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공작님, 제발! -->
"……."
대공은 잠시 멈칫하더니, 아이스크림을 녹여 삼키고 나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침묵이 이어졌다. 머리스타일 때문인지 옷차림 때문인지 그는 처음 만났던 그 때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원래가 스무 살 초반대의 얼굴인데다가 피부가 희고 매끈하며 굉장히 수려한 외모였으므로 잘 하면 십대 후반으로도 보일 것 같은 외모였으니까. 하지만 그의 실제 나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60살 노인이 손자 옷 입고 나이트에 놀러온 모습으로밖에 안 보였다. 애매한 나이다 보니까 그렇다. 세르는 자그마치 몇천 살인데도 오히려 그 많은 숫자가 실감나지 않아서 늙었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드니까.
대공은 잠시 짙은 속눈썹으로 덮힌 눈을 내리깔더니 리얼하게 모른 척 했다.
"당신 누구십니까."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아까와는 톤부터 다르네. 대외적인 중후하고 낮은 말투랑 방금까지의 소년같은 사적인 말투가 따로 설정되어 있는 건가?
나는 내 소개를 했다.
"저 이루랑 친한거 아시죠? 이 얘기 해주면 이루가 참 좋아할텐데."
"오랜만입니다, 시렌느 공작."
직접 만나본건 두번째지만 말이다. 그제서야 모른 척을 포기한 듯 그는 인사를 해왔다. 보통은 내가 먼저 인사해야 하지만, 이 영감이 도무지 정체를 시인해야지 말이다.
"네, 오랜만이에요. 흑의 대공 전하. 그런데 그 쪽은 누구에요? 소문의 그 약혼녀?"
"약혼녀라니……."
대공은 주춤하더니,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에이, 설마 약혼녀겠어. 딸이겠지. 아까야 대공인줄 몰랐으니 연인으로 착각했다지만, 대공은 60살이었다. 만약 정말 저 미니미니 소녀가 약혼녀면 당신은 로리콘 인증 플러스 변태 인증ㅇㅇ. 나는 대공의 인간으로서의 뛰어난 능력을 존경하기에 당연히 그가 40대에 하룻밤의 유희로 몰래 만들어내 숨겨둔 딸일거라고 생각했다. 잠깐, 딸이라고 해도 몰래 숨겨둔 사생아라면 이것 역시 대공의 체면을 깎아먹는 설정이잖아. 딸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정중한 대공의 태도와 스스럼없는 소녀의 태도가 조금 걸리지만 그래도 설마 약혼녀겠어?
대공은 아무리 파티 때와는 달리 편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언전 대하기에는 너무 빈틈없어보여 불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키가 장난아니게 큰 대공 옆에서 마치 인형처럼 보이는 조그마한 블론드의 그 소녀는 쭉 옆에 붙어있다가 그의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을 서슴없이 잡아당기거나 쓰다듬곤 했다. 그 예쁘게 생긴 소녀는 도자기로 빚어놓은 듯 묘하게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갖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과 닮은 것도 같다. 드워프가 빚어 만든 것처럼 섬세하고 좁은 콧볼과 살짝 감은 듯한 눈꺼풀, 진짜 백자기처럼 새하얗지만 표면에 옅게 복숭아빛을 띤 피부에 크고 선명한 은하늘빛 눈동자. 투명하지만 눈동자의 동공은 너무나 깊어서 그녀의 감정을 잘 판단할 수는 없었다. 엘릭과는 또 다른 느낌. 엘릭은 검은 안개였지만 이 소녀는 하얀 구름이랄까. 내가 껴안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소녀가 조그마했면 집에 두고 키우고 싶었을 듯한 그런 예쁘고 화려한 인형같았지만, 정말로 얼핏 보면 인형 이상으로는 안 보인다.
……인형.
왜인지, 생명력이 상당히 희미하게 느껴졌다. 작아서 그런 건가? 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 안에서 풀꽃 향기와 바람 냄새가 느껴졌다. 보통의 사람들은 몸에서 풀 향기 같은 건 나지 않는다. 하루종일 풀에서 뒹구는 양치기도, 풀만 먹고사는 채식주의자도, 심지어 하프 엘프인 유렌조차도.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뜻한 살 냄새가 날 텐데.
……으음, 생각하면 뭔가 섬뜩한 결론이 나오니까 그만두자. 내 착각일거야, 아마. 그 소녀의 말투는 이상하도록 가녀리고 침착했다. 하지만 말투에 비해 보이스톤은 생각보다 높게 울리는 상냥한 꾀꼬리같은 목소리라서 잠시 느꼈던 섬뜩함은 사라졌다.
"약혼녀라니 말도 안 돼. 레인이랑 나는 그런 사이 아닌걸."
그 소녀가 생긋 웃으며 먼저 부정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부정의 말을 들은 대공은 목덜미가 붉어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혼녀가……, 아닙니다."
약혼녀가 아니면 뭐란 말야? 댁 얼굴에 약혼녀라고 72pt 돋움체로 써붙여놓고 있잖아요. 그 소녀 쪽은 모르는 듯 하지만 말이다. 설마 그건가? 어린 애를 데려와서 키워 잡아먹는 거. 소녀 쪽이야 그러면 당연히 자기가 키워지는 지도 모른채 나중에 잡아먹히겠지 ㅉㅉ.
이 사람하고 사업적 관계 외에는 가급적 만나지 말아야겠다. 취향은 개인차가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저런 미니미니한 아가를 좋아한단말야? 60살에 저런 소녀를 보면 애기야 부르면서 박하사탕이나 쥐여줘야 하는게 정상 아냐?
"레인, 그나저나 저쪽은 누구야?"
그녀는 역시 보드라운 목소리로 대공을 불렀다. 그런데 레인이라니? 레인이라니!! 설마 저 남자를 부르는 거야? 대공을? 무슨 애칭이 그렇게도 깜찍하담ㅋㅋㅋㅋ. 개인적으로 대공 전하나 이트리샤 님, 영감님 정도의 호칭이 제일 적합하다고 보는데. 무슨 관게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불리는 애칭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뭐 약혼녀니까 그렇게 부르라고 했겠지만 말이다. 변태같아. 나는 빈틈없고 냉랭해보이기만 하던 수려한 얼굴의 대공이 작은 소녀를 앞에 두고 '쟈기야, 나를 할아버지 말고 레인옵빠라고 불러ㅎㅇㅎㅇ'라며 교육시키는 장면을 상상했다ㅋ.
대공은 내 비웃음은 거들떠보지 않으며 그 소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제국의 세이시아 시렌느 공작입니다. 레이나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어서 답례를 하느라 그 후로 몇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만났기는. 댁은 집에서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고 나만 줄창 기다렸잖아. 내가 대놓고 그의 성적 취향을 경멸하듯 쳐다보자 대공은 빨리 대화를 그만두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자리에서 미적거리던 유렌도 일어나서 내 곁으로 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이트리샤 대공……."
"그렇군요. 그대는 이 하프엘프와도 연인입니까? 그러면 전의 그 드래곤은?"
대공은 유렌과 한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 없었지. 그리고 첩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적도 없어서 유렌의 존재는 잘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유렌이 하프엘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드래곤이라니. 세르를 말하는 건가? 기억력 하나는 좋네. 하긴, 잊을 만큼 흔한 일도 아니니까.
소드 마스터의 통찰력은 대단하다고 한다. 일단 소드마스터인 유렌만 해도 세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고 대공도 내가 정령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으니 놀랄 일은 아니다.
"대공전하한테도 얼마 전에 청첩장 보냈잖아요? 우린 결혼한 사이에요."
공개 청혼을 했는데 대공의 귀에는 소문 끄트머리조차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다. 너무 소문나도 좋을 것 없지만 아예 몰랐던 일이라는 듯 말해도 난감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흑의 대공은 청첩장을 읽지 않고 원칙적으로 전부 폐기해버린다더라. 애인도 없이 지낸 솔로 60년차다 보니 결혼하는 것들이 완전 눈꼴시다며 자기에게 온 청첩장은 모조리 화로에 넣고 불태워버리라고 그렇게 명령해뒀던 것이다. 슬펐겠지 뭐. 내 말에 대공은 이제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아, 그 드래곤과 결혼한 사이입니까?"
"아니, 유렌과 결혼했잖아요!! 세르는 세컨드고! 오빠랑 어떻게 결혼을 해요?"
옆에서 듣던 그 소녀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크게 말할 일은 아니지.
"……난잡하긴."
대공은 눈썹을 찌푸리며 작게 말했다. 다 들리거든요. 게다가 당신이 그런 말 할 자격이나 있어?! 로리콘!! 그는 소녀를 안아들고 다시 의자에 앉혔다. 안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걸로 봐서 어지간히 안고 다녔나 보다. 그리고 그는 녹기 전에 빨리 파르페를 다 먹자며 재촉했다. 소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게 조그마한 손을 한번 흔들어보이고 미소짓고는, 대공을 마주 바라보며 다시 작게 조잘거렸다.
확 사진을 찍어서 퍼뜨려 버릴까보다. 흑의 대공의 카리스마와 정치적 영향력을 팍 깎아내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대공은 거대한 나의 뒷빽이었다. 그랬다간 나한테도 타격이 올지도 모른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로리를 탐하는 비인간적인 변태들을 처단하고 싶었지만 조혼은 제국에서 금지되었으며 10살 차이 이상 나는 결혼은 반드시 강제성이 없었는지에 대해 양쪽의 의사를 철저히 묻고 법적인 절차를 거쳐야 하니 대공도 함부로 결혼하지는 않을 것이다. ㅇㅇ맞아 로리쇼타는 지켜져야 해. 대공이 얼굴 표정이 훨씬 생기가 돌고 회춘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내 착각일거야.
랄까 말은 그렇게 해도 대공이 그렇게 나쁜 인간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마 친구 딸이거나 아는 사람의 손녀를 맡은 거겠지 뭐. 그 정도 사람을 판단하는 눈은 있다. 비록 그는 그 소녀를……, 너무너무 많이 귀여워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냥 귀여워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안심한 나는 얼음이 녹은 아이스티를 끝까지 마시며 접시를 싹 비웠다.
"다음엔 어디로 갈까?"
유렌은 녹차를 마저 마시고 살짝 눈을 찌푸렸다. 녹차가 너무 달았나 보다. 녹차에는 설탕을 넣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일부러 이 가게의 녹차는 설탕을 넣었던 것이다. 하긴 단 맛을 좋아하는 소녀들이 주로 오는 곳이니까. 게다가 녹차는 엄청 비싼데다가 녹차를 제대로 우려낼 줄 아는 사람도 일반인 중에서는 거의 없으니 평범한 귀족들이 마시는 녹차에 쓰고 떫은 맛을 없애기 위해 카페나 다른 주방장이 만든 녹차는 설탕을 넣는다고 한다.
"아아, 이젠 옷도 많이 샀으니 다음은……, 마법물품 잡화점에 가 볼까요?"
마법물품 가게? 내가 지금까지 접해본 마법 물품들은 몇 가지 없었다. 기껏해봐야 마법책과 마법주머니 정도? 하지만 실용품까지 합하면 사실 내 생활에는 마법이 꽤 많이 개입되어 있었다. 매일 사용하는 조명도 마법물품이고, 냉장고도, 온도조절기도 다 마법이 걸린 부품으로 만드는 거라고 했다. 심지어 마차에도 파손방지나 도난방지, 방수 등의 마법이 걸려 있다.
유렌의 말에 따라간 마법물품 가게는 입구부터가 진한 보라색의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라색은 마법을 상징하는 색이다. 방울이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운터에 마법과는 별로 관련 없어 보이는 한 여직원이 앉아 있었다. 마법물품 가게는 적어도 마법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만 열 수 있다고 한다. 마법 물품을 다루는 데 최소한의 자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가 가게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는데다가 장사와는 성격도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마법 물품 가게에서는 카운터를 맡아보는 조수가 따로 있다고 한다. 그리고 조수는 마법 물품을 주로 사는 돈 많은 상인들, 귀족들, 그리고 모험가들을 상대하는 데 익숙하며 계산과 대응이 빠르고 물품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할 만큼 머리가 좋아야 한다. 그녀는 한 눈에 우리 사이를 짐작하고(짐작하지 못할 수 없을 정도로 친근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으니까) 안내를 했다.
"연인 사이이신가요? 무엇을 찾으십니까? 애정과 관련된 물건은 왼쪽 진열대에 있습니다."
사랑의 묘약이라고 이름붙이고 실제로는 그냥 유혹향수인 푸른 색의 병을 집어보던 나는 물건을 함부로 만지면 위험하다는 유렌의 제지에 향수를 내려놓았다. 사랑의 묘약이라. 진짜 사랑의 묘약은 금단의 마법약으로서 절대 판매, 제작, 유통 금지가 되어있는데다가 지금은 제조법이 유실되어 만들 수도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약의 여파도 여파이겠지만, 재료로 인간의 주요 신체 부위가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 인간의 심장이 세 개나 들어간다더라. 추가로 더 구하기 힘들고 희귀한 무슨 풀이나 금속 같은 것도 매우 많이 들어간다는데 고대마법의 유실로 인해 현재 묘약의 레시피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마법 물품 가게에는 진짜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쓸모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림이 홀로그램처럼 움직이는 액자나, 불빛이 켜지는 낚싯대, 손톱을 아주 깨끗하게 자르는 손톱 커터기. 그런 취미를 위한 고가의 마법 물품들이 있는 반면 한쪽에서는 색이 변하는 펜이나 지워지는 마법 펜, 소리나는 시계, 마법코팅 칼 등과 같이 비교적 유용해 보이는 물건들이 있었다. 특히 매우 고가의 물건은 한쪽 내부에 진열된 투명한 유리병들이었는데, 전부 힐링포션이라고 한다. 여행자, 기사들이 주로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많이 사들이는 만능 치료약이다. 실제로 창상이나 약간의 내상만 치료할 수 있을 뿐 진짜 만능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불이 켜지는 라이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슈퍼에서 삼백원 하던 라이터가 여기서는 마법 물품이라니. 물론 내부 구조나 겉모습도 다르지만 불을 피운다는 점에서는 별 기능차가 없었다. 게다가 사용법도 달랐다. 라이터의 연료인 마석 값도 상당했기에 진짜 마법사가 아닌 이상 고작 담배를 피우는 데 라이터는 감히 상상도 못 한다. 위급한 상황이나 서바이벌에서 살기 위한 불을 피우는 데 주로 사용되는 물건이었다.
비교적 싼 값의 마법 물품도 있었다. 불이 오래 켜지는 성냥, 감기약, 잘 늘어나는 탄성마법 고무줄, 약간의 방부제, 뜨겁지 않은 방열장갑 등이었다. 방열장갑은 주방용이 아니고 마법사들의 약품 작업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왜 저걸 오븐에서 쿠키 트레이 꺼낼 때 쓰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 마법사들을 위한 마석들도 한 곳에 진열되어 있었으며, 유렌 말로는 VIP가 아니라면 대체로 꺼내 보여주지도 않는 '마법 아티팩트'라는 것도 판다더라.
아티팩트는 실용적인 물건들 말고 귀금속 또는 보석에 마법을 봉인한 것으로서 거의 영구적이고 견고하며 강력하고 확실한 마법이 깃들어 있는데 아주 값비싼 물건이라고 했다. 특히 그런 마법 보석이 박힌 무기는 더더욱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유렌이 마법 길드에서 돈을 벌기 위해 했던 아르바이트가 바로 그 아티팩트를 여러 개 만들어서 공급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교적 공격적인 성향이었으므로 공격형 아티팩트를 만들었는데, 공격형은 흔하지 않기에 꽤나 값을 받고 팔았다더라. 그걸로 드워프제 목걸이와 결혼자금을 마련한 것 같았다. 나중에 부녀회(귀족들의 살롱)에서 자랑해야징.
마침내 도착한 왼쪽 진열대에는 점원의 말대로 연인들이나 쓸 법한 낯뜨거운 용품들이 커튼에 가려진 채 교묘하게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진열되어 있었다. 가장 많은 것이 갖가지 종류의 피임약과 미약들이었다. 전에 세르가 나에게 선물해준 당밀약도 보였다. 적당히 둘의 기분을 고조시켜 주는 것부터 기분좋게 해주는 약, 정력제, 심지어는 남자의 그걸 커지게 해 주는 약도 있다. 최대 두배까지 커진다던데 중복 사용은 절대 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조금 다른 용제로 미끌미끌한 젤이나 크림 같은 것도 보였다. 그런데 여기 이 크림 어디서 많이 본 건데?
이루가 나한테 선물해서 요즘은 화장할 일이 없어 아직 써보지 않았던 화장품이었다. 아니, 화장품인줄만 알았는데, 나는 그 병 아래의 딱지를 쳐다보았다.
"윤활 크림이라고 적혀있는데요, ……해보고 싶습니까?"
푸흡, 나는 내 어깨 너머로 기웃거리던 유렌이 힐끗 보고 한 설명에 그 병을 떨어뜨릴 뻔 했다. 확실히 몸에 바르는 건 맞지만 화장품은 아니다. 이루 이자식, 이런 걸 선물하면 어쩌자는 거야! 랄까 이런 곳에서 당당히 팔지 마! 이 녀석, 다음에 만나면 가만 안 둬, 감히 이런 장난을 치다니!!
"연화제와 이완제가 조금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법약 취급이군요."
유렌의 태연한 설명이 뒤에서 이어졌다. 나는 그 병을 내려놓고 고민에 빠졌다. 집에 있는 크림 한통은 어쩌지? 써볼까? 말까?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고 고개를 저으며 그 옆 진열대의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피부에 좋다고 하는 마사지 젤이었다. 이건 전에 어느 귀족부인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걸 써보니까 좋던데. 피부도 매끈매끈매끈해지고 달콤한 향이 나서 기분도 좋았다. 살결이 실크처럼 보드라워지고 효과가 꽤 좋길래 확인해 보니 고가의 마법약 화장품이었다. 나는 전에 받은 오렌지향 말고 딸기향으로 한병 더 샀다. 내 육체는 원판도 워낙 예쁘지만 세르와 유렌이 녹아내리는 그런 몸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게다가 효과가 미비하다고 해도 나는 마사지 받는 걸 좋아하니 상관없었다.
유렌이 아까부터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은 유리구슬 처럼 생긴 것이었다. 꼭 머리맡에 놓는 구형의 작은 마법 알람처럼 생겼다. 표면에 아무것도 없이 그저 유리구처럼 반들거리지만 받침과 시간표시 버튼만 있다면 진짜 알람으로 착각할 것 같았다.
예쁘게 반짝거리는 그 매끄러운 유리구슬이 마음에 든 건지 그는 내게 물었다.
"어느 색이 마음에 들어요?"
어디 쓰는 거길래? 역시 알람인가? 나는 연한 보라색을 짚었다.
"이 색 맘에 들어. 그리고 노란 색도 괜찮은데……."
유렌은 반투명한 오렌지색을 짚었다.
"이 색도 괜찮네요."
그럼 내 의견은 왜 물어본 거야? 하긴 유렌이 쓸 거면 유렌이 고르는 게 좋겠지만.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세 가지 색깔을 전부 집어들었다.
"에? 그렇게 많이 사는 거야?"
알람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가? 하지만 유렌은 알람 없이도 일찍 일어나잖아?
"일단 써 보고 모자라면 더 사도록 하지요."
게다가 모자라기까지? 나는 의아해했지만 그는 더이상 설명해주지 않고 내가 산 화장품과 알람 세 개를 같이 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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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원래 19금이었……습…….
앗 대공 러브스토리 안 나와염 왜 제 말을 못 믿으시냐능! ㅠㅠ
이번 등장은 앞으로 정령왕이 될 시아에게 있어 인간세계의 연결고리 중 하나가 되어 줄 위의 금발머리 소녀를 소개시키려는 의도로 쓴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도와줄 사람 1人이라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