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공작님, 제발! -->
유렌은 작게 칫, 하고 중얼거렸다. 이런 중요한 날에 보기 싫은 얼굴을 둘이나 보게 되다니. 그렇단 말은 위스피닌 공작도 와 있다는 의미인데…….
유렌은 무심코 시아 쪽을 힐끔거렸다. 라포드는 한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비꼬듯 말했다.
"남창질은 잘 되어 가나? 아니면 공작이 이제 슬슬 겉만 번지르르한 네 육체에 싫증내 가는 건가? 조만간 공작의 치맛자락에 매달려서 버리지 말아달라고 징징대는 네 모습은 꼭 구경하고 싶은데."
자신에 대한 소문을 위스피닌 가에서 듣지 못했다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시렌느 가에 나를 팔아넘긴 사람은 위스피닌 공작. 그리고 그것을 부추긴 자들은 유렌의 형제들이다. 분명히 알고 있겠지. 유렌은 익숙한 시비에 역시 시비로 일관했다.
"적어도 미니어처 땅콩껍질만 다리 사이에 달랑거리는 당신 몸보다야 젊고 완벽한 내 몸이 공작각하의 마음에 들겠지요. 각하께 드릴 선물로는 당신보다 내가 더 적격이었으니까. 그리고 각하는 저처럼 성능 좋은 선물을 내다버릴 정도로 어리석지 않습니다. 멍청한 당신이야 각하의 고결한 뜻을 죽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즉 라포드는 공작에게 주는 선물만의 가치도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웃었다. 성적인 모욕은 남자의 자존심을 가차없이 짓밟지만 맞받아칠 꼬투리가 없으면 더 열받는다. 그러나 라포드는 어릴 때보다 더 지능적으로 자랐다. 이럴 때 화내면 소용없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정력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둘째 라엘은 자신을 향한 말이 아닌데도 벌컥 화를 냈다.
"뭐가 어째? 이 잡종 자식이……."
"믹스에 믹스를 섞은 것도 퓨어라고는 할 수 없지요. 그쪽은 배우질 못해서 뭔가 모르는 모양인데, 인간 잡종."
엘프 혼혈이라고 놀리는 것은 유렌에게 있어 최악의 모욕이었지만 오히려 어릴 때부터 하도 많이 듣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졌다. 대신 그는 라포드와 라엘의 어머니도 남부인이 아니라 중부인, 위스피닌 공작과 다른 인종이라는 것으로 시비를 걸었다. 잡종견 두 마리가 섞인 것보다야 잡종견과 순혈이 섞인 자신이 더 낫지 않겠냐는, 이종족 우월적인 말이었지만 제국의 법 자체가 협약을 맺은 엘프들을 높여주고 있었기에 그나마 먹히는 말이었다. 인다스 왕국에서는 모든 이종족을 인간 아래로 취급하고 있기에 그쪽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을 것이다.
게다가 플로렌스 아카데미에서 학문 계열 과목을 둘 이상 수료한 유렌과 오직 검술 쪽만 겨우 수료를 마친 라엘을 비교하듯이 유렌은 대놓고 '배우지 못한'이라는 발언을 했다. 플로렌스 아카데미라고 하면 어디서나 알아주는 곳이니까.
"배운 것 없이 검만 잡고 휘두르면 뇌까지 근육으로 변한다는 말이 맞군요. 저는 우월하니까 언제나 머리에 지식을 넣어두고 있지만 말입니다. 당신, 그렇게 살다가는 언젠가 뇌가 전부 근육이 되어버려서 뇌 이식수술을 받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디, 민달팽이의 뇌 정도면 적당할까요? 이런, 민달팽이에게 실례네요. 당신의 머리가 그런 우수한 뇌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요게 진짜!!!"
라엘은 사납지만 상대적으로 유렌의 도발에 금세 넘어가니까 오히려 편했다. 하지만 라포드는 튀어나가려는 라엘을 제지했다. 유렌은 깐죽거리는 걸 관두고 라포드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저 쪽은 영악해서 대하기 힘들다.
"시렌느 공작이 어떻게 나올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버림받고 울면서 다시 돌아와도 네놈을 받아줄 집 따위 없으니까 그렇게 알도록."
"맞습니다, 제가 다시 위스피닌 공작가에 방문할 때쯤이면 당신네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을테니까요."
끝까지 유렌은 표정변화 없는 얼굴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조금 위험한 듯도 한 의미심장한 유렌의 말에 라포드는 쳇, 하고 중얼거리며 무섭게 그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 그에게 멀어졌다. 유렌은 괜히 기분 잡쳤다고 생각하고 다시 벽에 등을 기댔다.
"누구야? 형제들?"
시아가 어느새 지척까지 와 있었다. 그는 흠칫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금 나눈 저급한 얘기들을 들었을까? 하지만 곧 언제나처럼 와서 안기는 시아를 보고 유렌은 미소지었다. 못 들었구나, 다행이다.
***
뭐야 저거 유렌 무서워 엉엉.
나는 그가 그렇게까지 적대감을 내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유렌이 아버지를 싫어한다는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저 증오의 대상일 뿐 오히려 형제들에게 더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라포드와 라엘이라고 했던가. 위스피닌 공작이 은발이었고, 라포드는 진한 적색, 라엘은 은색의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길러 묶고 있는 남자들이었다. 20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그들은 유렌과 험악한 대화를 나누더니 곧 욕설을 작게 내뱉으며 돌아갔다. 나는 유렌의 크고 따뜻한 손을 꼬옥 잡고 생각했다. 어릴 때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지. 자존심 때문에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괴롭힌 쪽이 다수이며 사내아이들이니 폭력이 동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은 유렌이 더 세니까 괜찮겠지? 그치?
저쪽에서 그들이 간 곳은 위스피닌 공작이 있는 장소이다. 위스피닌 공작은 아까 내게 인사를 하러 와서 치근덕거렸고 예의상 유렌의 안부를 딱 한번 물었지만 유렌에게 인사를 하러 오진 않았다. 유렌은 자신의 아들 중에서도 별 쓸모없는 패라고 생각해서 공도 들이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골칫거리 유렌에 대해 내가 혹여나 따질까봐서 유렌의 과거사나 자세한 얘기는 조금도 나와 하려들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유렌은 자신의 실력은 집안에서는 물론이고 밖에서도 알 수 없도록 지금껏 철저히 숨겨왔다고 했다. 아마 유렌의 실력과 가능성을 알게 된다면 태도가 바뀌겠지.
나는 유렌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그래도 절대 못줘. 유렌은 내꺼야!
"저어……."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했더니 연한 하늘빛 드레스 자락을 손끝으로 살짝 쥔 플라니아 자크루 공녀. 내가 그렇게나 친해지고 싶어했던 여친이었다. 나이도 같고 둘다 제국 2대 미녀라고 불릴 정도로 예쁘니까 수준 맞는 친구라고 생각해서 끝없이 접근했지만 아직까지 별 진도가 안 나가있던 공녀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보다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자크루 공녀님."
그녀는 내가 이렇게 친한 척을 할 줄은 몰랐는지 조금 놀랐지만, 곧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나는 유렌의 팔짱을 끼고 테이블로 가서 그에게 칵테일을 권했다. 플라니아 공녀는 예쁘장한 푸른 눈으로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용기를 내서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응응 말해보세요. 유렌 스리사이즈만 아니면 다 말해줄 테니까. 플라니야 영애는 약간의 경계심이 서린 눈으로 내게 말했다.
"……이트리샤 공과 결혼하는 게 당신인가요?"
"……응?"
나는 갑자기 질문한 그녀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멍해졌다. 누규? 나?
미쳤어요? 내가 왜 그런 이상한 영감탱이랑……! 아니지, 이건 대공에게는 비밀이지. 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전 출장 다녀오느라 세달 넘게 대공 코빼기도 못본 바쁜 커리어우먼입니다. 게다가 그런 심각하게 나이차 나는 사람하고 엮지 마!
유렌마저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플라니아 공녀는 내가 극구 부정하자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가요? 실례했습니다."
나는 얼굴을 가리고 어쩔 줄 몰라 급히 도망가려는 플라니아 공녀의 어깨를 탁 잡았다. 그렇게까지 말해놓고 그냥 가려고? 무슨 말인지 얘기하면 안 잡아먹지.
플라니아 공녀가 조금씩 꺼내는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공녀는 사실 황태자를 좋아한 게 아니라 황태자의 스승인 이트리샤 대공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기 위해 황태자와 붙어다녔다는 거란 말야?
"……케이드린 황태자전하와는 어릴 때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간단히 말해 소꿉친구라는 의미다. 그래서 황태자가 플라니아 공녀를 데리고 다니면서 둘이 이루어지도록 연결다리가 되어 도와준 거구나.
"천만에요. 그는 제 라이벌입니다."
아니, 황태자도 이트리샤 대공을 좋아한다고? 그건 또 뭐야!
들어 보니 황태자가 딱히 도와준다기보단 플라니아 공녀가 멋대로 황태자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일단 둘의 목적은 이트리샤 공작과 친해지기(황태자는 존경의 의미, 공녀는 사랑의 의미로)니까 가끔은 서로 협조도 하지만 결코 연결다리가 될 생각은 둘 중 누구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공께서 약혼하셨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대공이 가장 가깝게 지내는 미혼 여성이 각하였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물어본 것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뺨을 붉히는 플라니아 공녀는 남자들이 재깍 넘어갈 정도로 청순가련해 보였다. 순수한 처녀의 사랑이란 바로 이런 거구나!!
아니, 그런데 그 말은 아무도 대공이 약혼한 여자가 누군지 모른단 말야?? 이루 녀석이 호기심에 날 사용해서 놀러 가자고 말할 만도 하군.
"나이가 비교적 젊은 편이라는 소문도 있고, 금발이라는 소문도 있긴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결혼적령기 중에서 나이가 어린 금발 귀족영애는 한둘이 아니니까요."
"혹시 귀족이 아닌 건 아닐까요? 그, 왜 다른 나라 공주라던가……."
"머리색으로 따지자면 블론드 비슷하면 전부 금발이라고들 하니까 범위가 무한정 넓어지는걸요."
"그렇다면 그 영감님의 나이에 맞춰서 50대 내외의 미혼 여성들을 찾아보는 건……."
나와 플라니아 공녀가 소근거리는 얘기에 유렌이 드물게 눈치를 주었다. 평소에는 내가 아무리 파티장을 점령하고 놀아도 가만 내버려 두는데, 왜 그러지?
"흐음, 시아 님. 남의 부인 얘기에 신경쓰기보다는 다른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는 안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괜히 초조한 듯 눈을 깜박였다. 응? 뭔가 두고온 게 있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렌은 참다 못해 직설적으로 말했다.
"목……."
"아, 맞다. 나 목말라. 주스 좀 갖다줘!"
나는 그제서야 눈치를 채고 그에게 부탁했다. 플라니아 공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칵테일 잔에 입술을 묻었다. 유렌은 한숨과 함께 복숭아 주스를 잔에 담아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파티에서 술에 약한 사람이 취해서 큰 사고를 저지르면 안 되니까 그런 사람들을 위해 도수가 없는 음료도 꽤 많았다. 나는 복숭아주스를 홀짝이며 플라니아 공녀와 계속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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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등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