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인연 -->
"알페인 대공은 학창시절, 선배였던 흑의 대공을 매우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의 꼿꼿한 성격은 그 때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학창시절?"
내가 의아해하자 그 질문에는 유렌이 대답했다.
"플로렌스 국제 종합 아카데미. 그는 붉은 꽃의 졸업자였다고 합니다."
플로렌스 아카데미라면, 유렌이 전에 나에게 플로렌스 종합 아카데미 검술반 수석 졸업이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검술 수석의 증표라는 푸른 보석이 달린 데이지꽃 모양 금패를 내게 보여주었다. 웬만큼 이름 날리는 카덴의 검사들은 대부분 플로렌스 아카데미의 검술과 졸업 증거인 데이지꽃의 금패를 가지고 있다더라. 거기에 달린 보석은 다르지만. 아마 수석이 사파이어, 차석이 루비라고 했나. 보석의 가치와는 상관없이, 색깔의 의미 뿐이다. 가장 뛰어난 기사가 푸른 꽃, 두 번째가 붉은 꽃이라고 불리는 전통에서 유래했다.
그 밖에, 학자과는 백합, 마법과는 아이리스. 그리고 매우 드물지만 1년 내에 세 과목 전부에서 수석의 지위를 차지해서 졸업했을 경우 푸른 장미꽃의 패를 수여한다고 한다. 푸른 장미, 블루 로즈. 불가능을 상징하는 그 패는 지금까지 얻은 사람이 단 셋밖에 없다고 한다. 전 대륙의 모든 인재들이 모인 학교이니까.
나도 그 학교에 가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열 여덟이라는 나이는 플로렌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였다. 보통 열 살에서 열두 살 사이에 입학해서 이르면 열다섯, 늦어도 성인인 열 일곱 전까지는 졸업해서 나온다고들 하니까. 블루 로즈를 얻으러 간다면 모를까 나는 불가능했다.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알페인 대공과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세 아들은 다른 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파티장 내에 섞여들었다. 다른 귀족과 얘기를 나누는 알페인 대공을 보며 나는 어떡할까 망설였다. 까탈스러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나이는 40대 후반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50대란다. 젊은 여공작이 바로 아는 척을 해도 될까 고민하다가, 다시 다음 귀족이 도착한 듯 시종이 또 무슨 말인가를 했다.
"라키아네 백작님께서 들어오십니다!"
하얀 융단을 밟으며 똑같이 흰 드레스를 입은 30대 초반의 젊은 여귀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드물게도 파트너가 없이 혼자였다. 프쉘드리만 후작, 아낭세 공작 등, 그 뒤를 이어 나름대로 영향력 있는 고위 귀족들이 가족끼리, 혹은 파트너와 함께 하나씩 입장했지만 대공 이상의 지위를 가진 자는 없었다. 아젤은 같은 현자탑 출신으로 보이는 웬 젊은 남자가 말을 걸어오자, 아는 사이였는지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하고 그와 함께 있는 다른 학자풍의 사람들 무리로 향했다. 현자는 현자끼리 논다는 건가. 확실히 그들은 황실 파티에 초대되어 왔는데도 별로 내키지 않지만 황제가 시켜서 방문했다는 듯, 전혀 사치스럽지 않은 분위기와 묘한 깔끔함 때문에 정치에 발을 담그고 있는 귀족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마법사 로브를 입은 자들 또한 섞여있었다. 다른 무식한 귀족들은 오지 말라는 듯한 분위기랄까. 왜인지 나도 접근하기가 어렵네.
"자크루 대공 전하께서 들어오십니다!"
무심코 딸기 칵테일에 눈독들이다가, 벌써부터 취하면 안된다는 유렌의 제지를 받으며 나는 시종의 목소리에 반짝 뒤를 돌아보았다. 약간 결이 거칠어 보이는 검붉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자크루 대공은 적의 대공. 그런데 원로 귀족 치고는 젊어보였다. 한 40대 중후반 정도? 부인과 아들 둘, 딸 하나와 함께 있었는데 왜 저렇게 젊은 건지 고개를 갸웃하자, 유렌이 대답해 주었다.
"적의 대공은 결혼을 일찍 한 편입니다. 전 대공부인이 타국 출신이라, 현 제국의 방탕하고 음란한 귀족영애들을 경멸해서 다른 나라 귀족의 어린 딸을 데려와서 법을 어기고 조혼을 시켰지요. 게다가 초대였던 마리오타 자크루가 일찍 일선에서 물러나는 바람에 현 자크루 대공은 2대째가 아닌 3대째입니다. 다른 원로보다 젊으니까 정치적인 면에서도 과감할 수 있는 거겠죠."
각 귀족들에 대해서는 대충 이름과 성별, 나이와 성향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들어보니 무슨 집안사정이 이리도 복잡하담. 어쨌건 나는 자크루 대공 뒤에 조신하게 서 있는 체리빛 머리의 장녀 플라니아 자크루를 주목했다. 그녀는 자홍색의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장식이 거의 없는 긴 팔의 옷이었다. 그녀의 옷은 전체적으로 보수적인 스타일인데도 불구하고 의상 센스는 죽여줘서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오늘 생각없이 고른 내 드레스가 약간은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집안 여자들이 수수하게 차려입은 반면 정작 대공 자신은 매우 신세대적인 복장을 하고 있었던 것다. 젊은 청년들에게 유행하는 얇은 타이라던가 슬릿이 들어간 늘어진 커프스 같은. 이래서 모친의 과한 참견은 애를 버려놓는다니까. 전 대공부인이랬나, 그녀가 죽고 나자 대공은 엄격한 어머니의 간섭에서 벗어나 너무나도 자유분방하게 놀고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치 반항아처럼. 젊은 나이에 팔려오듯 시집온 부인이 불쌍해선지 바람은 안 피우지만 혹시 모르지, 뭐.
그래선지 그는 젊고 개혁적인 귀족들 틈에서 약간은 요란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부인에게도 '같이 놀자' 이러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녀는 사양하며 다소곳하게 딸들과 다른 소수의 귀부인들과 조용조용한 담소를 나눌 뿐이다.
너무 엄숙한 분위기의 청의 대공 측에도, 너무 현란한 분위기인 적의 대공 측에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내 나팔소리 알림이 들리면서 넓은 파티장 내에 쭉 울려퍼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께서 들어오십니다!!"
황제 폐하라는 말에 나는 유렌의 손을 잡아 이끌고 중간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황제,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하자. 하지만 연단이 높아서 그럴 필요도 없이 위에서 계단 아래로 내려오는 황제의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올해 40대 중반이라는 여황제는 나이보다 젊어보이는 미인이었는데, 곱슬거리는 레몬빛 금발을 틀어올린 채 붉은 망토와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중후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에 나는 황제 옆에 선 갈색 머리의 제이란 백의 대공이나 황자, 황녀들에 대해서는 일순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성군, 현제라는 말이 그냥 서 있을 때 풍기는 당당하면서도 자애로운 기운만으로도 증명될 수 있는, 그런 여자였다.
여황제의 남편인 제이란 대공은 백의 대공, 그런데도 흰색은 온데간데없이 누가 봐도 갈색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백의 대공이라며, 흰색은 어디 있는거야? 제이란 대공은 키가 큰 편이고 약간 마른 듯한 체격에 근육이 그렇게 많아보이진 않지만 몸이 단단해 보여서 적어도 단련된 신체라는 것은 확실했다. 이루가 자신의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대공은 남자치고는 상당히 선이 가는 미녀형 얼굴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코웃음쳤지만 실제로 보니 젊었을 때 여자로 오인받았다고 해도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에 천천히 걸어오는 황금빛 머리카락의 황태자, 옅은 녹색 머리의 이루, 이제 머리색이 바뀌는 것 정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처음 보는 얼굴의 창백한 안색의 금갈색 머리 소년과 붉은 기가 도는 연한 곱슬 금발의, 여제를 닮은 소녀가 있었다. 각각 3황자와 막내 황녀가 아닐까 한다. 조금씩 색이 다르긴 하지만 이루만 빼고 다 금발이었다. 이루의 원래 머리는 무슨 색일까?
여제의 등장과 간단한 인사말에 이어 기사 제복을 입은 황실 기사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보통의 연회에서는 볼 수 없는 그 장면에 사람들은 일제히 그들을 주목했다.
역시 기사라 그런지 다들 몸이 장난 아니다. 단단하면서도 용병처럼 너무 과하지는 않은 정돈된 근육에 키도 크고, 흐트러짐 없이 차려입은 화려한 의장용 제복의 주인들이 아무리 평범하게 생긴 얼굴의 남자라도 한번쯤 소녀들의 관심을 격하게 끌어당겼다.
이래서 다들 기사의 레이디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구나. 나도 당장 가서 거울 한번 보고 와야하는 거 아닐까? 아니지, 그럴 거 없이 유렌을 기사로 만들어버리면 더 바랄 것 없을 텐데. 특히 곤색의 넥타이라던가, 잘 다려진 셔츠의 주름 잡힌 등판이라던가, 제복의 어깨 장식이라던가……,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나는 그 기사들 틈에서 세리안을 정신없이 찾았다. 첫번째로 앞으로 나선 것은 전체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검은 제복의 기사단이었다. 두 번째는 푸른 제복, 세 번째는 붉은 제복. 의장용으로 화려하게 금사가 수놓여진 스탠드 칼라의 깃 사이로 보이는 하얀 와이셔츠와 넥타이들. 각각의 기사 제복은 동일한 디자인에 색깔만 달랐다. 각각 기사단에서 새로이 뽑은 신입들에게 축하말을 전하는 황실 행사였는데, 일종의 기사단 신입환영회였다. 3년에 한번 정도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나선 것은 드디어 세리안이 소속된 백의 로얄기사단. 앞쪽에 선 세리안은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평소에 앞으로 몇 가닥 흘러내리는 몇 가닥만 쓸어넘겨 묶는 느슨한 헤어스타일과 다르게 깔끔하면서 딱딱해보이기도 하는 느낌이었다. 기사들은 대부분 방해되는 머리카락을 브레이드로 땋아내리거나 올이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하나로 묶거나, 아니면 포니테일을 하고 있었다. 가끔 아예 짧게 목 위로 잘라버린 머리카락도 보인다.
"……앞으로도 황가의 수호와 영광을 위해 힘써주시기를. 백의 기사단의 아이서스 경, 시렌느 경, 그리고 그 휘하에 새로 들어온……."
단장과 부단장에다가 신입들의 이름을 다 외운 거야? 각 기사단 20명이면 네 기사단에 신입들이 적어도 30명은 될 텐데. 여제의 기억력은 정말 경이로웠다. 저 긴 인사말은 물론이고 서른이 넘는 사람들의 이름까지 다 외우다니. 황제도 힘들겠군.
"……그러면 이제부터 그대들을 위한 연회를 마음껏 즐기도록 하시오. 마지막으로 레이몬드 경, 휴이든 경, 앞으로 나와주시오."
레이몬드와 휴이든 경에 대해서는 미리부터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대략 알고는 있었다. 아마 엄청 뛰어난 실력자라서 이번에 작위를 수여한다던가? 그 두명에게 잘 보이면 앞날이 창창해진다는 것과 레이몬드라는 이름을 어딘가에서 들어보았다는 두 가지 생각에 약간 헷갈려하고 있는데, 백의 기사단과 청의 기사단에서 한 명씩 앞으로 걸어나왔다.
흰 제복을 입은 사람은 휴이든이라는 젊은 금발의 남자였는데, 느긋한 표정으로 유유자적하게 앞으로 걸어나왔다. 바람둥이처럼 생긴 얼굴에 졸린 듯한 얼굴은 의욕이 없어도 너무 없어 보였지만 여제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눈을 반짝 빛내는 모습이 앞으로 받게 될 작위에 대한 기대감과 우쭐함이 엿보였다.
그리고 푸른 제복을 입은 남자는 생각보다 더 젊었다. 보통 20대인 기사들과는 달리 기껏해야 10대 후반인 내 또래로 보였던 것이다. 피부가 매끈해서 그렇게 보이는지는 몰라도, 오똑한 코와 굳게 다문 입술은 작은 얼굴 안에서 묘한 조화를 이루어, 굉장한 미인인데도 불구하고 완고해 보이기도 하고 고집이 세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상당히 특이했다.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흑요석처럼 새카맣고도 새카만 머리카락은 아젤과 비슷한 길이로 짧게 쳐져 있었다. 나는 그의 검은 숏컷을 가리키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유렌, 저기 저 검은머리……."
"흑발이라 신기하십니까? 요즘 흑발은 매우 드문 편이지요. 엘릭 레이몬드는 최연소로 황실기사단에 입단한 기사라고 합니다. 드물게도 부친도, 모친도 닮지 않아 흑발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한 때는 사생아나 서출이라는 소문도 나돌았습니다."
그런 내 반응이 이해된다는 듯, 유렌은 조용히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내 귀에 속삭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기억 깊은 곳에 묻혀져 있던 이름이 생각나버렸다.
"엘릭 레이몬드……?"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였고, 나에게 청혼했던 레이몬드 백작가의 차남이자, 세리안보다 더한 미남으로 앞길 창창한 실력있는 기사이자, 신체의 중요한 부분에 장애가 있다는 고○가 바로 저 남자란 말야?!
나는 당황했다. 확실히 세리안도 미인이고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지만 저 엘릭이라는 남자는 인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이 있다. ……마치 하프엘프인 유렌처럼 신비롭거나 몽환적인 느낌이랄까. 예전의 세이시아와 저 엘릭 레이몬드란 남자가 어릴 때 친구였다고 하는데, 지금 난 세이시아가 아니니 그렇다쳐도, 저 남자의 중요한 부분에 장애가……, 아깝다, 아니, 이건 생각하지 말자.
마음이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 엘릭이라는 남자가 문득 이 쪽을 돌아보았다. 어쩌면 그저 시선이 스쳤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 찰나의 시간에 나는 패닉상태로 빠져버렸다.
매우 아름다운 얼굴에,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검은 안대. 그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 걸까, 예상치 못한 모습에 심장이 철렁했던 걸까. 아니면, 마치 푸른 불빛처럼 요요롭게 빛나는 그의 오른쪽 벽안의 눈동자에 영혼마저 꿰뚫리는 듯한 섬뜩한 느낌을 받아서였을까.
"엘릭 레이몬드, 라고……."
그러고 보니 단 하나의 결점으로 중요한 곳에 장애가 있다고 했던가? 나는 네리아의 말을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았다. 중요한 곳. ……설마 거기가 왼쪽 눈이었던 거야?! 저 안대는 분명 취미로 하고 다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검사에게 두 눈이 얼마나 중요한데 병신도 아니고 일부러 눈을 가리고 다니겠는가? 그렇다면 한쪽 눈이 원래부터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나는 네리아의 말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 걸 후회했다. 완전 잘생겼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결혼할걸. 그런데 그렇게 애매하게 말해버린 네리아도 잘못이 있어.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닐거야, 진짜. 제길, 못 먹을 멜론, 구경이나 실컷 하자.
내가 넋을 놓고 엘릭을 바라보는 동안 엘릭과 휴이든 경은 자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둘다, 소드 마스터가 되기에 가장 가까운 검사였다. 제국 입장에서는 미리 작위를 주어 독려해도 좋겠지. 자작은 세습이 불가능한 작위니까, 별로 큰 공을 세우지 않은 귀족자제들이나 인재에게 수여하는 작위로는 자작이 가장 적당했다.
옆의 휴이든 자작과는 반대로 절도있는 동작과 딱딱한 표정의 엘릭은 여제에게 허리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까딱했을 뿐이다. 일단 처음에 일제히 인사를 했으니 두 번째 인사는 가볍게 하는 것이 딱히 예의에서 벗어나지는 않지만서도, 그 거만한 행동에 누군가 나서서 지적할 만도 한데, 엘릭은 아무런 지적이나 경고도 받지 않았다.
본래 그런 녀석이라서인가. 여제는 웃으며 둘 다에게 이만 파티를 즐기라고 말해주었다. 그제서야 넋을 잃고 엘릭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내가 정신을 차리고 유렌을 돌아보았다. 유렌은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힉, 미안. 이런 멋진 남자를 옆에 놔두고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돌리다니, 큰일날 짓이군. 나는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척 그에게 물었다.
유렌은 갑작스런 내 질문에 조금 움찔하더니,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았던 곳은 엘릭과 휴이든이 있는 기사들 쪽이었다. 어딜 보고 있었던 거지?
"……??"
"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다가. ……무언가 질문하셨습니까?"
뭐야, 유렌도 딴생각 중이었잖아. 여자를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왜 기사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탐색하듯 노려보고 있던 거지? 저들 중에서 돈 떼먹고 도망간 녀석이라도 끼어 있는건가?
"음, 별거 아냐. 그냥, 엘릭……, 아니, 레이몬드 경도 그렇고 휴이든 경도, 생각보다 몸이 가느다란 편이라고 생각해서."
나름 건장한 체격으로는 보이지만 저 두사람은 다른 기사들과 비교하면 근육이 딱히 더 많아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그들 중 가장 소드마스터에 근접했다니, 우락부락하게 생겨서 힘 좀 쓸 것 같은 체형으로는 안 보이는데 말야. 이런 내 질문에 유렌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체형관리입니다. 용병과 달리 기사들은 운동과 스트레칭과 식이요법을 병행해서 근육이 너무 크지 않고 유연하면서 밀도 높고 단단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조절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용병처럼 무식하게 먹어서 근육량만 늘리면 어린 나이일 경우 키도 크지 않고, 오히려 유연성이 줄어들어 검술에 방해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지요."
우와, 요즘은 기사들도 몸매 관리를 해야 하는구나. 그럼 유렌도 했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기사도 아닌데다가 체형관리법도 모르고, 근육량이 많아보이지 않는 건 체질 탓이라며. 그래도 적당히 단단한 팔근육과 가슴근육 덕분에 포근해서 좋은걸.
"시아."
다른 영애들이 안면이 있는 기사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는 동안 드디어 세리안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을 제치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기사단에 대해 묻기도 전에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얼결에 따라가서 아까는 미처 끼어들지 못했던 청의 대공에게로 가는 것이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는 먼저 대공에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알페인 대공전하."
놀랍게도 세리안의 상큼한 인사를, 대공 아저씨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받아주었다.
"그래, 공자께서도 오랜만이오. 그 아가씨는……?"
자연스레 내 얘기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세리안은 강조하며 나를 소개했다.
"네, 아주 예쁘지 않습니까? 제국 2대 미녀답게 굉장히 아름답고 또한 머리도 좋지요. 제 여동생이자 이번에 새로 공작위를 이어받은 시렌느 공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렌느 공작이라고 합니다."
나는 얼결에 표정을 굳힌 채 눈을 내리깔고 어영부영 인사를 했다. 헉,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고개를 숙이는 걸 까먹었다. 게다가 소개받을 때는 윗사람인 대공이 먼저 인사해야 하는데 타이밍을 못 잡고 세리안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말해버렸다. 미처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왠지 대공이라 하면 왕 못지않는 권력의 소유자일텐데, 잘못 보이면 안되잖아. 다행히 알페인 대공은 너그러운지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알페인 대공이라고 하오. 이 파티장에 들어올 때부터 그대를 쭉 주시하고 있었는데, 너무 어려보여서 공작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오. 나 역시 잘 부탁드리겠소. 그나저나 차기 시렌느 공작은 세리안 시렌느 공자, 당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군."
"그 만큼 제 여동생의 능력이 뛰어난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핳. 둘은 아무래도 꽤 친분이 있는 듯 나름 허물없이 말을 섞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알페인 대공이 자신의 아내나 가족들을 소개시켰다.
그에게는 세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차남을 빼고는 다들 내 옷차림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나름의 관심을 표현했다. 첫째 아들은 신사적으로 웃으며 악수를 청했고, 셋째 아들은 음흉한 눈으로 내 몸매와 얼굴을 관찰했고, 외동딸은 내게 웃으며 만나서 반갑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세리안은 셋째 아들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막으며, 잠시 실례하겠다며 나를 끌고 적의 대공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까의 상황 반복. 나는 공식 사교계에 처음으로 나오는 거나 다름없으니 비록 내 지위가 상당히 높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내 얼굴을 몰랐다. 그렇기에 아무도 먼저 함부로 말을 걸어오지 않았고, 연장자인 세리안이 도움을 줘서 첫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적의 대공과 세리안이 가볍게 근황 얘기를 예의상 나누는 동안 나는 그의 딸인 자크루 공녀에게 접근했다. 그녀는 주변에 몰리는 남자들을 예의상 적당히 상대해주다가 황태자를 보더니 반색하며 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역시, 처음 만났을 때도 황태자와 같이 있더니, 자크루 영애는 황태자에게 관심있는 걸까?
그에 나도 영애를 따라가보았다. 황태자는 자신의 아버지인 제이란 대공과 얘기하고 있었는데 자크루 영애가 조금은 수줍게 말을 걸자 다들 친근하게 맞아주었다. 백의 대공, 즉 제이란 대공은 자크루 영애를 따라온 나를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40대치고는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그런데 공녀, 이번엔 친구와 함께 온 건가요?"
"……네?"
그들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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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있는 '중요한' 부분이 여러분이 생각하시던 거기가 아니라서 실망하셨나요 안심하셨나요?
어쨌든 엘릭 등장입니다. 처음에 엑스트라로 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찌질하게 적어놓은 설정에도 불구하고 엘릭을 찾으시는 분이 계셔서 깜놀.
요새는 근근히 써서 올리네여. 바로 써서 바로올리고 비축분 없고;;;
그러니까 더, 덧글좀!!
다음에는 유일하게 안 나온 흑의 대공인 레인 이트리샤 대공이 등장하려나? 이 영감님은 원로 귀족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요. 60대입니다. 나중에 우리편 되실 분인데 노총각이라 그런지 좀 까칠함. 비공략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