. 자유 참석이다 보니 사람들은 아직 거의 오지 않았다. 나는 이런 파티가 처음이니까 괜히 조금 일찍 온 편이다.

우아하고 웅장한 지금까지의 황실 연회와는 달리 이번 신년 연회는 훨씬 젊은 사람들이 많았고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즉, 내가 만나지도 못했던 신분이 낮은 귀족들인 것이다. 대부분 유행에 크게 따른 화려하거나 개성있는 옷차림이었기에 각각의 옷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당분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익숙한 옷들도 몇 보였다. 유행을 따르는 것은 귀족이지만 유행을 만드는 것은 더 고위의 귀족이다. 플라니아 공녀가 자주 입는 퍼플 백합 무늬 빌로드 드레스가 흔했고, 이루가 즐겨 입는 흰색 레이스 핀턱 셔츠를 입은 남자들도 많았다. 홀 안에는 연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꽃 장식으로 막혀 있었다. 신분의 고하는 크게 신경쓰지 말고 즐기자는 취지인 것으로, 황제와 황족들도 그냥 아래에서 아무 때나 돌아다니며 놀며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귀족들도 최소한의 예의로 편히 상대해 준다. 그렇다고 해도 보통의 파티 만큼이나 신분격차에 대한 예법을 따지기 때문에 결코 마음을 편하게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사교계였다.

나는 왜인지 사교계에 적극적으로 참석하기보다는 수다에 흥미 없고 상당히 도도하게 구는 여공작으로 알려져 있는 모양인데, 확실히 세이시아의 얼굴로 긴장을 하면 그런 표정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 얼굴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었으니. 게다가 세이시아는 옛 사교계에서 프리셀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으니 고정관념을 깨기도 쉽지 않았겠지. 하지만 내 친구인 플라니아 공녀도 사교계를 이끌고 있지는 않으니까 나도 그냥 이대로 편하게 살기로 했다. 내 태생적 지위가 지위인만큼 보통 때 살롱이나 모임에 참석해서 같이 어울려주지 않는다고 파티 때 나를 무시하는 귀족 여성들은 없었다. 그만큼 뒤에서 퍼지는 소문도 있는 모양이지만, 사교계의 중심 중 하나인 이루와 어쩐지 친해져버리는 바람에 그가 어느 정도 내 소문의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아직 내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넬 정도의 고위 귀족들은 도착조차 하지 않은 상태고, 홀의 일부를 초면인 하급 귀족들이 채우고 있었다. 채웠다고 하기에는 적은 숫자였지만 연줄을 만들기 위해 일찍부터 공식 파티에 방문해 차례로 고위 귀족에게 인사를 건네며 죽치고 있는 부류였다. 데뷔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나에게 있어서도 그렇고 그들에게 있어서도 서로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기에 눈에 띄는 내 모습에 은근히 궁금함과 호기심을 가지는 부류들도 몇 있어보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나보다 나이도 많고 파티 참석 횟수도 많은 세리안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시렌느 자작님, 일찍 오셨네요!"

"아무래도 이번 해의 신년 파티는……."

"오랜만이에요, 자작……."

……세르는 어딜 가도 인기가 많은 것 같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미 20대 중반의 한창 때고, 자그마치 20대 초반에 황실 기사단 단장을 역임했으며 현 백의 기사단 부단장, 차기 공작 유망주, 능력 있고 잘생긴 사위 후보 1위, 날렸던 바람둥이……. 아, 마지막 건 빼고. 세르는 이제 내 거니깐.

나는 어쩔 수 없이 대응해주는 세르가 잠시 내 손을 놓자 유렌의 팔을 두 손으로 잡고 그의 품에 기대섰다. 히잉. 인간의, 그것도 귀족의 사소한 사교관계 일에 대해 전혀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정령인 나로서는 자랑스럽기보단 아쉬웠다. 세르에게 가지 말고 나랑만 놀아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주겠지만, 그래도 떼쓰고 싶지는 않다. 남들 앞에선 남편인 유렌에게만 떼쓰고 앙탈부리기로 했으니까(응?).

"시아, 다리 아프죠? 잠시 앉아 있기로 해요. 뭐 좀 마시겠습니까?"

유렌은 어깨끈 하나만 걸쳐진 내 맨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쥐며 여러 가지 칵테일이 있는 테이블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

네넹, 시아는 사실 평민이 처음입니다.

지금까지 평민들과는 대화도 거의 안 해봤고, 민간 거리에 잘 나가본 적도 없습니다.

정령이니까 계급은 안 따지겠지만, 귀족으로 살다보니 만날 일이 없었죠. 유렌도 시아랑 나들이 갈 때는 귀족들이 다니는 거리로만 안내했고, 심지어 사신행에서도 다른 귀족들이 다 나서서 해결해 줬으니까요.

쓰다보니까 그렇게 되더군요ㅠㅠ 이래서 귀족들이란(?)

얼레? 또 새해네. 시아가 지금 몇살이지? ……라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앞쪽을 다 훑어보고 시기를 일일이 알아봤습니다. 기분상 3년은 지난 것 같은데 1년정도밖에 안되었군요. 그래서 시아 님의 경험치와 인지도도 아직은 그리 많지는 않은 편.

아, 그리고 노블 얘기인데 아젤은 송이송이 아니에요! 다른 캐릭이 송이송이라능. 이젠 송이송이가 뭔지도 헷갈리지만 어쨌든 송이송이는 다른 남캐님이라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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