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91화 (91/226)

<-- 6. 공작님, 제발! -->

***

오후의 간식시간.

유렌은 요즘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새 검을 사다줘서 기쁜 건지, 훈련시간이 전에 없이 늘어났다. 훈련시간이라고 해도 내가 꽃을 가꾸는 것처럼 단순한 취미 시간 정도의 의미였지만.

나는 서류결재를 대충 끝내고 의자에 축 늘어졌다. 휴우, 오늘 분량 끗! 수도에 머물면 하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예정보다 훨씬 더 많이 수도에 머무르게 되어서 휴가 따위 끝나고, 이제는 이곳의 일은 물론 여기에서 영지의 일까지 봐야 하는 것이다. 세르가 자잘하고 양이 많은 서류는 일차적으로 처리해주기 때문에 넋 놓고 일해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루종일 놀수도 없었다.

다행히 티 타임 전까지는 일을 끝냈으니 이제 느긋하게 빈둥거리는 일만 남았다. 나는 유렌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서 그가 두어 시간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나는 원래 혼자서 즐기는 티 타임을 좋아했지만 오늘은 조금 심심한데…….

쟁반에 주전자와 다과를 들고 오던 카딘과 눈이 마주쳤다. 카딘은 깔끔해 보이는 흰 색의 셔츠와 검은 색 베스트를 입고 있었다. 우리 가문 시종, 특히 귀족 바로 곁에 붙어있는 직속시종이나 직속시녀의 복장은 매우 깔끔한 정장과 에이프런이 달린 숏 드레스이다. 카딘에게도, 라르슈에게도 상당히 잘 어울리는 옷이다.

본래 귀족 출신 노예였지만 케르타에는 이처럼 중부식으로 차를 즐기는 풍습이 없었기 때문에 티 매너는 이곳에 오고 나서 따로 교육받은 것 같다. 테이블 위에 부드러운 동작으로 티컵과 포트를 내려놓는 카딘의 한개 풀린 셔츠 단추 사이로 그을린 갈색의 목덜미가 들여다보인다. 남부인들은 중부인에 비해 살결이 더 보드랍고 매끄러워 보인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카딘의 피부 감촉은 생각보다 상당히 좋았다.

나는 그가 내려놓기도 전에 카딘의 손에 들린 과자접시에서 복숭아 쿠키를 날름 핥아먹었다. 그는 뺨을 붉히며 접시를 내 앞에 놓았다.

"카딘도 이거 먹을래?"

쿠키를 맛보던 나는 건포도 쿠키를 집어 카딘의 입에 넣어주었다. 가끔 다과를 가져오는 시종에게 과자를 맛보여주기도 하는데, 그렇게 입에 넣어주면 멜은 놀라서 당황하고 루이는 잘 받아먹으며 좋아하고 네리아는 극구 사양하며 라르슈는 벌컥 화를 내면서도 얌전히 먹어준다.

그리고 카딘은, 저런 아슬아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먹어도 됩니까?"

"으응, 먹어도 돼. 그쪽에 앉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구두를 벗었다. 테이블 레그 밑에 나란히 벗은 구두와 스타킹을 내려놓고 무릎을 모아 의자 위로 올렸다. 본래는 예의가 아니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아 티타임 상대를 해주었다. 홍차 잔이 싹 비자 그는 좀더 차를 따라주었다. 그러나 나는 사양하고 다리를 다시 꼬았다. 그는 치마 밑으로 보이는 내 맨다리에 힐끗 시선을 주다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카딘."

"……네."

"일은 힘들지 않아?"

직속시종인 만큼 쉬울 리는 없지만, 이전보다야 휴식시간이 훨씬 길고 월급도 높을 것이다. 일단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닌가. 충분히 자질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조금 떨리며 나온 대답은 의외였다.

"너무 힘듭니다."

"뭐? 정말로?"

아무래도 일이 안 맞는가 보다. 내가 괜히 데려와서 고생시키는건가, 하고 걱정스럽게 왜 그러냐고 묻자 카딘은 고개를 저었다. 누가 괴롭히기라도 하는 건가? 타지 출신이라고 텃세라도 부리나? 그럼 설마 라르슈도?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

"일 자체는 쉽습니다만, 공작 각하를 늘 옆에서 바라보면서도 함부로 부탁하거나 만지지 못하고 꾹 참아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읭.

뭐야, 그게!

카딘은 정말로 진심으로 말하는 듯, 망설이면서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는 괜히 김이 빠져서 테이블에 머리를 얹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말하면 되잖아. 휴식시간 정도라면 같이 놀아줄 수 있는데."

카딘은 귀여우니까 당연히 그 정도는 놀아줄 수 있지. 나는 그가 흠칫하며 얼굴이 빨개지자 웃으며 발을 뻗어 그의 검은 바지에 감싸인 긴 다리를 끌어당겼다.

"이리 와."

***

나는 자그마치 네 장이나 온 황실 축하연 초대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 장은 나에게 온 것. 그리고 한 장은 오빠에게 온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현자인 아젤님에게도 의무적인 초대장이 왔다. 마지막으로 나머지 한 장은 정말로 유렌에게 온 초대장이었다. 발신처에는 황제의 낙인까지 찍혀 있다. 낚시 편지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어차피 한 집에 사는 사람들한테 한 번만 보내면 종이값이 절약될 것 같은데 초대장은 입장권의 역할도 하므로 주요 초대객에게는 각각 한 장씩 보내야만 한다. 초대장 한 장으로 어른들의 파티일 경우 파트너 한명, 정식 연회일 경우 직계 가족까지 동행 가능하다. 나는 초대장 두 장을 아젤과 세리안에게 전달하라고 카딘에게 말한 후에 나머지 초대장 한 장을 건네주려고 유렌의 방에 찾아갔다. 그러나 그의 방에도 내 방에도 유렌은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고서 나는 유렌의 방 창문 밖으로 기웃거리는 벚나무 정령에게 물어보았다. 진한 녹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그 정령은 얼굴을 붉히면서 유렌이 정원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왜 그렇게 수줍어하지? 나는 계단을 내려오면서야 그 벚나무 정령이 나와 유렌의 야외 수분 장면을 보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

웬만하면 잊어 줬으면 좋겠는데ㅠ.

나는 정원의 공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지? 다른 정령들도 모여서 구경하고 있는 걸로 보아 유렌 말고 다른 인간이 근처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까이 가서 본 나는 정령이 도망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아젤 님과 유렌이었다. 그런데 둘이 뭐 하는 거야?

아젤 님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긴 목검을 들고 가짜 표적을 내리치고 있었다. 그 옆에서 그걸 지켜보는 유렌의 말이 더 가관이었다.

"그냥 해서는 안됩니다. 그 나무 인형이 라포드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힘을 다해 때려야 해요."

"……헉, 헉, 라포드, 가 뭔가요?"

숨이 끊어질 듯 차서 말하는 아젤의 질문에 유렌은 말했다.

"제 생물학적 부친의 장자의 이름입니다. 예전에는 정말 재수없는 녀석이었죠. 지금도 제게는 죽이고 싶은 남자 2순위입니다. 물론 1순위는 라포드의 아버지이죠."

"???"

아젤은 이해를 못한 듯 했지만 적어도 휘두르는 힘은 더 강해졌다. 라포드라면 유렌의 첫째 형, 아마 유렌이 어릴 적에 형제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니 그 때문일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젤에게 갑작스럽게 스파르타 훈련을 시키는 유렌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아, 시아 님."

유렌은 아젤에게 잠시 쉬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는 끈질기게 검을 놓지 않았다. 아젤 님께서는 내년부터 플로렌스 국제 아카데미의 검술부에 입학할 예정인데 그걸 위해 우리 집에서 제일 한가한 유렌에게 강습을 받고 있는 거라더라. 그런데 정말 제대로 가르치는 거 맞아? 저건 아무리 봐도 검술이 아니라 그냥 몽둥이질이잖아.

"저는 어릴 때 저렇게 배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드마스터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건 아닐걸."

게다가 배웠다기보단 그냥 유렌이 라포드라는 이름의 자기 형에게 괴롭힘당하고 나서 그 원한을 저 가짜 나무인형으로 푸는 장면 같은데? 진짜 유렌은 저걸 반복해서 소드마스터가 된 거야?

"어릴 때는 그냥 주먹질이 싸움의 전부였으니까요. 엘프의 혼혈이라서 저는 신체 조건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우월했지만 그래도 일대 다수의 싸움엔 불리했습니다. 게다가 라포드는 정실의 아이였기 때문에 정식으로 유명한 강사에게 검술까지 배우는 중이었습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최대한 힘과 스피드와 맷집을 기르는 법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몇 달을 저렇게 연습했던 것 같습니다."

쥐어패는 연습 말이지…….

"진짜로 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열 다섯 살에 플로렌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직후였습니다. 라포드는 위스피닌 공작의 뒤를 이어야 하기 때문에 검술이 아닌 학문 부문의 경제학을 공부했고 저는 그런 라포드를 계속 갈구면서 라포드의 동생인 라엘도 괴롭히기 위해 경제학은 물론이고 검술까지 함께 배웠습니다. 라엘은 라포드보다 검에 더 재능이 있어서 검술 학과에 들어갔으니까요. 둘다 저보다 나이가 많았으니까 그때까지는 제가 괴롭힘당하는 쪽이었지만 열두 살을 넘어가면서 역전되었거든요. 그때쯤에는 그 둘이 저한테 발리는 상황이었지요."

우와, 유렌 예전엔 성격 진짜 나빴구나. 어릴 때 당한 걸 끝까지 뒤쫓아가서 갚아주는 타입이랄까. 지금은 착하지만 말야.

"그때 분명히 어릴 적 길러둔 팔 힘과 명중 훈련이 도움이 꽤 되었습니다. 사실 검술을 훈련할 때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신체조건이니까요."

그래서 지금 아젤 님에게 체력 훈련을 시키고 있는 거야? 아젤 님은 꽤 지쳐 보였지만 오기로 계속하는 것 같다. 아니, 그런데 대체 왜 아젤 님은 검술을 배우려는 걸까. 나는 의아했지만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대신에 유렌에게 초대장을 주고서 말했다.

"유렌, 파트너로 나를 데려가 줘."

***

케르타와의 평화협정이 성사되고 루페닌의 지원군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이번 황실 연회는 드물게 매우 성대하게 치루어지고 참여시간도, 인원도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주요 인물들은 물론이고 타국의 고관들까지 참석하는 대 제국의 축하연이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여러 남자들 사이에 끼어들어 고생하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세리안이었다. 내 친오라버니인 세리안이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동안은 조용했다. 그러나 황실 군사부 총사령관 비룬스 공작이 과거 황실기사단 로열가드 단장이었던 세리안과 친분이 있는지 그를 자기 근처로 불러내자 세리안은 나를 유렌에게 맡기고 잠시 자리를 비웠고, 그 틈을 타 사적인 목적으로 내게 접근하려는 남자들이 끝없이 찾아왔다.

유혹의 마력을 가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내 화려한 외모는 남자들의 사심을 이끌기 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오늘 유렌의 파트너로서 참석한 거라 유렌의 등 뒤에 숨어서 모른 척 딴청을 피웠고 유렌은 부드러운 대응으로 그 남자들을 전부 막아주었다.

"그 얼굴로 감히 누구와 말을 섞겠다는 겁니까? 나의 공작님은 저만큼 비위가 좋지 못하니 당장 사라져 주시겠습니까?"

유렌의 말에 벌컥 화를 내려던 어느 자작은 금방 태도를 바꿔 째려보는 유렌의 분위기에 쫄아서 도망갔다. 부드러운 대응……은 아닌가? 그렇지만 나는 유렌을 말리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유렌."

나는 그의 넓고 탄탄한 등에 살며시 기댔다. 중간 굽의 힐을 신고 서서 뺨을 그대로 파묻고 부비적대는데도 고작해야 유렌의 명치쯤 위치였다. 양 팔을 벌려 겨우 껴안을 수 있는 그의 가슴을 끌어안으며 나는 서비스로 애교를 부려보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에 닿았다. 세팅된 머리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가만히 쓰다듬은 후 그는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귀 밑을 지나쳐 목선을 따라 유렌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목덜미에 끌리는 손짓이 간지럽도록 느렸다.

"말씀드린대로, 목걸이, 안 하셨군요."

중간중간 끊어지는 그의 나른한 목소리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걸이를 하지 말고 파티에 나와달라니, 그거야말로 바로 오늘 나한테 목걸이를 선물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역시 유렌은 내가 한 말을 잊지 않았던거야, 그래서 목걸이를 사온 거겠지?

하지만 단순히 그는 내 맨목을 혀로 훑어올리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내가 목걸이를 하는 게 싫은 것 뿐인지도 모른다. 으응, 고민인데. 이거 역시 물어봐야 하나? 그치만 유렌이 부담스러워하면 어떡하지?? 그건 마치 목걸이 사내라는 것 같잖아.

그가 후, 하고 가벼운 입김을 불자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날려 목덜미를 스쳤다. 찌릿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자 다시 유렌은 드러난 나의 목을 입술로 덮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또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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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경은 처음에 살짝 묘사가 나왔답니다! 회색 머리의 30대 남자.

그때 미중년 설정이었던걸로 보아 30대 후반이었던 것 같지만 사실 실제 나이는 안 정해졌습니다. 어떤 나이가 좋을까요?

요새는 글 올리기만도 바빠서 오타를 도무지 못고치고 있네요 ㅠㅠ 시아가 유렌한테 목걸이 사달라고 하는 장면이나 엘릭 눈 순서 고쳐야 하는데 아직 손도 못댔습니다. 일단 제가 가진 문서는 일부 수정된 상태지만 언제 날 잡아서 조아라 편수를 싹 고쳐야겠습니다.

그리고…… 무심코 이벤트버튼을 누른 제 실수로 며칠 전 루이즈가 이틀 가량 프라이드가 되어있었습니다. 제가 이거 취소 안되냐고 문의하니 조아라 측에서도 노블레스 작품이 프라이드가 된건 오류라면서 다시 돌려보내주더군요. 지금은 다시 노블레스 작품으로 멀쩡히 잘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습니다ㄷㄷ;

2개월간 약속대로 연재했던 루이즈를 이제 휴재하고 다시 꽃의 여왕에 올인합니다! 꽃의 여왕이 또 슬럼프가 오면 도중에 루이즈 몇편정도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시간이 없기때문에 당분간 꽃의 여왕도 연재주기가 조금 길어질 예정인데, 약 3-4개월후(내년 초)부터 다시 꽃의여왕 연재주기는 다시 빨라지며 완결까지 곧장 ㄱㄱ입니다. 그쯤에 시간나면 루이즈도 수정해 일반으로 돌릴계획입니다(그래도 수위는 있으니 아마 일반부분 노블부분 따로 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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