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젊은 여공작과 첩 -->
유렌은 아까 만났던 그 남자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지, 곧장 돌아가는게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유렌이 거기까지 신경쓸 정도의 남자라면 보통 남자가 아닌 것 같아서 나도 오늘의 나머지 계획은 접고 다음에 다시 나올 생각이었지만…….
"역시 그건 직접 확인해봐야겠어."
대체 무엇 때문에 치안이 나쁘다고 하는지.
하지만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아까 찻집에서 무심코 후드를 벗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해서 가볍게 후드만 제끼고 햇볕을 쬐었지만, 차 값을 구리 동전으로 지불하고 나오는데 누군가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헐렁한 불량배같은 복장을 한 20대 중반의 비쩍 마른 남자였다.
"어이, 아가씨. 혹시 시간 있어? 처음 보는 이쁜이네, 여긴 관광하러 온 거야?"
바로 옆에 남자가 팔짱 끼고 서 있는데 시간 있냐고 묻는 건 또 뭐지? 우리가 연인으로 보이지 않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저러는 건가?
"당신 따위에게 할애할 시간은 없으니 꺼져 주시겠습니까?"
내가 직접 맞받아칠 필요도 없이, 유렌은 나를 단단히 잡아끌어 등 뒤로 숨기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우와, 박력있다. 키가 거의 190cm에 육박하는데다가 근육질에 잘생긴 남자가 등 뒤로 나를 감추면서 깡패에게서 지켜주는 기분이란 완전 끝내줬다. 아잉 좋아라. 이제 더 이상 내 능력으로 바람을 어디로 불게 하면 그 남자를 공격하고 도망칠 수 있을까 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든든한 남친이 있다는 건 이렇게 좋은 거구나. 나는 유렌의 허리를 뒤에서 꼬옥 껴안으며 넓은 등짝에 얼굴을 묻었다. 유렌은 나에게 안심하라는 듯 가만히 손을 꼭 잡아주었다.
게다가 그의 위협이란 존댓말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이전 내게 칼을 들이대며 했던 협박보다도 300%는 더 실감났다. 정말로 강자의 기도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진심으로 죽이겠다는 투의 협박이었다. 그 남자는 조금 흠칫했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몰라도 유렌이 비교적 깔끔한 복장을 하고서 검도 차고 있지 않은 걸 확인하고 넌 뭐냐는 둥 참견하지 말라는 둥 거만하게 외쳐대며 오히려 더 깝죽거렸다.
이래서 유렌이 검을 꼭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구나.
뭐, 그래도 키와 덩치부터가 차이가 나는데, 주먹질을 한다쳐도 설마 유렌이 저 남자 하나를 못 이기겠어? 응? 그치?? 하지만 내 자신감은 그 남자가 주머니에서 날이 잘 선 단검을 꺼내고부터 기세가 팍 꺾여버렸다. 망했다. 쟤 뭐냐, 흉기를 들고있잖아, 위험하지 않아? 경비대 부를까? 도망칠까??
주변의 민간인들은 또 저 짓거리냐는 듯 못마땅하게 그 남자의 행각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경비대나 치안대에 신고하려고 나서지는 않았다. 그냥 이 쪽이 안됐다는 투로 중얼거리거나 못본 척 할 뿐이었다. 어째서지? 그들의 행동으로 봤을 때, 이 남자가 여기서 이러는 게 한두번이 아닌 것 같은데. 거기다가 이 남자 혼자만으로는 별로 세 보이지도 않았다. 유렌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이곳 세력인가 봅니다."
"세력?"
"다시 말해서 이 도시를 지배하는 뒷골목 길드 일원이라는 거지요. 뒤에 상당한 배경이 있으니까, 이 남자 혼자서 행패를 부리며 돌아다녀도 보복이 두려워서 다들 참견하지 않는 겁니다."
엑!! 그게 뭐야! 이 영지의 뒷세력이라는 거야? 이거 자존심 상하네, 분명 영주는 나인데 말이지.
확실히, 어디서건 그림자란 것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전생, 그 그림자에게서 성적 착취를 당할 '뻔' 한 내 과거를 생각해봤을 때 이곳에서도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지만, 워낙 생활배경이 지구와 달랐기 때문에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까 찻집에서 만났던 그 흑갈색 머리의 남자가, 이곳 영지의 치안이 나쁘다고 말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의미였다. 일부러 무관심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신경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도시 경비대 측에서도 별다른 보고가 올라오지 않아서 치안 쪽은 당연히 문제없을거라고 생각해버렸던 내 탓이다.
도시 한가운데서 이러고 다닐 정도면 치안 상태가 꽤 심각할 텐데, 영주인 내가 모를 정도라니. 틀림없이 입막음이나 경비대 내부의 부정부패도 있을 것이다. 역시 이런 점은 직접 돌아다녀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같다.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당장 대책을 마련해야겠다. …………물론, 살아돌아갈 수 있다면.
그 남자는 유렌의 키와 몸집에 약간 위축된 것 같지만, 그래도 흉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엄청난 이점이 있었다. 그 단검을 들이대며 그대로 위협했다.
"킬킬, 개념없이 무기도 안 가지고 다니는 걸 보니 어느 촌뜨기가 도시 관광이나 하러 왔나 보지? 여자만 내놓고 꺼지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글쎄, 당신이야말로 목숨만 내놓고 꺼지면 무기만은 살려드리지요."
유렌은 그가 쥔 단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차갑고 거만하게 맞받아쳤다. 그 깡패가 나에게 한 말들로 유렌도 적잖이 열받은 듯 했다, 하지만 나는 걱정되어서 유렌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정말 그래도 괜찮은거야? 나는 여차하면 능력을 쓸 기세로 긴장해서 둘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후 능력이 꽤 강해졌으니 저 단검쯤은 날려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채 말리기도 전에 그 남자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일단 칼부터 들이댔다. 나는 본능적으로 유렌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유렌은 덥석 앞으로 나서서는 단 한번의 동작만으로 간단히 그 남자의 팔목을 제압했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미 게임 오버된 장면만을 넋놓고 쳐다보았다.
우와, 유렌 완전 짱 쎄다!
제압당해 상당히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걸로 보아 잡힌 손이 꽤 아팠나 보다. 일부러 손가락에 힘을 실어 꾹 누르자 그자는 비명을 질렀다. 유렌은 내가 반짝반짝한 눈으로 감탄하니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곳 경비대 초소가 어디였죠?"
"경비대한테 넘길거야?"
그치만 유렌 성격으로는 바로 이 자리에서 이 남자를 썰어죽여야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나는 순진한 척 고개를 갸웃했다. 유렌은 아무래도 내 앞이라 내숭을 떠는 것 같았다. 뭐, 모르는 척 해줘야겠지?
"이 정도는 여기서 처리해도 되지만, 시아 님 앞에서 험한 꼴을 보일 수는 없지요."
유렌의 경비대 발언을 듣고서 그는 놓으라고 바락바락 소리치며 유렌의 손에 멱살과 팔을 잡혀 버둥거렸다. 유렌은 아랑곳않고 대로에서 그를 질질 끌며 경비대 초소 쪽으로 걸었다. 경비대 초소는 의외로 조금 구석진 곳에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였지만, 그래도 이곳 영주인 내가 직접 깡패를 잡아왔는데 설마 모른 척이야 하겠는가.
하지만 초소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어째 대낮이고, 그리 좁은 골목도 아닌데 사람이 너무 없다 싶었다. 그 남자의 한패가 길목을 떡하니 가로막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숫자는 자그마치 스물 다섯 명 정도.
17대 1로 싸워서 이겼다는 전설은 들어봤어도 25대 1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은가 싶다. 게다가 유렌에게 잡혀 기절해 있는 얘랑은 달리 다들 떡대 근육질에 단검의 레벨을 넘어선 험악한 무기들을 하나씩 들고 있다. 철퇴, 가시 박힌 쇠몽둥이, 망나니 칼 등등. 아까 영지민들이 보였던 비협조적인 태도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 남자 하나쯤은 어떻게 처리했다 쳐도, 제 2관문에서 모두 전멸했던 것이다.
……이제 어쩌지?
***
유렌은 한숨에 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다지 긴장하고 있지는 않았다. 뭘 믿고 그런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 자리에서 신분을 밝힐 걸 그랬나.
"이거 곤란하군요. 최근 검을 쥐지 않았더니 몸이 조금 둔해진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검사로서는 실격이군요. 검을 몸에서 떼질 않나, 훈련을 빼먹질 않나, 몸 관리도 못하질 않나."
반성하는 건 좋은데, 지금은 후회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지. 무기도 없는 몸으로 나까지 지켜가면서 이 인원을 전부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체 뭘 믿고 여유로운 거야?
앗, 그러고 보니 유렌의 능력은 검 뿐만이 아니었다. 유렌은 마법사에 정령사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마법사들 중 가장 낮은 실력인 1클래스의 마법사가 캐스팅을 할 시간만 있다면 기사 몇 명 정도는 기절시키는 일이 가능하다더라.
근데 이 상황에서 캐스팅할 시간이 어딨어?! 설마 나한테 몸빵을 시킬 생각은 아니겠지. 하지만 유렌은 절대로 그럴 생각은 아닌 듯, 나에게 단단히 당부를 했다.
"……이제는 저에게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까, 이 이상 나태해져서는 안되겠군요. 오늘은 일단 몸을 푸는 정도로 끝내죠. 시아 님, 절대 제 뒤에서 떨어지면 안됩니다."
나는 얼결에 그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싸울 거니까 너무 달라붙으면 방해가 될지도 몰랐다. 유렌은 옷자락 안에서 단검을 꺼냈다. 헉, 뭐야! 검을 안 가져왔다며? 멀쩡하게 잘만 갖고 있구만.
"보이기 위한 검과, 호신용 단검은 다릅니다. 게다가 지금 같은 상황에선 장검 쪽이 싸우기에는 좀더 유리하죠."
마치 장검은 가끔 잊어먹을 수도 있는 옵션이지만 단검은 필수품목이니 빼먹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투였다. 하긴, 요즘은 귀족 여자들도 호신용 단검은 꼭 들고다닌다고 하니까. 뭐.
근데 단검이 있으면 아까전에 꺼낼것이지, 대체 지금 꺼내서 어떻게 저 무시무시한 무기들과 싸우려는건가. 하지만 내 걱정은 정말로 기우에 불과했다. 유렌은, 차례로 덤벼드는 불량배들의 묵직한 공격을 오직 단검 하나로만 전부 막아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투불능으로 만들기 위해 팔이나 다리에 그 단검을 박아넣는 짓까지 서슴없이 저질렀다. 아까와는 달리 피가 튀는 전투였기에 그는 내 쪽을 힐끔거리며 내가 놀라지는 않았는지 종종 확인했다.
유렌은 보기보다 팔 힘이 굉장히 강해서, 어떤 몸집 큰 남자가 거대한 쇠몽둥이로 있는 체중을 다 실어 유렌의 단검을 내리쳤지만 오히려 그대로 튕겨나가버렸다. 데미지를 입은 쪽은 그 덩치 큰 남자였다. 표정 변화 없이 그런 그 남자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너무 약하군요."
그 도발적인 어조에 열이 머리끝까지 뻗친 그 남자는 더욱 더 강하게 몽둥이를 쥐고 뛰어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유렌은커녕, 유렌이 지키는 내 털끝 하나도 건드려보지 못한 것이다. 우와, 유렌 정말로 세구나. 이제는 그가 왜 기사가 되지 못했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의 강함을 눈 앞에서 똑똑히 본 불량배 무리들은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꽤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중 대장이 목에 걸린 호루라기를 불어 신호하자 사방의 건물 곳곳에서 몇 배의 인원이나 되는 불량배들이 뛰쳐나온 것이다.
"……."
어째 이상하다 했더니, 이곳 건물이 그들의 길드 아지트였나 보다. 그런데 유렌은 왜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하얀 셔츠 자락으로 방금 전의 짧은 싸움(일방적인 구타)으로 인해 묻은 뺨의 피를 스윽 닦으며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시아 님."
"으, 응?!"
화들짝 놀라며 내가 쳐다보자 그는 방금 전의 여유로운 표정은 어디로 가고 딱딱한 얼굴로 진지하게 물었다.
"사람이 죽는 걸 보신 적 있습니까?"
그의 말은, 이제부터 내가 쟤네들을 죽일건데 그래도 되냐고 묻는 것이었다. 물론 사람의 죽음은 본 적 있다. 남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 죽는 모습을 말이다. 남이 죽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별로 큰 상관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위가 약하다고는 해도 앞으로 수도 없이 봐야 할 장면이다. 정령이 일일이 인간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며 동요할 필요는 없지.
그는 내가 정령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미리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내가 괜찮다고 하니 손에 든 단검을 곧장 고쳐쥐었다. 거꾸로 쥔 자세에서, 마치 긴 칼을 잡듯이 날을 위로 향하게 하고 단단히 붙잡았다.
"이젠 굳이 비밀을 감춰가면서 검을 휘두를 필요는 없어졌군요."
===
호롤로로롤ㄹ로롤로롤롤.
흑발츤데레는 흑발입니다! 흑갈색도 보라색도 아닌 순수 100%흑발!!!
이 소설 주요캐 중에서 흑발은 두명 뿐인걸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비공략대상이고 하나가 바로 그 흑발캐.