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젊은 여공작과 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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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넓지 않은 거리와 옆의 공터까지 꽉 찬 걸로 보아 길드 인원이란 인원은 죄다 나온 모양이다.
이제서야 살판 났다는 듯 방금 유렌에게 얻어맞고 잠시 기절했던 첫 번째 불량배가 멍든 얼굴을 소매로 문지르며 킬킬거렸다.
"네 녀석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 길드 대장한테는 못 이길걸? 게다가 여기는 우리와 동맹인 검은 달 길드의 부길드장이 시찰하러 와 있단 말이야! 틀림없이 그 분은 우릴 도와주실거야. 그럼 네놈 따위는 그대로 끽, 하는거지."
"검은 달 길드?"
검은 달 길드라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대륙에서 가장 큰 어둠의 길드 아닌가? 도둑질, 정보 취급, 암살, 밀수 등등 모든 흑막과 관련이 있다는 대륙 최강의 길드. 아마 비공식적인 의뢰를 주로 취급하는 곳으로서 그 길드의 장이 바로 마스터급 인물이라는 소문이 있다.
똑같이 마스터급 인물이 바로 붉은 태양 길드, 즉 대륙 최대의 용병길드 길드장이었다. 정의를 추구한다는 공식 용병길드. 그 두 사람과, 8클래스 마법사인 마탑의 길드장, 이렇게 셋이 서로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기에 카덴 대륙이 유지된다는 말은, 아주 유명한 것이었다.
제국의 기둥이 여제와 소드 마스터인 이트리샤 대공이라면, 대륙의 기둥은 바로 세 명의 마스터급 길드장이라고.
"그런 유명한 길드랑 너네가 동맹 관계라고?"
여엉 못 믿겠다는 듯 미심쩍게 내가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한 불량배가 말조심하라며 그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는 조금 흠칫하더니 주변을 살피다가, 도리어 뻔뻔하게 들이밀었다.
"그래, 동맹 길드. 그리고 네 년은 좀 닥치고 있어, 조금 후에 저 녀석을 죽이고 내가 귀여워해 줄 테니까 말이지."
나는 울컥해서는 그를 쏘아보았다. 저녀석만은 내가 한대 패고 만다! 그 남자 옆에 느긋하게 큰 칼을 차고 서 있는 40대의 남자가 길드장인 것 같았다. 다른 이들보다야 강해보이긴 했다. 첫번째로 만난 그 불량배가 시내에서 혼자 깝죽거리던 것이 길드장의 아들이거나 조카인 듯 싶었다. 하긴, 그 정도의 빽은 있겠지. 유렌이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제대로 설명해주었다.
"검은 달 길드의 관리를 받고 있는 중소 도둑길드겠지요. 중소 길드 치고는 인원이 많은 편입니다만, 아마 이 인원이 전부일겁니다. 이렇게까지 길드가 커질 수 있었던 것도 이곳 길드장의 수완으로 보이지만, 한계가 있는 좁은 영지 내에서 도둑 길드는 이만큼이나 커져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란 정말로 절제를 모르는군요. 균형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욕심만으로 끝없이 세력을 키우다가는 결국 자멸할 것이 뻔한데 말입니다. ……아마 검은 달의 부수장이 있다고 해도 도리어 우리를 돕는다면 모를까, 이들을 도와주지는 않을 겁니다."
"뭐, 이 새끼가 말 다했어?!"
유렌의 일리있는 설명에 열이 뻗친 듯 길드원들 중 하나가 예고 없이 곧장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다음 장면이 전혀 예상치 못하게 벌어지자 경악해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머리에서 인식을 채 하지 못했다. 그저 보이는 것은 붉은 빛.
그대로 세로로 단번에 잘려버린 인간의 잔해가 옆으로 스르르 쓰러졌다. 사람을, 한 칼에 반으로 깨끗이 잘라버리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나는 다시 눈을 비볐다. 똑바로 쥔 그의 단검은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은 채로 흐릿한 푸른 빛에 감싸여 있었다. 1미터 정도 되는 길이의 장검의 날 모양을 한 그 빛은 분명…….
"……오러 블레이드?"
소드 마스터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그 오러 블레이드?! 검기를 사용하다니, 대체 유렌은 얼마나 먼치킨인 것인가. 점점 더 유렌의 평가가 높아지는 것 같은데. 나는 바로 앞에 사람의 시체가 있다는 사실도 잊을 정도로 그 푸른 빛에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붉은 핏빛과 대조되는 강렬한 생명의 오러. 다른 검기를 본 적은 없지만 그 넘쳐흐르는 생명력의 마나를 봤을 때 틀림없는 진품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역시 그걸 구현시킬 수 있는 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드 마스터 뿐이다. 제국 6대 소드 마스터의 이름 중 유렌이라는 이름은 없다. 그렇다면 그가 숨기고 있는 결정적인 능력이 바로 그것이란 말인가.
유렌은 나를 등 뒤에 감추고서는 경악으로 흙빛이 된 모든 길드원들을 쭉 훑어보았다.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은 길드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옆에 서 있는 자신의 아들을 질책했다.
"네놈은, 고작 여자 하나 얻기 위해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이냐!"
"하, 하지만 아버지……."
"시끄럽다, 다들 도망쳐라!"
그렇게나 소드 마스터라는 것이 압도적인 전력차가 나는 것일까. 유렌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낮게, 하지만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중얼거렸다.
"알게 된 이상 한 명도 살려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는 않았다. 강하게 압축된 초자연적인 마나의 칼날이 닿은 물건은, 닿자마자 분해되듯이 싹둑 잘려졌고 인간의 육체도 별다를 바 없었다. 한번 휘둘러 너댓 명을 베고, 10분만에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돌아온 그는 주변의 붉은 살덩이들을 바라보는 내 눈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속삭이듯이 물었다.
"놀라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젓고, 곧장 유렌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조금 흠칫하더니 피가 묻는다며 내게 다가오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당장 그의 몸을 확인하며 따지듯이 질문했다.
"유렌, 다친 곳 없어?"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옷이 더러워집니다. 모처럼 예쁜 옷으로 입었는데."
"상관 없어. 잠시 고개 숙여봐."
나는 손수건을 꺼내 유렌의 붉게 물든 머리카락과 뺨을 닦아주었다. 그는 그제서야 하하 웃으며, 내 손을 치우고는 물의 정령을 불러내었다. 그렇게 안 보여주던 물의 정령을 한번만에 불러내주다니, 나는 예쁜 소녀 모습을 한 연푸른 색의 정령을 보고 감탄했다. 우와, 예쁘다. 허공에서 나타난 작은 인어 모양의 정령은 유렌의 말로는 물의 중급 정령인 운다인이라고 했다.
그 정령을 부리는 방법은 생각 외로 간단했다. 그저, 피를 닦아달라고 부탁하니 금세 사방이 전부 깨끗해졌다. 유렌에게 묻은 피와 덩달아 내 옷에 묻은 피, 손수건의 핏자국은 물론이고 이 근방의 공터 자체에 흩뿌려진 피들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피 냄새 때문에 머리가 띵할 정도였는데 조금 나아졌다. 덕분에 시체는 허옇게 드러났지만 그래도 주변이 사방의 피로 새빨갛게 보이지는 않으니 다행이었다.
"피도 물로 이루어져 있으니 물의 정령으로 처리 가능하지요. 범위가 넓으니 하급 정령인 운디네로는 무리라, 중급을 소환했습니다."
나는 깨끗해진 원피스를 보고 그 물의 정령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물의 정령은 내가 내미는 손을 빤히 쳐다보고 호의적으로 나에게 다가와 애교를 부렸다. 우와, 만지니까 말캉말캉하다. 젤리나 차가운 물이 담긴 풍선같았다. 유렌은 그런 운다인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물의 정령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데, 이상하네요."
"이상하지 않아. 나는 꽃이니까."
뜬금없게 느껴지는 내 말에, 유렌은 풋 하고 웃었다.
"그렇군요. 시아 님은 꽃이니까요."
노, 농담 아닌데…….
그리고, 공터 위쪽의 건물 꼭대기에서 완벽하게 기척을 숨기고 그들의 행동을 힐끔거리던 흑갈색 머리의 청년은 방금 자신의 앞에서 벌어진 상황들에 굉장히 당황했다.
아까 찻집에서 만났던 남자, 유렌이라고 했던가. 그 옆의 여자는 예쁜 것 빼면 그다지 능력이 없는 것 같았지만, 유렌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스텝을 읽어낼 수 있을 만한 상당한 실력자였다. 감찰이라는 명목으로 오긴 했지만, 시렌느 영지의 도둑 길드는 영주의 무관심 아래에서 세력이 너무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발생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관리자인 검은 달 길드에도 피해가 올지 모르기에 어차피 세력을 좀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니, 여차하면 그들을 은근슬쩍 도와 줄 작정으로 숨어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도와줄 필요는 없게 되었지만, 다 죽일 필요는 없는데 말야.
동업자의 죽음을 아무 감정이 섞이지 않은 눈으로 빤히 바라보던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알려지지 않은 소드 마스터라니, 엄청난 걸 알아버렸군. 저 남자는 대체 누구지?
그는 과감하게 그 백금발에 남부인 혼혈 남자의 뒤를 밟아볼까 생각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그가 소드 마스터라면, 마스터가 아닌 자신이 함부로 뒤를 밟는 짓은 위험했다. 어쩌면 들켜서 살인멸구당할지도 몰랐다. 지금은 거리가 멀어서 겨우 몸을 숨기고 있다지만 건물이라는 엄폐물을 벗어났다간 틀림없이 들킬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가 귀족일 경우에 한해 길드로 돌아가면 그 남자의 정체를 조사하는 일쯤은 간단할 테지.
백금발에 녹안, 그리고 남부인 혼혈의 구릿빛 피부. 이 정도의 정보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그 옆에 있던 희귀한 머리색에 예쁘게 생긴 여자에게서 더 알아낼 것이 많을지도 모른다. 같이 있다는 점은 어딘가 접점이 있다는 얘기니까, 그는 그 둘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엄폐물에 쭉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마침내 공터에 시체 빼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자 그는, 답답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짜 얼굴 가면과 가발을 벗어버렸다. 곧이어 드러나 바람에 휘날리는 그의 긴 생머리는 윤기 흐르는 청보랏빛이었다.
"그럼, 돌아갈까."
허공에 그 청년의 잔상이 잠시 빛났다.
***
그날, 성으로 돌아온 후에 나는 예정대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골치아픈 일이 있다면 내부에서 그들에게 뇌물을 받고 입을 다물어준 몇몇 병사나 관리자들의 처리였는데, 증거물을 싹 죽여버렸으니 누가 뇌물을 받고 누가 안 받았는지 알게 뭔가.
그래서, 분명 그들 중에도 억울한 자들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냥 뿌리부터 전부 뽑아내버리기로 했다. 즉 병사들을 관리하는 부서 자체의 모든 인원들을 갈아치우기로 한 것이다. 분명 그들은 이 상황을 알고 있었고, 누구든간에 내게 직접 아래의 상황을 알릴 수도 있었지만 끝내 입을 다물고 있었으므로 내 처리에 관해 크게 항의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인원을 뽑는 데는 기사단장 라이언 경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그는 누가 뭐래도 청렴결백하고 곧은 기사였기에 올바른 사람만을 골라내는 것은 잘할 것이다. 라이언 경은 기사단장으로서의 일도 많았으니 병사를 다루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워낙 영지 일을 맡을 인원이 부족한데다가 경 자신도 정도(正道)를 벗어난 아랫사람들의 행각에는 분노했기 때문에 스스로 이 일을 맡겨 달라고 발벗고 나섰다.
덕분에 이제부터 수도로 가기 전까지 꼼짝없이 새로 병사를 재정비하는 일에 매달려야 할 거라고 생각한 나로서는 할 일이 줄어든 셈이다. 물론, 그 사이에 누가 도둑 길드의 전원을 소탕(살해)했는가 하는 의문이 부상했지만 내가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아무도 진실을 알지는 못했다.
그리고 오늘 하루종일 걸어다니느라 피곤했던 나는, 제 4관의 큰 방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벗지 않고 침대 위로 푹 쓰러졌다. 우아, 피곤하다. 여기의 침대는 커다란 원형침대로, 붉은 실크 시트에 캐노피가 달린 본관의 내 방 침대와는 달리 새하얀 시트에 스프링 탄력보다는 솜이 가득해 너무 심할정도로 푹신해서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침대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완전히 파묻혀버린다. 이 침대가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이 건물 자체가 공작이 첩과 노닥거리기 위해 지은 것 아닌가.
나는 그 침대에서 바둥거리다가 겨우 일어나서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너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피곤한 하루였다. 구경하느라 당시에는 힘든 줄도 몰랐지만, 세이시아의 몸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거리를 걸은 것은 처음인데다가 목숨의 위협까지 당해보고. 몸이 뻑뻑한 게 여기서 자칫 몸 관리를 잘못하면 잎 끝부분이 노랗게 말라버릴 것 같아서 당장 수분섭취를 좀 해야겠다. 본관보다 더 호화로워 보이는 욕실 설비를 이용해보고 싶어서, 나는 네리아에게 말해 목욕 준비를 하라고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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넹 그렇다능. 저 흑갈색머리(실제로는 보라색머리) 캐릭은 사업상 연관있는 캐릭입니다. 가짜 외모인걸 눈치채시다니 흑흑ㅠ
쟤도 나중에 상황 좋으면 꼬셔볼 생각입니다.
전편 나름 충격포인트는 유렌이 생각보다 세다는 거였는데, 어째 그 점에 놀라신 분은 아무도 안계신건가여ㄷㄷ 판타지에서 남주의 강함은 옵션이 아닌 필수인건가요!
흥, 쳇, 핏, 그래서 다음편은 야한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