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젊은 여공작과 사막의 황제 -->
***
빨강…….
반쯤 뜬 눈꺼풀 사이로 사정없이 빨간 색이 찔러들어왔다. 선명한 빨간 색. 영지의 성에 있는 내 방의 캐노피는 자주색에 가까운 짙은 빨강이었지만 햇빛에 비치면 이렇게 선명하고 밝은 빨간 색이 된다. 자연스럽게 저택에 있는 내 방이라고 인식한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반쯤 몸을 틀었을 때 느껴지는 단단한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헤죽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아, 역시 따뜻해.
"유렌……. 지금 몇 시야……?"
약간 낮은 목소리로 조근조근하고 애교있게 속삭이며 몸을 비벼댔다. 늘 함께 자는 것은 대외적으로 친오빠인 세르가 아닌 첩 유렌이었다. 언제나 나보다 늦게 자면서 늘 일찍 일어나는 유렌이 오늘따라 대답이 없자,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아 좀더 몸을 밀착시켰다. 가벼운 천의 느낌이 느껴졌다. 나는 속옷차림으로 맨살인데 유렌은 옷을 입고 있었다. 으음, 언제 입은 거지?
"그럼 나 좀더 잘래잉……. 유렌은 밤마다 나를 너무 괴롭혀대니까……."
그래도 그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며 슬며시 눈을 떴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붉은 천에 금실로 수놓아진 화려한 문양들이었다. 처음 맡아보는 묘한 향기도 났다. 마치 예식용 양초에서 나는 것 같은 생소한 향이었다.
"……유렌?"
팔에 와닿는 머리카락의 느낌으로 봤을 때, 유렌 치고는 머리가 너무 길었다. 유렌은 새의 솜털 같은, 짧고 보드라운 머리칼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근육질의 유렌과 비교해서 미미한 차이였지만, 몸의 라인이 전체적으로 유렌보다는 약간 매끈한 느낌이다.
그럼 설마 세르인 걸까. 어젯밤은 세리안과 함께 잤던가? 그런데, 어젯밤에 내가 어쨌더라…….
"세르……, 도 아니네……. ……그럼 설마……."
나는 어젯밤의 일은커녕, 모래밖에 없던 끝없는 사막과 지금 나의 상황을 기억해내고 잠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결정적으로 눈을 뜬 나에게 보인 것은, 그을린 구릿빛의 건강한 피부가 아니라 여자보다도 더욱 더 곱고 새하얀 피부색과 루비같이 빛나는 붉은 긴 머리카락이었다.
"……;;;;"
나는 지금 어떤 남자의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그 남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매우 좋았던 것 같지만, 지금은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 붉은 긴 머리카락과 피처럼 새빨간 두 눈동자, 게다가 섬세한 외모와는 달리 매우 낮게 흘러나오는 중저음의 목소리는, 내게 매우 생소했다.
"유렌이, 누구지?"
내가 처음으로 본 미르헬의 모습은, 붉은 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화려한 침대에서 술이 가득 달린 쿠션을 등에 받치고 모로 누운, 아찔할 정도로 잘생긴 미모를 가진 적발의 청년이었다. 결이 좋아보이는 적색의 긴 머리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 위에 눈부시게 흘러내려 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보석을 그대로 가늘게 뽑아낸 것처럼 비단실같이 아름다운 그 붉은 색 머리카락은 불꽃이나 피같은 강렬한 감각보다는 잘 세공된 최상급 루비같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어쩌면 여자로 착각할 수도 있을 법한 갸름한 뺨과 섬세하고 오똑한 코, 자두빛의 도톰한 입술, 길고 풍성하면서도 장식처럼 늘어져 있는 속눈썹은 우윳빛처럼 뽀얀 피부색과 너무나 잘 어울려서 크리스털 조각상이나 도자기 인형같기도 했다. 헐렁한 케르타 양식의 주름잡힌 복식을 하고 있어서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까 그에게 달라붙은 적이 있는 나는 그가 확실하게 근육이 잡힌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 몸에 저 얼굴은 버그 아냐?! 투명하고 잡티 하나 없는 흰 피부는 백설공주 못지 않게 비현실적인 인상을 심어주었지만, 선명하게 붉은 머리색과 대조되어서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에로틱한 분위기로 보였다.
그러나 나의 눈에 비친 그의 붉고 투명한 눈동자만은 의혹과 질투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한순간 멍해졌다.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지? 왜 사막 한가운데에 조난당해 있어야 할 내가 이런 시원한 실내에 있는 걸까? 일행에게 구조당했다고 보기에는 장소가 좀 애매한데 말야. 게다가 저 남잔 뭐야? 무슨 왕궁도 아니고, 처음 보는 양식의 장식들이었지만 방 안은 분명 넓고 화려했다.
"유렌이라는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다시 말했다. 나는 재차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 누구?"
"유렌은 네 연인인가? 아니, 그러면 세르라는 건 또 누구지?"
낯선 곳, 낯선 사람을 앞에 두고 그나마 말이라도 통하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대륙 공용어를 쓰는 상대라 다행이지만, 이건 다른 의미로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이다. 왜 기절했다 깨어난 사람한테 애인들의 이름을 묻고 난리야? 나는 황당해져서 그를 쳐다보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내가 말한 두 남성의 이름을 되뇌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여긴 어디죠?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요?"
내가 하도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경계하며 캐묻자 그는 붉은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턱을 괴고 귀찮다는 듯이 짧게 답했다. 제국에서 기사도와 레이디 퍼스트만을 접해왔던 내게 처음 보는 그 남자의 행동은 너무나도 고압적이고 거만한 태도였다.
"난 미르헬. 사막에서 널 주워 온 사람이자 네 주인이다. 그리고 여기는 케르타 왕궁의 내궁이지. 그건 됐으니 아까 한 말이나 대답해. 너, 다른 남자가 있었던 거야?"
케르타 왕궁이라면 나와 내 일행의 목적지가 아니었던가! 다행이다. 나는 그 점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하면 일행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적대국이라도 전쟁을 하고 싶지 않은 이상 타국의 공작을 함부로 대하거나 가두진 않을 것 아닌가. 그보다 이 남자는 케르타의 왕자인가 뭐 그쯤 되는 사람인듯하다. 미르헬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지만, 케르타와 같은 남부 연합국은 대부분이 일부다처제이므로 왕자와 왕녀만 해도 수십 명이라고 들었다.
방안은 처음 보는 케르타풍의 장식 투성이였다. 역시 왕궁이라는 건가. 일단 이 인간은 도무지 내게 협조해 줄 생각이 없어보이니 나가서 실프에게 이 곳에 우리 일행이 왔는지부터 알아봐야겠다.
"어쨌든 구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미르헬 씨. 사례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나는 이불을 걷고 침상 위에서 내려가려다가 멈칫했다. 미르헬이란 이 남자도 내가 전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기색을 안 보이자 일차적으로 묻는 건 포기한 듯 했다. 그가 '하긴, 이제부턴 내거니까 과거는 따질 필요가 없지', 라고 중얼거린 건 못 들은 걸로 하기로 했다. 하지만…….
……왜 내가 속옷 차림이지? 게다가 원래 내가 입고 있던 속옷도 아니다. 이건 분명 케르타의 여성 복식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의복이었다. 겨우 긴 천 한장으로 아래위를 감싼 복장 말이다. 나는 다시 침대로 올라와 급하게 몸에 이불을 감았다. 저, 저녀석, 이래놓고 나랑 같은 침대에 누워있었던 거야?! 이 변태, 저질!!!
"……."
게다가 내 옷은 누가 벗겼어? 다친 것도 아니고 단지 지치고 물이 없어서 기절했던 건데 옷을 벗길 필요가 굳이 있었던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낼 기운도 없어졌다. 내가 의혹에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미르헬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내 시녀들이 너를 씻겼다. 설마 내가 직접 했으리라고 생각한 건가? 옷은 여기서는 더이상 쓸모없을 것 같아 버렸다. 구해준 사례를 한다고 했지? 자, 그럼 이리 와서 몸으로 갚아."
헐렁하게 늘어져 쇄골이 다 보이는 옷차림으로 나른하게 팔을 뻗어 말하는 미르헬의 행동에, 보통 여자라면 그 얼굴에 홀려 품속으로 뛰어들었겠지만 나는 몸부터 사렸다.
"뭐, 뭐라고?! 뭐뭐, 뭘 몸으로 때워? 나 돈 있거든?! 님 나랑 싸울래여?!! 엇, 그러고보니 내 주머니 어딨어??"
충격적인 그의 요청에 나는 반사적으로 반말이 나왔다. 그는 내 말투가 맘에 들지 않는 듯 했다. 그는 침대에 기대 앉아 느긋하고도 느릿한 말투로 천천히 중얼거렸다.
"천박한 말투로군, 너 내가 누군지는 알고 반말하는 건가?"
"너야말로 내가 누군지는 알고 반말하는 거야? 그러고보니 넌 첨부터 말 놨잖아! 내 주머니나 돌려줘!"
나는 분해서 숨을 씩씩거리며 미르헬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존댓말한 거 다 반말로 갚아줄 테다!! 미르헬은 반쯤 뜬 눈으로 옆에 있던 조그만 천 주머니를 나에게 던져주었다. 손을 넣어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돈지갑, 보석들, 옷과 모포, 책 세권까지 다 그대로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그는 주머니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시야에 두고 응시했다.
비록 20대 초반의 외모를 가진 그가 나보다 조금 연상으로 보이긴 했지만, 수개월간 하르아이나 제국에서 능력있고 지위 높은 여공작으로 떠받들여진 나는 나이를 무관하고 눈앞의 건방진 사내 따위에게 무시당하는 걸 참아낼 수 없을 정도로 나름 드높은 프라이드가 세워져 있었다. 흥, 감히 귀족의 프라이드를 무시해? 게다가 그 발언은 뭐야! 하지만 미르헬은 내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고 멋대로 단정지었다.
"너 노예지? 네가 가지고 있던 돈, 한갓 평민이 들고 있기엔 너무 많은 액수더군. 그리고 내가 널 주운 곳은 사막 노예상들의 주요 밀수 루트 근처였다. 그곳에, 타국의 옷차림을 하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사막에 있던 걸 보면……, 넌 분명 노예상에서 금화를 훔쳐 달아난 여자 노예겠지?"
"헉……."
이건 결코 뜨끔해서가 아니다. 하도 혈압이 올라서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오해를 해도 어쩜 저런 오해를 할 수가 있는 거지? 내가 길을 잃고 헤매던 곳이 노예 밀수 루트인지 알게 뭐냐!!! 그거야 라콘 왕국을 거쳐 왔으니 당연히 그쯤이겠지.
내가 어이없어서 잠시 멈칫해있자, 미르헬은 다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뺨을 쓰다듬다가 황홀하다는 듯 말했다. 아까까지의 차가운 태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말투였다.
"안심해. 처음에 주웠을 때는 네 머리카락만 가지고 나머진 버리려고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어. 너같이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이야. 아까까지 잠들어 있는 모습만 몇 시간을 줄곧 바라보았는데도 조금도 질리지 않았어. 평생 내가 잘 키워줄게. 내 말만 잘 들으면 말야."
"난 노예가 아냐."
나는 미르헬의 손을 쳐내고 외쳤다. 그는 내 반항에 미간을 조금 찌푸렸지만 그래도 곧 생긋 웃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우후후, 넌 앙탈부리는 것도 귀엽군. 하지만 소용없어, 케르타의 법에 따르면 일단 노예인장이 찍히면 그 과거가 어찌됐던 그는 노예다. 네 몸에는 아직 노예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것 같지만 타국에서 납치당했다고 해도 이미 돌아갈 수 없으니 역시나 여기서 노예로서 살수밖에 없지."
뭐야, 그 어이없는 법은?! 난 엄연히 제국의 귀족이란 말야, 하르아이나 제국에선 노예가 불법이었기에, 노예라는 말도 안 되는 발언에 나는 어이가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르헬은 흥,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제국 출신이었나. 하긴, 그렇다면 계집 주제에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네가 지금 혼자서 거기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여기 분명……."
……내 일행이 도착해 있을 텐데. 하지만 만약 그들이 전부 전멸했다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게다가 눈앞의 이 미르헬이라는 남자가 혹시나 반 제국파의 왕자 중 하나라면 내가 사신이란 걸 알게 된 순간 나를 죽일지도 몰랐다. 아니지, 죽는 거야 상관없었다. 정령이니까 육체의 소멸이 정신체까지 영향을 주진 않는다. 대신 성체가 될 때까지 다른 몸에서 지내야겠지만.
문제는 그들이 나를 산 채로 인질로 잡거나, 다른 용도로 이용하게 될 경우이다.
자칫 제국과 케르타가 전쟁이 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정체도 모르는 미르헬에게 내 신분을 밝히기 망설여졌다. 내 정체를 말하려면 최소한 이곳의 국왕 정도는 직접 만나야 할 것이다.
미르헬은 옆에 누워서 내 표정을 빤히 감상하다가, 내가 말을 끊자 아쉽다는 듯 보챘다.
"뭐야? 계속 말해봐. 지저귀는 소리를 좀더 듣고 싶단 말야."
"……내용은 안 듣고 있었냐."
이 멍청해 보이는 남자의 정체는 젊은 왕자 정도 되겠지. 왕궁에 이런 방을 갖고 있을 정도라면 말야. 일단 여길 빠져나가서 일행의 생사 여부를 알아내거나 혼자라도 제국으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다. 나는 갑자기 힘이 쭉 빠져서 다시 침대 위로 엎어졌다. 깨어나서 안 거지만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은 어지럼증이 계속 느껴졌다. 설마 햇빛 하나 안 들어오는 이 방에 쭉 있었던 건가? 밖의 햇볕이 따가워서 사막의 황궁은 통풍과 차광이 잘 되는 재질로 만든다고는 하지만 나는 따가울지언정 햇볕과 물이 필요했다.
미르헬은 내가 갑자기 기운이 빠져서 드러눕자, 그 모습마저도 재밌다는 듯이 빤히 바라보다가 문 밖에 서 있을 시종을 향해서 소리쳤다. 그 목소리만큼은 이상하게도 아까까지와 달리 감정 한오라기 섞여 있지 않아 냉랭하면서도 굵고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아까 말한 대로 식사 준비를 해오도록. 최대한 빨리!"
기세로는 꼭 무슨 황제라도 되는 것처럼 말할 수 있으면서, 왜 나한테는 전혀 딴판으로 굴었지? 저 녀석 혹시 이중인격 아닌가 고민하는 내게 미르헬이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리고 혹시 좋아하는 먹이라도 있어, 나의 귀염둥이 종달새?"
나는 그의 새 취급이 기분나빴지만 밥을 준다니 냅다 말했다.
"과일."
"그래, 과일. 과일을 많이 가져와. 궁에 있는 종류를 모조리."
그 말을 듣고 문 밖의 시종은 아무런 이의 없이 시키는 대로 행했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곧장 들여오는 엄청난 양의 식사와 디저트에 경악했다.
……어째서 제국의 황궁보다도 더 호화로울 수 있는 거지? 사실 우리 제국 황성이 조금 덜 화려한 대신 격조 높고 웅장한 편이긴 하지만, 이 곳 케르타는 궁과 서민들의 생활격차가 너무나도 컸다. 그렇기에 국력은 제국보다 좀 딸리지만 궁만큼은 엄청나게 호화로웠던 것이다.
나는 지금껏 이렇게까지 많은 음식이 한 명만을 위해 차려진 것은 처음 본다. 이건 호화를 떠나서 완전히 낭비였다.
"이렇게 많이는 못 먹는데……."
내가 이불로 속옷차림의 몸을 감싸쥐고 자그마한 소리로 그렇게 한마디 하자, 미르헬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먹고 싶은 만큼만 먹고, 또 먹으면 돼.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에게 하는 대우로는 이 정도가 당연하지."
음식을 날라온 사람은 붉은 색의 쉬폰으로 만들어진 짧고 야한 복장을 한 여자들이었다. 투명한 우유빛 피부의 미르헬만 봐서 몰랐는데, 그녀들은 죄다 케르타인, 즉 남부인의 특색을 그대로 가진 갈색 피부와 조그만 체구에 붉은 기 도는 진한 갈색이나 은색 머리카락의 인종이었다.
하지만 나는 별거 아닌 시녀들보다 그녀들이 가져오는 처음 보는 온갖 열대과일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미르헬이 보고 있는 것조차 잊고 정신없이 과일을 입에 넣고있다보니 어느새 한 접시의 절반이 줄었다. 어느 정도 배고픔이 가시자 잠시 손을 놓고 있다가, 껍질을 벗긴 미끌미끌한 붉은 색 과일을 집어들고 옆에 있던 미르헬에게 다가갔다. 과일 이름은 모르지만 달콤하고 수분이 많은 게 먹을 만 했다.
"자."
짧은 말이었지만, 아까부터 내가 먹는 것만 계속 보고 있어서 얘도 먹고싶은 게 아닐까 생각한 나는 특별히 호의를 보여 미르헬에게 과일을 건네주었다. 미르헬은 내가 주는 과일조각에 조금 당황하더니 곧 울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과일을 받아먹었다. 물기어린 그의 붉은 눈동자로 보아 내 행동에 격렬한 감동을 받은 듯 했다. 가만히 내 손을 쥐고 과일을 문 채 과즙이 묻은 나의 손가락을 붉은 혀를 내밀어 하나하나 세심하게 핥고 있는 모습이, 꽤 귀여운 것 같다고 순간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생각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이었는지 금방 깨달았다. 그야말로, 쥐가 고양이 보고 귀엽다고 느낀 격이었던 것이다.
그는 씹지도 않고 덥석 과일을 삼킨 후 으스러질듯 강하게 날 껴안았다. 나는 갑자기 예고도 없이 그가 습격해오자 비명을 지으며 악악 거렸지만 미르헬은 너무 좋아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너, 너, 너는, 어, 어, 어쩌면 이렇게 이쁜 짓만 하는 거야? 나한테도 그걸 먹여주고 싶었던거야? 응? 응? 응? 아, 예쁘고 귀엽게 생긴 것만 아니라 하는 짓도 너무 깜찍해서 그냥 한 입에 물어 터뜨려버리고 싶네, 자, 다시한번 해봐!!"
"읍! 읍! 읍읍읍!!"
두 번 다시 내가 너한테 먹으라고 과일 주나봐라! 무거워! 이거 놔!!! 진짜 톡 터뜨려 죽일 셈이냐?!!
있는 힘껏 팔을 휘저으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반항했지만, 이 녀석, 예쁜 얼굴과 달리 팔 힘이 거의 괴수라고 불릴 정도로 센 것이다. 질식하기 일보직전에 미르헬은 팔을 풀고서 이번엔 뺨에 쪽쪽쪽쪽쪽 정신없이 키스했다. 기뻐 죽겠다는 행동이었다. 내 양 뺨을 손으로 쥐고 바로 내 얼굴 앞에서 나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요구했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뺨으로 들떠서 소리쳤다.
"다시해봐, 응? 아까 나한테 애교부렸던것처럼 그런 말투로!"
"애아 어에 어아에 애어어어얽!(내가 언제 너한테 애교부렸어?!) ……볼 잡아당기지마!!!"
내가 그 새를 못 참고 곧장 뺨을 잡아당기는 그의 손을 소리내서 쳐내며, 크게 빽 소리질렀지만 미르헬에겐 별로 크게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헤죽 웃으며 다시 내 어깨를 꼬옥 껴안았다. 이전처럼 숨쉬지도 못하게 세게 안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손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고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내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아까, 잠에서 덜 깼을 때, 더 자게 해달라고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잖아? 나 그때 심장이 멈출 뻔했어, 그래, 네가 그 유렌인지 하는 남자이름만 말하지 않았어도 분명 심장이 쾅 하고 멎어버렸을거야. 네가 너무 귀여워서."
그건 유렌으로 착각해서 그런 거지, 미르헬한테 한 게 아니었다. 라기보다, 내 몸 더듬지 마! 아무리 그가 내 목숨을 구해줬다고 해도 이런 짓까지 웃으며 허락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미르헬은 내 맨등을 더듬으면서 손가락을 가볍게 흠칫거리며 떨었다. 내 귓가에 딱 붙어서 뺨을 부비며 참기 어려운듯 속삭였다.
"후……, 네 속살은 감촉이 굉장히 좋구나. 귀여워귀여워. 나의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예쁘고 귀여운 종달새. 게다가 굉장히 좋은 향기도 나네. ……그치만 지금은 참아야겠지? 으응?"
맛있는 건 아껴먹어야 하니까, 라며 그가 아찔할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나는 미르헬의 어깨를 확 밀쳐내고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변태자식! 저질!! 만지지 말고 빨리 내 옷이나 줘!! 내 속옷은 어쨌어? 이런 불편한 속옷 말고 내 속옷을 내놔!!"
내 손에 거의 맞듯이 밀려난 미르헬은 아프지도 않은지 피식 웃으면서 다시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버렸다고 했잖아? 대신에 다른 좋은 옷을 수백 벌 줄수 있어. 아니, 수천 벌 넘게 줄게. 자, 일단 이걸 입어봐."
그렇게 말한 미르헬이 옆에 개어져 있던 하얀색의 천조각을 건넸다. 얼결에 받아들어 펼쳐보니 재질은 마치 견사로 짠 듯이 매우 가볍고 촘촘했지만 쉬폰처럼 약간 까칠까칠해 피부에 바로 달라붙지 않아 시원해 보였다. 반투명한 것과 불투명한 재질이 기묘한 형태로 섞여있었는데 결정적으로 이게 뭔지 모르겠다는 거다.
분명 미르헬이 하고 있는 금빛의 장식처럼 생긴 게 은색으로 달려있는 걸로 봐서, 사람이 입는 옷 같은데?
그런데 난 케르타 복식을 어떻게 입는 것인지 모른다. 미르헬은 기대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잘 어울릴 거야. 네가 자고 있을 때 내가 세 시간이나 고심해서 고른거라구. 나중에 좀더 좋은 옷을 선물해줄테지만, 그때까진 이걸 입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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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의 덧글 1000개는 농담이었습니다. 그래도 덧글 많이 달리니 좋네염ㅋㅋ. 실제로 그 편에 달린 댓글수는 225개였습니다.(아래 '연재목록'을 클릭하면 총 덧글수를 알수있습니다) 하지만 1000개는 과욕이라던가 이왕 쉬는거 영원히 쉬라던가 님은 흑설탕 혹은 각설탕이라던가 최면을 건다던가 하는 분들도 계시네요ㅠㅠ. 진짜로 1000개를 기대하진 않았어요, 진짜에요ㄷㄷㄷㄷ. 어젠 예정에 없던 친척집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 집에 오니 거의 12시;;; 그래서 오늘아침에 일어나자마자(응?) 올리는거에요.
이번엔 추천 1000번으로 해볼까요?(헐?)
비축분이 아주 약간이지만 쌓여있습니다. 오늘내로 추천 1000번 넘으면 연참 올릴게요. 진짜임. 원래는 어제 토요일날 추천대비 연참작전을 펼치려고 했지만 친척집 다녀오느라;;
지금 미르헬과의 실랑이를 쓰고 있는데……. 미르헬 쓰면 쓸수록 벗어날 수 없는 심각한 변태가 되어가는군요. 거시기를 쳐맞고 웃질 않나. 어떻게 수습하지……;;;
한 가지 희망을 드리자면 얜 그냥 멍청한 척만 할 뿐 실제로는 영악합니다. 어쩌면 이미 시아의 정체를 다 알고 저러는 걸지도…….
포인트를 짚고 넘어가자면 미르헬은 자꾸 케르타를 '제국'으로 말하고 있고, 시아는 '왕국'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데서 기싸움을 하는군요, 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