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47화 (47/226)

<-- 4. 인연 -->

***

"기다려."

파티 홀 앞문으로 뛰쳐나오던 나를 낮고 밋밋한 그 한 마디로 불러세운 것은, 뜻밖에도 엘릭이었다. 나는 멈칫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모습을 보아하니 일부러 나를 만나기 위해 문으로 따라나온 듯 했다. 그렇다면 아까 그 모습도 다 봤단 말인데…….

에잇, 어차피 난 처음 본 사람인데 뭘 신경써. 그냥 봤으면 본 거지! 하고 시원스레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남자의 흉흉한 눈빛에 살짝 쫄았기 때문일까. 엘릭은, 세이시아의 소꿉친구라고 했었나? 이건 소꿉친구를 보는 눈빛이 아니잖아!! 철천지 원수를 보는 눈빛도 이것보단 부드럽겠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격하게 궁금해졌다.

"레이몬드……, 자작?"

"할 얘기가 있어, 따라와."

의아한 내 물음에 무엇이 불만이었는지, 엘릭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다짜고짜 턱짓을 해 뒤쪽을 가리켰다. 황궁의 정원 뒷뜰로 가자는 의미일까? 그는 따라오는 내내 내게 가까이 오지도 않고 내 몸에 닿으려 하지도 않았다. 우와, 날 정말 싫어하는구나. 이제 정원으로 가면 검을 휘두르려나? 나는 앞서가는 엘릭의 제복 차림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넓은 등은 유렌의 크고 높은 근육질의 등처럼 남자다운 맛은 적었지만 단단히 근육이 잡혀 있었고 반듯해 보이는 게 꽤 멋있었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걷고 있다가, 정원의 인적 드문 곳에서 그가 딱 멈춰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말해."

"……뭘요?"

아까부터 이 남자가 나랑 뭘 하자는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던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쭉 반말이었다. 보는 사람 없다고 그렇게 반말해도 되는 거야? 하지만 어릴 때 친구였다고 하니, 사적인 자리에서 서로 반말하는 것 정도는 당연하다고 치자. 그런데 명령조로 따라오라거나, 죽일 듯 노려보거나, 내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야?

"세리안과 너는 사이가 나빴으니 내가 청혼한다면 너는 틀림없이 내 밑으로 들어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약속이 틀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청혼을 거절한 거지? 무슨 수를 써서 세리안을 유혹한 거지? 게다가, 너와 함께 있던 그 남자는 뭐지?"

세이시아와 이 남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한데,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약속이라니? 그래서 순순히 따라온 거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따라올 걸 그랬나보다. 엘릭은 아무래도 나를 죽일 생각인 것 같다. 여기서 벽에 밀어붙여진 후 고백을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검을 빼들 것 까지는 없잖아?

황궁 무도회에서는 무기반입이 엄격히 금지된다. 그렇지만 기사제복을 입고 공식으로 참가해야 하는 행사가 있었기에 제복 차림의 엘릭의 허리춤에는 의장용 검이 걸려 있었다. 날이 서있지 않은 의장용 검이지만, 엘릭 정도의 검사라면 이 정도로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식사용 나이프로도 나무 한 채를 벨 수 있는데, 하물며 장검의 형상을 한 물체로 무엇인들 못 베겠는가.

"검을 배웠던 너라면 알겠지, 이 철덩어리가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가졌는지. 빨리 말해. 약속은 어떻게 된 거지?"

"난 검을 배운 적이 없는데요. 게다가 약속이라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릭을 마주보았다. 엘릭에게 반말을 했을 보이시하고 터프한 세이시아는 더 이상 없다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 일부러 여성스러운 존댓말을 사용했다. 게다가 검이라니, 무슨 헛소리야. 그 뭉툭한 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유렌이 가르쳐 줘서 아는 것 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세이시아는 검술을 배웠다고 했나? 하지만 그 말에 엘릭은 더더욱 분노했다. 하지만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잠시 숨을 고른 후 내게 확인했다.

"……역시, 기억을 잃은 건가? 전부?"

"나는……."

"그렇다면, 내 왼쪽 눈에 대한 대가는, 네 목숨으로 갚아야겠군."

갑자기 얘 왜이래!! 나는 순전히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고, 그 위를 간발의 차로 엘릭의 검이 스쳐지나갔다. 삐져나온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역시 날카롭다. 우와, 나 방금 벌레가 될 뻔 한거야?!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아니,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두근거렸다. 눈 앞에 자길 죽이려고 검을 휘두르는 남자가 있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곳에 오고부터는 전혀 쓴 일이 없는 바람의 정령력을 반사적으로 사용했다. 망설임 없이 두 번째로 내리친 엘릭의 강한 일격이 바람의 방어벽에 막혀버렸다. 역시 힘이 늘긴 늘었구나, 겨우 눈에 먼지를 들어가게 해서 잠깐 상대가 멈칫할 정도의 바람이, 철로 된 검까지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다니.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히자, 엘릭은 조금 침착함을 찾고는 다시 멀리서 나를 보며 공격자세를 잡았다.

"……뭐지? 마법은 아닌데, 물질도 아니었어."

바람으로 벽을 만들어본 것은 처음이라, 이미 방어벽은 엘릭의 일격을 막고 사라졌지만 벽이 투명했기에 그는 모르는 듯 했다. 그 다음에 곧장 엘릭이 망설임 없이 검을 찔러넣었다면 나는 그대로 맞았을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제대로 튼튼한 바람의 막으로 구형의 벽을 만들어냈다. 굴곡 없는 편안한 인생일거라 생각했는데 내 오산이었다. 이럴 때에 목숨의 위협을 받다니. 집에 가자마자 정령력을 다루는 연습이라도 해야겠다. 서투르지만 벽을 전부 구성했을 때, 엘릭이 두 번째로 검을 날렸다.

"그렇다면 정령이겠군. 흥, 내가 정령과 상극이란 것은 기억하고 있었나 보군."

인간은 정령과 상극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의 미묘한 말에 의문을 표하기 전에, 그런 기억이 있었으면 애초에 널 따라오지도 않았어! 나랑 상극인 남자가 뭐가 좋겠냐!

나는 그의 공격에도 움찔하지 않았다. 바람으로 검 정도는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미미하지만, 그의 공격을 한번씩 막아낼 때마다 내 몸 안의 마나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금껏 잘 느낄 수 없었지만 이렇게 한움큼씩 빠져나가니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아연해져서 잘 보니, 그의 검은 보통의 검이 아니었다. 유렌의 오러블레이드처럼 강렬하고 단단한 빛은 아니지만 종류가 조금 다른 검정색 마나가 아까와는 달리 엘릭의 검에 감싸여 있었던 것이다.

"자, 잠깐만! 이대로 가다간 구멍나버릴거야!! 아파, 하지마!!"

바람의 벽에도 구멍이 나고, 내 몸에도 덩달아 구멍이 나겠지. 엘릭의 검에 말이다. 실제로 육체의 통증은 없었지만 전달되어오는 마나의 소모가 꽤 묘한 감각이었다. 내가 그렇게 애원하자, 엘릭은 잠시 검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조금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 정령이라도 현계에서 움직이는 그 기본은 마나, 마나를 담아 공격하면 내 쪽이 더 유리하다. 쓸데없는 저항은 그만둬."

그만두면 죽는데 넌 그만두겠냐!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마, 말로 해결하면 되잖아! 이 누나가 다 들어줄게, 네가 왜 이러는지 난 도무지 모르겠단 말야, 일단 이유나 알고 죽자!"

"누가 누나란 거지?"

"나 5월생이거든, 넌 나랑 동갑이잖아. 몇월 생이야?"

"1월."

"……."

뭐, 흠흠, 나이가 그 무어 중요하리. 오빠면 어떻고 누나면 또 어때, 중요한 건 마음이지. 나는 표정을 가다듬고, 드레스를 정리한 후 그의 얘기를 경청할 준비를 했다. 시간을 끌면 유렌이 날 찾으러 오겠지. ……과연 찾으러 와 줄까? 방금 그렇게 걷어차버렸는데.

엘릭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가."

"응."

"그럼 죽일 수밖에……."

기껏 집어넣은 검을 다시 빼들자 나는 기겁하고 말렸다.

"안대, 제발 이러지마, 기억해 낼게! 기억하면 되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까진 기억해서 내용을 3줄로 요약해올게!!"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래도 배 째라고 개기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게 애원하던 것도 잠시, 엘릭의 돌발행동에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그는 거칠게 자신의 왼쪽 안대를 풀어냈다. 하지만 그 안대 속에 있던 것은, 분명 다쳐서 실명했다고 들은 왼쪽 눈의 흔적이나 상처가 아니었다.

엘릭의 짙은 푸른색의 오른쪽 눈동자와 대비되는, 선명한 금빛을 띤 멀쩡한 왼쪽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헐. 오드아이? 그런데 왜 안대를 하고 다녀?"

너무 놀랐는지 생각하는 게 그대로 입으로 나와버렸다. 그러나 내 말투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엘릭은 진심으로 경악한 눈을 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내 기억상실을 인정했다.

"……내 왼쪽 눈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인간은 너밖에 없었어. 그런데, 그것조차 잊었단 말이군."

나는 그의 우울한 어조에 의아해아며 되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드아이같은 건 부모님은 알고 있지 않아?"

아무렴 자기가 낳은 아이의 눈동자 색도 모를려고. 하지만 엘릭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엘릭의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진실들을 머릿속에 새겼다.

"내 부모도 모른다. 나는 남 앞에서 안대를 벗은 적 없어. 내가 이렇게 된 것은, 10년 전의 그 사건 이후였으니. 그 전의 나는 분명 푸른 색의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너 때문에 나는 인간으로서의 스스로를 버리고 이 모습이 되었지. 내 부모도, 너의 부모도 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너를 구하기 위해 왼쪽 눈을 실명했다고 알고 있어. 하지만 진실은, 그 때 그곳에 있었던 너만 알고 있는……."

갑자기 엘릭은 하던 말을 끊더니, 나를 거의 들쳐업다시피 하고 순식간에 수풀 뒤로 끌고왔다. 유렌처럼 다정하게 안아주기는커녕 완전 인질을 대하듯 하는 거친 몸놀림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야, 아파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 녀석, 나중에 두고보자. 정의의 이름으로 가만두지 않겠다.

아까 우리가 서 있던 자리에는 다른 남녀 한쌍이 서로 얘기하며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밀회를 즐기려는 커플일까. 그런데 말야,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서 숨은 건 알겠는데 좀 살살 해라.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 나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던 엘릭이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나는 항의하듯이 엘릭을 올려다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아까 날 죽이겠다고 달려들 때보다 더 살벌했다.

……어라? 무슨 일 있었나? 왜 저러지. 방금 그 여자가 엘릭의 여친이었다거나……?

그건 아닌 듯 했다. 그는 대답 없이 거칠게 나의 한쪽 팔을 끌어당겼다. 내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엘릭은 내 시선을 무시하고 내 왼쪽 어깨를 가린 소매를 끌어올렸다.

"……."

"가, 갑자기 왜……?"

그는 내 팔을, 잡아당길 때와는 달리 마치 끈이 끊어진 것처럼 힘없이 탁 놓았다. 나는 주춤하면서 일어나 그가 살펴본 내 왼쪽 어깨 상단을 확인했지만 그 곳에는 흉터조차 없이 매끈했다. 나는 다시 엘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강하게 쏟아지는 살기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나는 인간이 아니므로 정신은 별다른 위협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조금 놀라서 움찔했다. 나는, 방금까지의 그의 태도가 그럭저럭 나를 배려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의 그는 진짜로 살벌했기 때문이다. 성격을 자제하는 짓 따위는 집어치우고, 진짜 험악한 표정으로 내게 씹어뱉듯이 위협에 가까운 말투로 내뱉었다. 진심으로 화난 것 같았다, 그는.

"……너는, 세이시아가 아니군."

그리고 나는 그가 화난 이유를 듣는 순간 경악했다. 어떻게 알았지?

"진짜 세이시아는 어디 있지?"

나는 다급하게 심문하듯이 내게 명령조로 질문하는, 그 차가운 엘릭의 두 눈동자에 응시당한 상태로 히죽 웃었다. 정체를 말해줄 생각은 없다. 이미 이런 협박은 세리안에게서 한번 받아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쫄지도 않았다. 진짜다. 안 쫄았다니까?

그리고 마치 악당처럼 삐딱하게 서서 거만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의 만만한 여자가 아니라고, 이 몸은. 왜냐하면 나는 너의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런 무뚝뚝하고 냉랭해 보이는 남자가 그렇게까지 세이시아의 행방에 신경쓰고, 내가 세이시아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단번에는 아니지만 금세 알아채고, 게다가 예전에 청혼까지 했었다고 하면 아무리 내가 엘릭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고 해도 답은 뻔한 것 아니겠는가?

이 녀석은 세이시아를 좋아한다. 아니, 이미 세이시아는 죽었으니까 조금 씁쓸하지만 좋아했다, 겠지. 사실 내가 세이시아라는 걸 알고 있던 상황에도 그 무시무시한 눈빛이 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약간의 의심이 가는 결론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목 내놓고 벌레가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알고 싶어? 진짜 세이시아가 어디 있는지 말야."

말투를 완전히 바꾸어 마치 내가 세이시아를 감금하고 있다는 듯한 어조에 엘릭은 검을 빼들었지만, 나는 이번엔 간단히 한 손가락으로 그를 제지했다.

"ㅋㅎㅎㅎ 그 검으로 나를 죽이려고? 말리진 않겠지만, 그러면 세이시아의 행방은 모르게 될 텐데.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나밖에 모르거든."

물론 뻥이다. 유렌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세이시아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죽은 사람을 이용하는 것은 조금 미안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도 세이시아와 나란히 저승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저 녀석의 손에 말이다.

하지만 엘릭은 표정을 약간 흐트러뜨리는가 싶더니, 잠시 생각해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를 취했다.

"알 게 뭐야, 그딴 여자. 받아낼 것이 있긴 하지만 없어졌다면 내 알 바 아니지."

"뭐야 그게!!!"

나는 나도 모르게 흠칫해서 두 팔로 몸을 감싸며 그에게서 두 발짝 멀어졌다. 이 잔인한 자식, 나쁜 자식, 어떻게 너의 세이시아를 그렇게 간단하게 버릴 수가 있어?! 역시 인간의 남자란 믿을 게 못 돼!!!

둘이 무슨 사이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속으로 엘릭의 욕을 막 퍼부었다. 그리고 애원했다.

"안돼 그럼 안되잖아! 인간으로서의 너를 포기하면 안 돼! 세이시아가 어딨는지 궁금하지? 응? 궁금하지 않아?! 넌 궁금해해야 돼, 왜냐하면 세이시아를 구할 수 있는 건 지금 너뿐이거든! 그치? 너만이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거야, 그러니까 제발 나한테 물어봐!! 말해줄게!!! 지금 날 죽이면 너는 세이시아와 나 두 여자의 애원을 무시한 엄청 나쁜놈이 되는 거라구?!!"

"……말해봐."

그는 시끄러운 내 비명에 가까운 긴 외침에 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안면몰수하고 요구했다.

"네가 세이시아랑 무슨 사이인지 말해주면, 나도 그녀가 어떻게 됐는지 말해줄게."

그 요구에 그는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뜻밖에도, 거절은 아닌 것 같았다.

***

아직 어렸던 8살의 엘릭은, 동갑내기의 꼬마 여자아이 세이시아가 못마땅했다. 쪼끄만 주제에 자신의 흑발과 정반대의 은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힘도 약해빠진 계집애 주제에 검술을 배우겠다고 떼쓰는 것도 싫다. 조금만 무섭게 노려보고 소리쳐도 울음을 터뜨리는 것과 약해빠진 외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간만에 시렌느 공작가와 레이몬드 공작가가 들판으로 피크닉을 나왔는데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간 형에게 놀림받을 것 같아서 애써 표정을 바로했다.

"너는 그 때 나에게 들판 멀리까지 나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 그래서 우리는 칼릭의 충고도 무시하고 부모님과 형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려나갔어."

엘릭은 그 황금빛의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며 10년 전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기, 이건……."

"입 다물고 들어!"

힉. 엘릭이 갑자기 소리치자 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낑. 내가 듣고 싶은 건 러브러브 가득한 애정 얘기란 말야. 8살짜리 애들의 놀이 얘기가 아니고. 하지만 엘릭은 세이시아에게 말하는 것처럼, 둘만의 사건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의도지?

그렇게 멀리까지 나왔던 세이시아는 엘릭에게 저 큰 나무에 올라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엘릭과 세이시아는 둘 다 경쟁하듯 흙투성이가 될 때까지 나무로 기어올라갔다. 가지가 많아 어린아이들도 나무에 오르기 편했는데, 먼저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간 엘릭은 장난 비슷하게 위에서 세이시아를 놀려댔고, 세이시아는 오기로라도 엘릭보다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나뭇가지 위에서 팔짝 뛰었다. 당연히 나뭇가지는 부러졌고, 십수 미터나 되는 높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세이시아를 본 엘릭은 경악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나는 그 '힘'을 사용했지. 떨어지고 있는 세이시아를 보고, 거의 본능과도 같은 반응이었어."

그 다음에 엘릭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의 어머니는 나의 친모이지만 아버지는 친부가 아니다. 내 아버지는 마족 칸. 인정하긴 싫지만 그자라고 할 수 있지. 그 마족이 우연히 심심풀이로 심어놓은 '알' 중의 하나가 내 모친의 몸에서 부화해서 내가 태어났고, 나는 힘의 각성을 하지 않은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10년 전까지는."

마족이 인간에게 자신의 마력의 조각인 알을 심으면 그것은 숙주, 즉 모체에서 인간의 태아의 형상을 하고 태어난다. 반마족 아닌 반마족이 되는 것이다. 보통의 마족들은 알을 사용해서 후계를 낳지 않지만 엘릭의 부친 칸이라는 마족은 조금 특이했나보다. 인간의 몸에 알을 심고 관찰 연구하는 게 취미라니. 엘릭은 그렇게만 설명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반마족은 각성의 계기 없이는, 단지 능력이 좀 뛰어날 뿐인 인간, 평생 평범한 인간처럼 살 수 있다. 그러나 각성하게 되면 보통 마족과 흡사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즉, 태생만 인간일 뿐이고 진짜의 마족이 되는 것이다.

갑자기 마족이라는 뜬금없는 새 종족이 나와서 헷갈려하다가, 나는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뭐?!?!"

그럼 넌 마족이란 거야? 엘릭은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고 비웃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세이시아는 목숨을 건졌지만, 각성의 파동을 눈치챈 마족 칸이 차원의 틈새를 열고 내게로 와서 나의 태생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했지. 한 점의 죄책감도 없이 웃는 얼굴로 말이야. 그리고 내게 명명했다. '성공작'이라고. 이 왼쪽 눈은 그 마족이 내게 '성공작의 증표'로 심어준 것이다."

뭐야, 그 매드 사이언티스트같은 녀석은!! 나는 10살도 안 된 어린 아이가 받았음직한 충격을 생각하며 걱정스레 엘릭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엘릭의 기분은……, 여전히 읽을 수 없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뒷말을 이어갔다.

"그런 충격적인 내용은 여덟 살의 어린아이가 견디기에는 힘들었지. 혼란스러워하는 나에게, 세이시아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지만 울며 다가와 말했다.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니 책임지겠다고. 그리고 계약했지. 18살 이후의 목숨을 내게 주겠다고 말야. ……그 계약의 증표는 왼팔에 새겨져 있었다."

18살 이후의 목숨을 주겠다고? 18살 후에 죽이든 노예로 삼든 맘대로 하란 것 아닌가, 그 의미는. 하지만 엘릭은 세이시아에게 청혼했다. 내가 18살이 되던 해, 바로 그 때 말이다.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단 말이지…….

엘릭은 세이시아에게 배신감을 느꼈을까? 그건 즉, 엘릭이 세이시아를 좋아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이시아가 엘릭을 좋아했을까? 아무리 어렸다고는 해도, 10년 이후의 평생의 목숨을 맡길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호감이 기본적으로 있었을 것이다.

둘의 애매한 애증의 관계를 나는 제 3자의 입장에서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엘릭이 과거의 일 전부를 나에게 설명한 후, 마지막으로 처음 보는 인간적인 눈동자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는 건가?"

그 눈에는 무엇이 담겨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세이시아가 아니야. 세이시아는 열 일곱살에 죽었고, 계약은 아마도 깨졌겠지. 그리고 나는 죽은 세이시아의 몸을 잠시 빌린 것 뿐이야. 그래서 머리색이랑 눈 색이 조금 바뀐 거고. 그녀와의 연관관계는 없어. 미리 말해두지만 세이시아는 내가 오기 전부터 죽어있었다구. 내가 죽인 것도 아니고, 나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니야."

그는 과연 믿어줄까? 이렇게 말하더라도 그는 소문을 퍼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별로 입이 가벼워 보이지도 않았는데다가, 내 정체를 소문내면 엘릭이 사실 마족이란 것도 다 말해야 하니까. 엘릭은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세이시아의 몸을 사용하고 있는 거지?"

"……살기 위해서. 굳이 세이시아의 시체가 아니라도 상관없지만, 이 몸이 가장 적격이니까. 이 몸을 돌려받을 생각은 하지 말아줘. 계약이 깨진 이상 너에게는 권리가 없고, 나는 자연계의 지배자에게 허락을 받아 이 몸에 머무르고 있는 거니까."

그가 날 속였구나를 외치며 적어도 시체라도 접수하겠다며 내게 칼을 휘두를까봐 나는 생각나는대로 둘러댔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라구. 진짜야.

그리고 엘릭의 오해와 우리들의 대화는 이걸로 끝나는 듯했다. 다만 마지막으로 엘릭이 남기고 간 이 말만 아니었더라면.

"방금 한 대화, 잊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너와 내가 사적인 자리에서 마주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군. 죽이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그럼."

엘릭은 경고조로 다시 돌아온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하고는, 나를 먼저 끌고와서 쥐어패고 괴롭힌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 쌀쌀맞게 돌아섰다. 뒤에 남겨진 나는 어이가 없었다. 방금 괴롭힌거 다 물어내! 적어도 오해한 거 사과는 하고 가!! 비록 내가 세이시아의 행방을 알려줄 것처럼 사기친 것에 대해서 그는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지만, 그건 엘릭이 날 위협하는 바람에 자기방어 겸 위장한 것 뿐이다.

무표정 무감정의 절정남으로 보이는 엘릭이 그 순간 예전의 친구였던 세이시아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슬퍼하고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화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표정에 전혀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고,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상태의 내가 그의 슬픔따위를 뒷모습에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확률은 제로였다. 속으로 길길이 날뛰면서 저 녀석을 어떻게 나중에 한대 때려줄까 고민하며 나는 수풀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한참 나를 찾고 있던 유렌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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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심었다고는 해도 진짜 인체실험 같은걸 한게 아닙니다. 그 짧은 시간에 인체실험이 가능할리가 ㄷㄷ. 그냥 색만 바꾼 거에요. 자기 아들이라는 증거로.

엘릭 공략이 지금까지 중에서 최고난이도입니다.

학자풍이라……. 사실 칼릭의 등장신은 예~전에, 그러니까 현재의 세리안의 캐릭터가 잡히기도 전에 써 놓았던 거라 미처 캐릭이 겹친다는 생각을 못했네요. (원래 세리안은 비공략캐였고, 아젤은 출현예정도 없었으며, 엘릭은 에릭이라는 이름의 인간 기사캐릭, 공략캐는 유렌과 미르헬 둘밖에 없었던 시기의 설정입니다) 학자캐란건 말하자면 지적이고 똑똑해 보이는 대신 몸이 가늘다는 의미입니다. ㄷㄷ 그렇게 오해받을수도 있겠네여ㅋㅋㅋ. 나중에 고쳐야징.

사실 제 취향을 따지자면 전 여리여리한 남자 별로 안좋아해요. 학자풍은 싫어하는 편이죠. 전에 쇼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 이유. 제가 좋아하는 건 키 엄청 크고 덩치 큰 근육질의 짐승남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유렌의 몸에 가장 가깝군요(거기에 얼굴과 성격은 또 별개). 이건 역하렘으로 다양한 남자들을 전부 수집한다는 취지의 글이기 때문에 제 취향과는 완전 별개로 나갑니다. 굳이 제 취향을 드러내는 글이라면, 이 글과 동일 배경의 소설 'My Fair Kight'(엘리아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 2년전에 앞부분 조금 연재하다가 접음)일듯 합니다. '꽃의 여왕'에선 엘리아스(엘)가 주인공이 아닌 조연캐릭인데, 좀 나중에 나옵니다. 비중은 전체 캐릭의 5%정도? 전 한 소설에서 주인공 말고 또 다른 러브루트가 과도하게 나오는 건 싫어하므로, 이 소설에서는 그다지 엘리아스의 출현이 많지는 않을 예정이에요. 그냥 도움만 좀 준다, 정도? 하지만 뭐 독자분들 반응 보고 조정해야겠지요.

음 그리고 시아 공작대우……좀 받게 노력해보겠습니다!

꽃이 소유될수 없다는건 변명같았나여?ㅠㅠ 사실은 '난 플로라라서 한남자만 사귈 운명이 아님'이라는 숙명을 느낀다 뭐 그런 느낌으로 적으려고 했는데 어색했남ㄷㄷ.

일단 조금 수정할 예정입니다. 근데 원래 역하렘이나 하렘이라는 게 다 현실성 떨어지고 그래요. 여기서 더 리얼리티를 찾으면 전 죽을듯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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