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공작님, 제발! -->
아젤 님은 눈에 띄게 마른 것 같다. 그 통통하던 젖살은? 풍성하고 보드라워 보이던 뺨은? 원래도 마른 편이었지만 키가 커서 그런지 더 말라 보인다. 그렇지만 세밀한 머리카락 색깔과 드문드문 길게 휘어진 속눈썹은 어딘지 모르게 서정적이고 분위기 있어 보였다. 요즘 유렌이 체력 훈련이랍시고 아젤님을 끌고 스파르타 훈련을 달달달 시키더니 한층 더 말랐지만 뼈대 자체는 튼튼해지고 운동량이 늘어나 남자다워지고 키도 더 큰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아젤 님은 어리고 귀여웠다. 특히 저 크고 둥근 눈망울은 나중에 성장했을 때 부드러운 인상의 동안 미소년이 될 것 같아 기대치가 높았다. 나는 생긋 웃으며 아젤 님의 맞은 편에 앉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결혼 축하드려요."
아잉 난 몰라, 하며 살짝 뺨을 연한 장미빛으로 물들이고 수줍게 꽃잎을 웅크리자 아젤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위스피닌 공자님, 아니 이제는 백작님이군요. 그분께서는 굉장히 좋은 사람이니까……. 세이시아 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요. 백작님의 능력이라면 당신을 충분히 행복하게 해줄 겁니다."
아젤의 말은 미묘하게 쓸쓸함을 담고 있었다. 나는 왠지 울적해 보이는 축하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내리깐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 앗, 이건 혹시 주변에 커플이 생기니 우울해진 솔로의 마음의 병?! 나는 괜히 아젤님을 위로한답시고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저번 일 이후로 가급적 그의 몸에 허락없이 손대는 일이 없도록 주의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아젤 님은 왠지 모르게 만져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아, 역시 보는 것만큼이나 그의 푸른 머리카락은 윤기가 흐르고 부드러웠다. 손에 닿는 시원한 감촉은 마치 매끄러운 비단실 타래를 만지는 것 같은 느낌. 살며시 머리카락을 쥐고 흘려버리다가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우와, 가만히 있는다! 신기해! 게다가 머리카락 너무 보드랍다.
"괜찮아요. 언젠가 아젤 님도 여자친구가 생기면……."
아젤이 갑자기 자신의 머리 위에 얹힌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놀라서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 때와는 달리 이번의 아젤은 내 손을 쥐고서는 자신의 뺨에 그대로 눌렀다. 훨씬 살이 빠진 뺨의 약간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게다가 아직 어린아이처럼 여리기는 하지만 굳은살이 생기기 시작하는 건조한 손바닥은 거의 내 손만큼이나 컸다.
그는 물기어린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렸다.
"그런 건 아마 평생 저에게 없을 겁니다. 시아 님, ……아무래도 결혼식은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결혼식 며칠 전에 플로렌스로 떠나거든요. 수료가 끝나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간 건강하세요."
도망치듯 그가 나간 다음에야 나는 아젤이 처음으로 나를 세이시아 님이 아니라 시아 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2주일째. 오늘은 드레스 가봉이 있는 날이다. 그 이후로 아젤님은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찾아갈 시간조차 나지 않는다. 아젤님이 매일 유렌이 있는 별관 쪽을 드나든다는 거야 들어서 알고 있지만 세르는 아젤님에 대해 잘 말해주지 않았다. 단지 유렌을 보지 못해서 우울한 나를 달래준다고 계속해서 꽃가루나 과일을 먹일 뿐이다.
과감하게 밤마다 나와 같이 지내며 팔베게 하고 놀아주던 세르는 오늘 아침도 나를 깨우기보다는 꽃가루 먼저 먹이는 짓을 반복했다. 충분히 적신 화분액을 혀로 핥아내며 샤워실로 기진맥진한 나를 밀어넣고 물을 틀어 씻겨준다. 나는 그가 내 몸을 닦아내고 옷을 입혀주려고 하자 울먹이며 매달렸다.
"흐엥 나 졸려, 세르~!"
유렌이라면 일이 밀리더라도 좀더 자게 침대에 눕혀주었을 텐데 세르는 그러기보다는 잠이 깰 때까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키스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나중에 일처리가 걷잡을 수 없게 늘어나기 때문에 지금 당장 깨우는 세르가 옳은 선택이지만 그래도 졸린 당시에는 유렌이 더 그리울 수밖에 없다.
꾸벅꾸벅 졸며 드레스 가봉을 다 끝내고 나서 서류에 한참 매달려 드디어 어제의 밀린 분량까지 다 끝냈다. 세르가 일부를 맡아주었던 점도 크지만, 이제는 드디어 결혼 준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꽃을 고르는 일, 결혼식 초청장, 연회의 예산 지정도 어제 끝냈고 조금 한가해진 나는 오늘의 남은 시간은 유렌을 보러 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별관에 간다고 말하며 처리된 서류들을 한데 모아 놓고 문을 열려는 내 허리를 세르가 덥석 붙잡았다. 순식간에 꽉 안겨서 발이 허공에 뜰 정도였다.
"세르? 왜?"
나는 당황해서 그를 불렀다. 세르는 나를 든 채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쿡쿡 웃었다.
"흐음, 뭐야, 이 오빠를 혼자 놔두고 가다니 섭섭한데. 안 본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유렌을 보려는 거야? 결혼식 당일까진 안 돼."
기껏 닦달해서 유렌 쪽에서 못 오게 묶어놨는데 네 쪽에서 찾아가면 곤란하지, 라며 세르는 중얼거렸다. 그래서 유렌도 이 쪽으로 안 온거구나! 하긴 유렌 성격이라면 담을 타넘어서라도 규칙을 무시하고 내 방에 쳐들어왔을 텐데. 그래도 공작가의 결혼인데 전통은 지켜야 하지 않겠어? 라고 하는 세르의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어차피 유렌은 결혼하고 신혼 기간에 실컷 볼 것 아냐? 대신, 솔로의 마지막을 오빠가 화려하게 즐기게 해 줄게. 유렌이 별관에서 결혼 준비하며 책이나 파고 있는 동안 나는 하나뿐인 여동생을 예뻐해주는 거야. 그래야 나와 유렌이 서로 공평하지 않겠어? ……신혼은 유렌에게 양보할테니 결혼 전까지의 밤엔 나만 생각해."
나를 유렌과 결혼시킨다는 세르의 결심도 꽤 큰 고심 후에 나온 결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평하게 모든 나비의 장미가 되어주기로 했으니까.
나는 문을 잠그고 창문에 커튼을 쳤다. 세르는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그치만 방에 돌아가려면 복도를 두 개나 지나야 하는데. 집안 사람들에게 수상하게 비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두어시간 정도는 함께 있어도 될 것이다. 서류처리 하는 동안은 들어오지 말라고 네리아와 카딘과 라르슈에게 말해두었으니까. 소파 네 개와 의자 한 개, 책상과 책장이 있는 집무실은 내 침실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방이었는데 바닥에 자주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채광이 잘 되는 큰 창문에는 연한 노랑 색의 두꺼운 커튼이 달려 있었다.
나는 세르의 어깨를 잡고 소파에 세로로 눕혔다. 세르는 내 체중에 순응해서 그대로 누워 나를 올려다보았다. 여유로운 표정이다. 하지만 나는 내 얼굴로 올라오려는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가만히 있으라는 내 행동에 그는 웃으며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얌전히 누워서 대기했다.
(여기부터 노블 중략 노블 17회로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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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렌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