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젊은 여공작과 사막의 황제 -->
감히 나를 종달새 취급한 것, 내 정체를 알면서도 숨긴 것, 감금한 것, 게다가 강제로 키스한 것, 나를 허락없이 덮칠 뻔한 것. 화낼 일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먼저 들먹여야 할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일단 한 대 때리고 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미르헬은 떨림이 멎지 않은 내 몸을 껴안았다. 그가 닿자마자 내 신체는 불에 데인 듯이 흠칫하고 떨었다. 추워서 그렇다고 착각할 정도로 부들거리는 내 몸을, 미르헬은 강하게 껴안았다. 더 이상 떨지 않도록. 이제는 그 무지막지한 팔 힘이 드래곤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놀라진 않았지만 내 허락도 없이 나를 껴안은 미르헬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이거 놔……, 무, 무슨……."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지?"
"……ㅇ?"
작은 내 의문에 미르헬은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묘하게 달라 보였다.
"실피드가 지켜주고 있지 않나. 나는 드래곤이니 정령왕에게 발리지도 않지만, 나 혼자 힘으로 실피드를 이길 수는 없어. 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두려워서 떨었던 거지? ……마치 '진짜'처럼."
"그거야 네가……!"
덮치려고 했으니까. 그런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입술이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허락없이 키스한 것, 이걸로 두 번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미르헬은 아까와는 달리 천천히 내 입술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입술을 할짝이는 그의 혀에 멈칫하다가 얌전히 입술을 열어주었다.
미르헬은 조심스럽게, 또 부드럽게 내 입술을 쓸며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의 키스를 받아주고만 있다가, 한 가지 깨달았다. 이 녀석 키스 엄청 못하잖아. 꼭 초등학생 같아.
그러나 천천히 내 입술을 빨아들이는 힘과, 껴안는 팔 힘에 나는 기운이 빠져서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대신에 그가 키스를 잠시 쉬고 숨을 가다듬을 때 입을 열어 말했다.
"돌려보내 줘."
"……싫어."
내 일행들에게로 돌려보내달란 말야! 하고 여기서 땡깡부릴 수도 있었지만 나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왜?"
미르헬은, 아이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방금까지의 소유욕과 정욕, 그리고 소름끼칠 정도의 집착은 없었다. 대신에, 매우 투명하고 예쁜 눈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실피드가 말했던 것처럼 성룡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드래곤. 세리안보다 어린 나이 같았다. 그런 어린아이같은 순수하고 물기어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미르헬은 말했다.
"지금 보내면 다시 못 만날 거 아냐?"
못 만나긴 왜 못 만나? 나는 공작이고, 너는 케르타의 왕이잖아. 적어도 외교협상을 하러 몇 번은 더 만나야 할 텐데 말이다. 미르헬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체격이 커서 내가 완전히 파묻힌 꼴이 되었지만 그는 떼쓰듯이 말했다.
"네가 갖고 싶어."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는 것도 아니고, 무슨…….
"네가 좋단 말야!!"
스무 살은 넘어 보이는 키큰 사내가 내게 안겨서 울먹이며 그렇게 말하는 모습은, 남들이 보면 비웃을 꼴이었지만 지금 이 곳에는 나와 그밖에 없었다. 그럼 내가 비웃어야 하나? 나는 비웃지 않고 미르헬의 몸을 살며시 밀어내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헉헉 미치겠네. 무슨 애가 힘이 이렇게 세? 나는 지쳐서 말로 반박했다.
"유희는 그만둬. 나도 할 일이 있단 말이야."
"유희가 아니야!"
미르헬은 귀찮아하는 내게 열정적으로 따졌다.
"왜유희라고생각하는거야?나는처음부터유희가아니었어게다가난첫키스였다구유희따위가아니야그래서진짜이름도가르쳐줬잖아그런데당신이이것을유희라고말해버리는바람에충격받아서, 나는, 나……."
"……숨 좀 쉬고 말해도 돼."
미르헬의 흰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귀엽고 예쁘다고 실컷 문지르며 뻔뻔하게 애정공세를 하던 아침과는 다르게, 그는 한참 숨을 고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사, ……사, 사, 사, 사랑해!"
그러고 보니 직접 사랑한다고 말한 것도, 키스도 처음이다. 미르헬은 가벼운 접촉은 쉽게 하지만 의외로 정작 중요한 행동에는 경험이 없는 듯 했다. 나는 괜히 고개를 돌리며 그를 외면했다.
"난 이미 애인이 둘이나 있어."
"몇 번째이건 상관없어, 내가 첫눈에 반했으니까!"
그는 매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드래곤이라선가. 정작 내가 플로라라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몇 번째라는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은. 세르도 그랬었지, 아마.
"그러니까, 내게 유희라고 말하지 마, 제발."
미르헬은 그렇게 애원하며 내게 매달렸다. 매달리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내가 그 매달림을 뿌리치기는커녕 오히려 힘에 이끌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유희로서 사람을 상대해온 내가 이런 말을 하는것은 모순이겠지만, 그래도 너만은, 너만은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었으면 좋겠어. 유희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없는 관계인지는 내가 잘 아니까. 그러니까, 플로라……."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젖은 눈동자와 선정적으로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이 마음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차갑게 대답했다.
"놓아 줘."
"싫어, 대답하기 전에는 절대 못 놔."
숨쉬기 힘들 정도로 조여오는 팔 힘에 나는 순간 질식할 뻔 했다. 진짜 무서운 집착이다. 이러고 평생이라도 버틸 듯한 기세에 나는 미르헬에게 매정하게 대하는 것을 포기했다. 다른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좋아서 그랬다는데, 한번 덮칠뻔한 건 용서해 주는 것도 괜찮……지 않다. 날 물먹인거랑 엘레스트라를 역소환시킨거랑 종달새취급한 거 절대 용서 못한다!
"절대 안 봐줘! 놓으란 말야, 익익!!"
"싫어!"
"네가 애냐!"
"난 아직 천살밖에 안 됐단 말야!"
"천살이면 많이 먹었구만!!"
한참을 그런 의미없는 실랑이를 벌이고, 체력이 소진되어 헉헉대는 나를 미르헬은 끝내 악착같이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젠 이 녀석하고 싸운 게 문제가 아니라, 미치도록 덥다.
나는 미르헬을 매단 채 아까 내려놓은 얼음 딸기 주스를 집어들고 쭈욱 빨았다. 얼음이 이미 다 녹아 있었지만 시원한 게 먹을 만 했다. 조금 진정이 된 후에 나는 미르헬을 향해 따지듯 말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당분간은 안 갈테니까 일단 내 일행들에게 나 살아있다는 안부나 좀 전하게 해줘."
포기와 한숨이 섞인 내 말에 미르헬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전해주면 그대로 가버릴 거 아냐!"
"아 글쎄 안 간다니까!!!"
넌 속고만 살았니?
***
케르타의 손님용 궁에 머무르고 있는 제국의 다른 사신 일행들에게 내 소식을 전하자, 그들은 매우 안도했다고 한다. 특히 내 시종 두 명이나 내 기사인 라이언 경은 매우 기뻐했다더라. 그나저나 다행이다. 그들이 살아있어서. 하지만 나는 그들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내궁에 있는 왕의 침실에 갇혀있어야 했다.
'이대로 떠나면……, 울겠지?'
미르헬 말야. 아니, 울기는커녕 오히려 제국을 멸망시키겠다며 날뛸지도 모른다. 일단 당분간은 여기 머무르기로 약속했으니까. 문제는 그 '당분간'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은 사신으로 방문한 외교조약체결과 무역협약에 대한 용건만 끝나면 돌아갈 생각이지만, 그 말을 입밖으로 내어 말하면 미르헬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이 끝나지 않게 대놓고 훼방놓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미르헬은 내 뒤에서 나를 안은 채 속삭였다.
"그런데 그 '당분간'말야, 한 2~3천년 정도를 말하는 거지?"
"……."
내 유골 껴안고 살래?
"난 드래곤이고 플로라는 정령왕이니까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시아라고 불러."
"싫어, 본명 부를래. 플로라."
내가 기껏 애칭을 허락해 줬더니, 미르헬은 거부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아직까지 플로라가 아니니까, 시아라는 이름이 더 편하단 말야."
"……."
"가짜가 아니라 진짜 이름이야. 시아는 내 첫번째 삶을 살았던 때의 이름이야. 채시아. 성은 빼고 시아."
내 부연설명에 미르헬은 그제서야 만족한 듯 헤실거리며 내 등에 볼을 부볐다.
"……좋아. 그럼 나도 미르라고 불러. 드래곤들은 이름이 길기 때문에 보통 친한 사이끼리는 줄여서 부르니까. 내 이름은 고대어 치고는 별로 긴 단어가 아니지만."
미르헬이 너무 기쁜 것처럼 보여서 나는 이제 그만 봐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ㄴㄴㄴㄴ 아니지. 방금까지만 해도 난 엄청 열받아 있었다구. 어째서 이렇게 쉽게 화가 풀리는 거야? 게다가 다 큰 어른의 모습으로 나를 쥐어 터뜨릴 듯이 안고 있는데 귀여워 보일 리가 없잖아!
빨리 공작으로서 일을 하러 일행들에게 돌아가야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나는 미르의 팔 안에서 몸을 틀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투명하고 색이 선명해서 촉촉해 보이는 루비 빛의 눈동자와 가짜같이 길고 잘 정돈된 진짜 속눈썹, 게다가 음란해 보이는 우유빛 피부와 빛나는 긴 적발의 머리카락……. 만져보면 남자라는 것이 실감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유렌이나 세르에 비해 비교적 가늘고 근육이 많이 보이지 않는 편인 팔다리. 거기까지 보는 순간 나는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유렌과 세르는 검사라는 것을 생색내듯이 넓은 어깨와 단단하고 굵은 팔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고, 유일하게 적임자였던 이루는 황자라는 그 신분 때문에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려다가 미르의 팔에 내 몸이 엉켜있어서 그저 침대 위에서 머리만 잠시 떼고 다시 누웠다. 그리고 미르를 달래서 그를 떼어낸 후에 말했다.
"여기에 다른 나라 옷은 없어? 드레스라던가 치마 같은 거."
케르타에서는 여자들도 바지를 입는다. 물론 속바지는 어느 나라에서건 여자들이 입지만, 이곳의 바지는 조금 달랐다. 몸을 완전히 감싸듯 헐렁이면서도 다리 전체를 가리기 때문에 위에 천으로 된 겉옷을 입어도 바지 아랫자락이 보였다.
좀 예쁜 옷이라고 하면 하렘의 여자들이나 고위 귀족의 첩과 부인들이 입는 화려한 천으로 된 옷이나 예복 정도일까. 원래 이곳에는 여자들의 사회 진출이 제한되다못해, 여자는 사회의 일원으로도 잘 취급해주지 않기에 여성들이 끼는 무도회나 연회같은 것도 없었다. 있다고 해봤자 야한 옷을 입은 무희들을 불러 춤추게 하는 것 정도.
하지만 내가 필요한 것은 몸매가 다 드러나는 그런 무희 옷이 아니었다. 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라에선 실용성이 없어 입지는 않지만, 몇 벌 정도라면 있을 거라고. 정 필요하면 의복 재단사를 불러 만들어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지금 당장의 놀잇감이 필요했기에 있는 옷들만 가져오게 했다. 미르헬은 내가 출신국인 하르아이나 제국에 있을 때의 기분을 내 보고 싶은가 하고 외국에서 쓰는 여성용품을 전부 가져오라고 노예에게 명령했다.
그래서, 방 한가운데에 가득 마련된 옷들을 보고 즐겁다는 듯 웃는 나를 보고 미르도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과연 언제까지 갈까?
*아래부터 약 5페이지는 미르헬 여장 장면 15금입니다*
옷더미들 사이에서, 우리 나라에선 잘 쓰지 않지만 아크샤 왕국의 여자들에게서 유행한다는 코르셋도 있었기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누워 있던 미르의 위에 기습적으로 올라타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시아?"
미르는 조금 놀란 듯 하지만 기대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 조, 좋은 거 하려는거지? 나도 그거 좋아해! 나도 도와줄게!!! 그런 눈빛을 나는 못 본척 하며 미르의 상체를 맨몸으로 만들었다. 그의 맨몸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선천적으로 여자와 골격이 다르기에 완벽히 꾸밀 순 없겠지만, 그래도 유렌에 비하면 충분히 여자다웠다.
하얀 몸은 길었지만 조금 마른 편으로 보였다. 가늘었지만 마치 모델처럼 균형이 잘 잡혀 있었기 때문에 실제 세리안보다 약간 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키는 매우 커 보였다. 나는 딸기우유같은 핑크빛으로 도드라져 있는 그의 유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아래의 매끈한 몸과, 잔근육이 있긴 하지만 날씬하고 가는 허리. 여기까진 합격점이다.
나는 무자비하게 미르의 바지를 한번에 벗겨냈다. 흰 속옷이 드러났다. 케르타의 속옷은 남자건 여자건 천 한장짜리라 그런지 처음 보는 방식으로 상당히 미묘하면서도 어렵게 묶여 있었다.
허리 부분을 잡아당겼지만 신축성이 없어 그런지 잘 벗겨지지 않았다. 미르는 자진해서 속옷 매듭을 풀어 스스로 벗었다. 혼자서 알몸이 된 그는 아직도 자기가 무슨 짓을 당할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생긋 웃어보았다. 미르는 내 미소에 뺨을 핑크빛으로 붉히며 내게 물었다.
"마음에 들어?"
"응."
"원한다면 더 크게 해줄수도 있어."
"됐어. 이대로가 딱 좋은걸."
그와 나는 미묘하게 요점이 다른 대화를 하고 있었다. 네 상반신은 딱 적당한 게 마음에 들지만 다리 사이에 있는 이 무기 좀 작게 줄여봐. 여자 속옷으로 감싸기엔 너무 크지 않아? 이 예쁜 얼굴과 달리 전혀 델리케이트하지 않잖아? 이렇게 크면 곤란한데. 얘는 변태인가, 옷을 벗겨진 것만으로 흥분해서 여기를 세우고 있단 말야?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미르헬은 흥분해서 이번엔 내가 옷을 벗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악하악 내 무기가 맘에 꼭 든대, 너무 좋아라, 플로라의 딸기 쇼트 케이크도 보고싶어! 라는 표정으로.
하지만 내가 왜 옷을 벗어? 이제 미르헬을 홀랑 벗겼으니 갈아입혀야지. 옷더미 속에서 가장 큰 사이즈로 보이는 레이스 여자 팬티를 찾아낸 나는 반쯤 누운 미르헬의 다리를 들고 팬티를 끼워넣었다. 그는 이제서야 당황해서는 어물거렸다.
"저, 시아……?"
"왜?"
순진한 눈을 반짝이며 미르헬을 올려다보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미르헬은 따지려던 걸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네 취향이 정 그렇다면야."
나는 그의 오해를 풀어주지 않은 채 분홍색 레이스 팬티를 허리까지 끌어올려 입혔다. 타이트한 레이스 팬티는 그의 다리 사이에 있는 굵고 두꺼운 스틸 바스타드 블레이드를 제대로 다 가리지 못하고 꽉 조였지만, 그래도 허벅지 위까지 들어간 게 어디냐.
그리고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짓는 미르를 불러서 의자에 앉혔다.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 그가 얌전히 의자에 앉아 주진 않았지만, 억지로 앉혀서 코르셋을 뒤집어씌우고 끈을 꿰어 있는 힘껏 졸랐다.
"잠깐, 그런 걸 입으면 내가 허리를 못 움직이잖……."
"안 움직여도 돼."
아까보다 얼굴이 더 창백해진 미르의 가슴에 브래지어를 채우고 그 안은 털장식과 솜으로 꽉꽉 충전했다. 그리고 속바지와 속드레스를 입힌 순간 미르는 내가 하려는 짓을 뒤늦게 알아챘다.
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있는 내게 미르헬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설득시켰다.
"저기, 그만두면 안될까요……?"
"ㄴㄴ."
"정 여자를 원한다면 내가 폴리모프로 진짜 여자로 변신해줄……."
"왜 그래? 아까까진 너도 즐겼잖아."
게다가 이런 게 진짜 재미있는 거야. 뻔뻔스러운 내 외침에 그는 차마 뭐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무슨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 사실대로 털어놓다간 뺨 한대라도 맞을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암울하도록 얌전해진 미르에게 잘 어울리는 진한 분홍색의 립스틱을 발라주고, 안 그래도 예쁜 속눈썹을 마스카라로 휘어 올린 후 눈화장과 볼화장을 해 주었다. 그 다음에 눈썹을 다듬고 예쁘게 덧그려 주었다.
마지막으로 예쁜 붉은 색의 드레스를 입히고 구두를 신긴 후에 머리를 보석 핀으로 틀어올려 묶어 주면 미르 언니 완성!
오랜만에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재미있게 논 것 같네. 내 화장술과 코디 실력은 아주 뛰어나진 않았지만 보통 이상이었고, 워낙 원판이 예쁘니 완성품도 환상적이었다. 나는 완성품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감사했다. 그리고 감탄했다. 마네킹처럼 잘 빠진 섹시한 미녀가 완성되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만들어놓고 네가 웃으면 어떡해!"
미르헬이 늘어진 치맛자락과 꽉 조이는 속옷이 불편한지 쩔쩔매며 외쳤지만 나는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어울리긴 진짜 잘 어울렸다. 저 풍성한 치맛자락 속에 든 게 남자의 거대한 오리지널 웨폰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분명 어떤 남자든지 미르에게 넘어갈 것이다.
"아, 잘 놀았다. 이제 저녁 먹자, 미르!"
"알았어."
미르헬은 한숨을 쉬며 머리장식을 뽑으려 했다.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그런 미르를 제지했다.
"안돼! 내가 기껏 해준건데 벌써 풀어버리면 아깝잖아? 잘때까지 하고 있어!"
"……."
"싫어?"
눈을 크게 뜨고 미르헬에게 바짝 붙어 그렇게 올려다보며 묻자, 그는 입을 헤벌리고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네가 웃어준다면 평생이라도 이러고 있을게, 라는 표정이다. 드래곤은 참 단순해서 좋다.
미르헬은 당당히 어깨를 펴고 그 차림새로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예는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
재상, 루센은 지금까지 살아온 72년의 세월 중에서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에 부딪쳤다. 케르타의 위대한 왕. 곧 케르타를 제국으로까지 부흥시킬 수 있는 현명하고 카리스마 있는 그 왕, 라이만 키시이렐이 갑자기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어제 웬 종달새랍시고 여자를 데려온 이후, 그 여자가 사실은 제국에서 온 사신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였다. 이상 현상을 보이는 몬스터들에게 습격당해 헤어진 사신단 일행이라나. 제국의 사신 측에서는 당연히 그녀를 구해주고 보호해 준 케르타 측에 감사를 표하며, '당장' 그녀를 보내달라고 했다.
루센의 입장에서는 계집 따위가 굉장한 인재에다가 머리도 좋고 공작이라는 고위 귀족이란것부터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북쪽 나라 녀석들은 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들이 중요인물이라고 주장한다면 돌려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국왕은 돌려주지 않았다. 국빈으로서 대우하며 내궁에 얌전히 모시고 있다며 일방적으로 제국 사신측에 통보만 했을 뿐.
하지만 케르타의 여성 비하 풍조를 잘 아는 제국 출신들이 그 말을 믿을 리가. 무슨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제국의 그라시에 후작은 당장 그녀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거나 내놓지 않으면 그녀를 지극히 아끼시는 여제께서 노하셔서 전쟁을 선포할지도 모른다며 은근히 돌려 말해 압력을 넣었다. 제국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었다.
'국빈으로 대우하고 있다니까.'
그럼, 국빈도 이런 국빈이 없지.
왕은 정신이 나가서 그녀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값나가는 물건이라도 두배, 세 배로 갖다 바치며, 심지어는 어제처럼 화려한 여자 옷을 차려입고 본궁을 돌아다니는, 그런 사내로서 지극히 수치스러운 짓도 서슴치 않았다. 그녀가 짖으라면 짖고, 구르라면 구르는 그저 개같은 취급을 받으면서도 좋다고 허덕대는 것이다.
이건 그냥 그 여자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고민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국왕이 정신이 들게 할수 있을까? 그러나 답은 보이지 않았다.
***
내가 설마 미르헬 때문에 궁에 머무르며 놀고만 있었겠는가? 미안하지만 나는 케르타의 왕후가 아니라 제국의 여공작이다. 제국의 녹을 먹고 있는 이상 제 역할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케르타는 폐쇄적인 성격 때문에 아직까지 사막 밖으로 진출하지 않고 있다. 이전까지는 단지 국력이 모자라서 사막 위쪽의 아크샤나 라콘 왕국, 인다스 왕국 쪽으로 진출할 생각을 못 했지만, 부족이 통합되고 체계적으로 법이 정립되어 국가에 힘이 생긴 지금은 달랐다. 케르타같은 불모지에서 이 정도로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내다니. 물론 몇몇 엄격하거나 불합리한 법률 때문에 차마 치안이 좋고 살기에도 좋다고 꼭 단정지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기에 군사력과 국력만은 누구보다도 강한 국가가 지금의 케르타였다. 이게 다 사기적인 능력을 가진 왕 때문이다. 미르 말이다.
물론 이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군사력에만 치중해 무식하게 강한 나라를 만든 건지는 짐작이 간다. 조만간 침략전쟁을 일으킬 셈인 것이다. 케르타를 선택한 이유도, 케르타의 전사들이 타국의 군대들에 비해 가장 강하기 때문이었을지도. 하지만 나는 그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적어도 제국에 위협이 된다면 막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 먼치킨 왕만 끌어내면 모든 대륙의 위협이 해결되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주변 상황을 바꿔야지.
금가루를 뿌린 물로 하는 목욕보다 장미꽃 목욕을 더 좋아하지만, 나는 적어도 미르헬이 왕위에 올라 있는 동안에는 제국을 넘보지 못하게 국력을 뿌리까지 흔들어놓고 갈 생각이었다. 내가 가고 나면 한동안 자기 나라 재정비에만 힘써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불합리한 법도가 많이 바뀌면 좋겠고. 원래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굳이 쉬운 방법 놔두고 돌아서 갈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미르헬은 단지 유희일 뿐이라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나라를 망치는 일인줄 알면서도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있었다. 국민들이나 귀족들에게서 왕의 입지를 약하게 만드는 일-여장하고 돌아다니기 같은-도 하고.
미르는, 내가 자신의 게임팩 세이브 데이터를 삭제하거나 에픽템을 모두 상점행 시키는 정도의 피해밖에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나 다른 제국의 인간들에겐 꽤 중요한 일이다. 유희가 아니니까. 카덴을 좌지우지하는 대 제국의 황제가 레이나 여제같은 성군인 것과, 미르헬 같은 막나가는 변태인 것은 확실히 달랐다.
카덴의 모든 나라가 케르타처럼 된다면 난 어떻게 살라고! 절대 용납 못한다. 케르타의 귀족들은 제국의 기사들에 비해 너무 거만하고 간지도 별로였다. 상위층이라 남자에 비해 가질 수 있는 여자가 넘쳐나니 레이디를 위해 봉사한다거나 레이디에게 선택받는다는 개념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반면에 노동을 주업으로 삼는 케르타의 하층민 남자들은 몸은 튼튼한데 주변에 예쁜 여자들이 부족해서 그런지(예쁜 여자들은 신분과 나이를 불문하고 귀족들이 하렘에 갖다넣고 본다) 가끔 내가 직접 그들에게 말하면 동경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던가, 고개도 차마 들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다던가 하는 귀여운 면이 있다.
지금처럼.
"……괜찮습니다."
매일 그렇게 서 있기만 하면 심심하지 않아? 라는 내 질문에 왕의 침실 앞을 지키고 있던 적보랏빛 머리의 남자 노예는 그렇게 대답했다. 미르가 귀족 회의에 나갔기 때문에 나는 혼자 방에서 놀고 있어야만 했다. 웬만하면 나에게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미르였기에 보통 장소는 거의 따라다녔지만 이번 회의는 제국의 사신들이 참석하기 때문에 나는 기를 쓰고 가려고 했고 미르는 기를 쓰고 막았다. 결국은 가자미가 사는 커다란 수족관을 만들어주기로 약속하고 그는 나를 방에 가둬놓은 채 나갔다. 가자미 따위 딱 질색이지만, 사막에 수족관을 만들려면 돈 좀 들것이다. 미르의 성격에 아마 세금을 뜯어내기보단 국고를 털겠지. 세금을 착취하다 보면 국가 재정비에 정말로 오랜 세월이 들고, 나라가 자칫 망할 수도 있으니까. 어느 쪽이든 나는 케르타가 제국침공만 하러 오지 않는다면 상관없었다.
미르는 변태같이 능글거릴 때만 빼면, 종종 순진한 소년처럼 나를 그 비칠듯이 맑은 눈동자로 바라보곤 한다. 그리고 싱긋 웃는다. 그럴 때면 내가 하는 짓이 조금 미안해질 리가 없지. 솔직히 말해 나는 풀꽃들만 싱싱해진다면 인간들의 정치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내 목숨이 달려 있지 않았다면,그런데도 단지 재미로 미르를 괴롭혔을 지도 몰랐다.
미르도 괴롭히는데 보통 인간 남자를 못 괴롭힐 리는 없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며, 방문 앞의 발 뒤에 서 있는 그 노예를 불렀다.
"하지만 난 심심해. 이리 들어와볼래?"
"아, 안될 말씀이시옵니다. 저는 환관이 아닙니다. 전하께 들킨다면 저는 사형당할 것이옵니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케르타에서 하렘의 후궁들의 시중을 드는 것은 여자 궁녀들이나 환관, 그리고 거세 노예들이었다. 하지만 여긴 하렘궁이 아니라 왕이 거처하는 내궁이었다. 노예가 거세되어 있을 필요도 없고, 같은 내궁일지언정 하렘의 여자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도 없다.
나는 여기서 머물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거세된 남자가 아니라면 왕의 여자와 다른 남성이 접촉하는 일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그렇기에 내가 밖을 돌아다니거나 다른 남자 앞에 얼굴을 보이는 일은 여자의 입장에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이곳의 여자들은 교육받아왔지만, 나는 제국민이다. 내 에너지 보급원 중의 하나인 수컷과 대면이 제한당하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풍습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미르……, 아니, 왕에겐 비밀로 하면 되잖아? 괜찮으니까 들어와. 안 들어오면 나 미르한테 네가 말 안들었다고 이를거야."
진짜로 이르진 않을 거지만. 나는 그런 협박으로 그 노예를 안으로 끌어냈다. 발을 걷고 방으로 들어온 그 노예는 남부인이었는데 어깨까지 닿는 진한 청보라색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앉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들라고 명령했다. 우와, 좋은 거 낚았다.
그는 이목구비가 남자다운 게 꽤 잘생긴 편이었다. 지금까진 미르에게 시달리느라 그냥 지나쳤지만, 그는 늘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정식으로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좋은 수확을 얻은 내가 그를 보며 한동안 감탄하고 있으려니 전에 회의실에 있던 금발머리의 노예가 생각났다.
"있지, 너 궁에 일하는 다른 노예들에 대해서도 알아?"
"네, 대충은……."
"그럼, 엄청 잘생겼고 금발머리에 진한 하늘색 눈을 한 중부인 노예는 알아? 귀에 보라색 귀걸이를 하고 있던."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긍정의 대답을 했다.
"네. 그는 체술 실력이 어느정도 있어서 왕을 호위하는 일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무사로서, 저같은 일노예보다는 한 단계 지위가 높습니다."
어쨌든 노예는 노예라는 거네. 그런데 노예에도 지위가 있다는 얘긴 처음 듣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물었다. 케르타의 노예는 전부 남자인데, 가장 낮은 지위는 막노동을 시키는 노예, 중간계급이 그와 같은 귀족의 잡일이나 요리를 맡는 일노예, 가장 높은 계급은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서 특정한 직책을 맡고 있는, 그 금발 남자같은 노예였다. 성노예같은 건 없을까 물어봤지만, 그는 잘 대답하지 못했다.
케르타 출신의 여자들은 모두 태어났을 때부터 부친 소유의 단순한 가축이나 성노 이상으로는 취급받지 못한다. 단지, 나중에 얼마나 너그러운 주인에게 팔리느냐, 얼마나 지위가 높은 주인을 만나느냐, 그 주인에게 사랑받느냐 하는 것만이 대우가 개선될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단순한 노예로 전락해서, 최악의 경우에는 남자 노예들과 교배를 통해 자손을 늘리는 도구가 되거나 가사노동으로 평생을 지내야 한다.
그렇기에 케르타의 남자들은 전부 내 행동이나 말투에 대해서 경악하거나 신기해하거나 당황했다. 미르는 원래 남부인이 아닌데다가 중부의 생활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사람들은 또 그런 왕의 반응에 대해서도 아연해했다.
일단 일노예보다는 왕의 여자인 내 지위가 좀 더 높아서, 이 노예도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놀라고 있을……, 아니, 잠깐. 내가 왜 왕의 여자야?
나는 제국의 공작이란 말야! 이제와서 공작이랍시고 케르타 귀족들과 지위 따져가며 노닥거릴 생각은 없지만. 실제로 하려고 해도 이렇게 나라 망가뜨려놓고 타국의 공작으로서 그들과 대화하면 난감해지는 건 나였기에 내가 공작이라는 것은 잠시 잊고 살기로 했다.
"그럼 걔 지금 데려올 수 있어?"
"그건 가능합니다만……."
"데려와."
또 그가 말 뒤에 무슨 토를 달려고 하는 것을 알고 나는 곧장 명령했다. 보통때라면 '데려와주겠니?'하고 다정하게 부탁했겠지만, 워낙 군소리가 많아야지. 데려올 수 있으면 데려와. 나 심심하니까. 미르도 이 정도로 노는 건 용서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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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기 애매해서 너무 길게 썼네ㅇㅅㅇ. (결코 좋은거 아닙니다. 비축분 현재 0글자 남았어여.)
솔직히 미르헬 3글자 너무 쓰기 귀찮아염. 세리안은 각각 키가 가까이 붙어 있어서 타자 치기 편하기라도 하지.
그리고 어째서 미르헬을 신상이라고 오해하셨나여! 얘 부인들 많잖아요? 미르헬까지는 사용보장품이고 미르헬 이후부터 대부분 신상입니다. 미르는 키스만 처음이에요.
질문 답 : ㄴㄴ 아닙니다. 재상 두명 결국 쫒겨났어요. 전전편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남들 나갈 때 걔네 둘도 찍 소리 한번 해보고 같이 나갔습니다. 회의실 안에서 벌어진 일은 실피드와 시아와 미르밖에 모름.
갈수록 막장전개지만 전 신경안써요. 이 소설은 원래 이런 막장전개에 하악하시는 분들을 위해 썼으니까요. 선작수 2000대까지 찍었으면 이제 하락하는 일만 남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