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젊은 여공작과 사막의 황제 -->
그 두 여자들의 이름은 각각 셀리, 모이카라고 했다. 아까의 메르아와 같은 방식대로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난 그녀들은 전부 미르헬의 무릎에 앉아 있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 왕인 미르헬에게 밉보이지 않게 표정이나 태도로는 전혀 질투를 내비치지 않았지만,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나는 완전 질투에 찢겨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나, 황제 폐하. 새로운 여자인가요? 하렘에 넣기 전에 먼저 성은을 내리신 모양이네요."
생긋 웃으며 말하는 모이카의 그 말은 '하렘에 들어오기만 해봐, 우리들이 철저하게 신고식을 해 주지'라는 경고로 들렸다. 아니, 다른 여자들도 엄청 많은데 왜 새로 나타난 나에게 이렇게 적의를 보이는 거야? 설마 이 세 명의 왕비들은 다른 수백 명의 여자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괴롭혔던 걸까? 아니지, 그랬다간 괴롭히는 것도 빡셀 텐데. 비록 지위차가 있다지만 수백 대 3이잖아. 하루에 한명씩 괴롭혀도 거의 몇 달이 걸린다.
그렇다면 내가 중부인이라서? 하지만 이곳 하렘은 노예 출신의 타국 여자들도 많았다. 특별히 내가 배척받을 이유는 없다.
현 왕은 초대로서, 모친이 없다. 즉 이 세명이 하렘의 최고 권력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제국 하르아이나에서 사신으로 온 시렌느 공작이었다. 왕비라고 해봤자 고작해야 다른 나라의 후궁 정도의 권력도 가지지 못한 여자에게 무시받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하렘 따위에는 넣지 않아. 함부로 내 종달새 앞에서 입을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미르헬의 묘한 미소와 길게 늘어지는 듯한 경고조 말투에 모이카는 기가 죽어서 도로 입을 다물고 용서를 구했다. 속으로는 내 욕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완전 가시방석이네, 여긴.
하지만 미르헬이 왕이라는 걸 안 이상 더 이상 내 신분을 숨길 이유는 없었다. 나는 미르헬의 무릎에서 내려와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사실 하르아이나 제국에서 온 사절단의 리더인 세이시아 시렌느 공작입니다. 국왕 전하, 오는 길에 뜻하지 못한 사고를 당해 부득이하게 이러한 모습으로 첫 인사를 드리게 된 점은 실례했습니다. 혹시 먼저 도착한 제국 사절단의 일행이 있습니까?"
……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나는 미르헬의 무릎 단계에서 일찍이 제지당해 첫마디도 못 끊고 그대로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미르헬은 양 팔로 나를 꽈아악 껴안고는 내 다리를 매만지며 내려가려는 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안 돼. 바닥은 더러우니까 함부로 돌아다니면 못 써."
은근한 그 어투는 실제 하렘의 홀 바닥이 청결하지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여자들의 시샘으로부터 날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옆에 계속 붙잡아두려는 의미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지만……. 나는 애초에 하렘의 후궁들에게 시샘받아야 할 이유따위는 없는 제국의 고위 관리란 말이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미르헬은 내가 차마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하렘 내의 모든 여자들을 휘 둘러보며 선언했다.
"나의 종달새다. 어때, 아름답지 않은가? 앞으로 내가 가장 총애하는 애완동물로서 궁에서 키울 테니, 이 순간부터 내 애완동물에 조금의 해라도 입히는 자가 있다면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사형으로서 징벌하리라."
"너 뒤질래!!!"
여자들이 웅성거리는 것과 동시에 나는 그 말에 열받아서 바로 미르헬에게 따지듯 소리쳤다. 제정신이야? 감히 사람을 새 취급해?!! 여자들은 미르헬이 내게 대하는 태도에 매우 놀라고, 또 내가 미르헬에게 대하는 태도에 기겁하듯 놀랐다. 미르헬은 꽉 쥔 내 주먹을 양손으로 소중하게 감싸쥐며 부드러운 입술을 살짝 가져다 댔다.
"그래그래, 귀엽기도 하지. 주인님에게 아양떠는 거구나. 예쁜 나의 종달새. 착한 일을 했으니까 상을 주지."
미르헬은 자신의 팔에 끼고 있던 화려한 문양의 팔찌를 벗어서 내 오른팔에 끼웠다. 내 팔목이 더 가늘어서 남자용인 그 팔찌는 헐렁헐렁했지만 묵직한 무게감은 그 팔찌가 진짜 금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화려한 장식들과 섬세한 세공, 적어도 수십 개는 넘는 자잘한 보석들의 반짝임에 내가 감탄하며 헤벌레하고 있는 동안, 미르헬이 나를 안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팔찌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신을 차렸다.
"잠깐, 또 어딜 가는 거야?"
"본궁."
미르헬은 그녀들의 인사도 받지 않고 곧장 하렘을 나왔다. 등 뒤로 따끔따끔한 여자들의 살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제서야 그에게 안아들린 채로 미르헬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본궁이라니, 거긴 또 왜?! 아, 맞다, 너 왕이라며? 이봐? 미르헬!! 내 얘기 좀 들어봐!! 난 노예가 아니라 공……."
"쉬잇. 여기부터는 남자들이 많이 있으니까 함부로 그 예쁜 목소리를 내면 큰일나."
"읍읍! 읍으읍!!!!"
미르헬은 나를 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내 입술을 가볍게 막았다. 나는 그 엄청난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읍읍대기만 했다. 이거 놔! 무슨 입막음이 이렇게 튼튼해?
본궁은 내궁의 하렘이나 왕의 거처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조금 더 실용성을 중점에 두고 체계적으로 건축되어 있었다. 관리들이나 궁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곳곳에 있었는데, 전부 매우 놀랐다는 표정을 짓고 미르헬의 품에 안겨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눈을 비비거나 곧장 고개를 돌리고 죽을 죄를 지었다는 듯 급히 바닥에 엎드리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근처에서 서류 두루마리를 읽던 푸른 색 터번을 두른 한 남부인 남자가 나를 보고 놀라서는 왕에게 묻자 그제서야 미르헬의 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전하! 하렘의 여인을 내궁 밖까지 데려오시다니, 무슨 일이십니까!"
그 젊은 남자는 짙고 푸른 눈동자와 하얀 색에 가까운 은발을 가진 젊은 남자였는데, 허리에 구부러진 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관의 역할도 겸비하는 것 같았다. 선천적으로 골격이 우락부락한 남부인과 달리 꽤 수려한 인상과 조금 날카로운 인상에, 남부인 특유의 갈색 피부와 건장하고 큰 키를 갖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 고위 관료같았다. 옅은 머리색에 구릿빛 피부, 게다가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한 얼굴이 미묘하게 유렌을 연상시켰다. 물론 실제 유렌보다 피부색도 좀더 짙고, 얼굴도 더 날카로운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우리 유렌이 훨씬 더 예쁘고 잘생겼다구! 엘프라서 피부도 곱고 매끈매끈하고, 어려서 솜털밖에 안 나기때문에 감촉도 굉장히 좋다고!!
본궁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미르헬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었기에 나는 그 남자의 복식이나 외모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정세 시간에 배운 케르타의 주요인물 리스트를 다시 떠올렸다.
국왕 라이만 키시이렐, 그리고 서쪽의 재상 하민 마이아르, 동쪽의 재상 길티느 루센. 물론 그 이하의 가신들도 있었지만, 원래 케르타는 가신이나 영지 위주로 운영되는 국가가 아니었다. 일단 부족 통합을 이루었다곤 해도 사막의 오아시스 곳곳에 마을 단위로 부족과 부족장이 있고, 그 모든 부족장의 위에 왕이 있다.
분명 하민 마이아르가 스물 두 살의 나이에 백발과 푸른 눈을 가진 남자였다고 했지. 또다른 재상 길티느 루센은 백발은 백발인데 다른 의미로의 백발이다. 즉, 60살이 넘은 노인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미르헬이라는 이름, 어쩐지 국왕 치고는 처음 듣는 어감이다 했더니, 국왕의 이름은 라이만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르헬은 그럼 뭐지?
미르헬을 다시 슬쩍 바라보니 그는 그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아까 질리도록 했던 말을 반복했다.
"하렘 따위에 들일 여자가 아니야. 이건 내 애완동물이다. 나의 종달새, 이제부터 내가 키울 나의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이야. 처음엔 깃털 색에 반해 데려왔는데, 어때, 이 진주빛 깃털. 아름답지 않은가?"
깃털 아냐, 꽃잎이야! 나를 새 따위에 비교하지 마!! 넌 꽃잎과 깃털도 구분 못해? 눈은 장식으로 달렸냐?
"애완동물이라니, 무슨……."
그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나도 동감이다. 어이 상실이지, 그치? 하지만 미르헬은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싸늘하고 냉랭한 눈빛으로 한순간에 그 남자를 압도했다. 그리고, 매우 강한 어조로 명령했다.
"내가 '애완동물'이라면 '애완동물'이다. 이의라도 있는가?"
"……없습니다."
그 남자는 기세에 밀려 그만 인정해버렸다. 야! 뭐야, 인정해버리면 어떡해, 끝까지 밀어붙여야지!! 미르헬은 그의 인정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다시 표정을 조금 풀며,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들어 봐. 지저귀는 목소리도 얼마나 예쁜지 몰라. 자네에게만 특별히 들려주겠네, 마이아르. 자, 나의 종달새, 한번 소리내 봐."
"싫어."
"음, 역시 언제 들어도 은방울처럼 예쁜 목소리구나. 다시 한번 더 들려줄래?"
"싫어!"
톡톡 쏘아붙이는 내 말에 미르헬은 빙그레 웃으며 내 뺨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재상인 저 하민 마이아르에게 대하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인 분위기였다. 방금 내가 애완동물이라고 협박하듯 폭군처럼 우긴 것과 반대로 지금 나를 바라보는 미르헬의 루비 빛 눈동자는 정말로 녹아내릴 듯이 부드러우면서도 격정에 차 있었다.
"전하께서……, 웃었어?!"
믿을 수 없다는 듯 자그마하게 속삭이는 하민 마이아르의 말에, 나는 그 순간 본능적으로 미르헬이 내 화향에 취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나는 이곳에 와서 한번도 화향으로 매혹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미르헬은 분명 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비정상적일정도로.
그러나 그것이 비록 일순의 변덕이건 진짜 애정이건 지금의 내게는 방해일 뿐이었다. 나는 종달새 따위가 아니라 사신으로 온 여공작이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역시 빨리 내 정체를 밝히고 그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나는 제국에서 사……, 읍."
미르헬은 가볍게 내 입술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자신의 손에 끼여 있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내서 내 검지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사람 말 좀 들어, 인마!!! 미치겠네! 그는 내 말을 도통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다. 미르헬을 제정신이 들게 하는 것.
"주인님께 귀여운 아양을 떨었으니, 상을 줘야겠지? 자, 선물이야."
"전하, 그건 드워프제 반지……. 게다가 그 여, 아니, 종달새의 팔에 있는 건 왕가의 보물이 아닙니까?"
재상 하민 마이아르는 그 꼴을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미르헬을 말리려들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는 그가 끼워주려는 반지를 집어들어 던져버렸다. 드워프제라는데, 나 드워프제 처음 보는데 완전 아까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도도한 말투로 말했다.
"그거 색 맘에 안 들어. 다른 걸로 줘."
내 말이 불러온 파장은 엄청났다. 방 안의 하민에게만. 그는 멍청한 계집이 왕 앞에서 예의없이 군다거나 드워프제 반지의 가치도 모른다며 펄펄 뛰었다. 하지만 미르헬은 싸늘한 눈으로 하민을 노려보았다.
"자네도 참 어리석군. 종달새가 사람의 예절 같은 게 무엇인지 알게 뭔가. 색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것으로 바꿔 줘야겠지. 내 방의 보석상자를 가져오도록. 사랑스러운 나의 종달새, 무엇이 갖고 싶어?"
강적이다;; 옆에 서 있던 노예는 내 행동에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보더니 미르헬이 명령하자 곧장 따랐다. 그가 가져온 보석상자는 굉장히 컸는데, 온갖 금빛에 알록달록한 보물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가 보석상자들을 가져오는 동안에 황제는 궁의 큰 방으로 향했는데 연한 푸른 두건을 두른 노인 하나와, 그 이하의 다른 남자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왕에게 볼일이 있는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도 귀족 회의 비슷한 걸 하나보지? 그들은 왕에게 인사를 하다가 전부 미르헬의 품에 안긴 나를 보고 경악했다. 개중에는 여자를 신성한 본궁 회의실에 들여놓지 말라는 얘기도 들렸고, 미르헬의 의중을 신중하게 묻는 이들도 있었다.
"내 소유의 종달새다."
미르헬은 그 모든 질문에 일관했다. 그리고 자랑도 덧붙였다.
"어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겠지?"
이런 상황을 난생 처음 겪어보는지 귀족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정말 예쁜 종달새라며 왕에게 아부하는 귀족, 진언한답시고 왕의 행동을 지적하며 당장 그 계집을 내쫓으라는 극소수의 귀족, 수긍하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귀족. 물론 저항하는 파는 극히 일부였고, 절대왕권답게 모두들 그냥 입 다물고 왕의 심경만 살폈다. 머릿속으로야 저 놈의 왕이 드디어 노망이 났구나 하고 생각할지언정, 직접 입으로 내어 말하진 못하는 것 같다.
나를 비하하거나 지적하는 말에 미르헬의 심기가 나빠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미르헬은 딱히 그 기분을 행동으로 꺼내 폭정을 취하는 성급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놓고 땡깡을 부렸다.
"나 배고파."
아까 어느정도 과일로 배를 채우고 왔지만, 이미 점심때가 다 지난 시각이었다. 회의를 시작하려는데 미르헬에게 내가 그렇게 보채자, 나이든 재상인 길티느 루센이 왕 옆에서 말했다. 나이 덕인지, 왕 심기 맞추는 데는 도가 튼 것 같았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나를 종달새로 몰아가는 말이라니.
"전하, 그 종달새는 따로 새장에 가두고 모이를 먹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미 국정 회의 시간이 반 시간 넘게 지났습니다만."
새장? 미쳤어? 미르헬이 진짜로 그렇게 할까봐 나는 바로 말을 덧붙였다.
"사과 주스 먹을래. 여기에서."
사과는 대륙 중부에서 매우 흔한 과일이었다. 즉, 남쪽 나라인 이곳에서는 열대과일보다 구하기 힘들다는 의미였다. 희소성이 정 반대라고 할까. 그런 비싼 과일을 먹겠다고 말하자 미르헬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노예에게 명령했다.
"사과 주스를 가져와. 그리고 회의는 여기서 바로 시작하도록 한다. 종달새가 지저귀는 소리 정도가 방해될 리 없겠지, 다들?"
설사 방해되더라도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나는 이 다음에 더 어떻게 하면 미르헬을 짜증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
회의는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일부러 가져온 사과주스를 빨지 않고 다른 걸 요구했다.
"사과주스가 싫어졌어. 역시 딸기주스 마실래. 얼음 넣어서."
내가 일부러 시작부터 한번 변덕으로 분위기 깨 주고, 회의 중에 왕의 노예가 보물상자를 들고 들어와 회의 분위기를 완전 파탄내자 나는 속으로 보란듯이 미소지었다. 흥, 어떠냐. 이래도 내가 귀여운 종달새로 보여?
"전하, 명령하신 보석 상자이옵니다."
갑자기 웬 보석 상자? 고관들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미르헬은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나중에 볼 테니 내려놓고 가. 회의 계속하지."
물론 내가 가만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얼음 딸기 주스를 빨대로 빨면서 미르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지금 바로 줘. 기다리기 싫으니까."
반말에다가 회의의 흐름을 가로막기까지. 그 무례에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려는 귀족이 있었지만 나는 대놓고 혀를 내밀어보였다. 메롱. 종달새가 뭘 알겠어? 안 그래? ㅋㅋㅋ.
정작 무례를 받은 왕은 태연했다. 하긴 고○킥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괴수이니, 이 정도로는 부족하겠지. 오히려 내가 떼쓰자 더욱 기분좋아졌다는 듯 그는 환하게 웃으며 보석상자를 열었다.
"그래, 오래 걸리지도 않는데 지금 주지. 갖고 싶은 걸 골라볼래?"
"녹색 보석이 갖고싶어. 유렌의 눈동자가 매우 아름다운 녹색이거든."
무례와 폐 끼치는 것도 이쯤 되면 슬슬 심기가 불편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점점 더 즐겁다는 얼굴이 되어 가는 미르헬 덕에 나는 살짝 불안해졌다. 그래서 대충 내뱉은 말에 미르헬의 어깨가 순간 흠칫했다. 어라? 역시 다른 남자 얘기가 정답이었나. 나는 이제서야 이 지긋지긋한 종달새 취급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그를 자극하는 말만 골라 했다.
"하지만 은색도 좋아. 세르의 긴 머리카락은 반짝반짝한 은빛이니까. 아아, 말하고 나니까 보고싶어지네. 세르와 유렌 말야. 여기로 오기 전에 둘과 동시에 뜨거운 밤을 보냈는데 엄청 끝내줬다구. 듣고 싶어? 아, 그렇지. 최근에 내 시종이 된 멜과 루이도 꽤 남자답고 근육이 있어 보이던데 이왕 이렇게 될 거 그 둘과도 함께 자볼 걸 그랬나 봐. 아까워라. 근데 말야, 케르타에는 미녀가 많지만 남자들은 영 아닌 것 같아. 여기에 있는 남자들도 그다지 쓸모없어 보이지 않아? 그치만 종종 의외의 미인도 있네. 예를 들어 저기의 하민 군이라던가, 아니면 저 쪽의 금발머리 노예라던가. 어때, 거기 둘, 하룻밤 정도는 허락해 줄테니까 나한테 봉사해보지 않을래? 적어도 이 비실비실해 보이는 국왕보다는 나을 것……, 읍!!"
갑자기 눈 앞이 빨간 색으로 채워진다 했더니, 미르헬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스치듯 흘러내렸다. 너무 자극시켰나. 참을 수 없을 만치 화가 난 듯 나에게 처음으로 그 본성을 내보이는 뜨거운 붉은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덕분에 나에게 지적당해 굉장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금발머리의 노예라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하민의 표정은 미처 보지 못했다. 저런 건방진 계집은 당장 처형시켜야 한다고 외치는 몇몇 귀족들의 화난 외침만큼은 선명히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곧 미르헬의 격정적인 키스에 묻혀버렸다.
===
미르헬은 진성 M일거라고 생각하는 1人.
유렌은 성격상으로 보아 본성은 S이지만 시아 한정으로 M……(응?ㄷㄷ;).
미르헬 맛없다는 분들과 드래곤 많아서 ㄴㄴ 라는 분들도 계시는군요. 사실 이 소설 초기 설정에서 드래곤은 오직 미르헬 혼자였습니다. 하지만 세리안의 호응이 너무 좋아서 그냥 친오빠 대신 드래곤으로 만들었고(세리안은 원래 오빠 엑스트라 보조캐릭), 스토리 진행상 제국의 수호룡 하르아이나라는 드래곤도 나중에 나올예정이 되었습니다(얜 비공략캐).
즉 이 소설의 드래곤은 총 3마리인거지요.
세리안 괜히 드래곤으로 만들었나? 후회중.
곧 시아가 성체가 될텐데 그 이후부터 멍청한 건 약간 개선될듯. 지금까지 썼던 소설 중에서 주인공 멍청하다고 들은 적은 처음이네여ㅜ. 뭐가 문제였더라;;
아, 그리고 진짜 유부남은 공략할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은요. 미르헬은 가짜 유부남이고 본체는 미혼이라 공략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