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인연 -->
"!!!"
순간 그의 돌발행동에 파티장은 소란스러워졌다. 여제의 진상품을 함부로 마시다니, 게다가 그 순간에 하필이면 독이 든 와인을 스스로 마셔버리다니. 나는 다른 사람들과 약간 다른 의미로 당황했다. 하지만 곧 독 때문에 피를 토하고 쓰러질 거라고 생각한 내 예상과 다르게 그는 매우 멀쩡한 얼굴로 서 있었다. 다만, 미간을 약간 찌푸렸을 뿐이다. 그리고 2/3정도 남은 와인이 담긴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원샷하길래 전부 마신 줄 알았는데 한모금 정도 맛만 본 것 같았다.
역시 소드 마스터라 독을 마셔도 안 죽는 건가? 혹시 남들에 비해 늦게 독이 퍼지는 것일수도 있어. 잠깐, 그러면 이거 내가 살해용의자로 지목되는 것 아냐? 저 남자는 나한테 원한(?)이 있으니까, 날 잡아들일지도 몰라.
항상 무표정하던 얼굴의 대공이 드물게 이마를 찌푸리자, 모든 귀족들이 긴장상태에 빠졌다. 화난 듯한 그의 표정은 흑의 대공가 문장에 그려진 위압적이고 사나운 사자같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그의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파티장 안에 울렸다.
"……쓰군."
헐.
한참 미간에 있는대로 주름을 잡던 그가 겨우 한 마디 꺼낸 말에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그럼 술이 쓰지 안 쓰겠냐? 설마 술맛이 써서 인상쓴 거야?
그리고 흑의 대공은, 나랑 똑같이 그의 발언에 어이가 없어하는 듯한 여제 앞에서 조용하지만 큰 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독이 들었습니다. 이 술을 진상한 귀족들과 관련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조사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바로 독의 효력과 성분에 대해 검사해봐야겠으니 황실 마법사와 약사를 호출하십시오."
여제에게 명령하는 듯한 말투였으나 곧 여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하인들에게 상세히 명령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독살 미수 사건으로 갑자기 파티장 내는 소란스러워졌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따로 없다. 하지만 곧장 이어지는 살기 가득한 대공의 목소리에 모든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무의미한 소란을 피우지 말고 조용히 하십시오! 오늘 연회는 이것으로 끝내겠으니 관계자들을 제외하고 모두 돌아가시오. ……그리고, 감히 내 앞에서 황제 폐하께 이런 짓을 벌인 자, 반드시 목숨으로서 단죄할 것임을, 분명히 기억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매우 위압적이고 권위적인 어조로 하는 존댓말은, 분명 존댓말인데도 존대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공격성 가득한 오만한 눈빛을 하고 있다면 말이다.
가까이에서 다시 본 그 남자는 여러모로 꺼리고 싶어지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자리에서 몰래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며 몇 발짝씩 뒤로 물러났지만, 갑자기 흑의 대공은 정확히 나를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잠깐 저를 좀 따라오시겠습니까?"
그대라니, 그거……, 설마 나?
나는 주위를 휙 둘러보았지만 대공의 시선 아래에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헐. 따라오라니, 뜬금없이 1대1 면담을 요구하는 흑의 대공과 눈을 마주치고, 다시 멀찍이 뒤에 서 있는 세리안과 유렌과 시선을 마주쳤다.
'잉잉 도와줘어!'
나의 호소력이 가득 담긴 눈빛에 그 둘은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유렌은 곧장 그 남자에게서 나를 보호하듯이 감쌌고, 세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공에게 직접 말했다.
"같이 가도 괜찮겠지요? 친오빠 되는 사람입니다. 애가 너무 예뻐서 남자랑 단둘이 보내긴 걱정되거든요."
능청스러운 세리안의 말에, 대공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친오빠? 상관없습니다만……. 단 둘은 아닙니다."
그의 말대로 그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황궁 본관의 커다란 방이었는데, 응접실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방 안에는 여제를 비롯해서 검사관들과 마법사 로브를 입은 노인 등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확실히 단 둘은 아니었다. 방안에는 혐의자를 잡아들이라는 둥 무슨 독이냐는 둥 매우 분주하고 복잡해 보였다.
검사관 중 하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놓여 있는 나를 보고 웬 여자냐며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가 내가 독이 들어있는 와인에 대해 눈치챘다고 말하자마자 그들은 나를 수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긴, 어쩌면 내가 가장 수상할지도 모른다. 독이 들어있는 것을 만져보지도 않고 먹어보지도 않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어떻게 알 수 있었냐는 것이다. 그 독을 넣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흥, 나는 정령사니까요."
라고 뻥을 쳤지만, 다들 못 믿는 눈치였다. 이런 의심은 마법사 중 하나가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물의 정령사라고 판단을 내린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정령사가 맞군. 물과 바람의 정령……, 급수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저 영애와 저쪽의 청년이 정령사인 것 같은데."
나는 물론이고 유렌까지 집어내어 말하는 그의 말에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공작인 걸 모르고 영애라고 칭했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물의 정령사라고 그가 착각한 것은 아무래도 내가 강력한 정령사인 유렌과 찰싹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어쨌든 정령사는 꽤 드물었으니까,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울수도 있겠군.
대공은 검사관과 약사, 그리고 마법사들에게 독이 든 와인을 주고 당장 검사해오라고 돌려보냈다. 나는 마법사를 힐끔거렸지만 마법사들은 황제 독살이라는 말에 당황하고 분노해서 내 쪽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약사와 검사관들은 대공과 황제에게 고개를 깊게 숙이고 와인을 받아 나갔다. 그리고 방 안에 나와 대공, 세리안, 유렌, 여제만 남게 되자 잔 속에 남아있는 와인을 들고 대공은 죽일 듯 노려보았다.
"어째서."
조용한 방에 낮게 분노한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검은 머리의 장신의 청년은 그 와인잔에 화를 터뜨렸다.
"……어째서, 하필이면 누가 더럽게 맛없는 술 따위에다 독약을 탄거지? 덕분에 내가 알콜에 입을 대야 했잖아!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음주가무를 함부로 즐기지 않겠다고 그 분과 약속했는데!"
"……."
나는 방금까지만 해도 냉정한 얼음 조각같았던 그 남자가 투덜거리며 불평하는 말에 당황했다. 그럼 술이 맛없어서 화난거였어? 독 때문이 아니라?
"이트리샤 공께서는 술을 마시지 못하니, 설마 당신이 그 와인을 마시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을테죠. 어쨌든 큰일날 뻔 했군요. 마법 식기에도 반응하지 않는 독이라니."
여제는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그 말로, 나는 파티장의 모든 식기가 독을 탐지하는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뒤에서 백의 대공, 제이란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40대의 외모에 맞지 않게 당황해서는 허우적거렸다.
"레이나, 괜찮습니까? 갑자기 독살이라니……! 범인은 잡혔습니까?! 독 마신 것 아니죠?"
헐레벌떡 뛰어온 것이, 소식을 듣자마자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았다. 다급함과 걱정이 가득한 제이란의 말에는 흑의 대공이 대답했다. 실제 나이는 흑의 대공이 더 많겠지만, 겉보기로는 20대 청년이 40대의 아저씨에게 말 까는 패륜적인 상황으로밖에 안 보였다.
"범인은 아직이야. 독을 고르는 수법이며,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해 온 것 같군. 분명 지금 잡아들인 관련인들은 아무것도 모를 확률이 높아. 심문해도 그다지 소용은 없겠지. 하지만 일단은 독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야. 처음 보는 새로운 독인데, 소량으로도 즉사할 만큼 강한 독인데도 먹어보지 않으면 들었는지 아닌지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야."
그런데 나는 그걸 먹고 어떻게 살아났는지 일단 저 남자한테 묻고 싶었다. 미심쩍다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흑의 대공의 옆모습만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는 갑자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술에 독이 들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할 뻔 했습니다. 그대는 황제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니, 사례는 충분하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저 말고 황제 폐하가."
어차피 내가 죽을뻔한 것도 아닌데 뭐 ㅇㅇ 라면서 황제에게로 보답을 죄다 떠넘기는 그의 말에 여제 레이나는 황당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지만, 늘 있는 상황인지 금세 넘겨버렸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내게 감사인사를 했다. 나는 얼결에 꾸벅 답했다. 뭐어, 독의 정체를 안다고 혐의자로 몰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감사한데, 사례씩이나 할 것까지야.
"원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시렌느 공작?"
역시 여제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정령사라는 것을 알고 더 기뻐보였다. 제국에 능력있는 인재가 하나 더 늘어났으니 그렇겠지. 보통은 이럴 때 영지를 요구하거나 세금 감면, 포상금 등의 보답을 원하겠지만, 나는 미처 그런 생각은 못했다. 그런 나를 보고 여제는 직접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다는 의미로 알아듣고는 자기가 알아서 나에 대한 사례를 정했다. 내 생각보다 훨씬 과분하도록.
나중에 시종을 통해 전해주겠다며 갑자기 어마어마한 상금을 받아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흑의 대공은 계산 끝났으면 가보라는 듯이 눈짓했다. 하지만 여제는 나에게 정령사 자격증이 있냐고 물었다. 마법사임을 증명하는 마탑의 신분패처럼 정령사도 마탑에서 등급과 신분을 의미하는 패를 지급하고 있었다. 물론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자일 경우만. 그 패를 가진 사람은 신분이 증명되는 것은 물론, 국가 소유 시설의 할인이나 무료이용이 가능하고 일부 세금감면의 혜택까지 있다고 한다. 일자리를 구하는 데나 마탑에 입장하는 데도 쓰이긴 하지만 내가 그런 데 정령사패를 쓸 일은 없으니까 뭐.
그녀는 독을 멀리서 감별할 수 있을 실력자라면 틀림없이 고위 물의 정령사일거라며 내게 마탑에 대한 추천증을 써주고 황실 정령사에도 들여보내주겠다고 제안했다. 물론 내가 그녀의 목숨을 구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하겠지. 하지만 실수로 정령사가 아니란 걸 들키면 어떡해? 그런 호의를 받아들일까 말까 곤란해하고 있던 도중, 흑의 대공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여제에게 충고했다.
"황제 폐하, 그만두십시오. 과한 성의는 오히려 예의가 아닙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니, 그만 돌려보내십시오."
내가 눈이 동그래져서 흑의 대공을 바라보았지만 여제는 오히려 소녀같은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여제는 그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황궁에 잠시 머물지 않겠느냐고 내게 제안했다.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세리안은 정중히 거절을 표했다. 그 순간 종이에 펜으로 정신없이 무슨 마법진을 그리던 흑의 대공이 갑자기 룬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마법진 위에 남은 와인을 따르며 입 속으로 주문을 외우는 그를, 나는 놀라서 바라보았다. 저거 마법 아냐? 흑의 대공은 분명 이름난 검사로 알고 있는데, 마법도 쓰는 건가? 갑자기 약한 바람이 사방에 몰아치더니, 이질적인 기운이 마법진을 중심으로 방 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사라진 와인 자국 위에 하얀 가루가 남았고, 그 위에는 지렁이같은 글씨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 글씨를 뚫어지게 보던 대공은, 조용히 알아낸 사실을 읊기 시작했다.
"극미량의 히키르군요. 히키르 잎은 매우 강한 독약을 가지고 다닐 때 중화제 역할을 합니다. 약을 섞는 도중에 섞여들어갔을 겁니다. ……하지만 정작 독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 천연성분같은데, 합성독이 아니고서야 마법에 반응도 하지 않고 이만큼 강한 독성을 갖고 있다니."
그렇게 말하며 와인이 날아가고 하얀 가루만 남은 독성분을 조금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자기 입으로 강한 독이라고 말하면서 그 독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먹다니, 저 인간의 신체구조가 이상한 거야 머리가 이상한 거야?
"……그렇게 먹어도 괜찮아요?"
그 무식한 짓을 보다 못해 내가 묻자, 그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괜찮습니다. 술 성분은 전부 날려보내서 별로 쓰지 않으니까."
……누가 당신 혀 괜찮냐고 물었냐?
나는 그 독의 성분을 대공에게 말해줘야만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고대어로 적힌 책에서나 나올 정도라면 알아내기 어려울 텐데. 하지만 괜히 말했다가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며 오해하면 어쩌지? 하지만 구성성분을 도무지 알아낼 수 없었는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마법진 앞에서 고뇌하고 있던 대공을 보고 나는 이것이 천 년에 한번 있을까말까 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불러 단둘이 옆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잠갔다. 흑의 대공은 갑자기 내가 독대를 청하자 의아해하면서도 곧 따라들어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음침하도록 어두운 옆방에서 그에게 넌지시 제의했다.
"내가 그 독의 이름과 정체를 알려주면, 내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주겠어요? 황제 폐하가 아니라 당신에게 하는 부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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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 님께서 정치적 밀거래 스킬을 습득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지루하실듯 해서 최대한 생략하고 적었습니다ㅠ 그래서 좀 이상함; 나중에 제정신일 때 조금 수정하겠습니다. 시아의 정치적 인지도가 높아지고 미르헬을 만나게 되는 다음 챕터로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장면이라 넣었습니다만……. 정치 얘긴 역시 어렵군요;
그리고 강간이 아니에요! 제가 강간을 적을 리가 없잖아염;;; 그냥 강제로 하는 겁니다. 헐, 그게 강간인가? 하지만 미묘하게 달라요.
세리안 공략할때도, 시아가 싫다는데 세리안이 처음에 강제로 한것이나 그런 거랑 내용이 비슷할겁니다, 아마. 미르헬은 좀 제멋대로캐릭이라 억지로 하게 될수도 있겠군요. 제가 전에 설정상 적어놓은 내용에서는 미수로 그치지만, 실제로 하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참고로 흑의 대공(이름:레이니안 이트리샤)은 초 개사기급 인물입니다. 그랜드 소드마스터에 현재 7클래스 마스터의 마법사로서 세간에서는 최강의 마검사로 알려져있음 ㅇㅇ 인간 맞아여. 시아 입장에서는 퀘스트를 주는 NPC비슷한 인물이지요. 이제부터 얘가 시아에게 서브 퀘스트를 두세 개 정도 줄거에요. 더럽고 치사해도 유저는 그 퀘스트를 클리어해야만 합니다.
p.s. 블로그 서이추는 기본멘트 하시면 안됩니다! 거절당합니다. '조아라'에서 왔다고 그냥 한마디만 적어주시면 허락해드리지만, 기본멘트를 쓰면 그냥 검색하다 장난으로 서이추한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 거절할수밖에 없습니다;;;;
아 그리고 서이추 굳이 안하셔도 되요. 꼭 필요하다면 이웃추가만으로 충분합니다.
쪽지답변 : 네 거미는 곤충이 아니죠 ㄷㄷㄷ;; 잠시 헷갈렸네여. 그래도 징그럽다는 점에서 시아가 무서워할 만함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