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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69화 (69/226)

<-- 5. 젊은 여공작과 사막의 황제 -->

물론 정보를 신청한다고 해봤자 아무에게나 다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정보에도 급이 있다. 게다가 특정 정보를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보요청을 하는 사람의 신원 조회도 한다. 그게 싫다면 검은 달 길드로 가서 정보신청을 하면 되지만, 가격이 푸른 탑 길드의 수십 배는 더 넘었다.

그래서 유렌은 먼저 접수처 직원에게 가서 말했다.

"마법사 등록을 하고 싶습니다."

여직원은 생각 외로 후드에 얼굴을 가린 그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게 낮고 부드럽자 조금 놀랐지만, 그 내용에 더 놀라서 무슨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 유렌을 바라보았다. 어딜 보나 망토 후드와 두건을 뒤집어쓴 검사 내지는 용병으로밖에 안보이는 체구의 사람이 마법사 등록이라니?

"……마법사 등록은 대리등록이 불가합니다. 접수하시려면 본인을 데리고 오셔야 합니다."

"본인입니다."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미심쩍었다. 그리고 한번 더 못박았다.

"정식 마법사 등록은 3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만 가능한 것은 알고 계시죠? 견습 마법사는 1클래스부터 가능한데, 견습 마법사 등록을 하시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식 마법사 등록'이라고 딱 잘라 말하자 그녀는 꽤 놀랐다. 하긴, 접수처에서 일한지 3년밖에 안 되었으니 3년 전에 이 남자가 견습 등록을 하러 왔는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3클래스의 마법사인데 저만큼 근육을 기르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조금 성격이 특이해서 연구보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뭐, 마법사들은 워낙 괴팍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운동을 좋아하는 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흔한 것은 아니지만.

"이전 견습 마법사 등록자료를 확인해야 하니 이름과 견습 번호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견습 마법사 등록은 한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스승 밑에서 교육받으며 1클래스가 된 순간부터 모두 마탑으로 가서 견습 마법사 등록을 한다. 그래야 평민의 경우 신분증 발급과 세금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마법학교에도 입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적이 좋으면 마탑에서 다른 더 좋은 스승을 만날 수도 있고. 대개 이르면 10살, 늦어도 15살 사이에 등록을 하러 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늦으면 20살에서 30살 사이의 견습 마법사도 가끔 찾아온다. 정식 마법사 등록은 그들 중에서 극히 일부, 그것도 대체로 30대가 넘어선 사람들만이 할 수 있다. 그만큼 3클래스로 올라서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실 진짜 본격적인 마법재능이 있다면 20대 내에 거의 3클래스정도는 마스터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20대로 보이는 이 신청인은 분명 3클래스 이상만 가능하다는 마법사 등록을 하러 온 주제에 견습등록은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드물지만 이런 경우는 은거 중이거나 매우 폐쇄적이라 자기 탑 밖으로 안 나가려고 하는 마법사 스승 아래서 배운 제자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유렌을 다른 접수룸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녀의 인수를 받은 다른 남자마법사가 서류작성을 도와주었다. 그 남자 마법사는 재키라는 이름으로, 비교적 쾌활한 성격이었지만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 싫어서 연구를 하지 않고 남는 시간에는 이렇게 서류업무를 조금 돕고 있었다. 정식 마법사나 견습 마법사 등록 일에는 어느정도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기에 평범한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재키는 웬 장신의 남자가 검까지 차고서 정식 마법사 등록을 하겠답시고 들어오자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우와, 근육 죽이는데. 그는 자신의 마른 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똑같은 3클래스일텐데 저 녀석은 근육질이고 난 나무작대기냐. 근육도 사람을 가리나? 그나저나 3클래스씩이나 되는 마법사면서 근육 관리하기 만만찮을 텐데, 어쨌거나 부럽군.

재키는 기본적인 접수 서류를 내밀고 그에게 펜을 건네주었다. 마법사라면 당연히 글을 쓸 줄 아니까 문맹인지 아닌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일단 신분증이나 신분패를 제시하시고 여기에 기재 가능하신 목록은 전부 써주십시오. 그리고 마나측정을 받으신 후에 등록까지 대략 사흘 정도 기다리시면 마법사 등록증이 발급됩니다. 하지만 이후 연구비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논문을 작성해서 제출하셔야 하고, 배틀 위저드 인증을 받으시려면 실전 테스트를 추가로 받으셔야 합니다."

유렌은 조금 고민하다가 동패와 금패 중에서 금패를 내밀었다. 고위 귀족들만이 사용 가능하다는 그 금패를 보고, 기껏해야 동패나 은패 정도 내겠지 하던 재키는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귀족이십니까?"

"금패는 주인께 받은 것입니다. 생물학적 부친이 인간 귀족이긴 합니다만 그건 신경쓸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신경 안 쓰냐!! 재키는 어이가 없었다. 금패를 준 주인이라면 아마 그가 모시는 주군이라는 의미겠지만 아버지가 귀족이라니. 그럼 님도 귀족이라는 의미잖아? 고위 귀족이 3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라면 대체로 어느정도 마탑에도 정체가 알려져 있어야 하는데 그는 이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얼굴을 가리고 있긴 했지만 분위기나 체구만으로 봐도 누군지 짐작도 안 간다.

유렌은 재키의 반응에 신경쓰지 않고 펜을 들고 약간 머뭇거리다가 이름을 적는 란에 천천히 끄적였다.

「이름 : 유렌 카르테인」

"아~, 카르테인 가(家) 출신이시군요! ……가 아니라 카르테인?!"

재키는 아는 척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카르테인? 거긴 어느 가문이래? 마법사 일을 하면서 귀족가문에도 빠삭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보다. 어느 제국, 어느 작위의 가문인지도 모르겠다. 하급 듣보잡 가문이라면 모를 수도 있겠지만 금패까지 받을 정도인데 찌질한 가문일 리가 없지 않은가.

유렌은 재키의 혼란을 무시하고 계속 써내려갔다.

「나이 : 22

생일 : 4/26

성별 : 남자

스승의 이름과 마법사 등록 번호(중복기재 가능) : 에라렌 카르테인, 번호 없음」

에라렌 카르테인은 또 누구래? 재키는 이 남자가 그냥 사람 이름을 막 지어내는 것이 아닌지 궁금해졌다. 번호가 없다면 스승조차도 등록된 정식 마법사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재키의 의심은 유렌이 자신의 마법 클래스란에 6을 표시할 때에서야 극에 달했다. 그도 어지간히 성격 나쁜 마법사의 일종이기에 화를 내려고 했지만 그래도 금패를 낼 정도의 귀족인 것 같으니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애초에 아무리 3클래스라고 해도 재키가 그의 실력을 읽을 수 없었다는 것도 수상했다. 재키는 그래 보여도 얼마 전에 3클래스 마스터를 따냈다. 고작해야 3클래스 초입일 이런 마법사 입문자의 실력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즉 그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저기, 멀쩡하게 생기셔서는 장난치는 건 그만둬 주시지요. 아무리 마법사 등록이 공짜라고는 해도 자꾸 이러시면 탑 수뇌부측에서 강경대책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유렌은 무엇이 문제냐는 듯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늘진 얼굴에서 비치는 녹색 눈동자는 매우 깊고 어두워 보였다. 재키는 조금 흠칫하더니, 자칫 심각한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다급히 달려가서 총책임자를 호출했다.

***

"뭐, 6클래스 마법사가 등록을 하러 왔다고?"

마탑의 수장인 세일런은 재키의 보고를 듣더니, 하품을 하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3을 잘못 봤겠지 병시나."

"아, 글쎄 아니라니까요!!!"

6클래스라면, 거기에서 한 클래스만 더 올리면 대마법사인 7클래스가 되는 거잖아? 물론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리 천재 중의 초천재라고 해도 대부분 젊은 나이에 6클래스를 이룩하고 그 6클래스로 수십 년을 살다가 그냥 죽는 일이 많았다. 그만큼 7클래스 대마법사가 되기는 하늘의 별 따기인 것이다. 8클래스 마법사는 당연히 그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대륙의 유일한 8클래스 마법사, 세일런은 도자기 찻잔의 표면을 가만히 쓸다가, 느릿한 몸을 일으켰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그러려고 일어나신 겁니까?! 제발, 세일런 님!!!!"

답답한 듯 목이 터져라 외치는 재키의 말에 세일런은 귀를 후벼팠다. 반면에 도무지 자기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문제를 떠나서 움직이는 걸 정말 싫어하는 이 마탑의 수장 세일런 때문에 재키는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이 인간아, 니가 가서 한 마디만 해 주면 해결될 문제 아냐?! 요즘같은 비수기 때는 다른 책임자들이 다 휴가를 떠나거나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지금 말할 만한 책임자가 마탑의 수장인 세일런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재키도 제정신의 소유자였으니, 보통 때라면 절대로 세일런에게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덴 대륙 모든 마법사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8클래스 마법사. 마탑의 가장 높은 수장인 세일런 크렌트. 그는 올해 89살의 나이로서 짙은 푸른 색 머리카락과 하늘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청년이었다. 세일런은 느긋하게 몸을 소파에 뉘이며 있지도 않은 수염을 쓰다듬는 척 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대신 그 녀석을 이리로 데리고 와."

자기가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싫다는, 귀차니즘의 극을 달리는 세일론의 말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재키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유렌에게 말했다.

"이 마탑의 수장이신 세일런 크렌트님께서 잠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 장난친 것을 인정하고 그냥 돌아가시면 푸른 별의 악마라고도 불리우는 잔악하고 무섭고도 공포스러우며 위대한 대마법사 세일런 님께서는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자, 돌아가세요. 제발 돌아가세요."

간절하고도 노골적인 재키의 말에도 불구하고 유렌은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적어놓은 서류를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장께로 안내 부탁드립니다."

"……."

마탑의 높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재키는 불안감에 떨었다.

***

잠결에 미르가 나를 안고 있던 팔을 풀며 일어나 옷을 입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상냥한 말투로 나에게 속삭였다.

"오늘 회의가 있어서 조금 일찍 가봐야 해. 제국의 사신들이 참석하는 회의인데……, 같이 갈래? 아니면 그냥 나도 회의에 가지말고 너랑 같이 있어줄까?"

지금 생각해보면 둘다 여러가지 의미로 정말로 파격적인 제안이었기에 미르는 내가 틀림없이 같이 가겠다고 대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잠에 취한 나는 너나 가! 라며 미르를 밀어내고 다시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그 바보짓을 깨닫고 뒤늦게 회의장에 찾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찾아온 강렬한 갈증 때문이었다. 잠이 덜깬 채로 미적거리며 하늘하늘한 휘장을 걷고 테이블 위를 더듬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어젯밤에 물을 다 마신 것을 깨달았다.

보통 때라면 벨을 눌러서 저택 어딘가에 있을 시종이나 시녀를 불렀겠지만 이곳 케르타에서는 언제나 노예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로 불러야만 했다. 나는 방금 잠에서 깨 목소리가 그렇게 크게 나오지 않았기에 흐느적거리며 알몸 위에 얇은 잠옷을 대충 걸치고 느슨하게 허리띠를 맨 후에 눈을 비비며 문 앞까지 걸어왔다. 밤에는 발을 걸치는 대신 침실의 문을 닫는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문을 힘껏 밀어 열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문앞에 어느 노예가 있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말했다.

"나 물좀……."

잠시 후, 누가 건네준 물을 끝도 없이 실컷 마시고 난 후 어느정도 갈증이 풀리고 잠이 깨자 나는 눈을 비비며 졸림을 떨쳐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것은 굉장히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라이언경, 그리고 그라시에 후작 휘하의 기사 한 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당황했다. 내 호위기사에게 잠에서 방금 깬 모습을 보이다니! 게다가 다른 가문의 기사에게도 잠옷 차림을 보이다니이이!! 하지만 나는 곧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공작 각하! 괜찮으십니까?!"

내 잠옷차림에 당황해서 자신이 입고 있는 수놓인 기사제복 겉옷을 벗어 내게 걸쳐주는 라이언 경을 내가 어리둥절해서 바라보자 그는 내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언 경……? 여긴 어떻게……."

미르가 오늘 오전에 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내궁으로 안내해줬다더라. 라이언 경은 미르가 내게 무슨 해코지를 하거나 협박이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지 않았는지 매우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가장 이 상황에서 신빙성 있는 의견이었지만 그 내용대로라면 제국과 케르타의 친선은 물건너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지금 머무는 방이 따로 마련된 손님방이 아니고 미르 그 자신의 침실이라는 것을 라이언 경이 알았더라면 왕이고 뭐고 곧장 달려가 사생결단을 냈을지도 모른다. 그냥 내 방인 척 하자.

다른 귀족들은 다들 회의에 참석하느라 기사인 그 둘만 내 안위를 살피러 왔나보다. 라이언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돌아갔지만, 그제서야 나는 미르가 잠결에 나에게 말해주었던 대사를 다시 떠올렸다. 오늘 회의가 있다고 했었지. 벌써 끝났을지는 몰라도 일단 가봐야겠다. 나는 옷을 차려입고 신발을 신은 후에 내궁 밖으로 걸어나갔다.

'어디가 하렘이고 어디가 본궁이었더라?'

미르에게 안겨서 어떻게 갔는지를 아련히 기억해내며 정원에 나 있는 길을 걷던 와중, 나는 지금 내가 가는 곳이 하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렘의 붉은 벽돌 건물 입구에 있던 분수가 보였기 때문이다. 분수라기보단 작은 물그릇에 샘이 흐르도록 해 놓은 장치였지만, 잘 정돈된 정원에서 하렘의 여자들이 종종 바깥바람을 쐬러 나온 정원같은 장소를 위해 만들어둔 분수였다.

그 분수를 본 순간 나는 갑자기 엄청나게 목이 말랐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지? 아까 마셨던 물도 상당한 양이었는데. 이 느낌은 단순한 기갈이 아니었다. 마치 줄기 내부의 가장 큰 중심 수관에서부터 무언가가 물을 바싹 말려가는 느낌이었다. 뭐냐하면 어쨌건간에 목이 너무 마르다는 것이다. 나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분수에 가까이 다가갔다.

햇빛에 반사되는 아름다운 물방울들이 순간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맛있는 물,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물, 내 생명 물, 그 물들이 오늘따라 너무 매혹적으로 보였다. 물을 섭취하고 싶다. 이 사막의 나라에 와서는 햇볕이 모자라서 광합성에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지만 물이 꽤 부족했다. 하지만 내가 아까 마신 항아리에 든 물의 양은 하루종일 마실 정도의 물 양보다도 훨씬 많았다. 왜 이렇게 목이 마른 거지? 이 물에 입을 대고 마실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즘 폐하께서 바쁘신걸까, 왜 일주일 가까이 하렘에 발걸음도 안 하시지?"

"그것 아닐까요? 전에 들여온 그 하얀 피부의 계집애 있잖아요."

"그 종달새인지 뭔지 하는 것에게 싫증날 때도 되었는데 도무지 우리를 찾아오시지 않잖아요. 황제폐하를 위해서 매일매일 피부관리도 꼼꼼히 받고 있는데."

붉은 머리에 흰 숄을 걸친 혼혈 출신 메르아, 적갈색 머리에 보라빛 보석이 달린 은색 곁옷을 입은 남부인인 모이카와 금발의 중부인인 셀리. 왕비인 세 명의 뒤를 따라 푸른색과 노란색의 옷을 입은 다른 하렘의 여인들이나 붉은 바지를 입은 궁녀들이 재잘대며 산책을 나온 듯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분수대 옆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동시에 왕비 세 명도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나는 이 상황이 꽤 껄끄러웠기에 잘못 들어온 발을 돌려서 본궁쪽으로 급히 걸어가려고 했다.

"어머나, 여기에 종달새가 있었네?"

나는 뒤에서 들리는 적의에 찬 소리에 흠칫했다. 뭐, 뭐냐. 들킨건가, 나? 아니, 잠깐. 그런데 내가 왜 쫄아야 하는 거지? 나는 제국의 공작이라구!

나는 짐짓 오만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껏 쳐들고 뒤로 휙 돌아섰다. 세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살기가 든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이카가 먼저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폐하께서 그렇게나 아끼시던 종달새를 풀어놓으시다니, 이건 종달새에게 싫증났다는 의미겠죠? 메르아님, 저희가 조금 데리고 놀아도 될까요?"

아마도 메르아라는 여자가 이중 가장 서열이 높나보다. 메르아는 제 1왕비로서 아마도 현재 18살인 왕세자의 어머니랬나. 하지만 다른 두 여자도 각각 10대의 아이들을 두고 있었다. 아이들의 나이차가 크게 나지 않으니 세 왕비 모두 겉으로는 미르의 눈에 들기 위해 친한 척 하는 대신에 속으로는 다들 자기 아이를 다음 대 왕으로 만들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것이다. 다만, 셀리만큼은 아직 딸밖에 없었기에 셋 중 지위가 가장 낮다시피 했지만, 제일 젊어서 왕에게 사랑받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내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메르아도 그렇고 다른 왕비들도 18살짜리의 어머니라기엔 좀 젊어 보였는데, 하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왕비란 늘 하는 일이 외모 관리밖에 없으니까. 귀족의 여자의 일과는 외모관리나 하인들 관리, 그리고 평민의 여자들의 일과는 오직 가사노동 뿐, 이 케르타라는 나라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케르타를 싫어해서 미르의 종달새로 대우받는 것을 짜증나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여왕이니까! 나는 원래 정령여왕이며 모든 수컷들의 여왕이기 때문이다. 드래곤의 수컷도 마찬가지지만 인간 수컷 따위의 펫이나 소유물이 되고싶진 않았다.

메르아는 미르 앞에서와 전혀 딴판으로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훗, 그렇군요. 어차피 새장 밖에 풀어둔 종달새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모르시겠죠. 궁 밖으로 도망쳤다고 말하면 그만이니까. 그나저나 다행이네요. 가장 눈엣가시인 여자를 이렇게 빨리 제거할 수 있게 되다니."

하지만 그런 케르타의 여자라고 얕봐서는 안된다. 남자의 머리꼭대기에 올라서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여자였기에, 특히 권력의 집중지인 왕궁 내에서 일어나는 여자들의 암투나 기싸움은 남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라고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하렘의 여자들이 종종 정원으로(내궁의 벽 밖으로는 결코 못 나간다) 외출을 나올 때 몇몇씩 데리고 오는 남자 노예들이 출구 쪽을 지키고 서자 당황했다. 즈, 증거인멸?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그 증거인멸? 인간이 살았던 흔적마저 없애버리는 가장 잔혹한 범죄 아냐? 하는 꼴을 보니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것 같은데 말야. 설마 지금껏 특별히 왕의 관심을 끈 하렘의 여자들도 다 이런 식으로 처리한 걸까? 하렘의 관리를 맡은 거세된 남자 노예들은 아마 뇌물이라도 받은 듯 했다. 니, 니네들 모두 그거 들었지? 미르가 나 괴롭히면 가만 안둔다고 했던 거 들었지? 응? 그러니까 저리 좀 가라, 제발!

남자의 변신도 꽤 호러지만 여자의 변신은 진짜 무섭다. 특히 내 앞에서 독기어린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메르아의 얼굴은 더 공포였다. 그녀는 출구가 막혀 멈춰서 있는 내 얼굴을 노려보며 앙칼진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하렘의 모든 후궁들은 공평한데, 네년 때문에 하렘의 다른 여자들이 폐하의 성은을 입을 기회를 몇 번이나 빼앗겼는지 아느냐? 말해 보거라, 몇 번이지?"

미안, 세다가 까먹었다.

"폐하가 전에 없이 그렇게나 계집을 귀여워해주셨는데, 네년은 폐하의 옥체를 이로 깨물고 손톱으로 상처를 냈다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쩐지 어느 시중드는 궁녀가 미르의 옷 밖으로 나온 손등이나 팔을 뚫어져라 보더니 죄다 일러바쳤구나!

"게다가 여자 된 몸으로 함부로 본궁의 사내들에게 얼굴과 몸을 보였다지? 아무리 폐하께서 장난감으로 데려온 종달새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그렇게나 음란하고 천박할수가!"

무슨 헛소리야, 음란하고 천박한 변태는 미르란 말야!!

어쨌거나 지금 그들은 나를 죽여서 파묻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메르아는 한 노예에게 명령해서,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얇은 가죽 채찍이었다. 팔에 채찍 자국이 난 노예나 다른 궁녀들이 종종 있는 걸로 보아 왕비인 그녀들의 짓이었나 보다. 케르타나 인다스에서는 상위층이 하위층에게 비인간적인 체벌을 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하지만, 그, 그런 흉기를 나한테 들이대다니! 이른다! 진짜 미르한테 이를꺼야! 으아앙!!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메르아가 쫄아있는 내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채찍을 돌 바닥으로 짜악 내려치자 그 소리에 깜짝 놀라서 생각으로만 하던 대사를 큰 소리로 외쳤다.

"무슨 짓이야, 채찍은 가슴 큰 여자만 써야하는 도구란 말야!"

채찍이란 무기는 채찍을 휘두를 때 같이 가슴이 출렁거려서 시각적인 데미지+코피를 줄수 있는 여자만이 사용해야 진정한 보너스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솔직히 그녀가 일자몸매는 아니지만 그래도 남부인 여자들은 가슴이 중부인에 비해 조금 빈약했다. 메르아가 혼혈이라서 그런데 순혈 남부인으로 보이는 모이카는 더했지. 게다가 그녀가 빈유가 허용되는 로리로리도 아니고 말야. 물론 나 정도 되면 뭐든 잘 어울리겠지만. 메르아가 빈약하다는 내 말에 그녀는 벌컥 화를 냈다.

"네 년이 아직도 주제를 모르는구나! 폐하의 눈에 벗어난 이상 살아날 희망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지금까지도 그런 거슬리는 계집애들은 다 내가 처리해왔으니까, 도움을 청해도 소용없어. 어디 그 잘난 얼굴부터 만신창이로 만들어 주지."

이때 미르가 나타나서 구해주면 좋겠지만, 지금 미르는 한창 회의 중이었다. 그녀들은 내가 제국의 공작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말한다 해도 믿어주고 나를 풀어놓아줄지도 미지수이니, 이왕 이렇게 된 거 팔짱을 낀 채 나는 하고 싶은 말부터 다 하기로 했다.

"흥, 내가 왕에게 버림받았다니, 무슨 헛소리야? 미르는 나를 어젯밤에도 뜨겁게 사랑해줬다구.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 부드럽게 키스까지 해줬어. 너희들은 이런 거 못 받아봤지? 당연할걸, 왜냐하면 나한테만 해주는 거니까!"

각색과 생략과정을 조금 거쳤지만 그래도 뻥은 아니다. 비록 근거없는 말뿐일지언정 자기 남자 얘기가 얽히면 여자들은 혹시나 하는 의심을 품게 되고 이성을 잃는 법이다. 분명 엄청나게 열받았을거다. 특히 메르아는 그렇다쳐도 셀리처럼 겉으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타입은 속으로 더 질투가 치밀어오를 것이다.

"저게 진짜, 다른 후궁들보다 좀 어리고 반반하게 생겼다고 기고만장해져서는……!"

먼저 화를 참지 못한 것은 모이카였다. 케르타에서 여자중에 가장 지위가 높은 셋이었기에 다른 여자가 기어오른 적은 처음일거다. 나는 혀를 내밀어보였다. 메롱. 약오르지? 하지만 도발이 너무 심했나보다, 셀리가 내 뒤에 있던 남부인 노예에게 소리쳤다.

"저 계집앨 붙잡아서 끌고 와!"

"엘레스트라 소환!"

여기서 내가 순순히 붙잡히면 정령도 아니다. 나는 엘레스트라를 소환해서 명령했다. 그들은 갑자기 허공에서 웬 흰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자, 이게 뭔지도 모른 채 당황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난 엘레스트라의 흰 옷깃을 잡고 아까 그 노예 때문에 생긴 빈틈으로 잽싸게 도망쳤다.

"엘레스트라! 도망쳐!"

〈……잠깐, 그러면 저는 왜 부른 겁니까?〉

훼이크.

〈플로라님, 잡힐 것 같은데요?〉

그럼 더 빨리 뛰어!

나는 엘레스트라의 손을 놓고 그냥 앞으로 힘껏 달렸다. 늘 미르에게 안겨다녀서 몰랐는데, 지금만큼은 더없이 넓은 내궁의 정원이 성가셨다. 엘레스트라는 가만히 나랑 같이 뛰다가, 손가락을 튕겨서 물 폭발을 만들어냈다. 갑작스런 물 탄환에 그들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의외로 엄청난 힘에 맞고 나뒹굴었다. 기절한 것으로 보이는 여자들도 있었다. 나는 입을 딱 벌리며 멈춰섰다.

"……."

〈그대로는 붙잡힐 것 같길래요. 괜찮습니까?〉

이런 게 있으면 진작 좀 하지!!! 하지만 아직 정령을 다루는데 서툰 나는 엘레스트라의 기술이 이렇게 파괴력이 큰줄 몰랐다. 파괴력이 매우 큰 실레스틴은 왠지 내 말을 안 들을 것 같고, 불이나 땅의 정령은 아직 다루기 조금 버거웠기 때문에, 단순히 먹는 용도로만 알고 있는 엘레스트라를 불러서 그들의 주의력을 흐트러뜨린 것 뿐이다.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나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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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로리가 땡겨서 글을 끄적이다보니 로리 변태물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레이니안 특집편으로 올려볼까나.

레이니안이 시아 비공략캐인 이유는 레이니안이 중증 로리타 콤플렉스이기 때문입니다. A컵 미만 어린 소녀에게만 하앍하앍. 레알 진짜 그런 설정입니다.

"저는 로리를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반한 여자가 로리였을 뿐입니다!"

같은 말 믿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로리콘들은 애초에 로리콘근성이 있으니까 로리콘입니다.

그나저나 그림 이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제 뜰에 가시면 투표 설명이 있으니 상세히 읽고 투표하셔도 되고 안 읽고 투표하셔도 되지만 ●표시나 ◈표시같은 걸 하면 무효표로 처리됩니다. 방명록에 올리신 그림들을 보시고 덧글로,

가장 야한 그림의 경우 ♥표시 1~5개,

자기가 생각한 캐릭터와 가장 싱크로율이 높은 그림의 경우 ♣표시 1~5개,

가장 정성이 들어간 그림이거나 어쨌든 맘에 드는 경우 ♠표시 1~5개.

이렇게 각각 그림 밑에 덧글로 ♥or♣or♠ 표시를 투표해주시면 ㄳ하겠습니다! 그림이 저 위의 3가지 중 아무데도 해당되지 않는다 싶으면 표시덧글을 안다셔도 돼요. 이 방법이 나은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네여. 복잡함 ㄷㄷ;

참가율이 높으면 나중에 그림이벤트 한번 더 개시해볼지도?

상품은 외전 요구권이니까 원하는 외전이 있으시다면 유권자분들께선 신중하게 뒷거래를 통해 투표해주셔도 됩니다. 자기가 자기 그림 뽑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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