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젊은 여공작과 사막의 황제 -->
"앗."
갑자기 걷고 있던 내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강한 힘으로 덥석 안아올렸다. 보지 않고도 그가 미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대사를 스틸한 죄는 이번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해준 것과 쌤쌤이로 치기로 하고 그의 희고 매끈한 뺨에 살며시 키스했다.
미르는 조금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곧 내게 진한 키스를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내 입술을 핥으며 기대 가득한 눈으로 나에게 말했다.
"빨리 방으로 가서 기분좋은 거 하자."
기분좋은 건 어젯밤에도 했잖아. 그건 나중에 하고 일단 나는 그에게 드높은 궁의 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 기념품 사러 다녀와도 돼?"
"기념품?"
"응, 집에 있는 식구들이나 친구들한테 선물로 사가려고. 3개월간이나 떠나 있었으니까."
나는 내 주머니에 들어있던 넉넉한 금화와 보석을 떠올리며 말했다. 미르는 잠시 침묵을 고수하더니, 의아하다는 듯 말한다. 그 정도는 나한테 구해달라고 하면 최상품으로 얻어다 줄 텐데, 라며. 하지만 나는 내 돈으로 직접, 내가 고른 물건을 선물로 사가고 싶었다. 그게 최소한의 성의니까. 미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빙긋 웃었다.
"좋아. 대신 같이 가자."
미르가 같이 간다고? 설마 왕의 행차 이벤트 따위를 벌일 생각은 아닌 것 같고, 아마 신분을 감추고 귀족이나 평민인 척 하며 몰래 나간다는 의미? 뭐, 안내도 될 것 같고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나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방에서 내 마법 주머니 가져오고, 옷도 갈아입……."
내가 말을 꺼냄과 무섭게 갑자기 허공에서 툭 하고 내 마법 주머니가 나타났다. 색과 형태, 낡은 자국과 튀어나온 실밥 어딜 보나 내것 맞다. 내가 놀라 눈을 깜박이고 있자 미르가 마법 주머니를 건네며 배시시 웃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워프 마법인 건가? 그 주머니를 받아들고 일단 이 왕족 티 나는 너무 화려하고 불편한 옷부터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내 하얀 옷이 연한 갈색의 몸을 거의 가리는 옷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미르의 옷도 칙칙하고 두꺼운 재질의 몸을 전부 가리는 외투로 감싸여졌다. 나와 똑같은 옷.
나는 천으로 칭칭 감긴 발에 튼튼한 신발까지 신겨지자 발을 이리저리 들어보았다. 햇볕에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머리카락 전체와 목 아래를 전부 가리는 옷이라서 좀 답답했지만 잠시 밖에 나갔다 오는 정도라면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르는 나를 덥석 안고서 한번 더 워프마법을 시전했다. 심지어 세르에게조차도 이렇게 마법을 남발해대는 걸 보지 못했기에 내가 직접 정령 이외의 마법을 접한 적은 거의 없어서 무척이나 신기해 보였다.
***
왕이 직접 다스리는 수도인 이곳은 사막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다고 들었다. 특히 귀족들의 방문이 잦은 수도 파이쿠는 더더욱이나 혼잡하고 번화했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장식들과 대부분이 남부인이라는 상황,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처음 보는 물건들이나 과일들을 판다는 것에 정신이 팔려 촌놈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내 손을 미르가 꽉 잡고 어느 한쪽으로 이끌었다.
"사려고 정해놓은 거라도 있어?"
미르의 질문에 나는 일단 선물 줄 사람들의 목록을 떠올려보았다. 세르, 유렌, 아젤 님, 그리고 나 때문에 고생하신 라이언 경, 날 따라와서 마음고생한 시종 둘, 언제나 나를 보좌해주는 제인과 내 직속 시녀 네리아, 등등.
"저기, 미르……, 어?"
나는 그를 불러보다가 갑자기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거칠게 들리자 당황해서 목에 손을 가져갔다. 목이 많이 쉰 것은 아니지만 남자아이 목소리같잖아? 갑자기 왜 이러지? 하지만 미르는 걱정하지 말라고 웃으며 말했다.
"지금 넌 남자아이 모습이야. 이곳에서 여자로 다니며 고가의 물건을 쇼핑하려면 꽤 불편하니까 말야. 얼굴도 옷도 목소리도 환상 마법으로 잠시 바꿔놨어."
그런 건 좀 진작 말하란 말야. 하지만 워프하고 바로 왔으니까 말할 타이밍이 없었겠지. 나는 어색한 소년의 목소리로 다시 발음해보았다. 원래 내 목소리와 아주 다르진 않아서 비교적 여리고 예쁘장하지만 확실히 소년이라는 것이 티가 나는 목소리였다.
난 그 목소리로 미르에게 시험삼아 말해보았다.
"여기에 선물이나 기념품을 파는 곳은 없어?"
"있기야 하지. 상인이나 무역인, 아니면 근처의 다른 왕국 귀족들이 여기로 노예를 사러 와서 잠깐 들리는 고급 잡화점 정도라면. 하지만 그곳에서 파는 것은 이 시장에서 좀더 싸게 살 수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 좀더 둘러보고 갈까?"
그 말에 나는 헤실거리며 오랜만에 쇼핑을 하러 나섰다. 하고 싶었는데 잘 됐다. 케르타의 시장은 의외로 화려한 물건들이 많았다. 귀족이나 잘 사는 일부 상인들이 주로 오는 파이쿠의 시장이었기에 그렇겠지만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장 보러 온 여자들의 수가 제국의 수도에서 열리는 시장에 비해 상당히 적다는 것이었다.
파는 것도 거의 평민들의 생활필수품보다는 조금 고급스러운 물건들이었고. 나는 어느 옷가게에서 무난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잠옷 몇 벌과 무늬 없는 새하얀 손수건을 샀다. 통풍이 잘 되면서도 매우 고운 모시같은 메이네 천과는 다르게 매우 고운 직물로 된 손수건이었다. 견사와 면과 가장 가늘게 뽑아낸 고급 메이네 실을 섞어서 메이네 천 짜는 방식대로 만들어낸 또 다른 케르타의 특산물이라고 한다. 튼튼하고 땀 흡수가 잘된다더라. 값은 굉장히 비쌌지만 꽤 쓸만한 것 같아서 나는 그 손수건을 여러 장 사두었다. 세르한테 선물하면 좋아할까나. 기사니까, 손수건 받는 것은 익숙하겠지. 직접 수놓아서 주는 것도 괜찮으니까 수놓는 연습이나 할까.
그리고 예쁘게 수놓여진 천가방과 특이하게 생긴 모자, 무거운 검을 차고 다닐 때 쓰는 몬스터 가죽 허리띠를 샀다. 누가 무엇이 필요하다고 했는지 생각하며 일일이 줄 사람을 지정해서 어느덧 대부분의 물건을 전부 구매했다.
짐꾼은 물론 미르였지만 산 물건들이 나보다는 가벼운 무게니까 나를 언제 어디서나 안고 다닐 정도라면 충분히 들 수 있겠지.
하지만 아직 세 명이 남았다. 내 선생님인 아젤 님. 아젤 님은 딱히 필요한 게 없을 것 같다. 책을 선물하기엔 왠지 내가 선물한 책이 그가 수십 번은 더 읽어본 책일 것 같아서 찝찝하고, 그렇다고 찻잎을 선물하려니 내가 차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뭘 골라줄까 고민하다가 마침 무기점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젤 님은 검술에 흥미가 있다고 했지. 유렌의 검술을 구경해도 되냐고 물은 적 있으니까.
나는 무기점 문을 열고 들어가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미르에게 말했다.
"미르, 이 중에서 제일 좋은 검이 뭐야?"
"몰라."
……읭?
미르는 웃으며 답했다.
"몰라. 난 검술은 영 아니거든. 고기 써는 칼 아니면 마법을 쓰거나 아니면 주먹으로 끝장내는 것밖에 몰라."
……드래곤이라고 다 검술에 능통한 것은 아니구나. 하긴, 그는 이번이 두 번째 유희랬던가. 첫 번째 유희는 너무 막무가내로 놀다가 결국 엉망으로 망쳐버리고, 두 번째 유희는 아예 세계정복을 목표로 해서 저질러 놓았다. 정의의 꽃(진짜 꽃이다)인 내가 막아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미르는 고급 무기점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재질이 가장 좋은 칼은 구분할 수 있어. 저거랑 저 쪽에 있는 종류가 미스릴로 도금한 칼이네. 미스릴이나 오리하르콘 같은 마법 금속은 마나의 흐름이 약간 다르거든. 아마 자세히 보면 너도 구분할 수 있을 거야."
미스릴 도금 칼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언데드를 처치할 수 있다……, 고 하지만 사실 웬만한 흑마법사가 아니고서야 평생동안 살면서 그런 걸 만날 리가 없지. 미스릴 도금한 검은 살을 베고 피가 묻어도 날이 무뎌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몬스터 사냥에 가장 좋은 칼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문제는 그 미스릴이란 게 눈알 튀어나오도록 비싸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스릴은 보통 인간이 제대로 다룰 수 없는 금속이었다. 미스릴 무엇무엇이라 하면 99.9%로 그건 드워프제의 물건인 것이다.
역시 파이쿠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무기점 답게 미스릴 도금 칼이 두 개씩이나 있다니. 게다가 질 좋다는 케르타 철로 만든 검들일테니 일단 다른 곳보다 질은 뛰어난 게 당연했다. 가게 주인은 귀족으로 보이는 우리 둘을 반갑게 맞아주면서 이칼 저 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올 미스릴로 된 칼과 미스릴 도금 칼 중에서 무엇이 더 비싼가 하면 당연히 올 미스릴이겠지만 어느 쪽이 기사에게 쥐어줬을 때 제한된 시간 내 몬스터를 더 많이 잡느냐 하면 미스릴 도금 칼이었다. 왜냐하면 미스릴은 적당한 무게와 파괴력의 쇠검에 익숙해진 기사들이 쓰는 검에 비해 너무나도 가볍기 때문에 처음 휘두를 땐 상당히 어색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돈이 없어서 올 미스릴 칼을 못사주는게 아냐. 기사에겐 도금 칼이 더 쓰기 편하다구.
하지만 역시 처음 검을 배우는 아젤에겐 쓰기 편한 종류가 더 낫겠지? 게다가 무거운 칼보다는 단검 종류가 괜찮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젤의 가녀린 팔을 생각해보며 단검 코너로 향했다.
단검도 중부 쪽에서 쓰는 직선 검과 이쪽에서 쓰는 휘어진 도가 있었다. 검 쪽이 낫겠지? 나는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한 요만한 남자아이가 호신용으로 검을 배운다 치면 어떤 단검이 좋을까요?"
가게 주인은 보석 주렁주렁 박힌 장식용이 아니라 호신용 검을 찾자 좀 실망한 듯 했지만, 내가 기념품을 사러 온 타국 귀족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단골 서비스까지 들먹이며 귀족 단골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특별히 아이용으로 파는 단검은 없고 그 아이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꽤 실력자에게 어울리는 질 좋은 단검을 선물하는 게 어떨까 하며.
덕분에 좀 비싸긴 하지만 아젤님에게 딱 어울리는 푸른 사파이어가 하나 박힌 큰 단검 하나를 샀다. 지금 쓰는 건 안되고 적어도 좀 실력이 쌓인 후에 써야 할 텐데, 뭐 아젤님이 단검에 취향이 없으면 그냥 장식용으로 써도 좋을 것 같은 단검이다.
그 단검을 사고 나서도 나는 미스릴 도금한 칼이 자꾸 눈에 밟혔다. 그 비싸다는 미스릴 검, 제국의 무기점에서도 주문수입으로 들여와야 한다는 검, 호화로운 파이쿠의 최고급 무기점에도 겨우 두 자루 있는 검 구경이나 실컷 해보자.
내가 벽에 걸린 미스릴 검을 자꾸 보자 가게 주인은 거의 버릇처럼 그 미스릴 검에 대해서 줄줄이 말하기 시작했다. 루페닌 왕국과 오베르 왕국 통틀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난 대장장이 드워프인 카롯에게 직접 주문을 넣어서 만들어낸 소드마스터를 위한 최고급 검과 도라며. 소드마스터란 말에 나는 유렌이 생각났다. 그래, 그러고 보니 유렌은 늘 곁에 두는 낡아빠진 쇠검 하나뿐이었다. 이제는 좋은 새 검을 새로 장만할 수도 있을 텐데 안 사고 있었던 걸 보면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지 않을까 했지만딱히 더 좋은 검을 살 필요성도 못 느끼겠고 그냥 손에 익다보니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검이라고 유렌이 자기 입으로 말했었지. 지금 생각해 보니 유렌은 자신을 위한 사치는 거의 하지 않는 듯 했다. 그가 새 옷을 맞추는 날은 입고 있는 셔츠가 단추 손상을 초과하는 과도한 데미지를 입었을 때나 나와 함께 참석하는 연회날 뿐이니까. 검을 사는 것도, 특별히 무언가를 먹고싶어 한 적도 없다. 내가 갖고 싶어 한 것은 예쁜 레이스 브로치부터 내가 먹고 싶어 한 열대과일에서 솜사탕까지 전부 구해다 줬으면서 말이다. 나는 걸려있는 검 한자루와 도 한자루 중에서 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보통의 기사들이 흔히 사용하는 표준 롱 소드보다 약간 더 긴 듯했다. 미스릴 특유의 깊이있는 은은한 은빛이 너무나도 아름다워보였다. 백금보다도 더 아름답고 밤에도 하얗게 빛날 것 같지만 햇볕을 반사해도 결코 번쩍일 정도로는 빛나지 않는 그런 표면. 만약 유렌이 큰 키로 서서 보통 검보다 약간 길다싶은 이 검을 언제나처럼 물 흐르듯 가볍게 뽑아서 들면 실력 이전에 그 자태에 반해 상대방이 쓰러질지도 모를 만큼 유렌과 잘 어울렸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미스릴이란 거구나. 첨 보는데 완전 돋네 하악.
"저기, 주인아저씨. 이 검 얼마죠?"
"그 검은 7만 5천골드 됩니다, 나리."
헉. 나 눈 튀어나올 뻔 했어. 무슨 검이 그렇게 비싸? 말도 안 돼!
성 한채를 지을 가격이잖아, 그거!!!
공작인 나로서도 쉽게 구매를 결정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애초에 내 영지라면 모를까 여비를 좀 넉넉하게 챙겨왔을 뿐인 지금 상황에서는 꿈도 못 꾸게 비싸다. 무슨 일을 당할까 걱정이 되어서 매우 넉넉히 들고 왔는데도 말이다.
여기가 내 영지거나 저택 근처였으면 커다란 성 하나 새로 짓는 셈 치고 진짜 눈 딱 감고 충동구매 하는건데. 당분간, 아니 꽤 오랫동안 용돈이 좀 쪼들리겠지만 말이다. 내가 풀죽어 한숨을 쉬자 미르는 그 검과 나를 번갈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말했다.
"확실히 좋은 검이긴 하지만, 저 검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
"돈이 없어……."
마음에 든다고 말하면 더 속이 쓰릴 것 같아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샀던 요 단검이 고작해야 80골드였다. 그것도 수백 번의 공정을 거친 단검 중에서 최상급의 단검인데도 말이다. 80골드짜리 무기는 소드 익스퍼트 상급, 즉 황실 기사단의 상위 기사들이 사용하는 무기의 가격대와 비슷했다.
애첩에게 검 하나 사주지 못하는 무능한 공작인 나를 자책하고 있을 때 미르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7만 5천골드짜리 키스를 해주면 내가 그 검을 사줄게."
나는 소년의 모습인데도 남자와 찐한 키스를 나눈 후 경악해하는 가게주인에게서 미르가 금화로 돈을 지불하고 검과 검집을 받아든 후 면보로 검을 잘 쌌다. 한번의 키스 후에 미르가 거스름돈이라며 또 한번 내 입술에 먼저 입을 맞춰왔다. 검은 조금 무거웠지만 검과 단검은 내가 산것 중에서 가장 값비싼 물건이었기에 마법 주머니에 꼼꼼히 챙겨넣었다.
미르가 아까의 키스에 만족한 듯 웃으며 가게를 나오자마자 말했다.
"그 허접한 주머니 불편하지 않아? 내가 더 좋은걸로 만들어 줄까? 9클래스짜리 경량화 주머니로 말야."
보통 사람은 입에 올릴 수도 없는 9클래스가 드래곤 미르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나왔다. 분명 9클래스 경량화 주머니는 전설에서나 나오는 에픽템으로서 성 한채를 집어넣어도 고작 돈지갑 정도의 작은 사이즈이며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 것을 넣든 병아리 다리털보다도 가벼워진다는 그 주머니 아니던가?
하지만 그런 사기급의 아이템이 딱히 필요하다는 점은 못 느끼겠다. 지금 이 마법 주머니도 내 입장에선 굉장히 편리하니까 말이지. 요 조그만 거에 보석과 옷 몇벌과 모포랑 다른 여행물품이 다 들어간단 말야.
"하긴 정령이 되면 공간 마법도 가능하게 될거야. 아마도 정령계와 연결된다는 점이 다른 아공간 마법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효과는 비슷하니까."
덧붙여진 미르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공간 마법? 뭐지 그거? 먹는 건가??
***
"……6클래스라고?"
그렇다고 진짜 6클래스를 데려오냐, 이 빌어먹을 녀석. 넌 오늘 야근이다. 대체 6클래스짜리 마법사는 어디서 구해왔대? 수장인 내가 노는 게 그렇게 고깝더냐? 세일런은 재키를 욕하고 그 남자에게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전설의 8클래스답게 그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6클래스 초반대로 들어선 고위의 마법사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 앉으시게. 흐음, 그나저나 마탑엔 무슨 볼일이오?"
유렌은 푸른 별의 악마라고 불리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선량해 보이는 진한 파란 머리칼의 어린 청년을 바라보았다. 어린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89살의 나이에 걸맞는 느릿한 몸짓과 늙은이같은 말투, 그리고 그 하늘빛 눈동자로 보이는 깊고도 깊은 무심한 연륜과 경험으로 인해 그 청년이 진짜 대마법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마법 실력은 유렌이 낮았지만 소드 마스터의 직감과 그의 몸에 흐르는 반쪽짜리 엘프의 피는 진실에 훨씬 근접한 것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유렌이 세리안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본 것도 같은 맥락의 능력이었다. 유렌은 그가 시키는 대로 귀족적인 움직임으로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마법사 등록을 하러 왔습니다."
"마법사 등록?"
세일런은 잠시 유렌이 말한 마법사 등록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3클래스가 된 정식 마법사들이 마탑에다가 난 이런 몸이올세 하고 세금감면과 연구비 지원과 마법사패를 요청하는 그런 등록 말하는 건가? 그걸 왜 진작 안 하고 6클래스씩이나 되어서 하러 온 거지?
세일런은 손버릇으로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매우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또랑또랑한 소년에 가까운 청년의 그것이었으나 말투가 워낙에 노인네같았기에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래, 그대는 은거 마법사의 제자인가? 인세에서 먼 곳에서 살다가 이십여년 만에 내려왔으니 모르는 것이 많겠군. 혹시 오는 길에 사기를 당하거나 하진 않았겠지. 흠, 뭐 이제부터 6클래스 쯤 되면 마탑에 거처를 얻어 머물면서 충분히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당연하겠지만 6클래스나 되어 등록을 하러 온 신인 마법사 유렌을 무슨 촌닭 취급하는 세일런의 말에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제국의 영지에서 살았습니다만."
"……응?"
세일런은 유렌이 엘프 어머니와 인간 귀족 아버지를 둔 하프 엘프이지만 그동안 놀다가 이제서야 마법사 등록을 하러 왔다는 말에 경악했다. 남의 일 딱히 신경쓸 것은 아니지만 열 여섯살에 5클래스 초입에 들었다는 유렌의 말에 세일런은 그동안 날린 지원금이 아까워서 속으로 눈물지었다. 조금만 더 일찍 오지. 마탑이 소유한 마법사들이 5클래스 이상이라면 각국에서 지원금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알아? 게다가 제국 출신이라니. 제국 측에서 보내주는 마법 지원금은 다른 나라들의 거의 두 배였다.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유렌의 천재성은 삼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인 세일런의 드높은 기준에 묻혀버렸다. 하지만 인재는 인재. 세일런은 유렌의 서류에 곧장 인증 도장을 쾅 찍어주고 뒤늦게 그가 쓴 글을 읽어보았다. 국가를 멸망시킬 흑마법사건 소환사건 네크로맨서건 일단 마탑에 등록되면 무조건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에 사실 마법 실력만 인증되면 특별한 신원조회는 필요없었다. 마법사 정보는 대체로 푸른 탑의 정보길드에서 소유권이 넘어가 그것도 돈이 되기 때문에 신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것 뿐이다.
"유렌 카르테인. 엘프어를 조금 배운 적이 있어서 대충은 알겠군. 유렌이라……, 감람석이라는 의미로군. 엘프들 중에서 보석의 이름을 가진 자는 특출난 재능이 있다는 의미인데. 그런데 카르테인은 하이엘프 부족의 성으로 쓰는 이름 방식인데, 자네 모친이 하이엘프셨나?"
"어머니께서는 스스로에 대한 말씀을 거의 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렌이 조금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반쪽 아들에게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과 하프엘프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치는 시간 이외에는 절망에 빠진 인형처럼 거의 죽은 것과 같이 지냈다. 과거를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유렌은 모친에 대한 얘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론은 하이엘프고 뭐고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에라렌이라는 엘프의 나무 이름에다가 카르테인(상록수의 일종)이라는 성이라니. 에라렌과 카르테인처럼 오래 사는 푸른 잎 나무의 이름을 엘프의 성이나 이름으로 붙이는 것은 하이엘프 수장이나 그 후계자로 지정된 엘프에게나 하는 것일텐데. 세일런은 한번 입맛을 다시더니, 뭐, 상관없지, 하곤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이보게, 옵션 표시도 되었잖아? 정령사에 검술까지? 구라 아닌감?"
사실 15세에 5클래스 마스터, 20세에 6클래스 마스터였던 세일런이 89살의 나이일지언정 8클래스에 도달했다는 것은 3살때부터 마법 오직 하나만을 끝내 파고들었던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가장 기초적인 체력을 유지시키는 움직임 이외에는 마법 말고 다른 것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덕분에 현재 89세 미혼 대마법사였지만 말이다.
"정령사나 마검사 등록지가 아닌걸로 봐서 마법이 주요능력인 것 같은데 정령이나 검술 능력은 어디까지지?"
생존 현황을 알 수 없는 은거 마법사를 제외하면, 마탑에 등록된 현 최고의 정령사는 세 속성의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노처녀 바니카였다. 그리고 오직 마법 부문에서 마탑의 2인자는 얼마 전 6클래스 마스터였다가 7클래스 초입에 간신히 든 90살 영감쟁이 구스. 마탑에 등록되어 있는 인간 중 최강의 마검사는 제국의 대공인 레이니안이었다. 마법 실력만 따지면 6클래스 마스터. 물론 엘프 중에서는 고위 마법사나 정령사가 얼마든 많겠지만 말이다.
유렌은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정령은 네 속성 다 중급까지 소환해 보았습니다."
사실 마법과 검술이 그 실력쯤 되면 정령의 활용빈도는 줄어들어서 상급 정령까지 소환할 일이 유렌에게 생기지 않았기에 중급에서 머물 뿐, 지금 시도하면 최상급까지는 쉽게 부를 수 있는 하이엘프의 친화력을 물려받은 유렌이었지만 그는 그다지 정령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언제나 곁에 있는 정령이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검술은 아직 소드 마스터 입문급밖에 안 됩니다."
마법을 배우며 검술을 병행하긴 쉽지 않다. 세일런은 유렌의 근육과 허리에 찬 검을 보면서도 그저 호신용이겠거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드 마스터 정도밖에…….
……응? 잠깐, 뭐라고?
마탑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
레이니안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6클래스 마스터이자 현재 7클래스 초반대.
유렌은 소드 마스터 초입에 6클래스 초입. 같은 마스터급 마검사라도 의외로 실력차가 엄청나군요. 만렙이 100이라면 유렌은 60정도인데 레이니안은 101정도?
전전편에 괜히 로리물 썼다가 욕만 먹었군요;;
시아의 나이는 18살이고, 로리외전의 주인공이었던 엘의 육체 외형 나이(성장이 멈췄을 때의 나이)는 15살, 실제 나이는 약 100살입니다. 외모만 어려보일 뿐 딱히 로리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재미로 쓰고 재미로 읽는 이 소설에서 저도 진지한 내용은 쓰기 싫지만 일단 해명해봅니다.
사실 저는 그냥 귀여운 게 좋다는 거지 실제로는 3차원 중딩이하 어린애들은 참 싫어합니다. 저는 애들을 별로 안좋아하거든요(특별히 애들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귀찮고 또 그 어린애들 보호자와 관계가 좀 그래서; 애들이야 기어다닐 때까지나 귀엽지 걸어다니는 애들은 제 성격상 별로 안귀엽더라구요.). 2차원(소설도 2차원으로 볼수있다면)과 3차원은 다르지요. 어차피 여자분들만 보는 소설에서 여자 작가가 귀여운거 좋다며 개그 차원에서 써본건데 성범죄라니;;;
저도 예전엔 성폭행 소식같은것 듣고 나서는 좀 그랬으니까 그런 덧글 다신것도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그리고 저는 요즘에 충격적인 두가지 성폭행 사건을 접한 후부터는 인터넷이나 뉴스에 성폭행 관련 범죄같은게 떠도 읽어봤자 정신건강에만 안좋을거라고 생각해서 아예 안 읽고 꺼버리기 때문에 요새 성폭행 사건이 어떤가에 대해서 상황을 몰랐습니다. 지금도 별로 알고싶지 않아요(관련댓글 제발 X). 싫어도 귀에 들어오는 대략적인 내용만 아는 것 뿐입니다.(그것도 얼마 전부턴 화제로도 안올라오고 뉴스 제목도 안뜨더군요. 그래서 대충 일단락됐구나 하고 아는 것뿐입니다. 듣고싶지도 않아요 그런거;;)
이건 그냥 성폭행 소식 듣고 충격받아 당분간 로리물 끊고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당분간 자제'라는 건 전혀 해결방법도 되지 않고 로리 관련 소설을 올렸다는 것에 클레임을 걸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여자가 쓰고 여자만 보는 그런 소설에서 본편도 아니고 로리라고 밝힌 다음 외전격 몇줄 끄적였다고 해서 제발 절 무슨 성폭행 범죄자나 모든 아동성폭행을 주동하는 근원 같은 걸로 취급하지 말아주세요ㅠㅠ 아 진짜 댓글보고 충격받았어요. 본격 로리콘도 아니고 그냥 유사 로리물 좀 썼다고 인간쓰레기 취급이라니. 제가 앞에 안밝히고 쓴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15금에 로리라고 밝혔잖아요? 웬만하면 이런 소리는 안하는데, 읽기 싫으면 읽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