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01화 (101/226)

<-- 6. 공작님, 제발! -->

꽃가루를 너무 마신 것 같다.

"나 과음했나봐."

한낮, 햇살이 스며들어와 내가 눈을 비비자 유렌은 내게 팔베게를 해준 상태로 손을 뻗어 짙은 색의 벨벳 커튼을 쳤다. 으응, 햇볕 좋은데 왜? 그치만 광합성 대신 다른 영양공급원인 유렌이 있으니까 괜찮아. 이미 유렌 때문에 많이 배부르기도 했고.

유렌은 얼굴로 흘러내리는 긴 진주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걷어내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시아는 응석이 심하네요."

그는 귀엽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입술에 키스했다. 응석 아냐! 초저녁부터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마시면 많이 마신거지!!!! 간신히 잠깐 자고 일어나니 두 시간정도 지나 있었다. 얼마 자지도 못했나보다. 과일 먹고 또 자야지. 나는 유렌이 챙겨주는 물과 딸기를 먹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하지만, 유렌은 바디 샴푸를 잡고 나를 그대로 안아들었다.

"목욕하고 재워드릴게요."

마침 씻고 싶기도 해서 나는 유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평소에야 시녀들이 목욕준비를 다 해주지만 수도꼭지가 있는 이상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유렌은 시녀를 부르지 않고 온도를 맞춘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유렌의 가슴에 안겨 있자니 잠이 쏟아진다. 나는 물을 찰방거리며 유렌을 바라보았다. 즉시 유렌은 내 입술에 키스해왔다. 그리고 물에서 나를 꺼낸 다음 비누거품을 낸 손으로 꼼꼼히 얼굴부터 씻겨주었다.

"시아는 피부가 정말 하얗고 고와요."

"으응, 유렌도."

보들보들하기는 마치 아가 피부 같았다. 보기 싫게 붉거나 노랗거나 불규칙적으로 그을린 톤이 아니고 달콤한 슈가파우더를 뿌린 커피설탕 색인데다가 결도 고와서 남자 피부 같지 않고 말야. 나는 유렌의 몸에도 비누를 묻혀 손으로 쓰다듬어주었다. 말랑말랑해서 깨물고 싶어! 냠냠!

"너무 예뻐서 먹고 싶을 정도에요."

응응 나도 유렌 핥고싶어.

유렌은 왠지 단 맛이 날것 같은 피부인데 핥으면 언제나 아무 맛도 안 나서 서글프지. 하지만 탱탱한게 꼭 젤라틴을 가득 넣은 커피 젤리같아서 만지면 언제나 기분좋다.

얼굴을 다 씻고 유렌은 바디 샴푸를 묻혀 흐를 정도로 거품을 낸 미끌미끌한 손으로 내 몸을 만졌다. 씻기는 게 아니라 만지는 거였다. 팔다리를 질척하게 더듬고 은근슬쩍 다리를 벌리게 해 엉덩이 사이와 비부의 겉꽃잎까지 만지작거렸다. 게다가 가슴은 얼마나 집요하게 농락해대는지, 탱글탱글하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 튀어오르려는 가슴을 다잡는답시고 연이어 풀었다 쥐었다를 반복하며 미끈거리는 손으로 희롱했다. 이건 씻기는 게 아니잖아!

"유렌 음흉해! 내가 씻을래!"

"으흥, 씻겨준다니까요. 시아는 여왕님이니까 제 시중을 들어야 해요."

목욕 전문인 엘레스트라도 요새는 꽤 밝히긴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예전엔 그나마 순진했는데. 그래서 종종 놀리기도 했는데 이젠 그것도 못하겠네.

"제가 이렇게 된 건 다 시아 탓이잖습니까. 그런 극상의 쾌락을 가르쳐줘버리면, 당연히 언제나 욕구불만에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겠죠."

"여, 여, 여왕님한테 기어오르는거야?"

"절대 아닙니다. 저는 영원히 시아의 발 밑이니까요. 다만 지금은 저를 귀여워해달라고 애교부리는 겁니다."

……이 음탕한 손길의 어디가 애교?

하지만 그런 유렌의 살짝 물든 귓불이 귀엽기도 해서 나는 애욕에 물든 그의 긴 손가락에 몸을 내맡겼다. 비누거품이 튀어 그의 몸까지 미끈미끈해졌기 때문에 나는 유렌의 몸에 지탱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도망치려고 바둥거려봤자 미끄러워서 무용지물이라는 점이다. 그 점을 잘 이용해 나를 무릎에 앉힌 유렌은 이번에는 아까의 애무로 달아오른 내 몸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한번 하고 또 침대에서 해요."

윽, 남편이 되고 나니 뭔가 요구하는 것도 당당해졌잖아?!

"하지만 하고 싶은걸요."

나는 그의 의외로 어울리는 칭얼거림에 넘어가버렸다. 어쩔 수 없지. 유렌에게만 해주는 거야. 게다가 유렌이 정말 너무너무너무너무 귀엽기도 했고.

신혼기간이니까. 게다가 충성스러운 그의 행동에 대한 포상으로 내 몸을 마음껏 유렌이 만질 수 있도록 손에 쥐여 주었다. 그는 비누로 씻어내린 내 몸을 조물딱 소리가 나도록 끈질기게 만지며 입술에다가 혀로 장난을 쳤다.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내 맨살을 쓰다듬는 것에서 그 날 유렌과 처음 목욕했을 때가 생각났다. 흥분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결국 완전히 끝내진 못해서 유렌이 꽤나 애타했었지. 나는 이번에는 그에게 충분히 맛보여주기 위해 몸을 돌려 유렌을 바로 안았다. 그는 물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틀어올려 핀을 꽂아준 후 비누의 미끄러움으로도 내가 타고오를 수 있게 무릎을 세워주었다.

따뜻한 살결 위로 덮힌 비누거품 때문에 유렌의 매끈한 가슴팍에 얹은 손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볼록하고 단단하게 솟아있는 유두를 중간에 스쳐지나갔다. 나는 다시 비누거품을 헤집어 손가락을 문질렀다. 마침내 유두를 찾아내서 손톱으로 집어내 무자비하게 문질렀다. 그는 순간 흠칫하며 낯익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아아, 시아가 만져줄 필요는 없는데……. 신혼기간 동안은 제가 봉사해드린다고 했잖습니까."

"괜찮아, 나도 유렌을 귀여워해주고 싶은걸. 저기 말야, 내 유두랑 유렌 유두랑 어느 쪽이 더 클까?"

"저와 비교하려는 겁니까?"

그는 내가 귀엽다는 듯 쿡쿡 웃으며 상체를 펴고 잘 보이도록 해주었다. 그거야 가슴 크기나 키나 손 크기 같은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잖아. 나는 가슴이 젤리로 되어있지만 유렌은 근육이고. 사실 가슴 쪽이야말로 내가 유렌을 크기로 이길 수 있는 신체부위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자꾸 미끄러지려는 가슴을 받치고 유렌의 가슴에 밀어붙였다. 올록볼록한 유두의 감촉이 서로 스쳤다. 비누거품을 걷어내고 유렌과 내 유두를 맞대자 둘의 차이가 확실히 보였다.

유렌의 가슴은 나에 비해 더 넓고 짙은 색이었다. 하지만 유두는 딸기 속살처럼 진하게 물든 분홍빛이다. 내가 좀더 연한 분홍색이긴 한데, 색만 봐도 이 부근이 예민하다는 걸 알 수 있을 듯 했다. 유렌의 유두가 조금 더 단단했지만 크기는 서로 비슷했다. 모양이 조금씩 달라서 정확한 크기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으응, 어렵네. 게다가 의외로 유렌 거도 크잖아. 몸 자체가 커서 그런가?

비누 덕분에 유두가 서로 스치는 감촉이 기분좋아서 둘 다 자극되고 있었다. 유심히 비교 중이던 나와 같이 유렌도 유두를 서로 바라보다가, 참기 힘들었는지 내 허리를 바로 조여당겼다. 그래서 가슴을 쥐고 비교하던 손이 미끄러지며 내 가슴이 그의 가슴팍에 바로 밀착되었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몸에 찰싹 달라붙어 색색거렸다. 따뜻한 욕실의 증기 때문에 저절로 숨이 차오르는 걸까, 아니면 밀도 높은 그와의 접촉 때문일까.

"시아."

"응?"

유렌은 할딱거리며 굵은 손가락을 내 하반신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 쪽에 딱딱한 자신의 것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럼 이제 누구의 여기가 더 큰지 비교해 볼까요?"

***

유렌이 원하는 대로 크기 비교를 실컷 하고, 씻은 후 나와서 머리만 말리는 동안에도 몇 번을 더 침대에서 굴렀다. 그리고 아침인지 점심인지 저녁인지도 모를 식사를 대충 하고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밀월기간을 방에서만 지낼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나 놀러가고 싶어, 유렌하고 놀러갈래, 안 데려가면 울꺼야 잉잉 떼떼."

그래서 유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 오면 잡화점과 마법 상품 판매점과 옷가게에서 마음껏 쇼핑하고 싶다는 내 계획을 뒤늦게서야 실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렌은 아침에 내가 한번 더 예뻐해주자 만족한 듯 흔쾌히 옷을 입었다. 그리고 남에게 알릴 필요 없이 나는 검술 실력자인 유렌만 데리고 슬쩍 빠져나왔다.

여러 번 들은 구분법이지만, 기혼 여자들은 원색의 짧은 치마보다는 종아리 아래로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고 기혼 남자들은 짧은 상하의와 화려한 무늬의 옷을 입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기 편한 무릎 길이의 빨간 프릴원피스를 입었다. 상관없잖아, 어차피 중요한 자리에 가는 것도 아니고 길거리에 놀러 가는 건데 뭐.

원피스 위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유렌의 팔을 껴안았다. 유렌은 그 상태로 내 손을 감싸쥐며 거리로 나를 안내했다.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평민들이 다니는 곳이라기 보다는 귀족들이나 돈 많은 상인들을 주 고객으로 하는 번화가 중에도 고급 번화가였다. 유명한 셰프에 화려한 옷차림의 종업원이 돌아다니는 최고급 레스토랑도 있고, 차 한잔에 몇십 실버씩 하는 야외 카페테라스도 있었다. 보석상, 옷가게는 물론이고 귀족들의 취미생활용 수입 잡화점. 심지어는 경매상 전단지도 붙어 있었다.

내가 가본 커다란 부티크는 이 거리 입구 광장에 있었기 때문에 이 안쪽까지 들어와본 적은 처음이었다. 오늘은 물건을 산다기보다는 그냥 구경 목적으로 왔지만 어쩌다 보니 처음으로 방문한 옷가게에서 주요 손님으로 붙잡혀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유렌의 새 옷이나 사줄까 하고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공자일 때 입던 옷이야 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예복과 정복은 파티 때마다 내가 맞춰준 것 뿐이고 몇벌 없었던 것이다. 그것 말고도 유렌의 옷은 내 취향대로 입히고 데리고 다니고 싶다. 전에 승마할 때 입었던 그 달라붙는 진갈색 가죽 팬츠가 완전 멋졌는데, 그리고 가끔씩 햇볕이 따가운 날 입는 헐렁한 듯한 얇은 흰색 린넨 셔츠도 어울린다. 물론 가장 멋있었던 것은 결혼식 날 새하얀 예복을 입었을 때였다. 옷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유렌은 다른 쪽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탐구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으로 뭘 그렇게 유심히 보나 했더니만 속옷이었다. 그것도 여자 속옷.

설마 첫날밤의 그것 때문에 야한 속옷에 맛들린 건 아니겠지? 안돼, 보지마, 보지마! 나는 유렌을 속옷에서 눈을 돌리게 해 남성용 의류들을 가리켰다.

"유렌, 어떤 옷이 좋아?"

"제 옷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냥 시아가 골라주는 거라면 아무 거나 좋습……."

헉! 어떻게 그런 센스없는 말을 할 수가 있어! 결혼하더니 유렌 너무 둔해진 것 같아! 결혼한지 이제 겨우 사흘째지만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패션센스 같은 것 없이 아내가 골라주는 대로 내복에 반바지만 입는 아저씨 유렌이라니! 말도 안돼!!!! 내 격한 반응에 유렌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전에도 제가 옷을 살 때는 시아가 골라주는 대로 샀습니다만."

……파티복은 그랬었지. 파티복 말고 평상복은 유렌과 사러 나온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유렌은 당연히 내가 원하는 옷을 고르라는 듯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치만 유렌 패션센스 좋지 않아? 갖고 있는 옷들도 비교적 최신에 유행하는 종류들 뿐이고, 깃 달린 모자를 쓰거나 핀턱이 잡힌 하얀 셔츠를 입어도 쿨시크해 보이도록 코디하는 편이었다. 거기다 모델핏이라서 뭘 입어도 잘 어울리지. 설마 결혼했다고 아저씨처럼 하고 다니려는 건 아니겠지? 왠지 유렌은 그래도 멋질 것 같지만, 하지만 그것만은 안돼!

"후후, 설마요. 여왕님 쟁탈 경쟁에서 이기려면 결혼했다고 해서 나태해져서는 안되지요. 게다가 저는 아직 어린 20대입니다. 여전히 시아에게는 멋있게 보이고 싶으니까 지금도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 같은 건 나름대로 열심히 관리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아내가 골라준 걸로 입고 싶어서요. ……안됩니까?"

살며시 눈웃음을 지으며 날 내려다보며 말하는 유렌의 표정에 나는 멍해졌다. 아저씨라니, 응응, 말도 안돼! 이렇게 멋진데 유렌이 후줄근한 아저씨 같은 게 될 리가 없잖아? 나는 군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렌의 몸매나 근육 위치 하나하나까지 나는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핏이 맞고 어울리는 옷도 잘 알수 있었다. 세심하게 살펴보고 제일 잘 어울리는 예쁜 옷 한벌을 샀다. 아잉 즐거워. 내 옷 말고 다른 사람의 옷을 쇼핑하는 것도 굉장히 좋은데.

신혼의 새로운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는 동안 유렌은 두 번째 가게로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쇼핑백이 한가득이었다. 유렌이 전부 들긴 했지만 무거워하진 않더라도 꽤 불편해 보이는데…….

내가 주춤하자 유렌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리 아픕니까? 그럼 잠시 쉬었다가 다시 쇼핑할까요?"

"응, 좋아."

내가 아픈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걱정에 행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카페 중에서 나는 분홍색과 오렌지색, 하늘색 장식이 있는 파스텔톤의 건물로 들어갔다. 아줌마들이 주로 차를 마시는 분위기 있는 카페가 아니라 젊은 귀족 소녀들과 그 남자친구들이 주로 다니는 곳 같았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진짜 사귀는 사이처럼 보이겠지? 그렇지 않아도 부부 사이지만, 그래도 둘의 사이를 좀더 부각시키고 싶은 신혼의 심리였다.

실내 인테리어를 감상하며 창가로 안내받은 나는 분홍빛 웨이트리스 복을 입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예쁘다기보다는 귀엽고 싹싹한 분위기의 소녀들이었다. 연인들이 주로 오는 곳이니까 종업원이 너무 예쁘거나 잘생긴 사람이면 곤란하겠지. 하지만 종종 짧은 웨이트리스 복의 치마를 감상하러 오는 변태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도 전에 그런 소문을 들었으니까.

"시아는 뭐가 드시고 싶으세요?"

"응 이거랑 저거랑 요거!"

유렌의 물음에 구슬과 리본으로 장식된 메뉴판을 짚어가며 내가 말했다.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 이름과 가격, 설명이 적혀 있었다. 집에서 주방장에게 부탁하면 뚝딱 나오는 음식들이긴 했지만 왠지 이쪽이 훨씬 더 맛있어 보인다. 왠지 모르게 이름도 훨씬 길었고.

체리 잼과 딸기 소스 아이스크림을 곁들인 초콜릿 버터 생크림 롤 케이크, 그리고 패스츄리 오렌지 복숭아 크림 타르트, 마지막으로 얼음이 씹히는 라즈베리 아이스 티. 유렌은 일반 녹차를 선택했다. 메뉴판 자체에는 그냥 녹차보다 녹차 크림 밀크가 더 앞에 있었지만 그는 가급적 불규칙적으로 단 것을 잘 먹지 않았다. 그나저나 아이스티가 엄청 비싸네. 얼음이 들어가서 그런 건가? 제국은 덜한 편이지만 케르타 국에서는 얼음이 눈 튀어나오게 비쌌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주스에 얼음을 넣어 마셨고, 얼음 마사지에 얼음 목욕과 얼린 과일을 잘 먹었다. 국고가 조금 휘청했을거다ㅋㅋ. 하지만 내 공작가에서는 냉장고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얼음을 돈주고 사본 적이 없었다. 그냥 얼음 가져오라고 하면 바로 냉장고에서 얼려진 걸 가져왔으니까. 아, 냉장고 유지비가 꽤 되긴 하더라.

주문을 마치고 메뉴판을 살펴보았다. 온갖 달콤해 보이는 것이 많았다. 게다가 커플 과일 빙수라며 하얀 눈송이 위에 온갖 과일들이 층층이 얹혀 있는 그림이 있었다. 이거 먹고 싶다. 유렌하고 나랑 커플인데, 주문할 수 있겠지? 나중에 와서 먹어봐야지. 어라, 이건 뭐지? 분홍빛 파르페 그림이었는데, 커플 스위티 슈가 초콜릿 핑크 아이스크림 파르페라는 이름의 음식이었다. 초콜릿 시럽에 적신 쿠키 위에 아이스크림, 그리고 또 과일과 잼, 추가 아이스크림, 딸기 크림에 또 과자가 섞인 아이스크림, 초콜릿이 묻은 막대 과자에 설탕을 가득 넣은 생크림과 사탕 조각, 젤리, 바나나와 코코아 가루, 온갖 과일, 꿀 시럽과 마지막으로 초콜릿이 또 한번 뿌려지고 눈처럼 새하얀 슈가파우더가 그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당분이 거의 일주일 간식치였다. 이걸 대체 어느 커플이 다 먹을 수 있을까? 게다가 단 걸 좋아하는 소녀들이라면 모를까, 멀쩡한 남자들이 이런 걸 먹을 수 있을 리가…….

"홍차 한 잔과 커플 스위티 슈가 초콜릿 핑크 아이스크림 파르페 하나."

굵고 낮은 남자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마침 서빙되어 와서 한 모금 들고 마시던 아이스티를 뱉을 뻔 했다. 진짜로 저걸 주문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남자가!

아이스티를 들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힐끗 보니 검은 머리를 포니테일로 올려 묶은 젊은 남자와 한 곱슬거리는 단발의 금발머리 소녀가 마주앉아 있었다. 여동생과 온 것 같았다. 나도 참, 멀쩡한 사내가 혼자서 대형 핑크핑크 아이스크림 파르페를 앞에 두고 당당하게 먹는 모습을 상상해버렸다.

……잠깐, 검은 머리?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도 참. 엘릭은 목소리도 다르고 머리길이도 훨씬 짧잖아. 내가 아는 검은 긴 머리는 흑의 대공 뿐이지만 그 사람도 역시 여기 있을 리가 없지.

나는 유렌에게 롤케이크 조각을 잘라서 먹여주었다.

"자기야, 아 해봐."

"응, 우리 이쁜 자기도 아 해보세요♡"

유렌은 내 말에 뺨을 살며시 붉히며 입을 벌렸다. 케이크 조각을 삼키고 내게도 먹여주며, 내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손끝으로 닦아내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핥아먹었다. 서로 먹여주며 달콤함을 마음껏 즐기는 동안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원래 이런 커플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으니 당연하다는 듯 종업원은 그냥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유렌이 워낙 눈에 띄는 외모였고 내 화려한 머리색도 한몫 해서 혼자 온 손님들의 질투어린 시선이 가끔 느껴졌다. 하지만 유렌은 내 꺼니까 구경만 시켜줄 수 있고 절대 손으로 만지지는 마세요. 먹이 주는 것도 싫어.

우리가 신혼부부의 권능으로 닭살 돋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부러웠는지 뒤에서도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도 저렇게 해볼까요?"

아까 그 아이스크림 파르페를 주문했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여동생이 아니고 커플이었나 보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말이지. 랄까 파르페 시킨 게 남자 쪽이었냐!! 여자 쪽은 그냥 홍차를 주문했잖아?! 우리하고는 정 반대네. 나름대로 언밸런스하면서도 어울리는 식성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금발 소녀의 조그만 대답이 들렸다.

"……저게 하고 싶어?"

"꼭 하고싶습니다."

대체 왜 저런게 하고싶냐는 듯, 영 미심쩍은 소녀의 물음에 그 남자는 다시 한번 하고싶다며 졸랐다. 나는 조그만 금발의 소녀가 아이를 달래듯 어쩔 수 없이, 하지만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가득 떠서 그 남자에게 살포시 먹여주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속 뒷모습만 보이던 그 남자가 아이스크림을 곧장 받아먹느라 고개를 틀자, 나는 기겁해서 떫은 표정으로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서 왜 이러고 계세요, 대공전하."

그 나이에 이러시면 안 되잖아요. 게다가 파르페는 왜 주문한 거야? 단 게 그렇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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냠냠냠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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